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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여러 얼굴들 - 광인, 길손, 전사 그리고 그림자
기픈옹달([email protected])
1. 루쉰魯迅
우선 오해(?)를 바로잡자. 루쉰은 흔히 중국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중국 문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기도 하지만, (중국 작가를 몇이나 알고 있나?) <아Q정전>이나, <광인일기>로 이름을 떨쳤던 까닭도 있다. 그러나 생전에 그가 쓴 많은 글들은 문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으며, 그 스스로도 문학연 하는 행태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생전에 남긴 대부분의 글은 '잡감雜感’이라 불리는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글이었다. 그때그때 시류에 따라 주제를 잡아 쓰는 글이었기 때문에 요즘으로 치면 칼럼으로 분류할 수도 있을법하나, 정작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워낙 논쟁이 치열하며, 자신의 신변잡기를 다루는 글도 많아 하나의 말로 그의 글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루쉰이라는 이름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저우수런周樹人, 루쉰魯迅은 그가 생전에 사용한 여러 필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 이외에도 수 없이 많은 필명을 사용했는데, 루쉰이라는 필명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일부 전하는 말에 따르면 'Revolution'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허나 그보다는 어머니의 성에서 루魯를 따오고, 그와 모순되는 표현으로 쉰迅을 붙였다는 것이 더 적합한 설명으로 보인다. 루魯는 노둔魯鈍, 느리고 어리석다는 말이다. 쉰迅은 신속迅速, 날쌔고 빠르다는 뜻이다. 느리고도 빠른, 상호 모순되는 요소를 이름에 품은 사람이 바로 루쉰이다.
이런 까닭에 루쉰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크게 엇갈린다. 누구는 루쉰을 계몽주의자로 보는가 하면 누구는 루쉰은 계몽을 거부한 인물이라 본다. 문학가로서 루쉰이 있는가 하면 반문학을 외친 루쉰이 있기도 하다. 루쉰은 사후 마오에 의해 현대의 성인으로 추앙되었는데, 일부는 이것이야 말로 루쉰에게 있어 가장 치욕스런 일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루쉰이라는 모호한 이름처럼, 그는 지금도 해석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2. 몰락
루쉰은 1881년 샤오싱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꽤 유복한 삶을 살았다. 이는 그의 할아버지가 청나라 중앙 관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1893년 그의 나이 13세 때부터 적잖은 풍화를 겪는다. 할아버지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에 가담한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투옥되었고, 루쉰의 집안은 부동산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화를 피하기 위해 루쉰은 친척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불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몸저 누웠다. 의원을 모셔와 진찰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도리어 의원이 요구하는 진귀한 약재를 구하려 루쉰은 산과 들을 누비며 고생해야 했다. 이때 겪은 경험은 훗날 전통 의학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며, 그가 의학을 배우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루쉰은 전당포와 약방을 오가며 아버지의 약을 받아오던 시절을 가슴 아픈 시절로 기억한다. 자신의 키보다 갑절이나 높은 전당포 창구 안으로 옷가지나 머리 장식을 밀어 넣었으며, 그 대가로 '모멸어린 돈'을 받아 약을 구입했노라고 전한다. 어린 시절의 몰락은 루쉰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으리라. 그는 그 경험으로부터 '세상인심의 진면목'을 보았노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몰락의 경험은 루쉰에게 다른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어지간한 생활을 하다가 밑바닥으로 추락해 본 사람이라면 그 길에서 세상인심의 진면목을 알 수 있으리라. 내가 N으로 가서 K학당에 들어가려 했던 것도 다른 길을 걸어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찾아보고자 함이었을 게다. 어머니는 방법이 없었는지 팔 원의 여비를 마련해 주시며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울었다. 이는 정리情理상 당연한 것이었다. 그 시절은 경서를 배워 과거를 치르는 것이 정도正道요, 소위 양무洋務를 공부한다는 것은 통념상 막장 인생이 서양 귀신에게 영혼을 파는 것으로 간주되어 몇 갑절의 수모와 배척을 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외침’ 서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연이어 닥친 불행이 없었다면 그는 번듯한 집안의 도련님으로 자랐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순순히 과거시험을 준비했을 테다. 그러나 그 개인에게 닥친 불행은 앞에 주어진 길을 의심하고 따져 물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가 말한 '정도正道'라는 것을 이야기해보자. 무릇 '도道'란 길을 의미한다. 한 사회가 닦아놓은 일반적인 삶의 과정이 바로 '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뿐인가.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 이념, 이상 등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 바로 '도道'이다. 그러나 그는 몰락을 통해 인도人道, 통용되는 인간사의 가치가 결코 믿을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른 길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루쉰 개인에게만 요청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청조清朝는 쇠락한 지 오래였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 참혹하게 패배했으며,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체제로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1894년에는 공들여 키운 해군이 괴멸당한다. 그것도 동방의 작은 나라 일본에게. 1898년에는 캉유웨이가 권력을 잡고 개혁운동을 벌인다. 이른바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 그러나 '100일 유신'이라 불리는 말처럼 개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마지막 황제 푸이가 자금성을 떠나는 1912년까지 낡은 왕조는 끊임없이 퇴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캉유웨이가 개혁의 깃발을 든 1898년 루쉰은 난징의 강남 수사 학당에 들어간다. 이곳은 해군학교였는데 당시 신문물을 수입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일찍이 <천연론(天演論/사회진화론)>'을 번역한 옌푸가 해군 출신이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 불만을 갖고 결국 광무철로학당으로 적을 옮긴다. 이곳은 철도와 광산일을 배우는 학교였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서술한다.
