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그 은밀한 권력의 기술

1. 천하통일天下統一

맹자는 중국 역사를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제대로 다스려진 평화로운 시대가 열린다면(一治) 이어서 다시 혼란스러운 시대(一亂)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역사란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교차는 현장입니다. 치세란 안정된 왕조가 등장하여 천하를 지배한 시대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난세란 천하가 이리저리 찢겨 다양한 나라가 등장해 서로 힘을 겨루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일치일란의 사이클 때문에 중국 역사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단순히 통일 왕조의 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일왕조와 통일왕조 사이의 혼란기에는 워낙 여러 나라가 등장한 바람에 이름을 다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역사를 두고 말하면 통일 신라의 몰락 이후 짧게 등장한 후삼국 시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뉜 나라가 셋이 아니라 열 몇 개가 되면 이제 외우기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이 시대를 하나로 묶어 부릅니다. 예를 들어 ‘위진남북조’라던가 ‘오호십육국’이라던가…

이 혼란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춘추전국시대도 저물 때가 되었습니다. 혼란기를 끝내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기에 춘추전국 말기에는 어떠한 형태로 통일될 것인가, 어떤 나라가 통일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역사는 서쪽에 위치한 진秦이라는 나라의 손을 들어줍니다. 서쪽에서 힘을 키우던 이 나라는 동쪽으로 전진하며 한 나라씩 지도에서 지워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천하를 통일합니다. 기원전 221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진나라의 통일에는 법가法家라는 사상가들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법가는 법法, 특히 문서화된 성문법成文法을 기준으로 강력한 통치 체제를 만들어 갑니다. 법이 현존하는 오늘날에는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법이 없던 나라도 있었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맞습니다. 법 없이도 나라는 잘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듯 ‘법 없이도 평화로운, 양심적인’ 사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법 없는’ 아직, 명문화된 법이 없는 사회였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문서화된 법조문이 없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이런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범죄나 사회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는 통치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과거 관리들은 형을 집행하는 권력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판결해주는 역할까지 떠맡았습니다. 한 사람의 판단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시스템이었던 것이지요. 한편 전통적인 관습도 중요한 원칙이었습니다. 관습에 따라 문제를 처리하는 것도 전통 사회에서는 흔한 방법이었습니다.

법가는 법으로 공과를 확실하게 평가했습니다. 공을 세운 자에게는 큰 상을 내렸으며 법을 어긴 자는 엄하게 처벌했습니다. 그 결과 국가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했으며, 공을 세우고자 하는 병사들 덕택에 전쟁에서도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법가의 도움으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던 진은 천하를 재패하고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진의 통일은 새로운 통일 왕조의 등장만을 의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라는 새로운 자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진의 통일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왕’, 혹은 ‘천자’라 불리던 통치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의 통치자는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며 지고至高의 존재를 자처했습니다. 여기서 황제는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진의 군주였던 영정嬴政은 스스로를 첫 번째 황제라는 뜻에서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진시황이 바로 그입니다. 보통 군주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후대 군주가 역사적 공과를 따져 선대의 군주를 부르는 호칭을 붙여줍니다. 이것을 시호라 부르지요. 그러나 진시황은 스스로 시호를 거부하고 그저 ‘첫 번째 황제’로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세운 제국이 자신을 시작으로 만세萬世토록 천하를 지배하리라는 기대감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그의 야망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 이세황제二世皇帝 이후 진은 멸망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 과인은 보잘것 없는 몸이지만 군대를 일으켜 포학한 반도들을 주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혼령이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섯 나라 왕이 모두 자신들의 죄를 승복하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제 (나의)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룬 공적에 걸맞지 않게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제왕의 칭호를 논의하라.”

“…신들이 삼가 박사들과 함께 의론하여 말하기를 ‘고대에는 천황天皇이 있고, 지황地皇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라고 했습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존칭을 올리나니, 황을 ‘태황’이라 하십시오. 명命을 ‘제制’라 하시고, 영令을 ‘조詔’라 하시며, 천자가 스스로를 부를 때는 ‘짐朕’이라 하십시오.”
진나라 왕이 말했다.
”‘태泰’자를 없애고 ‘황皇’자를 남겨둔 후 상고 시대의 ‘제帝’라는 호칭을 받아들여 ‘황제皇帝’라고 부를 것이다. 다른 것은 의논한 바대로 하라.”

…
”짐이 듣건대 태고 때에는 호號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 때에는 호가 있다가 죽으면 행적에 의거해 시호를 삼았다고 한다. 이와 같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논의하는 것이나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지금부터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노라. 짐은 시황제始皇帝라 부른다. 후세부터는 수를 세어 이세二世, 삼세三世에서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하도록 하라.”
- <사기본가>, 김원중 역, 민음사. 219~220쪽

<노자>를 이야기하는데 천하통일과 진시황에 대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노자>라는 책이 천하통일로 성립한 제국의 시대를 좌우로 기록된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노자>라는 책이 완성된 것은 진한교체기를 지나 한대漢代 초기로 추정합니다. 한편 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인간형, 황제라는 통치자와 <노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에서 말하는 도道란 이 지고의 존재의 통치술을 의미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노자>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가봅시다.

 

2.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과 노자老子

<노자>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시선을 통해 노자에 대해 알아봅시다. 사마천이 말하는 노자는 생각보다 복잡한 인물입니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禮’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 데 힘썼다. 오랫동안 주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락해 가는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가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 윤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은둔하려 하시니 저를 위해 억지로라도 글을 써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노자는 《도덕경》 상, 하편을 지어 ‘도道’와 ‘덕德’의 의미를 5000여 자로 말하고 떠나갔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여생을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노래자老萊子도 초나라 사람으로 책 열다섯권을 지어 도가의 쓰임을 말하였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또는 200여 살을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노자가 오래 살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도를 닦아 양생의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 어떤 사람은 담이 바로 노자라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아는 이가 없다. 노자는 숨어 사는 군자였다.
… (이하 생략)
- <사기열전>, 민음사 81~83쪽.

과연 노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어보아도 알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이름조차 몇 개가 튀어나옵니다. 맨 처음에는 이이李耳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노래자老萊子라는 이름을 듭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노자에 대해 당시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마천은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노자가 숨어사는 군자였기 때문이랍니다. 사마천은 공자가 노자에게 배웠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존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인물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노자에 대해 알 수 있는 믿을만한 정보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노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으려 합니다. 일단 역사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증명할만한 자료도 없을뿐더러, 설령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안다고 해서 <노자>라는 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연구를 일부 소개하면 역사적 인물로서의 노자는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춘추시대의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겹쳐서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적 인격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매우 설득력있는 주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텍스트 <노자>와 역사적 인물 노자를 쉽게 연결시키지만 이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노자>는 제목이 <노자>일뿐 역사적 인물로서의 노자와 연관지을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사마천의 글에서 볼 수 있듯, <노자>는 매우 짧은 책입니다. 약 5000여 자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짧은 책은 총 8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앞부분 37장을 <도경道經>, 뒷부분 34장을 <덕경德經>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각각 도道와 덕德이라는 개념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둘, 도경과 덕경을 합쳐, <도덕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노자>의 다른 이름이 바로 <도덕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 둘을 합쳐 <노자 도덕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도덕경>이라고 하지 않고 <노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도덕경>이라고 부를 정도로 ‘경전’의 지위에 오를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과겨의 경전이었던 텍스트들도 오늘날에는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잃었기 때문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논어>나 <맹자> 따위를 읽을 때, 그것은 경전이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지혜를 담고 있는 위대한 고전이기 때문에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상이 담겨 있다는 의미에서, 비록 그 실체를 알 수는 없으나 전통적인 호칭을 따라 <노자>라는 이름을 쓰기로 합니다.

