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픈옹달
3️⃣

제물론 : 너도 나도 하나의 피리에 불과하다

<제물론> 원문 & 번역문

아래 원문과 번역문을 붙입니다. 원문은 ctex.org에서 옮겨왔습니다. (링크) <장자>는 통행본마다 글자에 조금 차이가 있고, 장절의 구분이 다릅니다.
아래 번역은 모두 기픈옹달 이 직접 옮겼습니다. 딱딱한 직역보다는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문장으로 옮겼습니다. ‘우화’라는 형식에 따라 마치 이야기하듯 옮겼습니다.

원문 (펼치기)

[번역문] 제물론 : 너도 나도 하나의 피리에 불과하다

앎(知)이란 무엇일까. <제물론>은 앎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근대 철학에서 앎이란 단순히 지식의 문제를 넘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을 기억합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라는 주체는 생각, 즉 앎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장자의 접근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앎의 모호함을 이야기해요. '나'라는 개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앎도 없고, 고정된 나도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장자는 우리를 커다란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물론>의 첫 시작, "나는 내 자신을 잃었다(吾喪我)"는 남곽자기의 말은 이 곤혹스러움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전부터 <제물론>은 '만물제동萬物齊同', 모든 사물이 같다는 주장을 담은 글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앎에 대한 질문, 윤리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 회의, 존재에 대한 부정 등이 더 중요한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자는 '도'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도'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도,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길(道)은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진다(道行之而成)"는 말처럼, '도'는 떠남(行)과 함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떠남이란 곧 질문이 아닐지요.
남곽자기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것이 마치 넋을 잃은 것처럼 보였어. 옆에서 서 있던 안성자유가 말했지. "어찌 된 일인가요? 모습은 마치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마치 죽은 재와 같습니다. 지금 책상에 기대어 있는 사람은 어제 책상에 기대어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곽자기가 말했지. "좋은 질문이구나. 지금 나는 내 자신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알겠느냐? 너는 사람의 피리 소리는 들었어도 땅의 피리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지. 땅의 피리 소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하늘의 피리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을 게다."
"무슨 뜻인지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대지가 숨을 내쉬는 것을 바람이라 부르지. 고요하게 바람이 일지 않을 때도 있지만, 바람이 일면 모든 구멍이 울부짖는다. 휘익휘익 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테다. 깊은 숲 속, 백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나무에 여러 구멍이 있어. 어떤 것을 코 같고, 어떤 것은 입 같고, 귀 같고, 눈 같지. 술잔 같은 것, 절구통 같은 것도 있어. 웅덩이 같은 것도 있고 구덩이 같은 것도 있어. 아아 우우 호통치는 것 같기도 하고, 쉬익 휘익 성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이 여이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낄낄 깔깔 웃는 것 같기도 해. 앞에서 위잉 소리가 나면, 이어서 휘잉 하는 소리가 뒤따르지. 산들바람은 작게, 하늘바람은 크게 세상을 울리지. 그러나 아무리 사나운 바람이라도 멈추면 구멍들은 텅 빈 상태로 돌아갈 뿐이야. 그렇게 흔들흔들 살랑살랑 소리가 잦아지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땅의 피리 소리라는 것은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이고, 사람의 피리 소리란 퉁소에서 나는 소리이군요. 하늘의 피리 소리란 어떤 것입니까?"
