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타래: 공자와 논어 세미나

‘공자와 논어 세미나 시즌 3 – 인간 공자를 찾아서’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책을 읽었고, 앞으로 어떤 책을 읽을 예정인지 한번 정리해본다. 작년 7월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6개월이 훌쩍 넘었구나. 계획에 따르면 앞으로 올해 내내 세미나를 진행해야 할 듯. 지금까지 읽은 책과 앞으로 읽을 책을 한번 정리해 보자.

 

시즌 1 – 포스트 경학 시대의 고전 읽기 (2011년 7월 11일 ~ 9월 26일)

본래는 그저 ‘고전집중 세미나’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애초에는 [논어]만 계속 팔 생각은 없었으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포스트 경학 시대의 고전 읽기’라는 제목은 이후에 붙인 것인데, 링크한 글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읽은 책 종류는 하나, 도올의 [논어 한글 역주] 그러나 분량이 분량인지라 3개월이나 걸렸다.

[논어 한글 역주], 김용옥, 통나무, 2008

시즌 1에는 번역서로 [논어]를 일독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다. 많은 [논어] 번역서 가운데 하필이면 도올의 책을 골랐느냐고. 실제로 도올의 책을 골랐다고 했을 때, 어떤 분은 도올 같은 사람의 책을 읽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도올과 같은 사기꾼, 혹은 깊이가 없는 사람의 책을 읽을 필요가 뭐냐는 질문이 숨어 있었다. (물론, 그러면서 남회근의 책은 어떠냐고 물어…)

도올에 대한 일반적인 지적, 너무 대중적이라거나 깊이가 없다는 등의 말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도올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대중적인 동시에 독특한 문체와 강한 주장을 숨기지 않는 학자이기도 하다. 한편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그가 성실하게 다양한 자료를 읽는 것은 물론 최근의 연구 성과까지 반영하려 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도올이라면 박학博學이 떠오른다. 심문審問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논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다른 번역서에서는 볼 수 없는 비평적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텍스트 비평이 성서의 그것을 빌려온 바람에 아직 정확히 체계화 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따라서 원전을 읽지 않는 이상 번역서 가운데 [논어]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가능한 책이 도올의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 책을 꼽았다.

 

시즌 2 – 공자와 그의 제자들 (2011년 10월 ~ 11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라는 제목도 나중에 붙인 제목이다. 본래는 기획 세미나로 진행할 생각이었지만 예상보다 사람이 너무 모이지 않아;; 결국 일반 세미나로 전환하게 되었다. 나름 고난의 행군이었다고나 할까? 근데 뭐, 그런게 어제 오늘 일인감? 내가 하는 세미나에 사람들이 많이 온 게 언제라고… ㅠ

세미나 형태가 달라진 만큼 목표도 수정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후 시즌 3에 읽을 텍스트가 본래는 여기에 함께 엮여 있었다. 일단은 공자와 제자들에 대해 언급한 1차 텍스트를 읽어보기로 했다. 그래보았자 얼마 되지 않는데, [춘추]나 공자와 제자들을 등장시킨 [장자]나 [묵자]를 읽을 것이 아니면 꼴랑 [사기]의 [공자세가], [중니제자열전]과 [공자가어]만 읽으면 된다. 이 중에 [공자가어]만 분량이 조금 되고 나머지는 단숨에 읽을 정도로 짧은 분량.

[사기세가], 김원중 역, 민음사 2010 /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 2007

 

사마천의 [사기]의 경우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보지는 못했으나 최근 번역본이 낫겠다 싶어 민음사판 김원중의 번역을 골랐다. 물론 이 두권의 무지막지한 책을 읽은건 아니고 [사기세가]에선 [공자세가]를 [사기열전]에선 [중니제자열전]을 뽑아 읽었다. 예문서원에서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을 묶어 책으로 내긴 했으나(링크) 그냥 [사기] 번역본에서 뽑아 읽었다. 뒤에 소개할 크릴은 사마천의 텍스트를 읽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으나, 어쩌겠는가 여기서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시작하는 걸.

[공자가어], 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2003

품절이다. 하는 수 없이 제본을 했다. [공자가어]를 검색해보면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3권짜리가 있기는 하다. 아마도 원문까지 포함하고 역주를 단 책인가 본데, 너무 비싸서(각 13,000원) 못보고 그냥 예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번역본으로 봤다. 보통 공자에 대해 공부할 경우 이 [공자가어]를 빼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유는 거의 명백한 위서기 때문이다. 워낙 많은 사람이 [공자가어]를 씹어 놓아서 읽지도 말아야할 텍스트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혹자는 이 [공자가어]의 일부가 [예기]보다 이전에, [공자세가]보다 이전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떤 근거인지는 모르나, [공자세가]와 비교해서 읽어보면 특히 앞부분에서 사마천이 이 [공자가어]를 참고했으리라 추측되는 면이 없지는 않다. 텍스트가 완성된 시기는 아마도 한대漢代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읽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대에 사람들이 이해한 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공자에 대한 이야기들의 근원이 이 텍스트인 경우가 많다.(예를 들어 공자가문 3대 이혼설)

덧: 나중에 이런 식으로 세미나를 기획한다면 아래 책들을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은 자료인데 이 책들을 읽었다면 더 흥미로운 세미나였을 듯. [신간소왕사기]는 한대 금문학파의 공자관을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고, [공자 성적도]는 공자의 삶을 그림책으로 구성한 책이다.

  

 

시즌 3 – 인간 공자를 찾아서 (2011년 12월 ~ 2012년 2월)

현재 진행중. 공자라는 인물을 다룬 연구서를 읽는 것이 목표다. 제목으로 잡은 것처럼 역사를 산 한 인간의 모습으로 공자를 만나보고자 했다. 그러니까 성인 공자가 아니라, 인간 공자를! 처음으로 읽은 책은 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 그 다음으로는 핑가레트의 [공자의 철학], 카이즈카 시게키의 [공자의 생애와 사상], 시라카와 시즈카의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를 일을 계획. 애초 계획은 그렇지 않았지만 어쩌다보니 서구 학자 둘, 일본 학자 둘을 읽게 되었다.

[공자, 인간과 신화], H.G. 크릴, 이성규 역, 지식산업사, 1997 

대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책. 공자에 대해 다룬 책 가운데 매우 뛰어난 역작이다. 공자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할 만큼 좋은 책이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그렇다고 녹녹한 책도 아니다. 공자의 다양한 면모를 여러 키워드로 분석했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아마도 교육가와 개혁가로서의 모습에 치중되어 있다. 교육-학문을 통한 개혁을 공자가 구상했고 그것이 이후 과거제로 정착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저자는 과거제야 말로 민주주의적 제도라고 평가한다. 엘리트이기는 하나 일반 백성들이 누구나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벼운 논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지만 저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있게 들린다.

아쉬운 점은 크릴의 다른 저작이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책들에 언급되는 것을 보니 크릴의 ‘Confucius and the Chinese Way’도 꽤 훌륭한 저작으로 보이는데… 번역하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 없다면, 내가… 응..?!

[공자의 철학:서양에서 바라본 예에 대한 새로운 이해], 허버트 핑가레트, 송영배 역, 서광사, 1991

이 책은 현재 구할 수 없다. 품절이라… 핑가레트는 예禮를 [논어]의 중심 주제로 보고, 이 ‘예’야 말로 공자가 주장한 인간됨-인仁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 주장한다. 책을 읽으며 핑가레트의 탁월한 통찰에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었던 ‘예’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해기 때문이었다. 누누히 이야기하지만 서구 학자라고 이른바 ‘동양철학’에 무식하다 생각하면 큰 코 닥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무식할지니!

철학, 그것도 언어 철학을 전공한 학자라 그런지 이해가 쉽지는 않다. 철학적 개념들을 경유해야 그의 논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런 식의 접근은 이 바닥에서는 낯선 방법이다. 주석을 경유하지 않고 [논어] 원문을 파고들며 분석하는 그의 방법은 흥미롭다. 그렇기에 역자 송영배가 언급했듯 그의 한계도 매우 분명한데, 역사적인 배경이나 당대의 구체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기에 평가하긴 이르나 미덕이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듯. 덧붙여 치밀하나 분량이 짧다는 것도 미덕이라면 미덕.(!?)