<노자>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책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야겠습니다. <노자>에 얽힌 흥미로운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땅은 크고 넓습니다. 그런데 깊이도 깊나봅니다. 1993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무덤이 발견된 것인데, 그 무덤 속에는 죽간 책이 무더기로 들어 있었습니다. 무려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이 무덤에서 나온 문서 묶음을 학자들은 ‘곽점초간郭店楚簡’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곽점초간 가운데 <노자> 일부가 섞여 있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은 이 문서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노자>와 유사하기는 하나 적지 않은 부분이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노자>를 보는 관점도 많이 변할 수밖에 없었지요. 한편 한대漢代에 비단에 적힌 백서帛書 <노자>도 나왔습니다. 이 역시 오늘날의 모습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오늘날처럼 인쇄소에서 인쇄기를 돌려 같은 책을 찍어내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고대의 책들은 계속 모양이 변하면서 유통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체 처음에는 어떤 모양이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곽점초간과 마왕퇴 백서라는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 궁금증이 조금은 풀릴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오늘날과 똑같은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노자>의 본래 모습, 이전 모습을 복원하려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오늘날 통용되는 <노자>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3.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노자>는 ‘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바로 ‘도가도비상도’라는 말로 시작하지요. 이것을 풀이하면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앞서 강의에서 소개한 <장자>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이 이야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자>에서도 이야기했듯 도(진리, 이치 등등)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말할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기왕 시작했으니 <노자>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나머지 부분도 함께 살펴 봅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 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21쪽

<노자>역시 언어의 한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된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은 그 본래의 것에서 많은 부분을 덜어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말로 옮겼을 때의 실망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큼, 느낌만큼 표현하지 못하는 말이 원망스럽지 않던가요? 지금 <노자>역시 그 답답함의 여백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노자>에서 말하는 도란 이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도와 이름 이후에 등장하는 무(없음)과 유(있음)에 대해 주목해봅시다. 무는 세계 시작을. 유는 모든 만물을 아울러 부르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계는 무에서 유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그러나 이렇게 쉽게 말하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무’란 아무 것도 없는 ‘절대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유-있음’과 상대적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냥 ‘없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무엇이 없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빅뱅이전, 물질적인 우주가 구축되기 이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도리어 세계는 무에서 어느 순간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 있어왔던 것이며, 여기서 ‘무’란 늘 있는 그것의 근거가 되는, 시작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작’이라는 말이 직선적인 시간을 떠오르게 만들기에 문제가 된다면 ‘기틀’이나 ‘근본’, ‘바탕’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입니다. 결론만 말하면 이 세계에는 이 무와 유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개념적으로 보자면 이 무와 유, 없음과 있음을 아우르는 더 큰 개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노자>는 이 무와 유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을 일러 ‘현묘玄妙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현묘’는 원문으로 보면 ‘현玄’입니다. <장자>에서 설명했던 혼돈을 떠올리면 쉬울 것입니다. 본래 어둡다는 뜻의 이 ‘현’이란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과 생각이 닿지 않는 저 깊은, 혹은 멀리 있는 무엇. 그래서 그 모습을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없으며 단지 현묘하다, 아득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현묘함, 도道야 말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도’를 철학적인 의미로 풀이합니다. 진리에 대한 <노자>의 설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노자>의 ‘도’를 철학이 아닌 정치적인 의미에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이 ‘도’가 권력의 속성을, 앞서 이야기한 황제라는 지고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계는 다양한 이질적인 존재들이 모여 사는 공간입니다. 이 세계를 과거 사람들의 용어로 옮기면 ‘천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천하는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천하 밖의 세계도 있습니다. 천자의 지배가 닿지 않는 미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요. 과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일컬어 동이족東夷族, 동쪽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천자는 이 미개한 오랑캐들에 대해서도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직 다스림이 미치지 못했을 뿐, 그들도 천자의 통치권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존재들을 다 포괄하고 책임지는 천자-황제는 마치 ‘도’와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존재, 유有를 다스리는 것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무無까지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도’의 속성인 동시에 황제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백성은 언제나 황제의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명확하게 인식된다면 도가 아니듯, 황제 역시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이해될 수 없어야 합니다. 진시황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 ‘짐’이 ‘조짐兆朕’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태가 완벽하게 드러나기 이전을 뜻하는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권력을 가리키고자 했습니다.

황제, 절대권력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백성들, 국민들에게 통치자의 행동이 속속들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언제나 쉽게 알 수 없도록 감춰져야 합니다. 쉽게 알려지면 그것은 누구든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 황제는 백성들의 삶을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많이 알아야만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역사상 절대 권력을 지향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손쉽게 정보를 모으고자했습니다. 그것도 은밀하게.

 

3.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다

不出戶知天下 不闚牖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為而成

문 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문을 통하지 않고도 천도를 본다. 나간 것이 점점 멀어질수록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든다. 이런 이치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명철해지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65쪽.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보았는지요. 거기서는 절대 권력에 의해 통제된 세상을 보여줍니다. 안을 볼 수 없는 검고 커다란 차량이 있습니다. 빙빙 돌아가는 원형 접시를 탑재한 이 차량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대화를 검열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벽을 뚫고 이불 밑을 뚫고 엿듣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의 대화를 수집해야 누가 반동을 꾀하는지, 사람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TV나 매체를 통해서는 언제나 정부를 통해 통제된 정보만 전해질 뿐입니다. 권력이 어떻게 정보를 독점하며, 반대로 어떻게 정보를 조작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지요.

이런 것은 단지 상상 속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영화 ‘타인의 삶’은 공산정권이었던 동독의 한 비밀경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동독에서는 10만 명의 직원과 20만 명의 정보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 주인공인 비밀경찰은 집에 감청장치를 설치하고 이들의 삶을 일거수일투족까지 세세하게 기록합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요.

<노자>에서는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안다’고 말합니다. 과연 누가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 절대 권력을 손에 쥔 황제가 그럴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황제는 가만히 앉아서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편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멀리 나갈수록 아는 것이 점점 줄어듭니다. 여기서 멀리 나간다는 말은 황제의 자리에서 멀리 떠나 간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질수록 아는 것, 정보를 통제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은 점점 줄어든답니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아야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단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따로 무엇을 하지 않고서도 일을 이룰 수 있다(不為而成)고 합니다. 이 말에 주목해봅시다. 무엇을 하지 않고서도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 어떻게 행동 없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손에 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권력이란 한 사람의 능력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힘들을 모두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지요. 황제가 무서운 것은 그가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람을 찢어 죽일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편 매우 영리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만한 말재주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며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가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존재들, 그의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는 말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道常無為而無不為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통치자가 만일 그 이치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299쪽.

‘도 는 항상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를 원문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도상무위이무불위道常無爲而無不爲’ 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것도 없다. 이 역설에 주목해야 합니다. 도는 이 세상의 움직이는 근본 원인입니다. 그것은 모든 움직임의 중간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도 없이는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도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늘 ‘하지 않는 모양’(無爲)으로 우리에게 보입니다. 그렇다고 도에게 아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도리어 이 도란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앞에서 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진은 법을 사회 통치의 중요한 개념으로 삼은 뒤, 구체적인 법령으로 사회를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황제’입니다. 법 위에 있는 존재, 법 바깥에 있는 존재기 때문에 그는 역설적으로 법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법이 있기에 황제는 일일이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고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법에 얽매여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 법을 바꾸거나, 혹은 법의 예외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이 법을 두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려 하다가는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의 저편에 있으면서 만물이 스스로 돌아가도록(自化) 두어야 합니다.

 

4. 뺏고 싶으면 먼저 주라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強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強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不可以示人

장차 접고 싶으면 먼저 펴 주어야 한다. 장차 약화시키고 싶으면 먼저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장차 폐지하고 싶으면 먼저 잘 되게 해 주어야 한다. 장차 뺏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명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고기는 물을 떠나면 안 되고,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들을 교화하려 하면 안 된다.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293쪽.

<노자>는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번에 인용한 문장 역시 역설입니다.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해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답니다. 빼앗고 싶다면 먼저 줘야 한답니다. 그런가하면 무엇인가를 없애고 싶다면 먼저 잘 되게 해줘야 한답니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한편 그러면서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나중에 <주역>에서도 볼 수 있는, 모든 일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흐름의 중요한 특징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늘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너무 한쪽으로 힘을 강하게 주는 것은 도리어 반대 방향으로 힘을 강하게 주는 것과 같게 됩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배운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떠올리면 됩니다. 물리학에서도 하나의 힘이 한쪽으로 작동하면 그 반대로 그와 같은 크기의 힘이 작동합니다. 사람 사이의 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끔 하고자 한다면 그 반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지 않고 빼앗으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빼앗으려고만 한다면? 일단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아니면 위협이 될 만한 무엇이 필요하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빼앗았다고 합시다. 문제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문제가 될 소지가 많습니다.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한번은 괜찮을지 모르나 계속적으로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를 나랏일에 비유 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걷고 싶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걷기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무력이 강할수록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저항도 만만치 않게 강력하겠지요. 너무 폭력을 사용하면 자칫하다가는 군주의 자리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폭력으로, 강압으로 이루어놓은 평화는 오래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일단 주고 은근히 빼앗아야 합니다. <노자>에서는 이를 두고 미명微明, 미묘한 지혜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微, 드러나지 않도록,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빼앗을 수 있으며, 계속해서 빼앗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와 비슷한 예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 거대 통신사들이 등장했습니다. SK나 KT 등등. 그러나 이 통신사들이 이처럼 거대하게 성장한데는 기술의 발전이나 소비자들의 수요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핸드폰이 싸게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기계를 싸게 주고 그 동안 그 수십 배의 통신료를 오랫동안 천천히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꺼내가는 것이지요. 빼앗으려면 주라는 교훈을 잘 실현한 것입니다.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들은 ‘일단 주라’는 명령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작은 사은품에 혹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이 소비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일단 작은 것을 주어야 더 많이 소비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질문해야 합니다. 미명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엇인가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빼앗기는 것은 아닌지. 자본주의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은 ‘교환의 법칙’으로 돌아간다는 점입니다. 주는 것은 빼앗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교환은 결코 등가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주는 것만큼 빼앗는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기 위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권력이란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노자>가 말하는 은밀한 지혜, 즉 도道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자>식의 도를 우리 삶의 지혜로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천하를 지배했던 절대 권력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떠오릅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실질적인 정 치적 수장인 대통령이라던가, 아니면 입법부의 국회의원들. 한편 정말로 보이지 않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대기업 총수들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을 크게 지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쇼미더무비 1강 – <죽은 시인의 사회>, 지옥에서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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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 헬튼과 헬조선 사이

영화를 보며 ‘헬튼’이라는 말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학교를 조롱하며 내뱉는 저 말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지옥불반도’. 아마 2015년을 장식한 수 많은 말 가운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말일 것이다. 누군가는 2015년을 ‘헬조서니즘’의 탄생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하긴 신문과 잡지, 언론, 정치인의 입에까지 이 표현이 오르는 것을 보면 분명 이 말은 문제적 표현이다.

