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아 문제는 동성애가 아니야.

결론부터 말하자. 동성애자들이 세상을 더럽히지 못하는 것처럼 당신들의 행위가 세상을 더 깨끗하게 만들지 못한다. 동성애가 어떻다고 안달인가? 지옥행 열차 티켓이라도 끊은 것처럼 그렇게도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일인가? 그 옛날 누군가는 ‘동성애 청정국가’라는 해괴한 조어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청정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어 안달인가?

예수의 말을 옮기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오 15:11) 예수는 당대 유대인들의 정결관념을 뒤엎는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도리어 말, 즉 사람의 행위가 사람을 더럽힌다.

동성애 논쟁을 볼 때마다 궁금하다. 저들이 더럽다고? 그래 당신 눈에 그렇게 보인다 치자. 그것이 대상에 대한 개인적 감각을 넘어서 과연 무슨 해악을 끼치는가?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을 갉아먹어 버리느냐 이 말이다. 동성애자가 곁에 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파괴하는가? 동성혼이 무엇을 망가뜨리는가?

주먹쥔 손에 돌과 칼을 들고 싶겠지.

‘모두들 허리에 칼을 차고 진지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형제든 친구든 이웃이든 닥치는 대로 찔러 죽여라.’(출 32:27)

모교에 붙은 대자보가 떼어졌다. 사실 예상한 일이다. SNS에서 대자보 붙인 사진을 보았을 때 ‘잘 붙어있길’이라는 식의 댓글을 달려다 말았다. 괜히 초치는 거 같아서. 그러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하긴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학’에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치열한 논쟁? 깊이 있는 성찰? 적절한 냉소?

아니, 저들은 논쟁이라는 것을 모른다. 귀를 막기 바쁘고 눈을 가리기 바쁘다. 주먹으로 입을 틀어 막고 싶겠지. 돌을 쥐었다면 돌을 던질 수도, 칼을 손에 쥐었다면 칼을 빼어들 수도 있다. 논쟁대신 침묵을, 성찰대신 폭력을! 저들의 뜨거운 믿음은 이렇게 말한다.

대자보를 때어난 가슴은 아마 충일한 것이다. 떳떳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 놓인 더러운 쓰레기 하나를 치웠다 생각하겠지. 그러나 청결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어찌 그토록 협소한지 의문이다. 저들은 교계 내의 성폭력에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유명 목회자의 성폭력에 대해서는?

개인의 가랑이 사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집착하면서 저들은 썩어가는 교회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저들에게는 사회가 없다. 책임과 의무가 교차하며 권력과 폭력이 오가는. 저들은 매끄러운 세계 속에서 단지 쾌감을 맛볼 뿐이다. 약자에게 돌을 던지는 그 쾌감.

 

믿음은 강하다 그러나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마테오 7:7)

믿음이란 무엇인가? 고백해야 할 목록들의 집합? 동성애는 죄악임을 믿습니다. 가정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아멘? 아니! 믿음이란 행위이며 실천이다. 무엇을 하는가가 그의 믿음을 증거한다. 문을 두드리는 자는 문이 열릴 것을 믿기에 두드린다. 그러나 두드림이 없다면 열릴까?

믿음은 문이 없는 곳에서 두드리는 손이다. 그의 두드림은 벽에 문을 만들어 내며, 허공에 길을 만들어 낸다. 하느님 나라에 길이 있다면 이렇게 끊임없이 두드리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일테다. 그러나 그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 두드리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벽에 문을 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 손에 자신의 피를 묻히기 보다 타인의 피를 묻히지 못해 안달이다. 저들에게는 믿음이 없다. 추종할 따름이다. 그것이 정의라 배웠기에 정의로운 주먹을 휘두른다. 하는 말을 들어보라. 어찌나 똑같은지. 죄다 똑같은 입을 가졌다.