[공자의 생애와 사상], 카이즈카 시게키, 서광사, 1991년

이 책도 절판. 그러고보니 핑가레트의 책과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서광사는 뭐하나!? 이런 좋은 책을 더 찍어내지 않고… 버럭! 아직 읽지 않았으니 패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 시라카와 시즈카, 정원철 옮김, 한길사, 2004년

원제는 공자전孔子傳(1991). 간결한 제목은 본래 고수들만 붙일 수 있는 법이다. 일찍이 전목錢穆 선생도 동일한 제목의 책을 냈으니… 국내에 번역될 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는 긴 제목으로 바뀌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수가 없는데, 기존의 공자 해석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공자라는 인물을 분석하는 면이 매우 흥미로웠다.

텍스트로만 파고들던 이전의 연구방법과는 다르게 민속학적(맞나?)인 접근을 펼친다. 그의 다른 저서 [주술의 사상]에서 시라카와 시즈카가 가진 독특한 지반을 볼 수 있어보인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공자는 다 거짓인 게야?’라는 도발적인 질문이 들게 만든 책!!

덧: 공자의 삶을 다룬 책은 상당히 많다. [공자 최후의 20년]을 비롯해서 [공자 평전]이라는 제목의 책이 2권이나 있고, 게다가 김학주가 쓴 [공자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도 있다. 게다가 최근에 나온 강신주의 [관중과 공자]도 나름 참고해 볼만한 책

시즌 4 – [논어], 찢어보고 뒤집어 보기 (2011년 3월 ~ 2011년 6월??)

‘고증학자의 눈으로 본 [논어]‘라고 세미나 이름을 붙였다가 바꿨다. 뒤에 다산의 [논어고금주],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을 읽을 예정이니 다른 이름이 낫지 않을까 싶다. 물론 최술을 전면에 내새우자면 ‘고증학’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고증학에 대해 더 배워야 할 거 같은 의무감이…(그럴 여유는 아직 없다!!)

일단 시즌 4의 목표는 [논어]라는 텍스트 자체를 분석해보자는 것. 최근에 나온 리링의 [논어 세번 찟다]와 최술의 [수사고신록]과 [수사고신여록]이 주요 텍스트가 되겠다. 김영호의 논문집 [논어의 주석과 해석학]은 양념 정도. 텍스트가 더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 아는 바로는 [논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게 도와주는 책이 별로 없다. 게다가 이 정도를 소화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테니 이 정도로 만족. 부족한 부분은 논문으로 보충할 수는 있겠는데 [최술]에 관한 논문이 몇편 있는 상황이고, 내가 궁금해마지 않는 유보남의 [논어정의]에 관한 논문은… 못찾겠다 꾀꼬리!!

시즌 5 – 실학과 고학의 새로운 [논어] 이해 (2012년 7월? ~)

목표는 다산의 [논어고금주]와 오규소라이의 [논어징]을 읽는 것. 다산의 [논어고금주]의 경우 최근 2010년에 출간된 번역본의 경우 총 5권에 20만원이다!!(더구나 할인도 안 된다!! ㅠ) 어쩔 수 없이 도서관에서 가끔 들춰보기로 하고 예전에 여강출판사에서 나온 [여유당전서] 가운데 일부를 뽑아 제본하기로 하자.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일독했으나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그래서 아주 기대되는 중.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가 번역되었다면 좋겠지만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어디선가 번역한다는 소문을 들은 거 같은데… 구할 수만 있다면 잽사게 구해 봐야겠다. [논어고금주] 3권, [논어징] 3권, 총 6권을 읽는 것이니 6개월이 모자르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이렇게 1년이 가겠구나..

식겁! 집에 불이 났었어요~ ㅠㅠ

식구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들어왔습니다. 나무와 샘이는 종점 수다방에 그림책 읽기를 하러가구, 저는 꼬또리를 데리고 병원에 가러 집에 들어왔지요. 문을 여는 순간 뭔가 냄새가 나더군요. 뭘까… 싶었지만 일단 꼬또리 예방접종을 위해 빨리 집을 나섰습니다.

여차저차 진찰을 마치고 병원을 나오니, 오는 길에 눈이 폴폴 내리고 있더군요. 집에 오니 밖에 널어놓았던 빨래 거리들이 눈을 맞고 있었습니다. 꽁꽁 언 빨래를 뚝뚝 떼어 집에 들여놓고 보니 그 괴상한 냄새가 또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혹시나 작은 방에 넣어둔 귤 박스에서 귤이 썩어가는 냄새가 아닐까 생각했지요.(좀 전에 살펴보니 역시나 몇 개가 썩어가더군요. 귤은 빨랑 먹어야 합니다.ㅡㅡ;) 신발을 벗고 들어오니 혹시 전선이 타는 냄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나 냉장고 옆에 꽂아둔 요쿠르트 제조기 주변에서 강하게 냄새가 나더군요.

어이쿠나 안 되겠다 싶어 코드를 잡아 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찌잉- 퍼퍼벅 하더니(정말로 영화 효과음에 나오는 그런…) 콘센트에 불이 붙어버린 겁니다!!! 어머낫! 머릿속에 갑자기 지나가는 생각은 ‘어떻게 불을 끄지? 물을 끼얹어야 하나? 아냐! 전기인데 물을 쓰면 안 되지!’ … 불을 끌 생각을 하기 전에 차단기 부터 내리고 119에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발장 안에 위치한 차단기를 끄고 119에 전화하는데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ㅠㅠ 하긴 벽에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는데 차분히 생각한다는 게 쉬운일 인가요. 게다가 샘이가 핸드폰을 가지고 놀아서 비밀번호를 걸어놓은 탓에 몇번 틀리고 나서야 119에 전화했습니다.

다행히 전화하는 동안에 콘센트에 붙었던 불이 꺼졌어요. 그래도 기왕 부른 소방 대원들이 와서 보기를 기다려야겠다 싶었습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안에 연기가 자욱한 겁니다. 문을 열고 방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지요. 몰랐지만 검은 연기가 꽤 많이 나온데다 저도 연기를 꽤 마셨더라구요. 저녁 먹기 전까지 계속 기침을 해댔습니다.

10분 뒤 소방대원들이 도착했어요. 집으로 올라오는 길이 막히지만 않았더라도 더 빨리 왔겠지요. 얼마 안 되서 사이랜 소리가 들리긴 하더군요. 집에 처음 들어온 건, 완전 무장을 한 소방수 아저씨였습니다. 일단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는 큰 일이 아니니 둘러보시고 돌아가시더라구요. 좀 있다보니 공무원 복장을 하신 분들이 와서 자세한 상황을 체크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전기가 누전된 것이 아니라 코드가 낡아서 코드에 불이 붙었던 것이었어요. 집안 전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게 다행이지요.

마음을 가다듬고 집안을 정리하러보니 그을음이 엄청 많더군요. 플라스틱 코드가 타면서 꽤 많은 그을음을 날렸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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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비백산했었습니다. 이번 경험으로, 집에 작은 소화기라도 마련해두려구요. 막상 닥치니 어떻게 할 수 없더군요. (그 짧은 시간에도 혹시 불이 번지면 무엇부터 밖으로 내놓아야 하나 순서를 따지고 있었다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느라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고전을 공부하다보면 어떤 사태를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이야기하는데, 전 영 아닌가 봅니다. ㅠㅠ. 새해 벽두부터 액땜하는지…

덧: 코드를 뺄 때 코드 끝 부분을 잡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줄을 잡았기에 망정이지, 코드를 직접 잠았다면 큰일났을 거에요. 엉엉.

포…포기를 모르는 남자!!

아아앜… 나의 슬램덩크가!!!

[공자와 논어 세미나] 시즌3 – 인간 공자를 찾아서!