거꾸로 돌아보면, ‘지옥’이라는 표현이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된 표현 가운데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17살, 고등학교 나이 또래의 영화 주인공들이 경험한 현실은 입시라는 경쟁에서 비롯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전통’이라는 것도 결국엔 재학생 가운데 다수를 아이비리그 대학에 보냈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1989년에 제작된 이 오래된 영화를, 그것도 이국 청소년의 삶을 마치 우리 이야기처럼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대다수 사람이 이 지옥, 입시 지옥의 불길을 통과했고, 통과하고 있고, 통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 보면 배알이 꼴리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갈등, 압박, 폭력은 우리네 삶에서는 일상적인 게 아니던가. 영화에서 헬튼이라 조롱했던 그 지옥의 현실보다 더 깊고 어두운 곳에 우리가 처해있는 건 아니냐는 질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다닌다. 교정은 아름답고, 다방면에 걸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을 길러내기 위한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아무리 똑같이 입시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우리는 라틴어를 공부하지는 않는다. 대신 미적분을 공부한다고 하면 될까? 그렇다면 그 장면은 어떤가? 가죽 축구공을 차고, 조정을 배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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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저들이 모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식이라는 사실을 번뜩 깨닫게 된다. 언뜻 언급되는 아버지의 직업이란 이렇다. 의사, 변호사, 판사 등등. 아버지 덕분에, GM 소송을 처리했다는 그 아버지 덕분에 부잣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함께한 녹스를 보며 이질감을 느낀 건 바로 이런 까닭이다. 저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이런 문제가 살짝 언급된다. ‘누완다’라고 이름을 바꾼 찰리는 이들 가운데서도 잘사는 집 도령으로 꼽힌다.

따라서 영화를 보면서 저 정도의 학교에 다닌다면, 저런 교육을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저들은 헬튼이라며 자신들의 현실을 지옥에 빗대어 표현하지만, 거꾸로 저 말은 얼마나 낭만에 푹 적셔진 말이던가. 만약 영화 속에 들어가 주인공의 친구가 되었다면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니네가 지옥을 알아?!’

영화를 처음 보았던 약 20여 년 전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억압적인 학교, 그리고 그 속에서 저마다 꿈을 찾기 위해 갈등하는 이들의 삶에 동감하면서도 이들이 마냥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학교도 부럽고 선생도 부러웠다. 비단 키팅 같은 선생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저런 기품있는 교장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적어도 저들은 교실 안에서 쌍욕을 내뱉으며 함부로 몽둥이를 휘두르지는 않는다. 게다가 합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영화를 보면서 ‘진짜 지옥은 여기 있다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입시 지옥’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그건 ‘지옥’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 아닐까? 아니면 혹시 나이가 들어서 ‘입시’와는 거리가 먼, 학교와 영 동떨어진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궁금해서 ‘입시지옥’이라는 말과 ‘헬조선’을 각각 검색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훨씬 더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입시지옥’이라는 말도 간간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빈도가 덜하다. 고로 슬픈 현실은 이렇다. 바로 여기가 지옥이다! 나라 전체가 지옥인 지옥불반도에선, ‘입시지옥’은 이제 특별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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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나쁘게 ‘지옥’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말이 이미 사회적 용어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지옥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넘친다. 여기에는 다양한 문제가 섞여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 경제에 대한 위기감, 취업-결혼-육아로 이어지는 정상적 삶의 붕괴… 이런 현실에서 영화에서 말하는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좀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죽은 ‘시인의 ‘사회’

살다 보니 ‘영화 같다’는 말처럼 허망한 말이 없더라. 현실을 뛰어넘는 때로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두고 영화 같다고 하는데, 사실은 현실이 영화를 압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영화는 현실을 확장하기보다는 현실의 일부, 한 토막을 겨우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현실의 한 토막을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도 사유해야 할 부분이 있을 테니. <죽은 시인의 사회> 역시 마찬가지. 저렇게 낭만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며 발로 차버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전달되는 몇 가지 주제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란 잘못된 번역이다. 원제는 ‘Dead Poets Society’ 이를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Society’는 ‘사회’라고 옮기기보다는 ‘모임’ 정도로 옮겨야 옳다. 즉 이들의 굴속에서 가진 모임의 이름이 ‘Dead Poets’였다는 것. 그러나 워낙 널리 알려진 제목이고, 뭔가 멋진 구석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이른바 ‘초월번역’.

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모임’,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동아리’라는 데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옥이라며 조소한다. 그러던 그들의 삶이 바뀐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키팅 선생의 존재도 매우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또래들의 모임, 비밀 결사와 같던 그 모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던. 그 작은 동굴 속의 모임.

돌아보면 어렸을 적 이 영화를 보며 셋의 부재가 아쉬웠다. 시, 친구, 선생. 돌아보면 영화처럼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조금씩은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 문학 선생. 그의 수업을 통해 만나는 작품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재미있었다. 책을 읽는 친구. 함께 서점을 다니며 같이 읽을 책을 고르기도 했다. 같이 시집을 읽어보자며 뜻을 모아보기도 했다. 부족한 안목에 그나마 고른 시집이라는 게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집이었지만. 김소월의 시집은 다 읽었던 것 같은데 한용운의 시는 다 읽지도 못하고 던져두고 말았다.

영화를 보며 다시 생각하는 것인데 학창시절 저들과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더 깊이 시를 읽을 수 있었을 테다. 그 영향 때문일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문예반에서 시를 지어보겠다고 바둥거렸는데 거기서도 함께 시를 읽고 이야기할 손꼽을 정도였다. 결국 다 채우지도 못한 내 습작노트는 나만의 부끄러운 기억이 되고 말았다.

‘카르페 디엠! : 현재를 즐겨라!!’ 그런데 어떻게? 여러 길이 있겠지만 개별적 차원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즐김’이란 개인적 차원에 그치는 것은 아닐 테다. 인간이란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人間)에 있는 존재여서 자신을 그 사이의 틈에서 확장시켜 나가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수다스럽다. 그것을 전염시키고, 전달하고, 표현하고 싶기에. 그렇기에 그 욕망을 풀어내는 공간은 갈등이 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른 욕망들 꺼내놓고자 하기에. 그것도 더 많이.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출발점 필요하다. 이들의 모임이 단순히 ‘친목 모임’이 아니었다는 데 주목하자. 이들은 시를 읽었다. 시, 넓게 말하면 문학이야 말로 이들의 유대를 지탱해주는 튼튼한 버팀목 이었다. 영화에서 ‘시’는 분명 이들을 엮어주는 매우 훌륭한 재료였다.키팅 선생이 시를 매개로 학생들과 만났고, 학생들은 시를 통해 우정을 쌓았듯이.

영화의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을 이야기해보자.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학교를 떠나며 키팅은 자신의 물건을 찾기 위해 교실에 들린다. 마침 영문학 수업시간이었다. 키팅의 자리를 대신한 교장은 교과서를 처음부터 다시 나가려고 한다. 반복되는 질문, ‘시란 무엇인가?’ 영화에서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대체 시란 무엇인가?