이십 장 높이의 상공으로도 오르고 이십 장 깊이의 땅 밑으로도 내려가 봤지만 결국은 아무런 재간도 배우지 못했으며, 학문은 "위로는 벽락에 닿고 아래로는 황천에 이르렀건만 두 곳 다 무변 세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가 되어 버렸다.
<사소한 기록>
해군학교를 다니며 까마득히 높은 돛대에도 오르고, 거꾸로 컴컴한 갱도를 파고 땅 속 깊이도 내려가 보았지만 그 어디도 길이 없었다. 쇠락한 왕조의 낡은 학문은 이제 골동품이 되어 버렸고, 고향을 떠나 서양 귀신에게 영혼을 판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까지 이른 곳에도 딱히 답은 없었다. 결국 그도 외국으로 떠날 생각을 품는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일본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의학을 배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였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의학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배운 데는 이른바 '조국 근대화'의 꿈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하나의 경험이 그를 영 다른 길로 이끈다. 바로 유명한 환등기 사건이다.
내 꿈은 아름다웠다. 졸업하고 돌아가면 아버지처럼 그릇된 치료를 받는 병자들의 고통을 구제해 주리라, 전시에는 군의를 지원하리라. 그런 한편 유신에 대한 국민들의 신앙을 촉진시키리라, 이런 것이었다. (…) 한번은, 화면상에서 오래전 헤어진 중국인 군상을 모처럼 상면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가운데 묶여 있고 무수한 사람들이 주변에 서 있었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몽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해설에 의하면, 묶여 있는 사람은 아라사(러시아)를 위해 군사기밀을 정탐한 자로, 일본군이 본보기 삼아 목을 칠 참이라고 했다.
<'외침' 서문>
그는 이 경험에서 몸이 아닌 정신을 뜯어고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어야 무엇하겠는가. 아무리 건장하고 우람하더라도 어리석고 겁약하다면 조리돌림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것뿐인가? 동포의 죽음을 그저 구경하는 구경꾼이 될 뿐이다. 그는 문예 운동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뜯어고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에 루쉰은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문예운동에 투신한다.
3. 광인
1902년 일본으로 떠나, 1909년 중국으로 돌아온다. 꽤 오랜 시간을 일본에서 보낸 셈이다. 그는 일본에서 개혁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여러 외국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쥘 베른의 <달나라 여행>, <지구속 여행> 등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직접 문단에 이름을 떨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보통, 1918년 소설 <광인일기>를 그의 문예 활동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말을 빌리면 그때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문단의 중심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다만 이때의 문단이란 것도 문학연하는 이들의 세계만 일컫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자.
소설 <광인일기>는 보통 중국의 첫 번째 백화문 소설로 언급된다. 이전의 전통적인 고문古文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 백화문白話文을 이용한 소설이었다. 당시 중국 사회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었다. 이미 신해혁명으로 낡은 왕조는 무너졌다.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아야 하나 이는 요원한 상황이었다. 정치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문화를 바라는 목소리들이 등장했다. 전통의 언어, 전통의 관습과는 다른 문화를 만들자.
낡은 전통을 대표하는 흔적은 크게는 셋이었다. 변발, 전족, 고문古文. 고문에 대한 증오가 어찌나 컸던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나는 어찌되었든 동서남북 위아래로 찾아 나서서 가장 지독하고 지독하고 지독한 저주의 글을 얻어 가지고 먼저 백화문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인간들부터 저주하려고 한다. 설사 사람이 죽은 뒤에도 정말 영혼이 있어 이 극악한 마음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결코 이 마음을 고쳐먹거나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어쨌든 먼저 백화문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24효도>
그러나 시대의 변화는 더디 오는 법. 그가 백화를 쓰자고 주장했으나 낡은 유산을 지키는 사람들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그는 이른바 전통의 문화 속에 숨겨진 낡은 구습의 틈바구니에 사람을 잡아먹는 잔혹함이 숨어 있다고 고발한다.
만사는 모름지기 따져 봐야 아는 법. 예로부터 사람을 다반사로 먹어 왔다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 확실치는 않다. 나는 역사책을 뒤져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역사책에는 연대도 없고, 페이지마다 ‘인의’仁義니 ‘도덕’道德이니 하는 글자들이 비뚤비뚤 적혀 있었다. 어차피 잠을 자긴 글렀던 터라 한밤중까지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러자 글자들 틈새로 웬 글자들이 드러났다. 책에 빼곡히 적혀 있는 두 글자는 ‘식인’이 아닌가!