<당신이 알고 있는 공자는 어떤 모습??>

공자孔子, 그는 실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노나라에서 태어나 노나라에서 세상을 떠난 구체적인 삶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공자에 다양한 이미지를 덧씌웠습니다. 성인聖人으로, 위대한 스승(子)으로, 지위를 갖지 못했던 왕(素王)으로, 더 나아가 신으로까지  공자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공자만큼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람도 드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공자를 만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공자를 만나야 하는 것일까요? 일단은 공자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봅시다. 여러 연구서들을 통해 공자의 모습을 재구성해봅니다. 인간 공자, 그를 만나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 일시: 2011년 12월 1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 장소: 수유너머R
  • 세미나 회비: 15,000원 (세미나 회비를 내면 수유너머R의 다른 세미나에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문의: 기픈옹달 (O1O-7355-O57O / zziraci@gmail.com)
  • 공자와 논어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주저마시고 문을 두드려 주세요. 중간에도 언제든지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12월 1일 목요일 10시 30분, 첫 모임에는 [공자, 인간과 신화]를 4장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여름에는 도올의 [논어 한글 역주]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공자에 관한 중요한 1차 문헌들을 읽었습니다. [사기]에 실린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을 읽고, [공자가어]까지 읽었습니다. 물론 [춘추]나 [장자] 등 다른 문헌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시선이 미치기엔 힘이 부족한거 같고, 일단 방향을 틀어 공자에 대한 연구서들을 읽어갈 예정입니다.

그 첫번째 책으로 [공자, 인간과 신화](H.G. 크릴)을 읽습니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로 공자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교사로서, 학인으로서, 철학가로서, 개혁가로서 공자를 입체적으로 소개합니다. 공자라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오늘날에도 손꼽히는 역작입니다. 혹시 서양 사람이 썼다는 이유로 이 책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책으로 손꼽힙니다. 서양 학자라고 공자를 잘 모를 것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도리어 전통이라는 고정된 시각에 사로잡힌 우리보다 서구 학자가 더 균형잡힌 시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12월 중엔 이 책을 보고, 내년 1, 2월엔 [공자의 철학: 서양에서 바라본 예에 대한 새로운 이해](허버트 핑가레트, 제본 필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사라카와 시즈카)를 읽을 예정입니다. 시간이 좀 남으면 [공자 평전](안핑 친) 이나 [공자 최후의 20년](왕건문)을 읽고 영화 ‘공자’를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아마 이 정도면 공자라는 인물을 오늘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름 분명한 관점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최근에 나온 [관중과 공자](강신주)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이어서 내년 3월 부터는 다시 [논어]라는 주제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논어]를 읽을 것인가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최근에 나온 [논어, 세번 찢다](리링)를 비롯해서, [논어의 주석과 해석학](김영호)을 시작으로 청대 고증학자 최술의 [수사고신록]과 [수사고신여록]까지 읽는 것이 목표입니다. 최술의 저작은 청대 고증학의 눈으로 [논어]에 언급된 다양한 기록의 진위 여부를 다룬 책입니다.

내년 여름이나 가을 쯤에는 후대 논어 주석서 가운데 손꼽히는 다산의 [논어 고금주]와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을 읽어봅시다. 아마 이렇게 되면 2012년 한 해를 알차게 보낼 수 있겠지요. ^^ 이 정도면 [논어]라는 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겁니다. 휴~ 책을 뽑아 놓고 보니 앞으로 읽을 책이 눈앞에 선하군요.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게 흥미 진진한 공부가 될법 합니다. ㅎ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공자와 논어> 세미나

  • 시즌 1 – 고전으로 [논어]읽기: [논어한글역주](도올)
  • 시즌 2 – 공자와 그의 제자들: [공자세가], [중니제자열전], [공자가어]
  • 시즌 3 – 인간 공자를 찾아서: [공자 인간과 신화](크릴), [공자의 철학](핑가레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시라카와 시즈카)
  • 시즌 4 – 고증학의 눈으로 본 [논어]: [논어 세번 찢다](리링), [논어의 주석과 해석학](김영호), [수사고신록](최술), [수사고신여록](최술)
  • 시즌 5 – 실학과 고학의 새로운 이해: [논어 고금주](정약용), [논어징](오규 소라이)

등고자비登高自卑! 공부할 게 한 없이 높아 보인다고 주저마시고 함께 차근차근 나아가봅시다. 이래서 세미나라는 게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

잉여라서 미안합뉘다아~

* 25일 R토회 원고를 쓰는 중. 제목은 ‘쿨하지 못해 미안해’ 부제는 ’30대 잉여 – 인문학자의 생태적 조건에 대해’라고 붙여봤다. 일단 이전에 비슷한 제목의 글을 참고하며 쓰는 중인데, 좀 많이 다른 글이 될 거 같다. 한 부분을 써놓았으니 기왕 쓴거 블로그에 공개한다. 어차피 토론회에 공개하려고 쓰는 글이니. 근데, 생각보다 길어질거 같아 걱정이다. ㅠ

이렇게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잉여’로 칭한다. 오늘날 자신을 ‘잉여’로 분류하는 사람은 많다. 번듯한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른다. 이것은 포기, 항복, 깊은 절망감의 표현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해 있음을 깨달았다. …. 잉여들은 이상할 정도로 유쾌한데, 이 유쾌함은 사실 절망적인 반작용이다.

오늘날 ‘잉여’란 말은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해낸 ‘잉여 가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력을, 즉 일시적인 실업이 아니라 영원히 고용될 수 없는 이들을 의미한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53쪽.

사실 ‘쿨하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이 떠오른 것은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에 대한 강의안을 마련하면서였다. 사실 ‘돈-화폐’에 대해 별다른 공부를 한 적이 없는 나였지만, 수유너머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저자 고미숙을 잘 안다는 이유로 강의 주제를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부탁이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의 세미나인 ‘마중물 세미나’에서 온 것이었다. 고백컨대 얼마 전까지도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를 제대로 읽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언제건 꼭 읽어봐야지 하면서. 이런저런 상황에 이번 기회에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맞물려 강의요청을 덜컥 수락하고 말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것이 바로 꼬뮨-공동체가 가져야할 돈에 대한 태도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왜냐하면 어떤 불편함이 그 말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에 대한 지혜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그 텍스트 이외에 어떤 다른 말이 필요하랴 싶었다. ‘맞는 말이지요. 그렇게 살면 됩니다.’ 라는 말 이외에 더 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 먹었다. 중언부언하기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나를 돌아보건 데 일단 나는 ‘돈의 달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호모 코뮤니타스>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돈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나는 돈으로부터 자유하기는커녕 꽁꽁 매여 있는 상황이다. 한편 <호모 코뮤니타스>는 소비욕와 소유욕을 줄임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비법을 전수하고 있었지만 나의 고민은 소비와 소유보다는 노동과 생산의 측면에 있다. 즉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고 소유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어떤 노동으로 어떻게 벌어먹고 살지에 대해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자본-화폐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들어오는 흐름. 하나는 나가는 흐름. <호모 코뮤니타스>는 후자는 이야기하지만 전자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멋지게 ‘놀이처럼 돈 쓰기’, 이른바 ‘돈 놀이’하는 방법을 전수해주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한 소유의 욕망에 잡히지 않으면서 다른 관계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고민하라고 말한다. 교환이 아닌 증여를! 그러나 그때 구성되는 욕망의 조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 거지? 아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되는 대로 자신의 능력에 맞게! 그러나 ‘너의 노동은 필요 없어’라는 딱지를 받는 잉여세대에게는 턱 막히는 질문이다.