시詩… 참으로 먼 이야기이다. 시란 따분하고 재미없고 심심하며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채기 힘든 아리소한 말의 묶음 아닌가? 게다가 외워야 할 것은 어찌나 많은가? 심상이며, 은유니 환유니 하는 말들에, 음보, 운율, 형식 등등. 궁극적으로 수능 공부를 위해 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네 현실을 생각하면 시는 결코 정복하기 쉽지 않은 대상이다. 시 문제만 나오면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기에 고전시가가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거꾸로 키팅이 쓰레기라며 서문을 찢어버리라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시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시는 수학이 아니다. 시의 가치를 그래프로 그려서 점수를 매길 수 없다는 키팅의 말을 기억하자. 시는 죽지 않는 말들의 보물 창고다. 그렇기에 ‘죽은 시인’이란 어쩌면 모순적 표현일 수 있다. 시인의 삶은 무덤으로 들어가겠지만 그의 말들은 늘 살아서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 넘치기 때문이다. 시란, 문학이란, 글이란, 책이란 그렇게 죽음을 건너오는 목소리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삶을 즐겨라’, 어떻게? 삶을 즐기려면 죽음과 싸워야 한다. 살아있어야 즐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거꾸로 어떻게 죽음과 대면하여 저항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죽지 않는 말로 가능하다. 죽지 않는 말, 죽음을 건너온 말, 죽음에도 무뎌지지 않는 말을 담아보라. 그 말들의 생명이 곧 우리의 생生이 될테니.​ 이것이 죽음과 맞닿은 지옥에서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사기史記》 불후의 문장, 불굴의 삶 1강: 대체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6

하나를 내주고 둘을 취할 것

전국戰國, 말 그대로 각국이 서로의 세력을 다투며 전쟁을 벌이는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 각국의 목표는 강력한 힘으로 상대 국가를 제압하는 것. 오늘날이야 군대의 질과 양으로 승부가 나겠지만 당대에는 전략과 전술이 보다 중요했다. 때문에 훗날 병법가兵法家라 불리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孫武였다.

그러나 병법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일원화된 통제 시스템이라 하겠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일된 움직임으로 전장에서 구현해내지 않으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과는 다른 형식의 관계, 윤리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손무와 오왕 합려의 이야기는 어떻게 군대가 탄생하는가를 보여준다. 기초적인 명령에 따라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군대의 출발이다.

손무는 합려의 요청에 따라 궁녀들을 모아놓고 기본적인 훈련을 시킨다. 문제는 이들이 손무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까르르 웃을 뿐이라는 데 있다. 이에 손무의 말. ‘約束不明 申令不熟 將之罪也’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려 숙지하게 하고는 다시 시도를 하나 이번엔 더 크게 웃을 뿐이다. 이때 손무의 날카로운 말이 날아든다. ‘約束不明 申令不熟 將之罪也 既已明而不如法者 吏士之罪也’ 흥미롭게도 여기서 하나의 전환을 발견할 수 있다. 약속이 반복되어 명확해지고 익숙해지면 법法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법칙. 법에는 형벌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점.

이에 손무는 좌우 대장으로 삼은 합려의 애첩을 배려한다. 합려가 크게 놀라 이를 막으려 하는데도 손무는 거침없다. ‘臣既已受命為將 將在軍 君命有所不受’ 장군으로 군주의 명을 받은 이상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명을 받을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것. 결국 두 애첩의 목을 베어버리고 만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군령, 법의 두려움을 안 이상 이를 따를 수 밖에. 婦人左右前後跪起皆中規矩繩墨 無敢出聲.

법法과 예禮는 예로부터 대립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다. 예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전통에 의거하여 특히 상하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반해, 법은 전통을 단절하고 상하의 관계로 규정되는 권위에 도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법가로 부터 개혁적 정신을 찾으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중에 전통을 상징하는 군주의 권력에 턱밑까지 도전하는 법가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손자-손무’는 병가의 특징을 설명하는 역할로 등장했다면 이 <열전>에서 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인물은 바로 손빈孫臏이다. 손무와 손빈은 모두 같은 집안 사람이나 그들의 이름은 각기 특정한 의미를 상징한다. 손무가 이름 그대로 무武, 전쟁의 화신이라면, 빈臏은 형벌의 일종의로 무릎뼈를 제거해 버린 것을 가리킨다. 손빈이라는 이름은 그 형벌로 걷지 못하게 된 상태를 이야기한다.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가 워낙 빼어난 능력을 가졌던 까닭에 다른 사람을 시기를 샀기 때문이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방연龐涓이었다. 그는 손빈에게 죄를 씌워 무릎뼈를 빼내는 형벌을 받게하고 얼굴에 죄형을 새기는 ‘경黥’형을 받게 만든다. 불굴의 몸이 된 그는 이웃 제나라에가 몸을 의탁한다. 그를 받아준 것은 제나라의 장수 전기田忌였다. 그는 이후 전기의 모사가되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손빈이 전기의 마음을 사게 만든 마차경주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그는 세 마리 말로 치러지는 이 경주에서 서로가 비슷한 능력의 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았다. 각 셋이 상중하로 능력이 나뉜다는 점을 알고는 이렇게 말한다. ‘今以君之下駟與彼上駟 取君上駟與彼中駟 取君中駟與彼下駟’ 결국 전기는 이 마차 내기에서 큰 돈을 번다. 당연한듯 보이는 손빈의 계책에 숨어 있는 지혜란 하나를 주고 둘을 얻으라는 것이다. 하나를 내주어 상대의 주의를 끌고 그 틈에 헛점을 노리는 법!

그의 이런 병법은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위나라의 군대가 제나라를 업신여기는 형세를 이용하여 이를 뒤집는다. 매일 병사의 수가 줄어든 것처럼 상대를 속이고 이 틈에 위나라 군대를 협곡으로 이끌어낸다. 바로 그 유명한 마릉 전투가 이것이다. 그는 양쪽에 군사를 매복해놓고는 중앙의 커다란 나무에 껍질을 벗겨놓고 이렇게 쓴다. ‘龐涓死于此樹之下’ 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을 것이다. 군자를 이끌고 앞장서 마릉의 협곡으로 들어온 방연은 커다란 나무에 무엇인가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횃불을 밝혀 이를 확인한다. 이를 대비한 손빈의 말. ‘暮見火舉而俱發’ 밤에 불빛을 보면 일제히 쏘라!

‘龐涓果夜至斫木下 見白書 乃鉆火燭之 讀其書未畢 齊軍萬弩俱發 魏軍大亂相失 龐涓自知智窮兵敗 乃自剄 曰 遂成豎子之名’ 방연이 자결하며 한 말로 손빈의 복수에 마침표가 찍힌다. ‘遂成豎子之名’ 손빈은 상대의 헛점을 노리는 병법으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뿐이었다면 손빈은 단순히 빼어난 병법으로만 기억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극적인 장면을 마지막에 삽입함으로써 제나라와 위나라의 전쟁을 손빈의 복수로 화려하게 매듭짓는다.

이어서 소개되는 또다른 병법가 오기 역시 손빈과 비슷하다. 오기는 어쩌면 손빈보다 훨씬 잔혹한 인물이다. 노나라에서 자신의 처가 제나라 출신이라는 점으로 의심을 받자 자신의 아내를 죽일 정도였다. 그뿐인가. 그는 장군으로 병사의 고름을 빨아주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 속에 숨어있는 비밀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장군이 병사의 고름을 빨아주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는 고름을 빨아줌으로 병사의 목숨을 샀다. 단순히 빼앗으려 하면 적게얻지만 조금 주면 큰 것을 얻는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그의 어머지는 크게 슬퍼하며 울 수밖에 없었다.

‘非然也 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 遂死於敵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 손무, 손빈, 오기로 이어지는 병법의 전환! 약속의 반복으로 법을 만들고 형벌로 그 법을 시행케 한다. 그러나 이는 하수의 법, 시작할 때의 방법이다. 손무와 오기는 이제 병사의 목을 베지 않고도 상대의 목숨을 사는 법을 깨우쳤다. 주어라! 그러면 상대가 더 큰 것을 내어줄 것이니.

앞서 언급했 듯 법가/병법가는 군주의 권력을 때로 위협하기도 했다. 군주의 자리야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권력은 이들을 결코 곱게보지 않았다. 오기도 초나라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으나 그를 시기했던 이들도 그만큼 많았다. 及悼王死 宗室大臣作亂而攻吳起 吳起走之王尸而伏之 擊起之徒因射刺吳起 并中悼王 悼王既葬 太子立 乃使令尹盡誅射吳起而并中王尸者 坐射起而夷宗死者七十餘家

여기 죽음을 앞두고 날카로운 복수의 칼날을 번뜩인 인물이 있다. 오기는 절체절명의 순간 도왕의 시신에 엎드림으로 자신의 복수를 예비한다. 자신을 쏘아죽인 이들은 언제가 이 활로 멸할 것이다! 그의 예견처럼 그를 쏘아죽인 이들은 선왕의 시신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커다란 재앙을 맞는다. 어쩌면 오기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목숨으로 무엇을 얻을지 계산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목숨을 내놓는 대신 70여가 종실과 대신들의 목숨을 가져가리라!

<사기열전>을 읽으며 놀라는 것은 그가 단순히 역사의 인물을 시대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흐름에서 어떤 삶의 특정한 면을 조망하기 때문이다. 손빈이 방연의 목숨을 빼앗는 순간 벌어진 그 세세한 묘사를 보라. 과연 그 이야기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사마천은 <사기>를 쓰기 위해 다양한 고대의 문헌을 참고했으며 직접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했다. 그러나 이를 저런 간결한 문장으로 완성한 것은 오직 사마천 한 사람의 공일 것이다.