<광인일기>
<광인일기>에서 광인이 읽었다는 역사책이란 경서經書를 가리킨다. '연대도 없는 역사책'이란 장학성章學誠이 말한 '육경개사六經皆史'라는 말을 그대로 참고한 표현이다. 그러니 그 역사책에 있는 것이 인의니 도덕이니 하는 말들이지. '육경개사', 육경六經이 모두 역사라는 말은 경전의 권위를 사서史書로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고래로 전해오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이라는 분류에서 보면 역사서(史書)는 경서經書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경經이란 변하지 않는 법칙을 기록한 책이며, 역사(史)란 무수히 많은 다양한 변화상을 기록한 책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꾸로 루쉰은 역사라는 말을 통해 경전을 상대화하기보다는, 경전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점을 강조한다. 경전은 역사로 상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이기 때문에, 유구한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쉬이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수천년 간 사람을 먹어온 내력'이란 그렇게 뿌리깊은 낡은 습속을 가리키는 말이다.
<광인일기>에서 '식인',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말은 우선 하나의 비유이다.전통 도덕이 특정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말이다. 적자를 위해 서자가, 남편을 위해 아내가, 부모를 위해 자식이, 군주를 위해 신하가 등등. 그는 이렇게 강상윤리綱常倫理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실상 전통사회의 도리道理란 누군가를 희생 삼아 벌이는 제의의 현장, 식인의 연회장이 아니냐 묻는다.
누가 이 식인의 연회에서 예외일 수 있을까? <광인일기>의 주인공은 자신의 내력에 사람을 먹어온 풍습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동시에, 자신도 그 동조자였음을 깨닫는다. 전통의 모순이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며, 또한 자신의 핏줄에 면면이 이어져 오는 것이기도 하다. 잡아먹은 그 고깃덩이가 이미 내 피와 살이 되어버린 것을 어찌하랴.
하여 이 잔혹성을 인지한 자는 미쳐버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광인이란 시대의 모순을 발견한 인간이며, 자신에게서도 그 모순을 발견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답은 소멸 밖에 없다. 구습이 사라지듯, 변발과 전족, 그리고 백화가 사라져야 하듯 이 광인에게 주어진 미래는 소멸 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루쉰은 그의 다른 글에 나오는 또 다른 광인, <흰 빛>의 주인공에게 죽음을 선물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다시 주저앉았다. 눈빛이 유난히 번쩍거렸다. 눈엔 무수한 것들이 보였지만 희미했다. 무너져 내린 전도가 그 앞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 길이 넘점 넓어지더니 그의 모든 길을 막아 버렸다.
<흰 빛>
<흰 빛>의 주인공 천스청은 <광인일기>의 주인공과는 좀 다르다. 그는 시대의 모순을 깨우치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미래가 끊어진 인간이다. 천스청은 수 없이 과거 시험을 보나 매번 낙방하고 만다. 낙방할 때마다 그는 미쳐버린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집안 어딘가 묻혀 있다는 은자를 찾기 위해 밤새도록 땅을 파고 돌아다니지만 매번 헛수고만 할 뿐이다.
그러나 더욱 잔혹한 현실은 과거제가 곧 폐지된다는 미래일 것이다. 천스청이 기대했던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 낙방의 상처보다 더 큰 문제는 전해지는 은자에 대한 전설이 헛소문이라는 사실이며, 비록 그는 결코 모르지만, 그의 미래가 곧 산산이 부서져 버릴 운명에 처했다는 데 있다. 땅을 파해치며 은자를 찾아 헤매던 그가 주검으로 발견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4. 길손
그런 면에서 그가 <광인일기>를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는 것은 인상 깊다. 광인의 마지막 질문과 호소로 소설은 끝난다.
사람을 먹어 본 적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광인일기>
그는 한 시대의 종말은 한 시대의 인간의 소멸과 함께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꺼이 소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게다가 소멸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자연스러운 소멸이란,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결코 쉬이 빨리 찾아오지 않는 법. 그렇다면 그 시간을 어찌해야 할까. 이미 모순을 자각하였으나, 아직 새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혁명을 입에 담는 여느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새 시대가 도래하도록 미래를 호명해야 하며, 구시대의 유물을 척살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루쉰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와 광인은 떳떳한 혁명가가 될 수 없었다. 이는 광인 스스로 무고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나, 희망이라는 전도前道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희망, 이 희망의 방패로 공허 속 어둔 밤의 내습來襲에 항거하였다. 방패 뒤쪽도 공허 속의 어둔 밤이기는 마찬가지이건만. 그러나 그런식으로, 나는 내 청춘을 줄곧, 소진하고 있었다.
(...) 그런데 지금, 왜 이리 적막한가? 몸 밖의 청춘도 죄다 스러지고 세상 청년들이 죄 늙어지고 말았단 말인가?
(...) 나는 몸소 이 공허 속의 어둔 밤에 육박하는 수밖에 없다. 몸 밖에서 청춘을 찾지 못한다면 내 몸 안의 어둠이라도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어둔 밤은 어디 있는가? 지금 별이 없고, 달빛이 없고, 막막한 웃음, 춤사위치는 사랑도 없다. 청년들은 평안하고 내 앞에도, 참된 어둔 밤이 없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이다.