잉여세대. 도둑처럼 등장한 ‘잉여’라는 말은 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세대가 자신을 냉소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때 잉여란 쉽게 말해 남아도는 것을 가리킨다. 과거 잉여가 생산 후 남은 것을 의미했다면 현재의 잉여는 소비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나머지, 쓰레기, 군더더기 등과 동의어라는 말이다. ‘잉여’에 대한 바우만의 통찰은 잉여의 본질에 대해 잘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에 공감하는 자, 그대는 이미 잉여일지니!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 유용성과 필수불가결함의 기준을 설정하는 필요와 유용성이 무엇이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할 어떤 자명한 이유도 없고,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만한 어떤 뚜렷한 정당성도 없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마치 환불해 주지 않는 빈 플라스틱 병이나 일회용 주사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아무도 사지 않는 상품, 조립 라인에서 품질 검사관이 버리는 바람에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기준 미달 제품이나 불량품처럼 말이다. ‘잉여’는 ‘불합격품’, ‘불량품’, ‘폐기물’, ‘찌꺼기’ – 그리고 쓰레기 – 와 의미론상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실업자’, ‘노동예비군’의 목적지는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레기의 목적지는 쓰레기장, 쓰레기 더미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32쪽.

무엇이 잉여를 규정하는가. 그것은 버려졌다는 상실감이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우울과 불안감이다. 미래는 곧 걱정과 동의어이다. 제발 잉여에게 미래를 묻지 마라. 이 우울과 불안을 이겨내는 것은 꿈과 희망이 아니라 냉소와 자조이다. 꼰대들의 언어는 냉소와 자조를 퍼붓는 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뭘 몰라 그런다고. 그러나 이 냉소와 자조는 철저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직감적-동물적으로 느끼는 현재적 모순에 대해 신체적 –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망했어…’, ‘안 될꺼야’라는 그들의 말은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오히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예언하고 있다. 굳이 세계 경제 흐름이나, 증시 현황을 읽는 눈 따위가 없더라도. ‘그렇게 말하더라도 애인… 안 생겨요’라는 말은 어떤가. ‘3포 세대’라는 세련된 말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들은 이미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다.

부정의 언어는 잉여를 대표하는 주요 태도 가운데 하나다. 말끝마다 붙이는 ‘OTL, ㅎㄷㄷ’ 따위는 까마득한 현실의 벽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가 있다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것들이라고는 모두 찌질한 존재들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의 확인, 동류의식은 이들에게 묘한 쾌감을 가져다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그래서 비방과 놀림은 잉여들에게 가장 즐거운 일 가운데 하나다. 봐라 너도 나와 똑같은 존재라는 확인.

무엇이 잉여세대를 낳았을까? 2010년 경향신문의 진단에 따르면 ‘고용난민시대’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은 더 이상 초중등을 거쳐 대학까지 졸업한 ‘인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우만의 말처럼 그들이 없이도 기업은 잘만 돌아가며, 그들이 없다면 더 잘 돌아가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에게 연애는 물론이거니와 결혼, 육아는 사치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것들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미 이런 욕망 따위는 과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일단 그런 안락한 삶을 현실화할 공간조차 없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것은 회장 아들, 딸 정도는 되어야 꿈꿔볼 일이다. 열심히 모아 20-30대에 집을 마련했다는 부모세대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평생 모아도 집을 마련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일이다. 최근 유행하는 개콘 <사마귀 유치원>의 말을 들어보자. 선생님이 되어서 예쁜 집을 마련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어른이’들에게 들려주는 진학상담교사 일수꾼의 말은 이렇다.

‘여러분 선생님이 되어서 예쁜 내 집에 살고 싶다구요? 그거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이 선생님이 되려면 공부 쪼끔만 열심히 하면 되요. 여러분이 쪼끔만 열심히 해서 교대를 가면 되요. 교대를 가려면 어렵지 않아요~. 전교 10등 안에만 들면 되요. 그렇게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 바로 되는 것은 아니에요. 교대에서도 쪼끔만 공부를 해서 임용고시를 패스하면 되요. 그렇게 임용고시를 패스해서, 선생님이 되면 초봉이 140만원이에요. 그래서 내 집 장만 하는 거 어렵지 않아요~. 아무것도 안하고 숨만 쉬고 살았을 때는 89세에 내 집을 장만할 수 있어요. … 근데 아이도 낳고 싶지요? 몇 명 낳고 싶어요? (답: 2명이요) 아이 일 인당 양육비가 2억 4천씩 들기 때문에 아이들과 숨만 쉬고 살았을 때는 217세에 내 집을 장만할 수 있어요~.’

[개그 콘서트: 사마귀 유치원] 2011년 9월 25일 방영분.

웃음 포인트는 일단 ‘어렵지 않아요’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꿈의 직장이라는 국가 공무원 정교사가 되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라든 거다. 마찬가지로 내 집 장만이라는 꿈도 어렵지 않다. 숨만 쉬고 89년, 아이 둘을 가진다면 217년만 살면 되니까. 어렵지도 않은 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도전하고 내 집을 마련할 때까지 ‘무병장수’하는 것이야 말로 잉여세대의 미덕이다.

이 미덕조차, 이렇게 쉬운 취업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허락된 곳은 일단은 부모집이다. 부모집을 떠나고 싶다면? 걱정하지 마라. 안락한 고시원이 있으니. 요즘엔 원룸텔이라는 멋진 새 이름까지 얻었다. 잠자기에 최적화된, 몸을 뉘기에 적절한 공간이다. 살짝 불편한 것이 있다면 세로로 뉠 수 있지 가로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것뿐인가. 언제든 부시럭거리는 과자 봉지 소리로도, 삐걱거리는 침대 용수철의 신음으로도 옆방 사람과 정겨운 대화가 가능한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자, 그러니 쪼끔만 노력하도록 하자. 사정(?)이 이렇다보니 욕망이 싹틀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조차 배려 받지 못한 이들이 열패감(열등패배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모 코뮤니타스> 같은 책이 말해주는 비전秘傳에도 열패감이 가시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잉여라서 미안합뉘다아~’

고전 아카데미 8학기 [장자]

고전아카데미에서는 중요한 고전 텍스트를 원문으로 읽어갑니다. 2010년 <사서四書>를 읽었고 2011년 <근사록>과 <노자>,<주역>을 읽었습니다. 이어서 자유와 일탈의 사상가 ‘장자’를 만나볼 예정입니다. <장자>는 매우 매력적인 텍스트입니다. 마치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대붕처럼 호쾌한 사유를 <장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자> 가운데서도 ‘장자’의 목소리를 가장 온전히 담은 <내편>을 읽습니다. 흥미진진한 우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 멋진 문장들을 <장자> 속에서 발견해 봅시다. 한문 원문으로 장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신 분들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 한문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분을 위해 간단한 한문 문법부터 시작합니다. 낯설다고 두려워 말고 과감히 문을 두드려 주세요.
  • 교재: 원문 텍스트를 제본할 예정입니다.
  • 일시: 2011년 10월 11일 ~ 12월 20일(3개월) /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 5시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쿨하지 못해 미안해!!

* 2011년 9월 23일, ‘아름다운 구로 파랑새 공부방’ 교사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임.

하지만 난 쿨 하지 못해
너는 쿨해 넌 참 좋겠다 그래 참 좋겠다
나만 울어 너는 웃어 나는 울고 너는 웃어
정말 비겁하지 나 이렇게 비겁하지

No cool I’m sorry 쿨하지 못해 미안해
No cool I’m sorry 하지만 넌 넌 so so cool

- UV, 쿨하지 못해 미안해

0. 새벽 1시 30

새벽 1시 30분, 울산에서 바로 올라온 뒤에 집에서 글을 쓰고 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 기차를 타고 오전 강좌. 간단한 점심 식사 뒤 울산지역의 여러 활동들을 돌아봤다. 7시에 다시 강의. 10시 22분 KTX. 집에 돌아오니 1시 30분이다.

글을 쓰는 만큼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생각하는 만큼 글을 쓰는 걸까 모르겠다. 그러나 뭐라도 써야 뭐라도 이야기하기에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다. 단상, 메모. 혹은 주절거림이 될 듯.