대체 사마천은 왜 이 부분에 주목한 것일까? 복수! 그것은 아마도 한 사람의 삶이 찬란하게 빛나고 가장 주목되는 장면이 거기에 얽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결코 전장에서 벌어지는 각국의 거대한 싸움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 거대한 전쟁 속에도 인물들의 욕망이 넘실대고 있다. 그 넘실대는 욕망의 한 자락에 언뜻 보이는 생의 날카로움.

《사기史記》 불후의 문장, 불굴의 삶 1강: 대체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5

나는 그의 마부라도 되고 싶다.

관중과 함께 소개되는 안영 역시 제나라의 이름난 재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시대는 관중의 시대와 사뭇 크게 달랐다. 안영은 제영공, 장공, 경공의 삼대 동안 재상으로 있었는데 당시 제나라는 쇠락의 길을 겪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제장공이다.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최저라는 인물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최저는 당공棠公이라는 인물이 죽자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그런데 장공이 그만 그녀에게 빠져버렸다. 어찌나 푹 빠졌는지 최저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최저의 갓을 다른 사람에게 줄 정도였다. 다음은 <세가>에 실린 장공의 마지막 날 모습이다.

을해일에 장공이 최저에 가서 문병하고는 최저의 아내를 찾았다. 최저의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 최저와 함께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공은 기둥을 안고 노래했다. 환관 가거가 장공을 수행하는 관원들을 대문 밖으로 막고 들어와 대문을 잠그니 최저의 부하들이 무기를 들고 안에서 나왔다. 장공이 대 위로 올라가 포위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천지신명에도 맹세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 주지 않았다. 이에 종묘에서 자살하겠다고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 장공이 담을 넘으려고 하자 화살이 허벅지에 꽂혔다. 장공이 거꾸로 떨어져 내려오자 죽여 버렸다. 
… 안영은 들어가서 장공의 시신을 베개 삼아 곡을 한 다음 예에 따라 세번 뛰더니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최저에게 말했다.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최저가 말했다.
“백성들이 받드는 자이니, 그를 내버려 두면 민심을 얻을 수 있다.” 
- <사기세가>, 98쪽.

<사기열전>이 <백이열전>에서 시작하며 사마천이 이를 통해 난세라는 배경에 주목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난세란 무엇인가? 말을 그대로 옮기면 ‘어지러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나, 무엇이 그 어지러움을 낳았는가가 중요하다. 기존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기존의 가치도 방향을 잃어버린 세상. 본디 주나라의 체제에서는 중앙의 천자와 주변의 제후국 간에 상하 관계가 명확했다. 그러나 주 왕실의 몰락으로 그 관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그러한 현상은 제후국 내부에서도 빈번히 일어났는데 바로 제나라의 대부인 최저가 임금인 장공을 시해한 사건이 그렇다.

시해弑害란 아랫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윗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齊太史書曰 崔杼弒莊公 崔杼殺之 其弟復書 崔杼復殺之 少弟復書 崔杼乃捨之’ 태사는 역사 기록을 관장한 인물이었는데 이들은 이렇게 적었다.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 이를 보고 최저가 죽였으나 그의 동생이, 또 죽였으나 다시 그 동생이 똑같이 기록하자 멈추고 말았다. 과거의 실상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실록實錄’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유명하다.

목숨을 걸고 기록을 남긴 사관의 의기는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거꾸로 이는 제나라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안영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의 군주가 바뀌는 일이 벌어지고만다. 제나라는 그대로이나 군주의 가계가 바뀐 것. 제나라의 황금기를 연 관중과 제나라의 몰락을 보여주는 안영을 함께 열거한 것은 어째서일까? ‘제나라의 재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둘은 너무도 다르지 않나?

업적으로만 따지면 안영보다 관중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관중은 이후 대대로 훌륭한 재상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니. 그러나 사마천은 안영에게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의 마부가 되어도 좋다는 정도로. 그것은 먼저 관중에 비해 안영은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월석보와 안영의 이야기를 보자. 월석보가 죄인이 되었을 때 안영은 그가 비범한 인물인줄 알고 자신의 말을 풀어 그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집에 와서는 월석보에게 별 예우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월석보가 집을 떠나려하자 안영이 이렇게 말한다.

嬰雖不仁 免子於緦何子求絕之速也

내가 비록 모자른 사람이지만 당신을 저 옥중에서 꺼내주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월석보의 대답이 걸작이다.

不然 吾聞君子詘於不知己而信於知己者 方吾在縲紲中 彼不知我也 夫子既已感寤而贖我 是知己 知己而無禮 固不如在縲紲之中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뜻을 굽히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치는 법. 당신이 나를 옥중에서 꺼내주었으니 나를 안다는 것인데 나를 알아주면서도 무례하다면 이는 옥중에 갇혀 있는 것만 못하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전체에 흐르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여기서 명확히 드러난다. 누군가를 알아준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능력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럴뿐이라면 무시하는 것만 못하다. 그에 합당한 태도로 대우해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굴욕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기열전>이 이야기하는 ‘알아줌’이란 예를 갖추어 대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까지 포괄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게 문제는 아니다. 본디 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서 억울한 게 아니다. 문제는 알아주는 자들이 그에 합당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 못할 때에 문제다. 나를 알았기에 그에 합당한 태도를 나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

이어지는 또 다른 고사는 안영의 마부 이야기이다. 이른바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식으로 재상 안연의 마부라고 뻐기고 다녔나보다. 그의 아내는 그의 허위를 보고 헤어질 것을 요구한다. 안자-안영을 보라. 그는 비록 키도 작고 볼품 없지만 그가 품은 뜻은 높고 늘 자신을 낮추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품은 뜻도 없으면서 스스로 의기양양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이에 마부는 자신의 태도를 고치고 그 결과 안영의 눈에 들어 대부의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사마천은 평생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갈구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무고하게 사형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사마천은 형벌의 치욕을 홀로 견뎠다. 그런 그이기에 월석보를 풀어주고, 겸양을 배운 자신의 마부를 대부로 올려준 안영의 이야기에 탐복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그가 높이사는 것은 안영의 높은 기개다. 비록 안영의 힘이 제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고 하나 그는 최저의 집에 죽은 장공의 시신 앞에 울음을 감추지 않을 정도로 의기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태도를 두고 ‘見義不為無勇’이라 폄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서 사마천은 이렇게 평가한다. ‘至其諫說 犯君之顏 此所謂 進思盡忠 退思補過 者哉 假令晏子而在 余雖為之執鞭 所忻慕焉’ 犯君之顏! 그는 군주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간언을 했다. 보디 간언이란 군주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기 마련인법. 안영은 그것을 잘 알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좌전>에 실린 기록이다.

제나라 임금(경공)이 사냥터에서 돌아온 뒤, 안자가 천대에서 시종하고 있었다. 이때 양구거가 수레를 타고 도착하였다. 임금이 안자에게 말했다. “오직 양구거만은 나와 화합하고(和)있다.” “그도 역시 뇌동(同)하고 있습니다. 어찌 화합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화합과 뇌동은 다른가?” “다릅니다. 화합이란 마치 국을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물, 불, 식초, 젓갈, 소금, 매실 등을 준비하여 생선과 고기를 요리하는데, 한 사람이 장작으로 불을 때면 요리사는 양념을 합니다. 간을 맞추면서 부족한 것은 더 넣고, 지나친 것은 묽게 합니다. 군자(임금)는 그런 국을 먹고 마음을 평정하게 합니다. 군신 관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임금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그른 점이 내재할 경우, 신하는 그 그른 점을 지적함으로써 옳은 일을 잘 성취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임금이 그르다고 여기는 일에 옳은 점이 내재할 경우, 신하는 그 옳은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른 일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럼으로써 정치가 평정되어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되면, 백성은 불평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 <논어집주>, 박성규 역, 소나무. 538쪽 각주 2번에서 옮김.

공자는 일찍이’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 하였다. 이를 보면 안영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삶을 추구했던 인물인 셈. 어지러운 세상에서 스스로를 부동不同, 즉 동일성을 깨뜨리는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정치에서 늘 ‘화합和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과연 무엇이 화합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내편이 되라는 것이 화합인가? 나와 다르지만 적당히 어울리자는 게 화합인가? 범안犯顏, 상대의 안색을 거스르는 것이 화和의 본질임을 안영은 이야기한다.

 

《사기史記》 불후의 문장, 불굴의 삶 1강: 대체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4

부모가 나를 낳았으나

<사기열전>에서 다루는 인물을 보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단 시대적으로 볼 때에 균형이 깨어져있다. 앞서 <사기>는 ‘오제’라는 고대의 신화적 제왕으로 시작하여 당대, 한무제까지의 역사를 담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에 비하면 <열전>이 다루는 시기는 매우 제한적이다. ‘춘추전국’이라 불리는 혼란기에 활약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수를 차지하고, 진한秦漢 교체기, 한漢 초기의 인물까지 다루고 있다. 어째서 <열전>에서는 그 절반만 다루는 것일까? 날줄과 씨줄의 비유를 빌리면 <사기>라는 커다란 직조물 가운데 앞의 절반은 씨줄 없이 날줄만 있는건 아닐까?