"갖가지 다른 것에 숨을 불어넣은 것인데도 제 스스로 그런 줄 알아. 저마다 각기 제 생각을 가지고 있다지만, 누가 불어넣은 것일까?"
큰 앎은 넉넉하지만 작은 앎은 쩨쩨하지. 큰 말은 담담하나 작은 말은 재잘거려. 잠을 자도 꿈이 어지럽고 깨어나면 마주치는 온갖 것에 얽매여 날마다 마음이 다투지. 그런데도 태연한 척, 괜찮은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작은 두려움에 쩔쩔매다가도 큰 두려움이 닥치면 넋을 잃어. 시비를 따지는 모습은 마치 화살을 쏘아대듯 날카롭고,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은 묵묵히 맹세를 지키듯 끈질기지. 그러다가도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 날마다 조금씩 쇠락하기 마련이야. 그렇게 흘러가 버리면 다시 되돌릴 수가 없어. 늙어 고집을 피우면 마치 꽉 눌러 구멍을 닫아놓은 듯해.  마음이 죽음에 가까워지면 다시 일으킬 수가 없어.
희로애락, 근심걱정, 요사하고 변덕스런 갖가지 마음이 생겨나. 텅 빈 곳에서 음악이 나오듯, 습지에서 버섯이 피어나듯 그렇게 매일 우리 앞에 여러 잡생각이 오가는데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 원인을 찾아보는 일은 그만두자 그만두어. 아침저녁으로 여러 마음이 오가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그런 마음이 없으면 내가 없겠지. 내가 없으면 그런 감정이 일어나지도 않을 테고. 이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끔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아마도 '참된 주인(眞宰)'이 있을 테지만 그 자취는 찾을 수 없어. '참된 주인'이 움직이는 것은 확실한데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아. 실재하지만 형체는 없는 거야. 몸에는 백여 개의 뼈마디,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장기가 있어. 나는 그중에 무엇을 특별히 아껴야 할까? 너는 모든 것을 다 똑같이 좋아하고 있어? 아마 특별히 마음 가는 게 있겠지. 몸의 모든 부분은 신하나 노비처럼 부수적인 걸까? 이 부수적인 것끼리 서로 다스릴 수는 없을까? 번갈아 임금 노릇하고 신하 노릇 한다면? 아니, 참된 임금(眞君)이 있겠지. 그 실체를 찾던 찾지 못하던 그 참된 것에 더하는 것도 덜어내는 것도 없어.
사람의 삶이란 정말 이처럼 어리석은 걸까? 나만 홀로 어리석을 뿐, 어리석지 않은 사람도 있는 걸까? '통념(成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삶의 기준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변화를 알고 마음으로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거야. 어리석은 사람도 삶의 기준이 있겠지. 통념을 따라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거야. 통념 없이 옳다 그르다를 따진다면 오늘 월나라로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것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야. 이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면 옛날 신묘한 능력을 가진 우임금도 알 수 없을 텐데 나라고 어떻게 알겠어.
말은 공기를 내뱉는 것이 아니야. 말에는 메시지가 있기 마련이지. 그런데 또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말이라면, 그 말에는 메시지가 있는 걸까 메시지가 없는 걸까? 아마도 새소리와는 다르겠지만 그 말을 새소리와 구별할 수 있을까 구별할 수 없을까. '도'는 어디에 감춰져 참 거짓이 있고, 참된 말은 어디에 감춰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걸까? '도'는 어디로 사라졌기에 참된 말이 없고, 참된 말은 어디에 있기에 논쟁이 끊이지 않을까. '도'는 보잘것없는 통념에 가리어지고, 참된 말은 화려한 수사에 가리어지는 거야. 그렇게 유가와 묵가가 옳다 그르다를 따지고 있어. 한쪽에서 틀린 것이 다른 쪽에서는 옳고, 한쪽에서 옳은 것이 다른 쪽에서는 틀려. 다른 쪽에서 틀렸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우기고, 다른 쪽에서 틀렸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우기지. 이런 우격다짐 보다 참된 지혜가 낫지.