그러나 그냥 써도 될 것을 시간까지 밝히며 ‘나 바쁜 사람이야’라거나 혹은 ‘마감이 나의 힘’이라며 자랑하는 건 뭘꼬. 그건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구질구질한 이야기. 전혀 쿨하지 못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1. 어떤 불편함

[호모 코뮤니타스]를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의 부탁을 받았을 때 글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프레시안에 실렸던 [호모 코뮤니타스]에 대한 서평. 어떻게 보면 서평이라기 보단 비난조에 가까운 글. 제목부터 문제적이다. [월세 1000만 원 내며 '가난뱅이'? '돈의 달인'이시네요!] 간단하게 그의 비판을 인용해보자.

몇몇 사람의 수다가 아니라 사회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면 조금 더 사회 계층 피라미드의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대안을 자유로이 선택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들보다 대안에 냉소하고 때론 대안을 증오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책의 좋은 얘기들은 불가능한 것의 상상이 아니라 가능한 사람들의 여유로 그치지 쉽다.

예를 들어, 책은 가족과 분리된 삶을 찬양하지만 사실 그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다. 마치 몇몇 대안 학교들이 ‘자기 아이들’을 공부도 잘 하고 놀기도 잘 놀고 예술적인 아이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욕망을 반영하듯이. 하지만 가족을 거북이등껍질처럼 이고 살아 온 사람들에겐 “부모의 가난은 자식한테는 차라리 축복”이라는 말처럼 불편한 말도 없다.

- 하승우 [월세 1000만 원 내며 '가난뱅이'? '돈의 달인'이시네요!]

한편 울산에서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원순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개인적으로 박원순에 대해 상당히 우려 섞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희망제작소의 무급인턴 문제가 나왔을 때 박원순의 반응이었다.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는데 구로(!) 지역구 의원인 박영선의 말에 대꾸하는 부분이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의 발언을 살펴보자.

사실 따지고 보면 비영리단체는 기본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곳입니다
제가 설립하고 운영해온 희망제작소, 아름다운가게 등은 착취의 왕국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일합니다.
그러나 차이는 모두가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소망과 뜻에 따라, 흔쾌히 자원봉사로서 일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과 재능, 돈을 기꺼이 좋은 일에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가게에서는 거의 매달 5천여명의 주부, 은퇴자, 청소년들이 돈한푼 받지 않고 자신의 노고와 땀방울을 받치고 있습니다

- 저에게 돌을 던지세요 (2011. 3. 18)

“아름다운 가게나 희망제작소에서 후원 받은 것은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부자들한테 후원을 받는 게 뭐가 나쁜가, 그럼 가난한 사람한테 받나.”

- 박원순 “나눔 실천 위해 재벌 후원받은 게 나쁜가?” (오마이 뉴스)

박원순의 말에 일일이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흔한 현실적 대답이 귓가에 울린다. 당신이 시민단체를 운영해봤냐는 둥. 그러나 여기에는 갑자기 휙 지나가버리는, 아주 가볍게 처리해버리는 무엇인가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박원순은 너무 쉽게 ‘착취’라는 말을 한다. 너무 쉽게 ‘가난한 사람한테 받나’는 말을 한다.

여기에는 무엇인가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다. 더 고민하고 성찰해야 하는 부분이 빠져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박원순이 돈의 출처 보다는 사용처에 대해 항변하기 때문이다.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 지에 대해서는 그는 매우 간단하게 이야기를 회피한다.

자본-화폐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들어오는 흐름, 다른 하나는 나가는 흐름. 박원순은 적어도 전자에 대해서는 예민하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하다. 자본-화폐를 어떻게 만들고 들일까에 대해서 그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현실적 조건이 가장 우선에 놓인다. 현실적 조건이 운동의 방법과 전술을 결정하는 것은 맞겠지만 거기에는 치밀하게 고려하지 못한 문제가 놓여있다. 바로 노동의 문제다.

 

2. 잉여라서 미안합뉘다아-

최근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주제가 있다. 바로 ‘잉여’ 이른바 잉여의 시대가 도래 했다. ‘잉여’란 쉽게 말해 남아도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과거 잉여가 생산 후 남은 것을 의미했다면 현재의 잉여는 소비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나머지, 쓰레기, 군더더기 등과 동의어라는 말이다.

이렇게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잉여’로 칭한다. 오늘날 자신을 ‘잉여’로 분류하는 사람은 많다. 번듯한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른다. 이것은 포기, 항복, 깊은 절망감의 표현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해 있음을 깨달았다. …. 잉여들은 이상할 정도로 유쾌한데, 이 유쾌함은 사실 절망적인 반작용이다.

오늘날 ‘잉여’란 말은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해낸 ‘잉여 가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력을, 즉 일시적인 실업이 아니라 영원히 고용될 수 없는 이들을 의미한다.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53쪽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 유용성과 필수불가결함의 기준을 설정하는 필요와 유용성이 무엇이든 말이다. 다른 사람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할 어떤 자명한 이유도 없고,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어떤 뚜렷한 정당성도 없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마치 환불해 주지 않는 빈 플라스틱 병이나 일회용 주사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아무도 사지 않는 상품, 조립 라인에서 품질 검사관이 버리는 바람에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기준 미달 제품이나 불량품처럼 말이다. ‘잉여’는 ‘불합격품’ ‘불량품’ ‘폐기물’ ‘찌꺼기’ – 그리고 쓰레기-와 의미론상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실업자’ ‘노동예비군’의 목적지는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레기의 목적지는 쓰레기장, 쓰레기 더미이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바우만

-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 17쪽

한 구절 한 구절 폐부를 찌른다. 세기말 잉여에게는 정당성이란 없다. 도리어 버려졌다는 깊은 상실감만 자리한다. 이 자리를 채우는 것이 바로 냉소와 자조이다. 그러나 이 냉소와 자조는 그저 자기 환멸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철저한 현실 인식, 혹은 직감적으로 – 동물적으로 느끼는 현실의 모순에 신체적 –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자, 이렇게 말하자. ‘망했어…’라고.

부정의 언어는 잉여들을 대표하는 주요 태도 가운데 하나이다. 말끝마다 붙이는 ‘OTL, ㅎㄷㄷ’ 따위는 까마득한 현실의 벽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이 있다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잡히는 존재들이라고는 모두 찌질한 존재들뿐이다.

무엇이 잉여세대를 낳았을까. 2010년 경향신문의 진단에 따르면 ‘고용난민시대’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그 진단은 다시 ‘3포 세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애, 결혼, 육아’를 포기하는 세대라는 말이다. 여기서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은 이미 사라졌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잉여 세대가 겪는 노동의 문제를 집중 탐구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해봐’라는 이해찬 세대의 구호가 어떤 노동을 낳았는지 그 현재적 모습을 탐구하고 있다. 현실은 참담하다. 함께 세미나를 하는 자칭, 타칭 잉여들은 책을 읽으며 좌절하고 위로받았다. 이것이 턱 없이 큰 문제라는 데 좌절하고, 나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위로받는다.

세미나에서(이 세미나의 이름은 최신 유행을 반영한 ‘나는 잉여다’이다!) 다음에 읽은 <자기 만의 방>역시 만만치 않게 참담하다. 집을 가질 수 없는 자들, 겨우 자기 몸을 뉘일 수 있는, 그것도 세로로만 뉠 수 있는, 좁디 좁은 방, 그러나 이제는 집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공간, 고시원에 대해 논하고 있다. 고시원에 들어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말, ‘절대 고시원에는 들어가지 마라’는 잠언을 반복하면서도 그곳만이 청년 세대가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만의 방’이라는데 쓴 웃음을 짓는다.

앞의 문제로 돌아가면 자본-화폐를 어떻게 얻는가. 노동의 문제를 질문해야 한다. 노동이 필요 없는 시대, ‘나는 할 수 있습니다!’를 외치며 자신의 쓸모를 세상에 알려야 하는 시대에 자아의 욕망은 싹틀 공간조차 배려 받지 못한다.