저들의 똑같은 입은 나약한 영혼을 반증한다. 추종하는 강령이 없으면 쓰러질 나약한 영혼. 소수자에게 휘두르는 저들의 주먹질은 강자이고 싶은 욕망을 대변한다. 나는 정의롭다. 고로 나는 강하다. 그러나 너는 약자를 짓밟았다. 동성애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동성애가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혐오스럽다. 아니, 혐오할만하다고 하는 게 옳다.

 

너희는 불행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루가 6:25)

성서는 불행한 책이다. 왜? 손에 들리는 책이지 읽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로 시작하는 저들의 말을 보라. 대체 무엇을 읽었기에 저렇게 말한단 말인가? 아니, 도리어 읽지 않았기에 저렇게 확언할 수 있다. 저들에게 성서는 텍스트 – 고유한 결을 가진 세계가 아니다.

저들은 도무지 결을 매만질줄 모른다. 너무도 단순하여 예배당에 울리는 소리만을 반복할 뿐이다. 이번 사건의 가장 불행은 모교가 ‘신학적 입장’이라며 자랑스럽게 내놓았다는 데 있다. 신학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함부로 가져다 쓸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엔 신성도, 학문적 성찰도 없다. 부끄러움은 아는 자의 몫일 뿐.

기울어진 세계 속에서 예수는 과감하게 저울추를 옮겼던 인물이다. 그는 배불리 먹고 지내는 자들에게 불행을 선물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굶주린 자들에게, 집 없이 길을 떠도는 이들에게, 홀로 걷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 말했다.

저들은 불행하다. 하느님 나라를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을 마구 끌어내리고 있다. 저들은 자신의 웃음을 위해 남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칼은 예수가 주려했던 그 칼이 아니다. 예수의 칼은 이 세계의 헌 자루를 찢어내었다면 저들의 칼은 헌 것을 헌 것으로 머물게 할 뿐이다.

다시, 멍청아 문제는 동성애가 아니야.

모교의 사건은 동성애에 대한 해묵은 입장을 세상에 내보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 포장지를 보면 놀랍다. 저들은 앞잡이가 되지 못해 안달이다. 동성애 청정 동산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어하는 모습이 선하다.

일련의 사건을 보니 조금의 조바심이 묻어 있다. 그 조바심의 선물이 ‘동성애를 반대한 최초 대학’이라는 훈장이다. 그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긴 국사 교과서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맨 앞에 서서 국부 이승만을 찬양하지 않았나. 창조경제 이전에 창조과학을 이야기한 것은 탁월한 선견지명이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지도, 예수를 닮지도, 믿음을 낳지도 않지만 적어도 지혜롭다 칭찬할만하다. 저들은 회칠한 무덤에 솟은 십자가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잘 알고 있다. 적어도 ‘하나님의 대학’을 표방하는 이상 적절한 생존 전략이라 평가하자.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랑이 어째서 동성애를 디딤돌로 삼았는가는 다른 문제다. 동성애가 정말 중요해서? 저들의 걱정처럼 에이즈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가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극심하므로? 아니 내가 보기엔 돌을 던질만 하므로 그렇다. 저들의 돌팔매질은 그 무엇도 파괴하지 않는다. 적어도 저들의 세계에 속한 것은.

동성애가 죄악이기에 저토록 애정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가 소수자이므로 과감한 행보를 보일 수 있다. 죄악이라 이름 붙일만하므로 죄가 되었다. 따라서 저들이 걷는 길은 좁은 길이 아니다. 넓은 길. 누구나 쉽게 혐오 발언을 쏟아낼 수 있는, 가볍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그런 놀이터를 열어준 것이다.

거꾸로 이 사건은 누가 광야에 서 있는가를 보여 준다. 광야에 외치는 자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있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인가? 석청과 메뚜기인가? 아니. 홀로선 자, 길을 묻는 자의 발자국을 뒤좇아 섰다. 광야의 외침은 들을 귀 없는 자에게 외치는 소리이다. 그래서 떼어질 줄 알면서, 손가락질 받을 것을 알면서 다시 대자보를 붙이는 손은 ‘그’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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