그러나 반대로 이렇기에 <본기>보다는 <열전>이 후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본기>와 <세가>의 인물들이 ‘역사’라는 틀에 갇혀있다면 <열전>의 인물들은 그 틀을 넘나들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명문도 이 <열전>에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익히 들어온 고사들도 이 <열전>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백이열전>이 <사기열전>의 서문이자, 사마천의 출사표와도 같은 글이라고 한다면, <관안열전>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첫머리에 있는 인물은 ‘관중’이다. ‘관중’은 중국 고대로부터 명재상으로 손꼽힌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가 제환공을 당대의 패자霸者의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패자란 주왕실이 힘을 잃은 이후 제후들을 한데 모아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인물을 가리킨다. 맹자는 이를 ‘以力假仁者’라고 폄하하긴 했으나 공자는 덕분에 오랑캐의 침입에 무너지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참고로 춘추시대에는 다섯의 패자가 있었다고 한다.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합려, 월왕구천이 꼽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제환공은 패자라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만든 것은 관중의 업적이었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관중은 제환공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태공세가>에 이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는 제양공讓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제양공은 매우 무도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배다른 동생인 문강文姜과 정을 통하는 관계였다. 동생이 이웃 노나라에 시집을 가서도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의 노나라 군주는 노환공이었는데 이 사실을 알아채고 부인에게 화를 냈다. 이에 문강과 제양공은 노환공을 죽이기로 모의한다. 둘의 관계가 이웃 군주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결과까지 낳은 것. 당연히 나라는 어지러웠으며 주변의 인물도 양공의 손에 죽임당하기 일수였다.

공자公子 규糾와 소백小白은 각각 제양공의 동생이었는데 이웃나라에 도망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차 제양공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제 제나라의 다음 임금이 누가 되느냐가 문제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먼저 귀국하여 자리에 오르는 자가 군주가 되는 형국이었다. 이때 공자 규는 노나라에 있었고 관중과 소홀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공자 소백은 거나라에 있었는데 포숙이 따르고 있었다. 군주의 자리를 두고 이제 형제가 싸워야 하는 상황. 관중은 몰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제나라로 입국하려는 소백을 암살하려 한다. 관중이 쏜 활에 소백이 맞았는데 허리띠의 장식 부분에 맞았다. 관중은 소백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돌아가 공자 규와 느긋하게 귀국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소백은 자신의 생존을 비밀에 부치고 몰래 귀국하여 군주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그는 제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노나라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공자 규는 형제라 차마 주살하지 못하겠으니 노후魯侯께서 직접 그를 죽이기를 청한다. 소홀과 관중은 원수이니 청컨대 그들을 잡아 젓갈을 담는 형벌에 처하여 마음을 달래려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노나라를 포위하겠다.’ 결국 공자 규는 독살 당하고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관중만 남은 상황. 이때 거나라에서부터 그를 보좌했던 포숙이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臣幸得從君 君竟以立 君之尊 臣無以增君 君將治齊 即高傒與叔牙足也 君且欲霸王 非管夷吾不可 夷吾所居國國重 不可失也’ 이렇게 하여 포숙의 천거로 관중은 일급 죄수에서 한 나라의 재상으로 하루 아침에 그 자리를 바꾸게 된다.

바로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에 대한 이야기가 이것이다. 흔히 ‘관포지교’라고 하면 친한 벗의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기열전>의 기록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워낙 유명한 고사이므로 그 원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管仲夷吾者 潁上人也 少時常與鮑叔牙游 鮑叔知其賢 管仲貧困 常欺鮑叔 鮑叔終善遇之 不以為言 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 管仲事公子糾 及小白立為桓公 公子糾死 管仲囚焉 鮑叔遂進管仲 管仲既用 任政於齊 齊桓公以霸 九合諸侯 一匡天下 管仲之謀也
管仲曰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多自與 鮑叔不以我為貪 知我貧也 吾嘗為鮑叔謀事而更窮困 鮑叔不以我為愚 知時有利不利也 吾嘗三仕三見逐於君 鮑叔不以我為不肖 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 鮑叔不以我怯 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囚受辱 鮑叔不以我為無恥 知我不羞小睗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鮑叔既進管仲 以身下之 子孫世祿於齊 有封邑者十餘世 常為名大夫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관중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관중과 포숙아의 관계는 대단히 일방적이다. 관중이 겪은 다양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포숙아는 늘 관중의 편이었다. 이쯤되면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다는 관중의 능력보다 이 관중을 끝까지 믿어준 포숙아의 인품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그래서 관중은 이렇게 말한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부모가 나를 낳았고, 포숙아가 나를 알아주었다. 대구로 이어지는 이 짧은 표현은 짜릿한 울림을 선물해준다. 부모가 생명을 주었듯 그에 버금가는 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긴 그렇지 않나. 단순히 생물학적 삶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기에.

그런데 이어서 사마천은 이렇게 서술한다.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그토록 뛰어나다는 관중의 재능보다 사람을 알아보는 포숙아의 능력이 훨씬 훌륭하다고. 그렇다고 관중의 역량이 별볼일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의 업적은 탁월한 것이어서 시대에 커다란 획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管仲既任政相齊 以區區之齊在海濱 通貨積財 富國彊兵 與俗同好惡’ 눈에 익은 표현이 나온다. ‘富國彊兵’ 나라를 부유케 하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었다. 관중이야 말로 부국강병의 시대를 연 인물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한 인물의 역량에 의해 한 나라의 국운이 결정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천하의 나라들이 서로 인재를 불러모아야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관중 덕분에 제나라는 천하에 위세를 떨치는 나라로 탈바꿈한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에도 끝까지 살아 남았던 것이 제나라였다.

 

《사기史記》 불후의 문장, 불굴의 삶 1강: 대체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3

구름은 용을 따라 나오고 바람은 범을 따라 나온다.

앞서 <사기>는 <본기>에서 굵직한 역사의 흐름을 다루었다고 이야기했다. 은주의 교체도 당연히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이를 <백이열전>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백이와 숙제는 여기서 전혀 다르게 등장한다.

서백은 나중에 문왕으로 추존되었는데 … 인자하며 나이 든 사람들을 공경하고 어린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베풀었다. 어진 사람에게는 예의로써 자신을 낮추었는데, 한낮에 식사할 겨를도 없이 선비들을 접대했다. 이에 선비들이 서백에게 많이 몰려들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에 있었는데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가서 서백에게 귀의했다. – <사기본기>, 김원중 역, 민음사. 112쪽.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본기>에 따르면 이미 문왕-서백창이 생존해 있을 때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에 귀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무왕이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를 치는 것도 문왕의 사후 직후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주본기>에 따르면 무왕 즉위 9년에야 군대를 일으켰으며, 막상 전쟁에 나가서도 첫번째에는 그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주무왕은 천명天命을 근거로 군대를 물리는데, 아마도 충분한 세력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제후들이 800명 모였다고 한다.

<은본기>와 <주본기>에는 백이와 숙제처럼 주의 정벌 이후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은의 마지막 임금 주의 악행에 대해 자세히 서술할 뿐이다.

주제紂帝는 천부적으로 변별력이 있고 영리하고 민첩하며 견문이 매우 빼어났고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맨손으로도 맹수와 싸웠다. 지혜는 간언이 필요하지 않았고, 말재주는 허물을 교묘히 감추기 충분했다.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뽐내며 천하에 그 명성을 드높이려고 했으며, 모두가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여겼다. 술을 좋아하고 음악에 흠뻑 빠졌으며 여자를 탐했다. 달기妲己를 총애하며 달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 사구에 악공과 광대를 불러 모으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처럼 만든 후 남녀들을 벌거벗게 하여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 <사기본기>, 100쪽.

‘以酒為池 縣肉為林’ 주지육림酒池肉林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은의 주임금이었다. 그는 매우 사치스러웠으며 게다가 잔혹한 형벌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따라서 무왕의 업적은 매우 의롭고 당연한 것으로 묘사된다. 악인을 처단했으니. 그러나 <사기열전>에서는 이러한 배경이 전혀 무시된다. 도리어 ‘以暴易暴’라는 표현을 통해 주무왕의 은정벌이 잘못된 것임을 이야기한다. <은본기>나 <주본기>의 역사 인식과는 전혀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기>와 <열전>의 이야기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적지 않다. 이 불일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시대의 흐름에 요동치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시대의 날줄이 곧고 바른 경우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그렇게 곧고 반듯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 요동치며 굽이치는 경우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여러 폭력에 노출되기 마련이며, 갈등으로 내몰릴 수 밖에.