모든 것을 '저것이다'라고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이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어. '저것이다'라고 하면 알 수 없던 것도 '여기'에서 시작하면 알 수 있지.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 "'저것이다'는 '이것이다'에서 나오고, '이것이다'도 '저것이다'에서 시작한다." '저것이다'와 '이것이다'가 함께 생겨난다는 말이야. 그런데 함께 생겨나는 것은 함께 사라지고, 함께 사라지는 것은 함께 생겨나지. 옳다고 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 있고, 옳지 않다고 하면 옳다고 하는 것이 있어. '맞다'에서 시작하는 것은 '틀리다'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고, '틀리다'에서 시작하는 것은 '맞다'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아. 그래서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아. 다만 하늘에 비춰볼 뿐이야.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야. 그러면 '이것이다'가 '저것이다'가 되고, '저것이다'가 '이것이다'가 되지. 저쪽에도 옳고 그름이 있고, 이쪽에도 옳고 그름이 있어. 그럼 '저것이다'와 '이것이다'의 구분이 있는 걸까. '저것이다'와 '이것이다'의 구분이 없는 걸까? '저것이다'와 '이것이다'가 서로 대립하지 않는 것, 이것을 도추道樞, '도'의 회전축이라 할 수 있어. 회전축은 중심에 있어서 끝없이 변화에 대응할 수 있지. '맞다'도 끝이 없고 '틀리다'도 끝이 없어. 그러므로 '참된 지혜가 낫다'라고 말했던 거야.
가리킨 것을 가지고 가리킨 것이 가리키려던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보다는 가리키지 않는 것을 가지고 가리킨 것이 가리키려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낫지. 어떤 말을 가지고 말이 그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다른 말을 가지고 말이 그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나아. 세상의 모든 것이 똑같은 법. 정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정말 다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할 거야.
옳은 건 옳은 거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거야. 길(道)은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지듯, 사물은 불려서 그런 거야. 어째서 그러냐고? 그렇다니 그런 거지. 어째서 그렇지 않냐고? 그렇지 않다니 그렇지 않은 거야. 옳은 것도 있고, 옳지 않은 것도 있듯, 그런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 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그런 것, 옳은 것이 있기 마련이야. 그렇지 않은 사물은 없고, 옳지 않은 사물은 없어.
자, '여기'에 가느다란 풀줄기와 굵은 기둥, 못난이와 미인 서시를 예로 들어 보자. 기이하고 이상하겠지만 도道는 함께 하나로 보아. 나누는 것은 고정하는 것, 곧 통념을 따르는 거고, 통념을 따르는 것은 망가뜨리는 거야. 통념을 따라 망가뜨리지 않으면 다시 함께 하나로 볼 수 있어. 오직 통달한 자만이 함께 하나로 볼 줄을 알지. 바로 '여기'에서 다른 마음이 일지 않고 그런대로 내버려 두자. 그런대로 내버려 두어 생기는 마음, 그 생기는 마음이란 함께 아우르는 것이고, 함께 아우러야 지혜를 얻을 수 있어. 지혜를 얻으면 도를 깨우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그러니 '여기'에 있을 뿐, 어째서 그런지 알지 못하는 것을 '도'라고 해.
쓸데없이 정신을 힘들게 하면서 한 가지 주장에 몰두하지. 헌데 이전과 별 차이 없다는 건 모르고 있어. 이를 '조삼모사'라 해. 무슨 말이냐고? 이야기를 들어봐. 원숭이 사육사가 도토리를 주며 말했어.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지.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마.' 이번에 원숭이들이 모두 환호했어. 도토리 개수나 이로움이나 달라진 것은 없는데 성내고 기뻐하는 마음이 생겼잖아. 그러니 말에 휘둘리지 말로 바로 여기, 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해.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성인은 옳고 그름의 다툼을 조화시키고 우주적 평등함에 쉰단다. 이것이 양행兩行, 옳고 그름을 모두 포괄하는 자리야.
옛날 사람은 말이야 깨우침이 지극한데 이르렀어. 어느 정도였냐고? '있음' 이전을 생각하였지. 지극히 훌륭했어. 더 말할 게 뭐 있을까. 그다음은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도 경계를 생각하지는 않았어. 그다음은 경계를 생각했지만 그래도 맞다 틀리다를 따지지는 않았지. 맞다 틀리다를 세세하게 따지니 '도'가 엉망이 되어 버린 거야. 도가 엉망이 되어 버려서 치우친 마음이 생겨났지. 생겨난 것과 엉망이 된 것은 무엇이며, 생겨나지도 않고 엉망이 되지도 않은 것은 무엇일까?
