기픈옹달

아싸여서 더 좋아

인싸 혹은 아싸,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각각 인사이더insider와 아웃사이더outsider를 줄인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인싸라 하고 어떤 사람을 아싸라 할지 그 기준은 저마다 제각각입니다.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쓰이는 표현을 참고하면, 인싸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무리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하나, 이 말에는 개인의 매력을 뛰어넘는 사회적 맥락이 담겨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럴싸한 덕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인싸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싸란 무리들에 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외톨이라고 할 수도 있고 괴짜라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싸와 달리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기준들, 흔히 말하는 스펙Spec이라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간단히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 그래서 무리에 끼지 못하는/않는 사람이 바로 아싸입니다.
인싸와 아싸. 오늘날 세태를 반영한 신조어겠지만 실상 이와 비슷한 옛말이 있답니다. 바로 방내方內와 방외方外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방方'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방외'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밖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따로 별세계에서 살 수는 없는 일. 사람들을 옭아매는 다양한 관계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가리킵니다. 방외지사方外之士,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가운데 장자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방외지사를 자처한 수많은 사람들은 <장자>를 사랑했습니다.
오늘날 인싸 가운데 으뜸을 일컬어 '핵인싸'라 합니다. 어디 가나 주목받고, 어디 가나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 많은 사람이 핵인싸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핵인싸는 있지만 핵아싸는 없습니다. 아싸는 도무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겠지요. 여기 핵아싸, 아싸 가운데 으뜸인 장자가 있습니다. 과거 많은 방외지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장자는 오늘날에도 뭇 아싸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앞으로 총 네 명의 인싸 - 공자, 맹자, 노자, 사마천과 비교하며 아싸 장자의 면모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인싸로 꼽힌 이들의 이름을 보고는 의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인싸와 아싸로 나누면 그 역시 아싸에 이름을 올려야 할 사람 아니냐고. 그러나 인싸와 아싸라는 구분은 늘 상대적입니다. 장자와 비교할 때 이들은 상대적으로 방내, 세속적인 가치 체계 안에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싸와 아싸의 구분이 사회적 맥락에 따라 갈리는 것처럼 고대 중국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 위에서 이들과 장자의 차이에 주목할 예정입니다.
인싸들에 장자를 견주어 보는 것은 <장자>를 입체적으로 읽으려는 노력입니다. 또한 장자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에서 장자의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과연 그는 어디에 있었고, 그는 어떤 철학적 질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런 질문이 중요한 것은 철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의 철학자들은 저마다 각자의 문제를 부여잡고 해결책을 찾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지에 따라 그 철학의 가치와 쓰임이 달라집니다. 부자의 철학이 있고, 가난뱅이의 철학이 있습니다. 귀족의 철학이 있고 오랑캐의 철학이 있습니다. 지배의 철학이 있고 저항의 철학이 있으며 기만의 철학이 있고 투쟁의 철학이 있습니다. 저는 장자가 아싸로서, 후자의 철학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1부 '공자와 만나는 장자 : 기린과 곤붕'에서는 주나라의 몰락이라는 한 시대의 끄트머리에서 공자와 장자를 비교합니다. 주나라의 몰락은 춘추전국이라 불리는 혼란기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공자는 주나라의 몰락을 두고 기린이 사라졌다며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기린은 안정적인 시대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이었던 까닭입니다. 공자는 과거에 시선을 두고 전통을 잃지 말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학습學習의 화신 공자는 그렇게 기린의 부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곤붕鯤鵬이라는 낯선 동물의 출현을 이야기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크고 거대한 존재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합니다. 한편 그것은 바로 지금, 현재에 주목하고자 하는 투철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는 낯선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앎, 바로 깨우침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열어젖히는 지각知覺, 깨우침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봅시다.
2부 '맹자와 만나는 장자 : 계몽과 방황'에서는 시대의 문제를 대하는 맹자와 장자의 서로 다른 태도에 주목합니다. 맹자는 주나라 체제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임금이 천하를 통일하리라 예상합니다. 인의仁義를 지키고 널리 퍼뜨리는 인물이 새로운 천하의 통치자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맹자는 스스로 선각자를 자처하며 세상 사람들을 일깨워야겠다고 말합니다. 계몽의 철학자로서 맹자는 살신성인殺身成仁, 자신의 목숨도 내어버릴 각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와 달리 개인의 생명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자신을 희생하기보다는 멀찍이 떨어져 그런 흐름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맹자와 같은 사람은 장자를 두고 이기적이라 손가락질하겠지만, 그것은 장자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 불신 때문이기도 합니다. 새롭게 출현할 권력은 이전보다 안정된 세상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나아가 인의仁義건 천도天道건 규범적 가르침이 인간을 바꿀 수 있을까요? 방황의 철학자 장자의 고민을 만납니다.
3부 '노자와 만나는 장자 : 영원과 소멸'에서는 생명을 대하는 노자와 장자의 정반대의 태도를 다룹니다. 흔히 노자와 장자를 함께 묶어 이야기하지만 여기서는 노자와 장자를 따로 떼어 봅니다. 노자는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꿈꾸었습니다. 불로불사의 꿈을 꾸는 사람들은 노자를 통해 양생술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잘 가꾸면 늙지도 죽지도 않을뿐더러 신선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특별한 욕망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신선의 모습을 한 노자와 달리 장자는 자연스러운 소멸의 과정으로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늙고 병드는 이의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필멸의 인간이 직면한 보편적 자리에 주목합니다. 장자는 육신은 뿔뿔이 흩어질 뿐이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소멸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장자의 양생養生, 삶을 가꾸는 길은 나를 지키는 노력인 동시에 나를 버리는 연습이기도 합니다.
4부 '사마천과 만나는 장자 : 역사와 우화'에서는 매력적인 두 이야기꾼을 만납니다. 사마천과 장자는 매력적인 문장을 통해 훗날 많은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둘이 주목한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마천은 역사를 살아간 구체적 인간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권력과의 다툼, 역사의 굴곡을 살아간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사마천은 얄궂은 운명을 비판하였습니다. 장자는 우화, 여러 사물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장자> 속에는 온통 상상의 존재들이 웅성거립니다. 장자가 이들의 이야기를 필요로 했던 것은 구체적인 말들로 옮길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화로 풀어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그런 까닭에 사마천의 글은 구체적인 인간들 속으로 파고드는가 하면, 장자의 글은 하늘 높이 상상을 타고 날아오릅니다.
5부 '장자와 만나는 장자 : 인식과 혼돈'에서는 <장자> 텍스트 내부의 서로 다른 목소리에 주목합니다.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 장자와의 거리 때문에 구분해 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충돌하는 다른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장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한편 장자는 찰나의 깨우침을 경계합니다.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는 순간, 그 짧은 인식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문득 잠깐 깨우친 것은 그것대로의 쓰임이 있을 뿐. 그때도 지금도 맞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이야기. 결국 장자는 혼돈이야 말로 이 세계의 실상이라 이야기합니다. 모든 질문을 집어삼키는 컴컴하고 위험한 혼돈. 그 어지러움을 다루는 법이 중요합니다.
위 다섯 꼭지는 철학사적 맥락과 닿아있습니다. 주나라의 몰락에서 춘추전국 시대를 가로질러 통일제국의 출현과 몰락 위에서 장자 철학의 위치와 역할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역사적 맥락과 무관한 철학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의 장자읽기가 현재의 사회적 문제와 만나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부디 오늘을 부지런히 살아가는 수 많은 아싸들에게 장자가 반가운 벗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