앞서 <백이열전>을 <사기열전>의 서문이라 말했다. 이는 <사기열전>이 바로 이처럼 난세의 인간에 특히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백이열전>이 그리는 주무왕의 정벌은 ‘난세의 끝 / 치세의 시작’이 아니라 난세의 시작일 뿐이다. ‘채미가’ 끝의 ‘命之衰矣’라는 표현을 기억하자. 주무왕은 천명天命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사마천은 백이의 입을 빌려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내놓고 있다. 무왕의 정벌로 천명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쇠락하게 되었다. 이후 이어지는 <열전>의 인물들은 이 쇠락한 시대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삶들이다.

한편 이렇게 기존의 인식을 뒤집어 내놓는 것은 일종의 대결의식의 발현이기도 하다. 백이에 대해 원망함이 없었다고 했던 공자의 말이 정말 맞는 것일까? <열전>은 공자로 대표되는 당대의 보편적 역사관과 대항하며 시작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사마천은 <백이열전>을 통해 일종의 출사표를 내놓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식으로 세상을 이야기하겠다. 이를 생각하며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흥미롭다.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열전의 본문에서는 ‘或曰’ 누군가의 말로 되어있으나 오늘날에 이 문장은 <노자>에 실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늘의 도는 특별히 누군가를 아끼는 것이 없으나 늘 선한 사람과 함께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백이와 숙제는 선인善人이라면서 왜 그들은 굶어 죽었는가?

한편 이렇게 평가한 공자의 삶을 보자. 공자의 제자 가운데 안연이라는 제자가 있다. 공자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가장 훌륭한 제자로 손꼽혔음에도 가난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것뿐인가?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러니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하늘이 선하나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 어째서 늘 이렇단 말인가? 하늘이 함께 하는 것이 맞나?

그것 뿐이라면 그나마 괜찮을지 모르겠다. 악한 짓으로 유명한 도척盜蹠을 보라.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잔인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천수를 누리고 죽은 그는 대체 무슨 덕으로 그렇게 무도하게 잘 살 수 있었을까? 그것뿐인가? 사마천 당대에도 그런 비슷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악한 짓을 하면서도 호강하며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한스럽거늘 그렇게 부정하게 쌓은 부를 대를 이어 물려주기까지한다. 도리어 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화를 입기 십상이다.

‘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대체 하늘의 도(天道)란 옳은가 그른가? 이른바 천도를 주장하는 이들은 마땅히 이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늘은 이렇게 천도를 따라 사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역사를 보니 그렇지 않더라. 당신들이 주장하던 그 천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이것이 <백이열전>을 통해 사마천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렇다고 사마천이 도척처럼 멋대로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천도에 의거하지 않고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 사마천은 가의賈誼의 말을 빌려 자신이 그 길을 개척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흘린다. ‘同明相照 同類相求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睹’ 함께 빛나는 것은 서로를 비추고 같은 부류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구름이 용을 따라 나오고 바람이 범을 따라 나오듯, 성인이 일어나자 만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이 이들 선인에게 보응을 해주지 못한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貪夫徇財 烈士徇名’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열사烈士, 굳센 선비는 이름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이름(名)이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야 이름이 의미있기 마련이다. 지인知人,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이름도 빛을 발한다.

伯夷叔齊雖賢 得夫子而名益彰 顏淵雖篤學 附驥尾而行益顯 巖穴之士 趣舍有時若此 類名堙滅而不稱 悲夫 閭巷之人 欲砥行立名者 非附青雲之士 惡能施于後世
백이와 숙제가 비록 훌륭한 사람임에 틀림없으나 공자가 그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그들의 이름이 더욱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안연이 바록 학문에 매진했으나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공자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저들은 모두 그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으로 인해 세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지금 굴 속에 숨어 있는 선비들, 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고자 몸을 숨기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이 사라져 불리지 않으니 안타깝지 않은가! 좁은 골목에 살면서도 그 뜻이 높고 그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사람은 ‘청운지사青雲之士’가 있을 때야 비로소 후세에 이름을 떨치리라.

청운지사青雲之士란 바로 사마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테다. 가의의 말을 기억하자. 구름과 바람이 용과 범을 따라 일어난다. 그처럼 이제 자신도 용과 범 같은 이들을 불러내고자 한다. 한편 이는 앞서 공자가 했던 것에 견줄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가 백이와 숙제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듯. 그러나 사마천은 그와 똑같은 입장에서 이들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힌다. 자신도 공자처럼 이들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려고 하나 공자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작업을 ‘성일가지언成一家之言’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기록으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포부에 그치지 않는다. ‘제자백가諸子百家’ 고대의 그 빛나는 사상가의 자리에 버금가는 자리에 자신도 오르겠다는 강렬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앞서 ‘同明相照 同類相求’라 했다. 이들의 찬란한 삶을 <열전>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이를 서술한 자신 역시 그와 동일하게 빛나는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聖人作而萬物睹’ 만물이 제 모습을 밝게 드러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로 성인이 있기에 그렇다.

 

《사기史記》 불후의 문장, 불굴의 삶 1강: 대체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2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노라!

문제는 시대의 날줄에 비해 각 개인이 가진 씨줄이 너무도 연약하다는 데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실을 가졌으면 뭐하나. 시대의 날줄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면. 고대인들을 이를 천인天人 관계 속에서 사유하려 하였다. 천도天道와 인사人事 – 하늘의 법칙과 사람의 일.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는 천도에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찾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에 주목했던 이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하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사마천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다른 열전과 비교해볼 때 <백이열전>은 매우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열전>이란 통상적으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인물의 출신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어지는 <관안열전>의 경우 이렇게 시작한다. ‘管仲夷吾者 潁上人也: 관중 이오는 영수 사람이다.’ 그런데 <백이열전>에는 제목과 달리 정작 백이의 이야기가 별로 없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백이는 생몰연대가 불분명한 인물이다. 게다가 그의 고향으로 이야기되는 ‘고죽국’이 대체 어디인가를 두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역사적 행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사마천 시대에 이미 백이는 고대 성인聖人 가운데 하나로 숭상되고 있던 인물이다. 전설상의 인물을, 그것도 주周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내세워 <사기열전>을 시작한다.

이는 <백이열전>이 <열전>의 다른 편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백이열전>은 백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글이라기보 보다는, <열전>을 시작하는 글이라 보는 게 옳다. 일종의 <사기열전>의 서문이 되는 글.

사마천은 당대의 문화유산을 언급함으로 시작한다. ‘夫學者載籍極博 猶考信於六藝 詩書雖缺 然夏之文可知也’ 뭇 학자들이 기록해놓은 것이 무척이나 많다. 특히 ‘육예六藝’가 크게 숭상된다. 여기서 ‘육예’란 고대의 문물을 전해주는 여섯 텍스트를 가리킨다. <시>, <서>, <역>, <악>, <예기>, <춘추> . 물론 이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른바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인물의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기록 바깥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예를 들어 ‘허유’라는 인물에 관련된 이야기가 그렇다. ‘허유’에 얽힌 이야기는 <장자>에 전해지는데 간단히 내용은 이렇다. 허유가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요임금이 허유에게 나라를 물려주려 한다. 그런데 허유는 요임금의 제안을 단칼에 거졀한다. 훗날 이 이야기에 더 살이 붙는데 이런 식이다. 천하를 물려받으라는 요임금의 제안이 너무나 혐오스러운 나머지 허유는 강물에 귀를 씻는다. 더러운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나중에는 여기에 한 인물이 더해지는데, 바로 소에게 물을 먹는 사람이다. 갑자기 강물에 귀를 씻는 허유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은 자리를 옮긴다. 그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면서.

후대 유가 지식인들에 의해 순에게 왕위를 선양한 요는 성인으로 크게 존숭받는다. 중국의 고대의 이상사회를 요순시대라고도 하지 않나. 이처럼 훌륭한 임금들에 의해 다스린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그런데 유가 문헌에서는 허유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전설처럼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음에도 굴구하고. 사마천은 젊은 시절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는데 이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던 기산箕山도 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허유의 무덤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한편 허유처럼 왕위를 버린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오태백과 백이가 그렇다. 이 둘에 대해서는 공자가 이미 짧은 평을 남겼다. ‘子曰 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태백은 지극한 덕을 가졌다. 세번이나 천하를 양보했으나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할 길을 찾지 못했다. 태백은 고공古公의 첫째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뜻이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그는 남쪽 멀리 도망쳐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살았다 한다. 이후 ‘오吳’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여 ‘오태백’이라 부른다. 이 오나라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한편 오늘의 주인공 백이伯夷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는 고죽국 군주의 첫째 아들이었다. 후대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이지만 임금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첫째보다는 막내를 더 아끼는 경향이 있다. 성정으로 따지면 장자상속이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고죽국의 임금, 백이의 아버지도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왕위를 물려 받아야 하는 셋째 숙제叔齊가 형을 닮아버렸다는 것이다. 백이가 아버지의 명에따라 숙제에게 왕위가 계승되어야 함을 주장하자, 숙제는 장자인 형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이 아버지의 명(父命)을 주장하며 도망치자 숙제도 형을 따라 도망친다. 고죽국의 왕위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둘째에게 넘겨졌다!