<희망>
절망.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겠다. 하나는 그가 당면한 시대의 굴곡이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1912년 신해혁명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천 년간 유지된 황제 중심의 천하관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걸음걸이에는 늘 전진만 있지 않다. 도리어 후퇴고 있는 법. 황제를 몰아낸 이후에도 낡은 황제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황제의 복벽을 꿈꾸는 이들이며, 낡은 전통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이들까지.
캉유웨이나 옌푸와 같은 인물의 변신은 아무래도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을 테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낡은 체제의 변화를 주장하던 인물이 전통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꼴이라니. 이들은 그래도 황제는 있어야 한다며 황제의 복벽을 주장하거나, 공자를 신으로 섬기는 공교孔教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과연 이를 어찌 보아야 할까? 한 연구자는 그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말한다. 시대가 변했으나 그들이 변하지 않았던 까닭에 그리 되었다는 말이다.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 가운데 진보의 이상은 쇠퇴하고, 한때의 진보도 낡은 유물이 되어버린다.
절망, 그가 절망을 이야기한 또 다른 이유는 존재에 달라붙어 있는 자기에 대한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누구보다 소멸이야말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이라 여겼다.
인생에는 고통이 많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아주 쉽게 위안을 받으니, 구태여 하찮은 필묵을 아껴 가며 고독의 비애를 더 맛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 내 생명의 일부분은 바로 이렇게 소모되었으며, 또한 바로 이런 일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줄곧 무엇을 하고 있는지 끝내 알지 못하고 있다. 토목공사에 비유하자면, 일을 해나가면서도 대臺를 쌓는 것인지 구덩이를 파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설령 대를 쌓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그 위에서 떨어지거나 늙어 죽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구덩이를 파는 것이라면 그야 물론 자신을 묻어 버리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지나가고 지나가며, 일체의 것이 다 세월과 더불어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 이러할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주 기꺼이 바라는 바이다.
<‘무덤’ 뒤에 쓰다>
자명한 미래란 단 하나 무덤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전도前道에 있지 않다. 미래에 대해 의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 전도가 무너진들, 희망이 사라진 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높은 누대를 쌓는다 해도 이는 스스로가 굴러 떨어질 곳을 마련하는 것이며, 구덩이를 판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묻힐 곳을 마련하는 것일 뿐이다. 루쉰은 자신을 하나의 과도기적 존재, 지나갈 수밖에 없으며, 지나가야 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나아가 그는 과정으로서의 존재를 넘어 불같이 닥쳐올 필멸을 소망하기도 한다. 어떻게 이 무덤을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이 필멸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길손: 이름요? - 저도 모릅니다. 제가 기억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저는, 혼자였습니다. 제 본래 이름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길을 나선 뒤로 사람들이 되는대로 제 이름을 불렀지만, 가지각색이어서, 저도 기억이 또렷하지 않습니다. 매번 이름이 달랐습니다. (…) 기억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저는, 이렇게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론가 가려고. 그곳은, 앞입니다. (…) 저는 인차 저쪽 앞쪽! 으로, 계속해서 걸어, 갈 것입니다.
(…)
늙은이: 앞? 앞쪽은, 무덤이오.
(…)
길손: 끝까지 가리라는 보장이 없다고요? … (생각에 잠겼다가, 깜짝 놀란다) 안 됩니다! 가야 합니다. 되돌아가 봤자 거기에는, 명분이 없는 곳이 없고, 지주가 없는 곳이 없으며, 추방과 감옥이 없는 곳이 없고, 겉에 바른 웃음이 없는 곳이 없고, 눈시울에 눈물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증오합니다.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길손>
<길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에게 닥친 삶의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낸다. 늙은이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길손, 나그네의 태도야 말로 소멸을 상대하는 하나의 태도를 보여준다. 돌아갈 수 없음, 이는 하나의 당위이기도 하며 또한 이는 길손의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떠나온 곳에는 명분, 지주, 추방과 감옥, 거짓 웃음, 눈물이 있기 때문이다. 모순을 자각하고 모순으로 회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은 어떨까. <길손>의 늙은이가 바로 이런 존재다. 그도 한때는 어떤 목소리를 따라 떠나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늙음'의 미덕을 따라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어디서 출발했는가, 어디로부터 떠나왔는가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제 지쳐버렸다는 것이 중요할 뿐.
루쉰은 <길손>에서 격동의 시대를 산, 오르락내리락 요동치는 삶의 피곤함을 호소하고 있다. '저는, 피가 부족합니다. 피를 좀 마셔야 해요.'라는 대사는 그가 직면한 시대와 삶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머무르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머무름, 늙음이란 결국 삶의 모순에서 도피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길손, 나그네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를 통해 그는 늙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는 희망을 잃었고 절망을 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매몰되지 않는다. 그는 뚜벅뚜벅 서쪽을 향해 걷는다. 밤빛과 함께.
(…) 하지만 안 돼! 나는 가야해. 아무래도 가는 게 옳아… (즉시 고개를 들고, 힘차게 서쪽으로 걸어간다.)