소문의 거문고 연주로 예를 들어보자. 연주를 하자 생겨난 것이 있고 엉망이 된 것이 있지. 연주를 하지 않았다면 생겨난 것도 엉망이 된 것도 없었을 거야. 소문의 훌륭한 연주, 사광의 추임새, 혜시의 논변. 이 셋의 실력은 거의 완벽하여 모두 완전하다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 좋아하는 것을 지켜가려 하겠지. 헌데 사람들과 달리 유별나게 그것을 좋아했잖아. 그것을 사람들에게 일러주려고 했어.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도 일러주려고 한 거지. 그러니까 혜시는 어리석게도 견백론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고. 소문의 자식은 아버지의 거문고 줄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이룬 것이 없었어. 이런데도 무언가를 이루었다 할 수 있을까? 그럼 비록 나 같은 사람도 이룬 게 있을 거야.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면 그들이나 나 모두 이룬 게 없는 셈이야. 그래서 번쩍거리는 화려함을 성인은 피해. 바로 '여기'에서 다른 마음이 일지 않고 그런대로 내버려 두자. 이것을 '참된 지혜'라고 하는 거야.
지금 어떤 주장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이것이다'와 비슷한지, '이것이다'와 비슷하지 않은지 알 수 없다고 해. '비슷하다'와 '비슷하지 않다' 이 둘을 비슷하다고 한다면 '저것이다'와 차이가 없을 거야. 그렇지만 한번 말해보자. '시작'이라는 것이 있어. 그러면 "'시작'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이 있겠지. 또 "'시작'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이 아직 시작하지 않음도 있겠지. '있음'이 있어. 그러면 '없음'이 있지. 또 "'없음'이 아직 생기기 이전"이 있을 거야. 그리고 "'없음'이 아직 생기기 이전"의 그 이전이 있겠지. 문득 '없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있음'과 '없음' 가운데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아직 모르겠어. 지금 내가 말한 것이 있잖아. 그런데 내가 말한 것이 말한 게 있는지 말한 게 없는지 아직 모르겠어.
"털끝 보다 큰 것이 없고, 태산도 작다. 태어나자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사람이 없고, 팽조도 요절했다. 우주는 나와 함께 생겨나고 만물이 나와 하나다." 이미 하나라면 더 말할 것이 있을까. '하나다'라고 했는데 더 말할 것이 없을까. 하나와 말할 것이 둘이 되고, 이 둘과 '하나다'라는 것이 셋이 되어. 여기에서 나아가면 아무리 계산을 잘하는 사람도 다 헤아릴 수 없을꺼야. 그러니 평범한 사람은 어떨까. 그렇게 없음에서 시작해서 있음까지 가는데 셋이 되었는데 있음에서 시작해서 있음까지 가면 어떻겠어. 가지 말아야 해. '여기'에 있을 뿐이야.
본디 '도'에는 구분이라는 것이 없었고, '말'에는 일정함이라는 것이 없었지. '이것이다'라는 말 때문에 나뉘게 되었어. 나뉨에 대해 말해보자. 이쪽과 저쪽, 인륜과 의리, 나눔과 말다툼, 힘겨룸과 힘싸움 이 여덟 가지가 있어. 이 세상 바깥의 일에 대해 성인은 그저 가만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지.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성인은 이야기할 뿐 의견을 밝히지 않아. 역사나 정치, 훌륭한 임금에 대해서 성인은 의견을 밝힐 뿐 말다툼을 하지 않아.
"나눈다고 하나 나누지 못하는 것이 있고, 말다툼 하나 말다툼하지 못하는 게 있다." 어째서 그럴까? 성인은 그저 마음에 두지만, 사람들은 말다툼을 하며 서로 옳음을 내보이려 하지.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 "말다툼하나 보지 못하는 게 있다."
참된 '도'는 무어라 부를 수가 없어. 참된 말다툼은 말로 하지 않지. 참된 사람다움은 사람다움 같지 않아. 참된 깨끗함은 겸손하지 않아. 참된 용기는 겁주지 않아.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다. 말다툼을 해서 가리면 실패한다. 사람다움을 지키는 사람은 정작 그렇지 않다. 깨끗하다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남을 겁주는 용맹은 쓸 데가 없다." 이 다섯 가지는 맞는 말인데, 부족한 구석이 있어. 그러니 알지 못하는 데 나아가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지극한 것이야.
누가 말로 하지 않은 말다툼을 알까. 말할 수 없는 도를 알까. 만약 안다는 사람이 있다면 우주를 품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고,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을 테지. 그렇게 끝이 없지만 어째서 그런지는 몰라. 이것을 보광葆光, 가리어진 지혜라고 하자.