 

3. 소비적 주체에서 생산적 주체로

[호모 코뮤니타스]에서는 ‘돈’의 흐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다. 멋지게 ‘놀이처럼 돈 쓰기’, 이른바 ‘돈 놀이’. 또한 소유의 욕망에 잡히지 않으면서 다른 관계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고민하라고 말한다. 교환이 아닌 증여를! [호모 코뮤니타스]를 보면서 들었던 어떤 불편함은 거기에 자본-화폐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만 어떻게 그것을 생산할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고미숙의 자전적 이야기는 있으나 더 구체적인 방법들은 논의되지 않는다.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 거지? 되는 대로 자신의 능력에 맞게! 그러나 ‘너의 노동은 필요 없어’라는 딱지를 받는 잉여세대에게는 턱 막히는 질문이다.

프리랜서(이것을 유목적 삶이라 불러도 상관없다)는 늘 기근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평균, 쓸모 이상의 자본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더구나 책임이 크면 클수록 그 문제는 절박하게 다가온다.

2010년 1월. 아이가 태어나면서 식구가 세 식구로 늘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가 작다고 해서 작게 소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롯이 한 사람의 몫을 차지한다. 삶의 공간도, 물건도, 비용도.(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정확히 1/3이라는 말은 아니다.) 2010년 연구실에서 발표하는 한 글에 이렇게 썼다. 혼자 공부하며 사는 것은 쉬웠다고, 둘이 공부하며 사는 것도 그럭저럭 살만했다고. 그러나 혼자 벌어 셋이 사는 것은 쉽지 않다고.

나에게 닥친 문제는 결국 어떻게 최소한의 안정적인 생계를 마련하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결국 생각은 취업과 알바 전선에 뛰어드는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취업을 한다면 지금 하는 일을 모두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그나마 타협점인 알바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알바 시장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이미 사교육 시장은 강사들이 포화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나는 학력은 높지만 경력은 없는 아주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생각은 pc방과 편의점이라는 일반적으로 시급을 받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마저도 포기하게 되었다. 임금이 너무 낮아 알바를 하면서 공부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시급을 4,500원으로 잡고 월 90만원을 벌려면 200시간을 일해야 한다. 그러면 8시간씩 25일을 일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고액 과외 현장에 뛰어드는 것. 대치동 논술시장을 알아보았더니 그곳은 확실히 급여가 좋다. 주 4시간 강의에 월 60만원을 받으니. 시급이 자그마치 37,500원이다. 수업 2~3개만 맡으면 생계해결, 만사 OK. 그러나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대학 자체를, 대학 입시 경쟁을 비판하던 사람이 정확히 대학 입학을 위한, 그것도 소수 엘리트와 중산층 이상을 위한 노동을 한다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대답할 말을 찾고 싶었다. 최소한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격지심이었을까? 여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명언을 되뇌며 사교육 시장에 입성하기로 마음 먹었…. 으나 결국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국 찾은 방법은 연구실이라는 공간에서 되는 대로 강의를 열어서 삶을 구성해 보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동원해서 강좌를 열었다. 다행히 내가 속해있는 R에는 강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 나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왔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할 수 있는 만큼 강좌를 열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공간은 있고 사람은 부족하니.

이 과정을 돌며 얻은 교훈은 수비적 주체가 아니라 생산적 주체로서의 고민이다. 나는 무엇을 생산해야 하는걸까라는. 그리고 어떤 관계 속에서 자본을, 기초적인 유물적 토대를, 생계를 꾸려나갈 화폐를 마련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돈을 많이 벌려면 일을 많이 해야 하잖아? 너희는 일하는 것이 좋아?” 44만원 세대 혜완의 말이다. 물론 일하는 것은 싫다. 그러나 일해야 하는 것은, 수고로운 것은 당연한일 아닌가. ‘노동勞動’, 수고로움이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존재가 자기 재생산을 위한 필수 과정이 아닌가. 노동이 필요 없는 세상, 잉여를 낳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노동의 문제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에서 나의 필요를 보이는 일. 최소한 존엄성을 적게 다치면서.

 

4. 88만원과 117만원 사이

현 사회의 문제를 소비욕과 소유욕을 정의하는 순간 해결책은 자명하다 소비욕과 소유욕을 줄이면 된다. 자신의 욕망을 변이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하면 폭력적인 욕망의 억압으로 바뀔 수 있다.

제가 굶어죽을까 염려한 집사람이 인터넷에서 조사한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쌀은 800원어치 한 컵만 샀습니다. 그리고 마트에서 세일하는 쌀국수 1봉지 970원, 미트볼 한 봉지 970원, 참치캔 1개 970원에 샀습니다. 전부 합해 3,710원. 이정도면 세끼 식사용으로 충분합니다. 점심과 저녁은 밥에다 미트볼과 참치캔을 얹어서 먹었고 아침식사는 쌀국수로 가뿐하게 떼웠지요. 아참! 황도 970원짜리 한 캔을 사서 밤에 책 읽으면서 음미했습니다. 물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수돗물을 한 양재기 받아서 끓여 놓았지요. 이 정도면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지요.

나는 왜 단돈 6,300원으로 황제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밥 먹으라고 준 돈으로 사회기부도 하고 문화생활까지 즐겼을까? 물가에 대한 좋은 정보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저생계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분들이 저처럼 될 수 있을까요? 단 하루 체험으로 섣부른 결론 내리는 것은 옳지 않겠지요. 다만 최저생계비만 올리는 것으로 답이 안 나올 것 같습니다. 국가재정에도 한계가 있고요.

- 차명진 황제의 밥상

최저 생계비 하루나기에 참여한 차명진 의원이 쓴 수기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참치캔과 미트볼, 황도 통조림. 자, 이게 황제의 밥상이란다. 게다가 하루 최저 생계비 6300원 가운데 620원‘이나’ 남았단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인스턴트 식단으로 꾸려진 저 밥상을 과연 황제의 것으로 부를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는 그 남은 돈으로 1000원은 기부를 하고 600원은 조간신문을 사 문화 생활을 누리고, 거기에 20원까지 남았다며 자랑스러워한다.

문제는 이것이 하루의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6300원으로 하루는 물론 일주일을 살 수도 있다. 최소한의 밥과 간장 종지로 저칼로리 저염식단을 꾸밀 수도 있지 않나! (실재로 나의 어릴 적 밥상은 여러 번 이런 꼴이었다,) 게다가 TV에서 틀어주는 토요 명화로 여가를 즐기며 문화생활을 누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이 일상이라면?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한 달, 일 년, 평생이라면? 최소한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삶’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욕망을 상상할 수 있을까?

88만원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다. 그런데 117만원이라는 말은 들어보았는지. 혹은 143만원은? 117만원은 우리 가족, 그러니까 3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다. 최소한 이만큼은 있어야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한편 143만원은 4인 가족의 경우이다. 1인 가구는 53만원, 2인 가구는 90만원이다. 최저 생계비라는 말에 주목하자. 이 말은 이 비용이 위 숫자의 가족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이것은 이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라고 생각해도 좋다. 왜? 이 이하는 한국 사회에서 인정하는 삶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므로.

현실적인 가장이 되어, 노동하면서 가계의 소비를 줄이자는 이야기를 못하는 것은 바로 이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그것도,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한국 사회가 말하는 최소한의 삶 정도를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줄이라고 하는 것 옳은 이야기일까라는 고민.

최저 임금으로는 1시간을 일하더라도 밥 한 끼 사먹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밥 한 끼 양을 줄여서 두 끼로 쪼개 먹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최저 임금의 불합리성을 고발해야 하는 것일까.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게 요구할 것인가, 최저 생계비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에게 요구할 것인가. 우리 욕망의 문제는 현실의 박탈감 때문일까, 아니면 헛것을 좇는 허영심 때문인가.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상상해야 하는 것은 얼마만큼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 욕망의 쟁취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게 아닐까? 욕망은 오롯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욕망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특정한 역사적 배치 위에 놓여있다. 욕망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말이 아닐까?