(여자아이가 노인을 부축하여 흙집으로 들어서고, 바로 문이 닫힌다. 길손이 들판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밤빛이 그의 뒤를 따른다.)
<길손>
5. 전사
1925년은 루쉰의 개인에게도, 중국에게도 커다란 변화를 요구하는 해였다. 그해, 3월 12일 중국 혁명의 기수 쑨원이 세상을 떠난다. 한 혁명가의 죽음을 보면서 루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루쉰은 <전사와 파리>라는 글에서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있는가 하면 파리처럼 앵앵거리며 시끄럽게 주변을 돌아다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결점을 지닌 전사는 어쨌든 전사이고, 완미完美한 파리 역시 어쨌든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꺼져라, 파리들이여! 비록 날개가 자라나 앵앵거릴 수 있지만, 끝내 전사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 이 벌레들아!
<전사와 파리>
루쉰은 전사를 순결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싸움에는 고결한 싸움이 없듯, 백색의 전사도 없는 법이다. 싸움에는, 삶에는 얼마간의 상처와 핏자국이 남기 마련이다. 도리어 고결함이란, 말끔한 면상이란, 그가 싸움을 빗겨나간 자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전사에게는 결점과 상처가 나기 마련. 도리어 파리야 말로 흠 없는 존재이다. 완미한 파리와 쓰러진 전사.
흥미롭게도 그해 3월은 루쉰에게 새로운 관계가 열린 시기이기도 하다. 훗날 아내가 되는 쉬광핑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당시 쉬광핑은 루쉰이 교편을 잡고 있는 베이징여자사범대학 학생이었다. 루쉰은 학생에게 자못 진지한 태도로 답한다.
나는 고통은 언제나 삶과 서로 묶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분리될 때도 있는데, 바로 깊은 잠에 빠졌을 때입니다. 깨어 있을 때 약간이라도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방법은 '교만'과 '오만불손'입니다. (…)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가는데 가장 흔히 만나는 난관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림길'입니다. 묵적 선생의 경우에는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나는 울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우선 갈림길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숨 자고 나서 갈만하다 싶은 길을 골라 다시 걸어갑니다. 우직한 사람을 만나면 혹 그의 먹거리를 빼앗아 허기를 달랠 수도 있겠지만, 길을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도 전혀 모를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를 만나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굶주려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내려옵니다. 호랑이가 끝내 떠나지 않으면, 나는 나무 위에서 굶어 죽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 허리띠로 단단히 묶어 두어 시체마저도 절대로 호랑이가 먹도록 주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없다면? 그렇다면 방법이 없으니 하릴없이 호랑이더러 먹으라고 해야겠지만, 그때도 괜찮다면 호랑이를 한 입 물어뜯겠습니다.
<먼 곳에서 온 편지 3월 11일>
그가 <길손>을 쓴 것은 그해 3월 2일, 쉬광핑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11일, 쑨원이 세상을 떠난 것은 바로 이튿날 12일, <전사와 파리>를 쓴 것은 21일.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루쉰은 수많은 사건을 직면하고 있었다.
과연 그는 무어라 생각했을까. 호랑이를 만났다고 여겼을까? 그 길을 무어라 여겼든 당혹스런 상황을 만났을 때 대처하겠다는 그의 태도에 주목하자. 갈림길이라면? 앉아서 좀 쉬다 갈만한 길을 골라 가겠다. 멈추지도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어느 길이 좋은 길인지 헤아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겠다. 가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도망쳐야지.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리도 만무하니 버티기. 호랑이가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무에서 굶어 죽는 수밖에. 그러나 몸을 칭칭 동여매어 한 입도 내어주지 말아야지. 제 아무리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호랑이라도 굶주려 보라는 못된 심보.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그가 세계를 끊임없는 문제의 공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이 문제와 고통에서 도피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만과 오만불손, 다른 글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우쭐대는 자대自大의 정신, 패배를 승리로 치환하는 정신승리법 등등. 허나 루쉰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적막 속에서도 끊이지 않는 외침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세계가 문제의 공간이라면,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망각을 도피처로 삼지 않는다면 결국 남는 것은 끊임없는 분투의 연속일 뿐이다.