그래서 옛날에 요가 순에게 물었어.
"내가 종, 회, 서오 이 세 곳을 정벌할 생각이다. 그런데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 이런 궁리를 하는 게 마음이 좀 캥기는구나. 어째서 그럴까."
순이 말했지. "세 곳은 꽉 막혀 있습니다. 수고롭게 정벌할 생각에 어찌 마음이 불편하십니까. 옛날에는 태양 10개가 한꺼번에 떴다고 하지요. 밝게 온 세상을 비추었답니다. 태양보다 더 나은 덕을 가진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어. '그대는 만물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아시오?"
"내 어찌 알겠나."
"그대는 그대가 모른다는 것을 아시나?"
"내 어찌 알겠나."
"그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시나?"
"내 어찌 알겠나. 그래도 한번 말해보지. 어찌 내가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어찌 내가 모른다고 한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또 내가 한번 그대에게 물어보세. 사람들은 습한데 자면 허리에 병이 생기고 한쪽 몸이 마비가 되어 죽기도 하는데, 미꾸리도 그런가? 나무에 올라가면 덜덜 떨리고 무서운데, 원숭이도 그런가? 사람과 미꾸리, 원숭이 이 가운데 올바른 터전이라는 게 있을까.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뜯지. 지네는 뱀을, 올빼미는 쥐를 좋아해. 이 가운데 올바른 식성이라는 게 있을까. 원숭이는 침팬지와, 사슴은 노루와, 미꾸리는 물고기와 어울려 지내지.
모장이나 려희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미인이야. 그러나 물고기가 그를 보면 깊이 숨고, 새가 그를 보면 높이 날고, 사슴이 그를 보면 재빨리 달아나. 이 가운데 누가 올바른 미모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라는 생각에서 시작하면 인의 같은 규범, 맞다 틀리다 하는 다툼 등이 번잡하고 어지럽게 일어나지. 그런데 어찌 내가 이것들을 다 헤아릴 수 있겠어."
설결이 말했어. "그대는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를 모른다 하는데, 지극한 사람도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를 모를까?" 왕예가 말했지. "지극한 사람은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온 세상이 불타더라도 더위를 느끼지 않고, 온 세상이 얼어붙어도 추위를 느끼지 않지. 벼락이 산을 깨뜨리고, 바람이 바다를 흔들어도 놀라지 않아. 이런 사람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을 부리며 세상 밭을 노닐지. 죽음이니 삶이니 하는 것도 그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데,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 따위는 어떻겠어."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어. "내가 선생님께 들은 말씀이 있네. 성인은 애쓰는 일이 없다고 해. 이익을 좇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지도 않아. 얻는다고 기뻐하지도 않고, 규범에 얽매이지도 않지. 말이 없으면서도 있는 듯하고, 말이 있는 듯하면서도 말이 없어. 티끌 같은 세속 바깥에서 노닌다지. 선생께서는 터무니없는 말이라 하셨지만, 나는 오묘한 도리를 이야기한 게 아닌가 싶어.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장오자가 말했어 "이는 황제도 듣고 아찔하게 여길 이야기라오. 그대의 스승 공구(孔丘, 공자)가 어찌 그것을 알겠나. 게다가 그대도 너무 서둘러 헤아리고 있구려. 마치 알을 보고 새벽을 알리는 닭을 떠올리고, 탄환을 보고 새 구이를 생각하는 것처럼. 내 그대를 위해 멋대로 말해볼 테니 그대도 멋대로 들어보게나.
해와 달과 함께하며, 우주를 옆에 끼고 있다면 어떨까? 우주와 꼭 맞으면서도 어지러이 흐린 상태로 내버려 두면서도 귀천을 따지지 않아. 보통 사람은 바지런하게 움직이나 성인은 어리숙하게 행동하지. 시대의 흐름에 함께하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아. 그렇게 만물이 다 그렇게 성인과 함께 얽혀 살아간다네.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리석은 게 아닌지 내 어찌 알 수 있을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집을 잃고서도 돌아갈 줄 모르는 게 아닌지 내 어찌 알겠나. 여희麗姬는 애艾 땅을 지키는 자의 딸이었지. 처음 진나라에 시집갈 때는 얼굴이며 소매가 모두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네. 헌데 궁궐에 이르러 왕과 잠자리를 함께하고, 맛난 음식을 먹게 되자 슬피 울었던 것을 후회했다지. 그러니 죽은 자들이 살고자 애쓰던 것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 어찌 알겠는가.