 

4. 무상급식과 증여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부자들까지 무상으로 급식을 주는 것은 성경이 지향하는 ‘균등’ 사회와 나눔의 실천에 맞지 않습니다. 미국이 부자 감세를 철회하고 증세를 하듯 부자들은 더 내놓고 베풀어야 합니다.
- @OryunKim(김은호, 오륜교회 목사 트윗)

아침에 이 트윗 내용을 보고 무슨 이야기인지 한참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상 급식에는 반대하나 균등과 나눔은 주장하며 또한 부자 증세를 요구하는 것. 이것은 뭔가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을 이어다 붙인 것 마냥 어색한 조합이다. 보통 나눔과 균등을 주장한다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것이 옳지 않나? 부자 증세를 통한 세수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이 트윗이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국가가 주지 말 것, 공적인 통로를 통해 주지 말 것. 대신 부자들이 책임지고 개별적으로 지원할 것.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4.0 등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단다. 사회주의 마냥 국가가 나서서 보편적 복지를 마련할 필요가 없다고. 오히려 부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더 많이 베푸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나 여기에 간과하는 점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는 ‘주는 자 – 받는 자’라는 권력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적 통로를 통해 주지 않는다는 말은, 얼굴을 지운 채로 주는 자가 누구인지를 보이지 않게 하지 않고 준다는 것은 ‘자신이야 말로 주는 자’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받는 자에게 ‘너는 받는 자’라는 겸손의 태도를 요구한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교환의 원리이다. 여기서 베풂은 권력과 곧바로 교환된다.

추장의 능력은 많이 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하면 증여가 아닌 ‘권력을 위한 베풂’, 즉 또 다른 의미의 교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있다. ‘빼앗으려면 먼저 주라’는 교환의 논리가 바로 여기에 작동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교환은 받는 자를 끊임없이 소외시킨다. 받는 자는 받는 자일뿐이다. 그는 언제나 주는 자의 혜택 위에 자신의 위치를 찾을 분이다.

위에 언급한 박원순의 짧은 말에 이 교환의 논리가, 아니, 이 교환의 논리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언뜻 보인다면 과장일까? 그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후원하는 부자와 혜택받는 가난한 사람을 나누고 있다.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을 은근슬쩍 배제한다. ‘그럼 가난한 사람한테 받나.’라며. 내가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은 바로 여기다. 기업에서, 부자에게 돈을 받은 부분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후원을 받을 수 없다고 너무 쉽게 말한다는 점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언제나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확정해놓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한나라당은 부자에게는 무상급식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복지의 혜택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누어야 한다고 본다. 박원순의 말은 복지의 혜택이 아닌 복지의 자원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그 역시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눈다. 언뜻 보면 서로 다른 주장이지만 배면에 깔려있는 사고는 똑같다. 부자는 가진 게 많으므로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렇기에 받을 필요가 없다. 가난한 자는 가진 게 없으므로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그렇기에 받아야만 한다. 똑같이 부자와 가난한자를 나누어 접근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가치는 똑같은 것이다. ‘줌-받음’의 짝은 바로 ‘능력-무능력’과 일치한다.

증여의 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고-받음에 있지 않다. 이 주고-받음을 지우는 데 있다. 증여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오직 주는 것만 있다. 모두가 모두에게 줄 수 있다. 또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오직 받는 것만 있다. 역시 모두가 모두에게 받을 수 있다. 주고받는 대상을 나누지 않는 것, 권력과 소외를 만들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증여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주는 자가 없어야 우리는 순수하게 받음의 증여 고리를 이어갈 수 있다. 받는 자가 없어야 우리는 순수하게 줌의 증여 고리를 이어갈 수 있다.

누구도 주지 않고 누구도 받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회가 진정으로 평등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주고 누구나 받을 때, 우리는 그 사회가 진정으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정반대로 보이는 이 말은 같은 말이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는 말과, 주고 받으라는 말은.

북타래: [근사록] 번역서

일단 짤방부터… 왼쪽엔 하루 종일 문자 노동에 지친 나를 위한 나름의 선물! 오른쪽에 보이는 [근사록] 4종에 대해 간단한 리뷰를 써볼까 한다.

이렇게 [근사록]에 대한 책을 한꺼번에 모은 이유는 연구실에 가져다 놓았던 책을 이사 때문에 빼야하던 차에 일단 한동안 안볼 예정인 [근사록]이 일차로 걸렸다. 그러고보니 올해 [근사록]을 엄청 공부했잖아! 전문은 아니지만 약 80% [근사록]을 강독하기도 했고, 게다가 루니에서 [전습록]과 함께 강의하기도 했으니…

일단 [근사록]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면 남송 시대의 주희와 여조겸이 북송시대 4명의 학자의 글을 오은 책이다.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이 네 명의 글을 모았다. 송대 학술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이 얼마나 중요한 학자인지 알 것이다. 이들의 글을, 그것도 정수만 모았으니 [근사록]이 어느 정도 수준의 책인지 짐작할만 하다.

참, 주자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하는 필독서이기도 하다. [사서]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사서]는 중요하다. 허나 본문보다는 주석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 이 [근사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자-주희께서 [사서]로 가는 사다리라고 말씀하셨단 말씀, 그리고 [사서]는 [육경]으로 가는 사다리라고 했지 아마? 그러니까 [사서]를 읽기 전에 이 [근사록] 부터 읽으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사서]를 읽고 [근사록]을 읽는게 낫다. 왜냐구? 기본적으로 [사서]에 대한 기본지식이 있었던 과거 사람에게나 [근사록]이 [사서]보다 쉽지, 오늘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근사록]이 [사서]보다 더 어렵다.

어쨌든 일단 성리학이건, 주자학이건, 유학이건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근사록]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공부하는 사람은 꼭 독서목록에 올려두기를. 물론 이거 읽고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장재의 [정몽], 주돈이의 [통서]를 읽어보면 더 좋고… 근데, 내 경험으론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더라. (워낙 옛날에 읽어서 그런가?) 일단 [근사록]만 충실히 읽어도 성리학의 중요한 문건은 대충 섭렵한다 보아도 될 정도. 강조는 이 정도로 해두고 리뷰 시-자악!


일단은 교수신문에서 최고의 번역본으로 꼽힌 [근사록집해]. 엄밀히 말하면 이건 [근사록] 번역이 아니라 [근사록]에 주를 붙인 [근사록집해]의 번역본이다. [근사록]원문은 물론 주석까지 번역했다는 데서 높은 점수를 줄만한 책이다. 그런데 두 권이라는 부피에서 볼 수 있듯, 읽기엔 부담되는 게 사실이다. 여러번 [근사록]을 읽었지만 완독했다고 말하기엔 부끄럽게 다 읽지는 못했다. 필요할 때 주석을 참고하기에 보기에 좋은 책.

쓸데 없는 말을 덧붙이면, 주석을 단 사람이 ‘엽채’인지 ‘섭채’인지를 두고 여전히 말이 오고가고 있는 책.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나 서점 관련자의 말을 들으니 재고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니 공부할 사람은 사두도록 하자. 그런데… 책 값이… ㅠㅠ

 


찾아보면 명문당에서 나온 [신완역 근사록]이 두 권이 있다. 신기하게도 모두 2004년에 나온 책인데, 하나는 파란색, 성원경의 번역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김학주의 번역이다. 김학주 선생은 엄청난 양의 번역서를 내고 있는 학자이다. 뭐 거의 손 대지 않은 게 없다고 할 정도. 그런데 (이런말 하는 것이 좀 웃기나) 전공이 중문과이기 때문인지 번역에 있어서 사유의 독창적인 부분이 좀 부족하달까? 부정적인 의미에서 충실한 번역이라고 평가할만한 책들을 많이 내고 있다. 그나마 나름 장점을 이야기하면 문법적인 부분에 대한 내용을 꼭 넣는다는 점. 특히 [근사록]이 송대 책인 바람에 문법적으로 고문과 차이나는 부분이 많은데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다음으로는 이기동의 번역. 이기동은 한국에서 몇 안되는 고전 번역본을 많이 내는 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강설 시리즈로 유명하니.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별로 신뢰를 하지 않는 것이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도올을 깠기 때문. 민족주의적인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바람에 나에겐 별로. 비록 지금은 품절이나 그나마 이 책의 장점을 꼽자면, 원문이 없다는 점. 원문이 없는 번역본은 어쨌거나 읽힐 수 있는 번역을 추구하기 때문에 주목할만한 번역을 내놓곤한다. 한편 번역의 질을 차치하더라도 한문에 두려움이 있는 독자에게 매력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는 하다. 그래서 나도 청소년들과 [근사록]을 공부할 때 이 책을 참고하기도 했다. 단점이라면 쓸데 없이 해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는 점.