내게 이런 단평을 짓지 말라고 권한 사람도 있다. 그 호의를 나는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으며, 창작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지어야 할 때라면, 아마 아무래도 이런 것을 지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예술의 궁전에 이렇게 번거로운 금령禁令이 있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게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막 위에 선 채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을 바라보면서, 기쁘면 크게 웃고, 슬프면 크게 울부짖고, 화가 나면 마구 욕하고, 설사 모래와 자갈에 온몸이 거칠어지고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며, 때로 자신의 엉긴 피를 어루만지면서 꽃무늬인 양 여길지라도, 중국의 문사들을 좇아 셰익스피어를 모시고 버터 바른 빵을 먹는 재미난 못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 지금은 한 해의 마지막 깊은 밤, 이 밤도 깊어 거의 끝나간다. 나의 생명, 적어도 생명의 일부는 이미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적는 데에 쓰여졌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내 자신의 영혼의 황량함과 거칠음뿐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것들을 겁내지도, 덮어 두고 싶지도 않으며, 게다가 정말이지 조금은 이것들을 아끼고 있다. 이건 내가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라면 이 말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25년 12월 31일 밤
<‘화개집’ 제기>
1925년을 마무리하며 루쉰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해를 시작하면서 남긴 <희망>과 견주어 보면 대체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는 그해 수많은 글을 지었으며 덩달아 악명도 크게 떨쳤다. 그 가운데는 루쉰에게 실망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작품'을 써내는 '창작'의 정신이 사라졌다며. 그러나 루쉰의 대답은 이렇다. '이런 것을 지어야 할 때라면, 아무래도 이런 것을 지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글쓰기란 시대와 삶을 그렇게 인식한 자가 짊어져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리하여 루쉰은 예술의 궁전에, 문학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도리어 그는 사막 위에서, 모래와 돌이 뒹구는 곳을 자신의 현주소로 인식한다. 그곳은 상처와 고통이 있는 곳, 설사 꽃무늬가 있다 하더라도 엉긴 핏자국이 그렇게 보이는 곳일 뿐.
루쉰은 그것이 보편적으로 모두를 위한 이야기가 아님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문학이 인종과 계급, 성별, 나이를 뛰어넘는 보편의 전당, 궁궐의 글이라면 루쉰의 글은 소수에게만 의미 있는 광야의 글이다. 어찌 그것을 배제의 글쓰기라 할 수 있을까. 소수, 그의 말을 빌리면 엎치락뒤치락 살고 있는 사람에게만 읽히는 글이다. 하하호호 웃으며 세상을 노래하는 이들은 먼지 가득한, 모래가 입에 씹히고 먼지가 목구멍에 달라붙는 거친 들판의 텁텁한 공기를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세계에 사는 존재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살아내는 것이며 그다음으로는 주먹을 쥐고, 투창을 쥐어 대항하는 것이다. 물론 조용히 사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저 모래처럼, 먼지처럼, 흩날리면 흩날리는 대로 사는 삶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쉰이 이야기하건대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은 세계가 거짓과 허위를 강요하기 때문이란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마구 욕해야 하건만, 무엇인가가 입을 틀어막는다. 루쉰은 이것이 비겁자의 전술이라 말한다. 상대를 멸절한 용기는 없으면서, 슬그머니 괴로움을 주면서도 영원히 그것을 기억하게 할 용기는 없는!
도리어 용기는 맹사猛士, 사나운 전사에게 있다. 멸절하더라도, 설사 괴로움을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집요하게 기억하는 이.
반역의 맹사가 인간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우뚝 서서, 이미 달라졌거나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폐허와 무덤을 뚫어본다. 깊고 넓은 오래된 고통 일체를 기억하고, 겹겹이 쟁여지고 응어리진 피를 직시한다. 죽은 것, 태어나고 있는 것, 태어나려는 것, 태어나지 않은 것 일체를 속속들이 안다. 그는 조물주의 농간을 간파하고 있다. 그가 떨쳐 일어나, 인류를, 소생시키거나 소멸되게 할 것이다. 이들 조물주의 착한 백성들을.
<빛바랜 핏자국 속에서>
루쉰의 글쓰기는 1925년을 좌우로 큰 변화를 겪는다. 그는 이러한 글을 잡감雜感이라 불렀다. 시대의 모순에서 빗겨나 있는 이들 - 학자, 지식인, 문인을 대상으로 그는 수많은 글을 써내었다. 혹자는 그의 총명이 빛을 잃었다 했고, 누군가는 늙은이의 허황된 소리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글은 더욱 예리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전사가 있어야 한다. -
(…) 그가 무물無物의 진으로 들어서자 마주치는 사람마다 한 본새로 인사를 한다. (…) 그것들의 머리 위에 각종 깃발이 나부낀다. 깃발에는 각가지 좋은 명칭을 수놓았다. 자선가, 학자, 문인, 원로, 청년, 아인雅人, 군자… 머리 아래 각가지 외투를 걸쳤다. 거기에 여러 가지 좋은 무늬를 수놓았다. 학문, 도덕, 국수國粹, 민의民意, 논리, 공의公義, 동방문명…
그러나 그는 투창을 들었다.
<이러한 전사>
루쉰은 허위를 정확하게 고발한다. 루쉰이 상대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정중앙에 심장이 있다고 한다. 나는 공평하며 정의롭고 무사无私하다고. 공의公義의 탈을 뒤집어쓴 그 논의의 맨 얼굴을 루쉰은 정확히 알았다. 그리하여 무릇 전사란 투창을 든 인물이며, 이 투창을 정중앙이 아닌, 왼쪽으로 치우쳐 던지는 사람이라 말한다.
루쉰은 이 싸움의 전장을 '무물의 진'이라 부른다. 사상계의 전사를 말하기 위함이다. 1920년대에 들어 다양한 논의가 들끓었다. 이제 변발과 전족은 사라졌지만 싸움의 양상은 더 복잡하게 바뀌었다. 때문에 이 시기 이후의 루쉰의 글은 매우 산만하며 어지럽다. 특정한 주의主義와 문제問題로 좀처럼 수렴되지 않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당면한 시대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보여준다.