꿈에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다가도 아침에 깨어나 문득 펑펑 울기도 하지. 꿈에서 펑펑 울다가도 아침에 깨어 아무렇지도 않게 사냥을 즐기러 나가기도 해. 꿈을 꿀 때는 그게 꿈인 줄 모르잖아. 꿈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을 점쳐보기도 하지. 꿈에서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인 줄 알아. 그러니 커다란 깨침이 있어야 커다란 꿈인 줄 아는 거라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깨어있다고 여기면서 똑똑한 체 한단 말야. 군주니 목동이니 하며 사람을 가르는데 어리석기 짝이 없지. 공구도 그대도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내가 그대에게 꿈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도 꿈이지. 이런 걸 해괴한 이야기라 해. 만세 뒤라도 큰 성인을 만나 이 꿈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가운 일이겠나."
나와 네가 말다툼한다 치자. 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너를 이지지 못했다면, 네가 정말 맞고 내가 정말 틀린 걸까? 내가 너를 이기고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내가 정말 맞고 네가 정말 틀린 걸까? 한쪽이 맞거나 한쪽이 틀린 걸까? 아니면 모두 맞거나 모두 틀린 걸까? 나와 네가 모두 알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어리둥절 알 수 없겠지. 그럼 누가 이것을 판단하지?
너와 생각이 사람으로 판단하게 하면 어떨까. 너와 생각이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판단하겠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으로 판단하게 하면 어떨까.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판단하겠어. 나와 너,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으로 판단하게 하면 어떨까. 우리와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판단하겠어. 우리와 생각이 같은 사람으로 판단하게 하면 어떨까. 우리와 생각이 같은데 어떻게 판단하겠어. 그러니 너와 나, 또 누구든 모두 알 수 없는 거야.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어?
하늘의 경계에 따르게 한다는 건 이런 말이야. 옳거나 옳지 않거나,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따진다고 해. 옳은 것이 정말 옳다면, 옳지 않은 것과 다른 것은 따로 말다툼하고 따질 게 없을 거야. 그런 것이 정말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른 것은 따로 말다툼하고 따질 게 없을 거야. 목소리 내어 서로 견주는 것은 서로 견주지 않은 것만 못하지. 하늘의 경계에 따르고 흐름에 맡겨두어. 이게 제대로 사는 길이지. 나이도 잊고, 도의도 잊으면 가 없는 세계로 나갈 수 있어. 그렇게 가 없는 세계에 살아보자구.
망량罔兩, 옅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어. "잘 걷다가 갑자기 멈추기도 하고, 잘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서기도 하고. 어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요?" 그림자가 말했지. "내가 기대고 있는 게 있어 그렇겠지? 내가 기대고 있는 것 역시 기대고 있는 게 있어서 그럴 테고. 내가 기대고 있는 건 뱀의 껍질이나 매미의 날개 같은 건가 봐. 그러니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어찌 알겠는가?"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던 적이 있어.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지. 맘껏 즐겁게 돌아다니며 자기가 장주인 줄 몰랐어. 문득 깨어나 보니 꾸벅꾸벅 조는 장주였다나.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모르겠네. 장주와 나비는 분명 다른데 말야. 이것을 사물의 변화라고 해.

PDF파일

220429 장자씨 헛소리도 잘 하시네 3강 제물론 원문 & 번역문.pdf
1718.5KB

강의안

강의안은 금요일 오후에 올라옵니다.

웹에서 읽기 (블로그 #1 / #2 / #3 / #4 / #5 / #6 )

웹에서 읽기 (펼치기)

PDF 파일

220429 장자씨 헛소리도 잘 하시네 3강.pdf
1955.8KB

강의영상

댓글

질문이나 의견을 남겨주세요. 강의 시간에 답변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