 


헉! 어느덧 마지막 책이다. 역시나 품절인 책이다. 2004년에 나왔는데 벌써 품절이라니. 나중에 [근사록]을 직접 강독하면서 원문과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본 결과 오역(?!)이 많다는 점을 알았다. 그래도 처음 [근사록]을 공부하면서 읽은 책이니 일단 간단히 소개 해둔다. 이범학은 역사학 전공인데 어째 이 책을 번역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중역티가 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기왕 언급한 김에 번역서가 아닌 다른 책을 하나 소개하도록 하자. 풀빛에서 나온 청소년을 위한 책. 워낙 척박한 [근사록] 바닥이라 번역서도 구하기 힘든데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니 반갑기만 하다. 그…러나. 구입해놓고는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다는… ^^;;;;

공서화 문장 정리

편장 및 풀이는 박성규의 [논어집주] 참고

5-8
孟武伯問 子路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맹무백이 공자에게 물었다. “자로는 어진 사람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가 재차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자로는 천승의 제후국의 병권을 맡길 만합니다.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습니다.” “염구는 어떻습니까?” “염구는 천 가구의 고을이나 백승(대부)의 가家에서 읍재를 시킬 수 있습니다.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습니다.” “공서화는 어떻습니까?” “공서화는 관복을 입고 조정에 서서 외교사절을 응대하게 할 만합니다.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습니다.”

6-4
子華使於齊 冉子爲其母請粟 子曰 與之釜 請益 曰 與之庾 冉子與之粟五秉 子曰 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 吾聞之也 君子周急 不繼富
자화가 제나라에 심부름을 가게 되자, 염유(염구)가 자화의 어머니를 위해 곡식을 주자고 청하였다. 공자가 “부(6말 4되)를 주어라” 하였다. 더 줄 것을 요청하자, “유(16말)을 주어라” 하였다. 그런데 염유가 곡식 5병(5×16섬)이나 주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자화가 제나라에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 나는 군자는 궁박한 이를 구제하지 부자를 불려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7-34
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公西華曰 正唯弟子不能學也
공자가 말하였다. “성과 인이라면, 내 어찌 자처하랴? 다만 그것을 추구함에 싫증내지 않고, 남에게 가르침에 나태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있다.” 공서화가 말하였다. “그 점을 저희가 배울 수 없습니다.”

11-22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公西華曰 由也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자로가 공자께 물었다. “(도리를) 들으면(깨달으면) 곧 행합니까?” “부모 형제가 계신데, 어찌 들으면 곧 행한단 말인가?” 염유가 공자께 물었다. “들으면 곧 행합니까?” “들으면 곧 행하라.” 이에 공서화가 공자께 물었다. “자로가 ‘들으면 곧 행합니까?’라고 묻자 ‘부모 형제가 계신다’고 대답하셨고, 염유가 ‘들으면 곧 행합니까?’라고 묻자, ‘들으면 곧 행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감히 그 까닭을 묻습니다.” “염유는 소극적이어서 분발시켰고, 자로는 압도적이어서 억제시켰다.”

11-26
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 子曰 以吾一日長乎爾 毋吾以也 居則曰 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 子路率爾而對曰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 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 夫子哂之 求 爾何如 對曰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 赤 爾何如 對曰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 點 爾何如 鼓瑟希 鏗爾 舍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 三子者出 曾晳後 曾晳 曰 夫三子者之言 何如 子曰 亦各言其志也已矣 曰 夫子何哂由也 曰 爲國以禮 其言不讓 是故哂之 唯求則非邦也與 安見方六七十 如五六十 而非邦也者 唯赤則非邦也與 宗廟會同 非諸侯而何 赤也爲之小 孰能爲之大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가 모시고 앉았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보다 나이가 조금 많을 뿐이다. 나를 어려워하지 마라.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들 말하는데, 만약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로가 경솔하게 대답하였다. “천승의 나라가 대국 사이에서 협박을 당하고, 군대의 침략을 받고, 기근으로 시달립니다. 제가 다스리면 삼 년 안에 백성이 용기를 가지며, 또 의로운 길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가 빙그레 웃었다. “염유, 너는 어떤가?” “사방 육칠십 리 또는 오육십 리의 나라를 제가 다스리면, 삼 년 안에 백성을 풍족하게 하겠습니다. 예악에 관련된 일은 군자에게 맡기겠습니다.” “공서화, 너는 어떤가?” “잘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배우고 싶습니다. 종묘의 일과 회동에서 의관을 차려입고, 작은 보필자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증점, 너는 어떤가?” 증점은 거문고를 멈추고, ‘둥’하고 퉁기더니, 거문고를 놓고 일어나 대답하였다. “세 사람의 선택과는 다릅니다.” “무슨 상관인가? 각기 자기 뜻을 말하는 것뿐이다.” “늦봄 봄옷을 갖춰 입고, 어른 대여섯과 아이들 예닐곱과 합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가 크게 탄식하고 말하였다. “나는 증점을 인정한다!” 세 사람이 나가고, 증석이 뒤에 남았다. 증석이 물었다. “저 세 사람의 말은 어떻습니까?” “각기 자기 뜻을 말했을 뿐이다.” “선생님은 왜 자로의 말에 웃으셨습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예로써 하는 것인데, 그 말에 겸양이 없었기 때문에 웃었다.” “염유가 말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 아닙니까?” “어찌 사방 육칠십리나 오륙십 리를 나라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공서화가 말한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 아닙니까?” “종묘의 회동의 일이 제후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공서화의 일을 작다고 하면, 누구의 일을 크다고 하겠는가?”

자유 문장 정리

편장 및 풀이는 박성규의 [논어집주] 참고

2-7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자유가 공자께 물었다. “효란 무엇입니까?” “요즘 말하는 효는 ‘봉양 잘함’일 뿐이다. 개나 말도 집 안에서 봉양을 받지 않는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개나 말과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4-26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자유가 말하였다. “임금을 섬기면서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고, 친구에게 자주 충고하면 소원해진다.”

6-14
子游爲武城宰 子曰 女得人焉爾乎 曰 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 未嘗至於偃之室也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되었다. 공자가 물었다. “그대는 인재를 얻었는가?”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갈 때는 샛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저의 집무실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11-2 / 11-3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공자가 말하였다. “나를 진, 채에서 따랐던 이들이 지금은 다 문하에 있지 않구나.”
德行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 言語 宰我子貢 政事 冉有季路 文學 子游子夏
덕행은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언어는 재아, 자공이, 정치는 염유, 자로가, 문학은 자유, 자하가 뛰어났다.

17-4
子之武城 聞弦歌之聲 父子莞爾而笑曰 割鷄 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 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者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
공자가 무성에 갔는데, 현악과 노랫소리가 들렸다. 공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닭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 자유가 대답하였다. “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인민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 하셨습니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

19-12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灑掃應對進退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 區以別矣 君子之道 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
자유가 말하였다. “자하의 제자들은 쇄소, 응대, 진퇴의 예절은 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말단이다. 근본이 없으니, 어찌할꼬?” 자하가 그 말을 듣고 말하였다. “아! 자유의 말은 지나치다. 군자의 도 중에 무엇을 우선 전하고 무엇을 나중으로 밀쳐 게을리 하랴? 초목에 비유하면, 종류로 구별이 있는 것과 같다. 군자의 도를 어찌 왜곡하겠는가? 시작도 있고 완성도 있는 분은 오직 성인이다.”

19-14
子游曰 喪 致乎哀而止
자유가 말하였다. “상례는 슬픔이 다한 데서 그친다.”

19-15
子游曰 吾友張也 爲難能也 然而未仁
자유가 말하였다. “내 친구 자장은 어려운 일은 잘한다. 그러나 어질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