왕성하고도 집요한 글쓰기, 상대를 물어뜯는 커다란 이빨과 강한 턱, 자신을 향한 공격을 가뿐히 흘려버리는 기술까지. 그의 글을 읽노라면 싸움의 귀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의 글을 읽고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이들이 여럿 있겠지. 이때 들러붙는 질문. 그는 어찌하여 원귀寃鬼가 되지 않았나? 그의 글에 지속적으로 보이는 건강함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6. 그림자
루쉰은 1925년 북경여사대 사건에 휘말린다. 총장과 학생들이 대립한 이 사건은 학생들의 승리로 끝나는듯 싶었다. 내쫓겼던 학생들이 돌아오고 학생 편에 섰던 루쉰도 복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926년 3월 18일, 3.18 참사가 발생한다.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향해 돤치루이 군벌 정권이 발포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루쉰의 제자도 여럿 목숨을 잃었다. 잠깐의 승리는 달콤했으나 적의 항전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베이양 정권은 수많은 인물을 잡아 가두었고 그 틈에 여러 인물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다. 루쉰도 수배 명단에 이름을 올려 한 달 넘게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몸을 피해야 했다. 결국 그는 그해 여름 쉬광핑과 함께 남쪽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루쉰은 샤먼으로 쉬광핑은 광저우로. 그러나 샤먼에서의 삶도 편치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쉰은 광저우로, 다시 상하이로 거처를 옮긴다. 1927년 상하이에 거처를 정한 이후 193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줄곧 상하이에 머문다.
1926년 삶의 중요한 변화를 겪으며, 베이징에서 샤면, 광저우를 거처 상하이로 삶의 자리를 옮기며 그는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이 반년 동안에 나는 또 많은 피와 눈물을 보았지만
내게는 잡감만 있었을 따름이다.
눈물이 마르고, 피는 없어졌다.
도살자들은 유유자적 또 유유자적하면서
쇠칼을 사용하기도, 무딘 칼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게는 ‘잡감’만 있었을 따름이다.
‘잡감’마저도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던져넣어 버릴’ 때면
그리하여 ‘따름’而已만이 있을 따름이다.
10월 14일 밤,
교정을 마치고 적다.
<화개집 속편 / 1926년>
루쉰에 대한 공격도 더욱 심해졌다. 누군가는 그의 잡감을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려야 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그에게 욕이 될 수 있을까. 앞서 보았듯 그는 자신의 글이 자연스레 사라지는 날을 맞을 것이라 여겼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는 시대의 폐단과 사라지는 소멸을 바란 것이지, 적에게 내쳐지는 운명을 자신의 미래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허나 혹시 아는가 시대가 역행하여 그가 바라던 시대가 불같이 닥쳐오기는커녕 꽁꽁 얼어붙은 시대가 다시 찾아올지.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평생을 분투하여 살았건만 한치도 변하는 것이 없다면. 개별 존재의 소멸만이 감당해야 할 미래라면. 전통적인 지식인은 이런 경우 역사에 기댔다. 언젠가 의인을 알아줄 것이라는 희망. 역사란 표폄의 공간이며 또 다른 도덕이 작동하는 현장이다. 비록 느리기는 하나 언젠가는 정의는 승리하는.
루쉰은 말년에 새로운 글쓰기 실험을 시도한다. 검열을 피해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글쓰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수많은 필명으로 자신을 변주하며 사건에 개입하고자 했다. 한편 고대의 신화와 전설을 걸어내어 자신의 글쓰기 소재로 삼기도 했다. <새로 쓴 옛날 이야기(古事新篇)>는 이런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그의 실험적인 글쓰기 속에 역사와 신화는 새롭게 구성된다. 루쉰은 역사와 신화의 이야기를 비틀고 더불어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았다.
역사와 신화를 변주한 이후, 사건이 벌어진 다음 거기에 남는 것은 별볼일 없는 일상일 뿐이다. 아무리 커다란 변화가 있은들 사람들의 삶은 그저 심심한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
눈물도 마르고, 피도 마르고, 설사 도살자들이 오가는 상황에도, 모든 것이 쓸모없음으로 돌아간 뒤에도 루쉰은 "‘따름’而已만이 있을 따름"이라 말한다. 이를 어찌 이해할 것인가. 쉬이 읽히지 않는 표현이다. '따름'而已. 여기에 남는 것은 차가운 냉소, 잔혹하게 닥쳐올 그 이후의 시간, 진보도 변혁도, 혁명도 반동도, 그 무엇과도 무관한 그 이후의 시간.
흥미롭게도 루쉰은 말년, 죽음에 관심을 둔다. 1936년 10월 19일 루쉰은 세상을 떠나는데, 약 한 달 전 그는 <여조女弔>라는 제목의 글을 짓는다. 여조란 목매어 죽은 귀신을 가리킨다. 죽음을 앞두고 어린 시절 극에서 보았던 여조를 떠올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녀가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젖힐 때에야 얼굴이 보인다. 석회처럼 하얗고 동그란 얼굴, 칠흑같은 눈썹, 시커먼 눈자위, 새빨간 입술. (…) 만약 밤중에 날이 어둑어둑할 때에 멀리서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입술이 빨간 사람이 어른거린다면, 지금 나라고 해도 달려가서 바라볼 것이다. 물론 내가 거기에 혹하여 목을 매지는 않을 것이다.
<여조>
나는 그가 가진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 삶과 죽음을 오가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여조를 떠올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삶의 현실에 주목했던 사람이지만 거꾸로 그에게 삶이란 죽음의 반대말이기도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이 서로 맞닿아 있음을, 그중에 하나를 취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삶과 죽음 양쪽 모두를 성찰한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그는 삶의 뒤편에 계속 눈길을 주고 있었으며, 문득문득 비치는 어둠의 그림자를 부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세계란 본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아래 모든 존재가 또렷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허위의 허위와 허위만이 있는 건 아닐까. 밤이 되어도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법. 빛이 사라진다해도 어둠 속에 모든 것이 삼켜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어둠 속에 어둠을 보는 자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가 있을 뿐.
내가 싫어하는 것이 천당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싫어하는 것이 지옥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싫어하는 것이 미래의 황금 세계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그런데 그대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오.
동무,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소. 나는 머무르지 않으려오.
나는 원치 않소!
오호오호, 나는 원치 않소. 나는 차라리 무지无地에서 방황하려 하오.
(…)
나는 이러기를 바라오, 동무 -
나 홀로 먼 길을 가오. 그대가 없음은 물론 다른 그림자도 암흑 속에는 없을 것이오. 내가 암흑 속에 가라앉을 때에, 세계가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할 것이오.
<그림자의 고별>
존재를 믿는 자는 존재가 지워지는 순간을 가늠하지 못한다. 희망을 품는 자는 희망을 빼앗긴 이후를 감당하지 못한다. 순진한 계몽주의자들은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날은 있으나 그림자를 몰아내는 날이 있을 수 있을까?
루쉰은 일찍이 희망이건 절망이건 모두 허망함을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희망도 절망도 사라지고 허망만이 남는 순간이 있을 테다. 나는 그가 수많은 적을 상대했음에도 원귀가 되지 않은 것이, 원수와 복수를 입에 올림에도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은 것이, 숱하게 많은 글을 써냈으면서도 글과 문자의 노예가 되지 않은 것이 존재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믿지 않았고, 존재와 실재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의 글쓰기는 진솔하되 진리를 추구하지도 진실을 말한다고 자부하지도 않는다. 어둠 속에 가라앉는 법,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세계가 자신에게 속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
그는 <여조>를 쓰기 며칠 전,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도 죽음을 앞두고 몇 가지 당부의 말을 남긴다. 죽고 난 뒤의 일이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며, 상관할 수도 없는 일이기는 하나 몇 마디쯤은 남긴다 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1. 상을 치를 때, 누구에게선 돈 한 푼 받지 말라. - 다만 친한 벗의 것은 예외이다.
2. 바로 널에 넣고 땅에 묻어라.
3. 어떤 기념 행사도 하지 말라.
4. 나를 잊고 제 일을 돌보라. - 그러지 않는다면 진짜 바보다.
5. 아이가 자라서 재능이 없으면 작은 일로 생계를 꾸리도록 하라. 절대로 허울뿐인 문학가·예술가 노릇은 하지 말라.
6. 남이 너에게 해주겠다는 것을 참말로 여기지 말라.
7. 남의 이빨과 눈을 망가뜨려 놓고서 보복에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는 사람과는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라.
<죽음>
옛날 증삼은 사람이 죽을 때면 말이 순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루쉰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은 참이 아님에 분명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별로 순해지지 않았다. 평범한 당부도 있으나 첨언한 말이 인상적이다. 설사 돈 한 푼 받지 않더라도 친한 벗의 것은 받을 수 있다는 말. 자신을 잊고 제 일을 돌보지 않으면 진짜 바보라는 말. 그의 벗들이 그 말을 듣고 어찌 생각했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루쉰은 바라지 않았을 테지만, 루쉰의 관 위에는 '민족혼'이라는 커다란 휘장이 덮였다. 훗날 마오는 루쉰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이며, 위대한 문학가이자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이다.' 비록 상상이기는 하나, 마오의 평가를 들었다면 무덤 속의 루쉰은 무어라 말했을까. 루쉰에 대한 시끄런 찬사가 그친 지금, 루쉰은 또 무어라 생각할까.
위에서 이어지는 루쉰의 글로 매듭지으련다.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것 말고도 있었을 것이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열이 많이 났을 때 유럽 사람들이 치른다는 의식을 떠올린 기억은 있다. 남에게 용서를 비로 자기도 용서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적이 많은데, 내게 신식 사람이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나를 미워하라고 해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런 의식은 없었다. 유언장도 쓰지 않았다. 말없이 누워 있었을 뿐이다. 때론 훨씬 절박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는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서 한번뿐이니 어떻게든 견뎌 내겠지… 나중에 좀 호전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나는, 이런 것들은 아마, 정말 죽기 직전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정말 죽을 때에는 이런 상념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떠할까는, 나도 모른다.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