이상적으로는 왕위는 현자賢者에게 물려 주는 것이 옳다. 그래서 요는 순에게, 순은, 우에게, 우는 탕에게 물려준다. 그런데 탕에 이르러 현인이 아닌 자식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생겼다. 바로 탕임금의 하夏나라다. 이제 왕위는 선양이 아닌 계승의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선양의 다른 측면, 그 자리를 양보하는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백이와 숙제는 선양이라는 고대의 방식을 숭상하며 장자 상속의 방식을 거부한다. 그런데 그 결과는 좀 우스운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양보하지 않은 사람에게 권력이 돌아가고 말았으니. 어떻게 보면 세상은 이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떠돌이가 된 두형제는 이어 더 큰 모순을 맞이한다. 그들은 주나라의 서백창西伯昌이라는 이가 늙은이를 잘 모신다(善養老)는 소문을 듣고 주나라로 향한다. 참고로 이 서백창은 오태백이 둘째 동생인 우중虞仲과 함께 도망친 이후 그들 대신 왕위를 물려받은 셋째 계력季歷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백이와 숙제가 도착해보니 서백창은 이미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 발發은 아버지를 주문왕周文王으로 올리고 은나라의 폭군 주紂임금을 무너뜨리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전쟁에 나아가려는 상황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군대를 일으켜 전쟁에 떠다려는 이들 앞에 등장하여 이렇게 말한다.

‘父死不葬 爰及干戈 可謂孝乎 以臣弒君 可謂仁乎?’
아버지를 장례지내지도 않고 급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효孝라고 할 수 있는가? 신하로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인仁이라 할 수 있을까?

<백이열전>에 따르면 아버지의 위패를 싣고 전쟁에 나가려는 상황이었다. 당시 천하의 중앙에는 은殷이 있었고 주周는 서쪽에 위치한 속국이었다. 그런데 속국의 신하로 어떻게 전쟁을 벌일 수 있냐는 질문. 이때 백이와 숙제는 ‘叩馬而諫’ 말고삐를 잡아 끌며 간했다 한다. 생각해보라. 군대를 사열하고 게다가 아버지의 위패를 상징적으로 내세우고 전쟁에 나서려는 찰나, 비렁뱅이 둘이 난입하여 이 군대를 막아서는 상황을. 그것도 군주의 말 고삐를 잡아 끌며. 병사들이 이를 죽이려 하자 한 인물이 나서며 이렇게 말한다. ‘此義人也’ 의로운 사람이다. 훗날 제나라의 시조가 되는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었다. 결국 주나라는 전쟁에서 이기고 이때 전쟁을 벌였던 발은 주무왕周武王으로 추앙된다.

백이와 숙제는 불의한 전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들은 산에 올라 은둔하여 살며 고사리를 뜯어먹고 살았다. 결국 이들은 수양산에서 굶어죽고 말았다. 이들의 죽음은 훗날 의로운 사람의 표본으로 숭상되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논어>에도 이들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죽었으나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을 칭송한다.

‘子貢曰 …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자공이 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옛 현인이다. 원망했을까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단 말인가?

공자의 말은 당대의 통상적 이해를 보여준다. 그들은 의로움을 추구하다 굶어죽었다.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다 죽었으니 무엇을 원망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마천은 자신이 찾아내었다는 일시軼詩를 주장하며 이들의 죽음에 의문 부호를 붙인다. 이 시는 훗날 ‘채미가采薇歌’ 즉, 고사리를 뜯는 노래라고 불린다. 사마천은 ‘及餓且死 作歌’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 이 시를 지었다고 말한다.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노라.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지만 그것이 그름을 알지 못하는 구나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신농, 우, 하의 시대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우리는 어디로 가아하나.
于嗟徂兮 命之衰矣 아! 이제 죽는 구나. 명命이 쇠락함이여.

사마천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觀之 怨邪非邪
이 시를 남기고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이것을 보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사기史記》 불후의 문장, 불굴의 삶 1강: 대체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1

기전체紀傳體 : 역사의 날줄과 씨줄

<십팔사략>이라는 책이 있다. 불경스런(?) 이 제목의 책은 본디 원대元代에 편집된 책으로 당대까지의 중국 역사를 축약한 책이다. 총 18개의 역사서를 줄였다고 제목을 <십팔사략>이라 붙였다. 이 가운데 가장 처음에 오는 책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이다. 물론 이후에도 중국의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통상적으로는 청의 건륭제 때 확정된 24사史를 중국의 정사로 본다. 그런데 24사 가운데서도 첫머리가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생몰연대가 불분명하나 대체로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 기원전 86년 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의 통치자는 한무제漢武帝였다. 그는 당대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오제五帝 –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과 같은 신화적 인물로부터 시작한다. 그로부터 하夏-은殷-주周를 이어 춘추전국과 진秦-한漢에 이르는 역사를 다룬다. 중국 고대사를 정리한 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히 중국의 가장 이른 역사를 다루었기에 <사기>가 그 첫머리에 오는 것은 아니다. 시간 순으로 따지면 사마천의 <사기>보다 앞서는 기록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공자의 저작으로 이야기되는 <춘추>가 있다. 흔히 <춘추>와 <사기>는 그 서술 방식으로 비교된다. <춘추>는 편년체編年體로 기록되었다. 연대기 순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역사가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편년체의 형식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 기록과는 상당히 다르다. 지금처럼 똑같은 달력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는 보통 군주의 재위를 기준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이를 기준으로 사건을 그대로 나열해놓은 것이 편년체 서술이다. 편년체로 기록된 대표적인 책으로 <조선왕조실록>이 꼽힌다. <실록>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왕의 이름 별로 나뉘어 매해, 매월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책과는 많이 다르다. 연표의 확장판이라고 할까? 어떤 임금이 재위한 후 몇 해, 몇 월 이러이러한 사건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부니 사실 읽는 재미가 별로 없다. 따라서 편년체 서술은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역사 사건 기록의 묶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라는 독특한 방식을 택한다. 여기서 ‘기전紀傳’이란 사기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부분에서 뽑아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로 <본기本紀>와 <열전列傳>. <본기>는 역대 왕조의 흐름을 따른다. 총 12본기로 구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중국 고대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순서는 이렇다. 각 편마다 ‘본기’가 붙는데 반복 되므로 편의상 빼버렸다. ‘오제-하-은-주-진-진시황-항우-고조(유방)-여태후-효문-효경-효무’

<오제본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중국 고대의 신화적 제왕들의 이야기를 서술한 부분이다. <하-은-주본기>는 흔히 삼대三代라 불리는 중국 고대의 왕조 이야기를 다루었다. 주나라의 몰락 이후를 흔히 춘추전국이라 부르는데 천하는 여러 제후국의 각축장으로 변한다. 그 가운데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진의 역사를 <진본기>에 서술했다. 그리고 이는 천하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진시황>본기로 이어진다. 진의 몰락 이후 항우와 유방은 천하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데 이는 <항우본기>와 <고조본기>에 기록되어있다. <고조본기>는 한고조 유방의 이야기를 엮은 글이다. 한편 유방 사후 실질적인 권력은 유방의 부인 여태후의 손에 넘어간다. 사마천은 이를 <여태후본기>에서 다루었다. 여태후의 죽음 이후 문제, 경제, 무제로 이어지는데 이는 각각 <효문-효경-효무본기>로 이어진다. 앞에 효孝를 붙인 것은, 오늘날이야 문제, 경제, 무제라고 간결하게 시호를 부르지만 본디 앞에 ‘효’를 붙였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본기>를 맨 처음에 놓았는데 이는 본디 <사기>의 편제가 <본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기도하지만, 역사적 사건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기>의 편제를 이야기하면 <사기>는 총 130편으로 이루어져있다. 12 <본기> 다음엔 10 <표表>가 이어진다. 이 <표>는 말 그대로 ‘표’인데 당대의 여러 나라들의 연표를 하나로 묶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본기>에 언급되지 않는 여러 제후국의 역사는 각기 저마다 임금의 재위 기간을 기준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를 따로 볼 경우 당연히 헷갈리기 마련. 따라서 각 나라의 사건을 동시대적 시각 위에서 보기 위해 <표>를 만들었다.

이어 8 <서書>가 있다. 이는 당대의 문화, 사회에 대한 보고서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예서禮書>와 <악서樂書>는 각기 예/악에 대해, <천관서天官書>는 당대의 천문天文에 대해, <봉선서封禪書>는 천자가 하늘에 지낸 봉선제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8 <서>를 통해 우리는 고대 사회의 문화, 사회, 경제 상황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편 30 <세가>는 제후국의 기록을 담았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중국의 천하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본디 ‘천하’라 불리는 문명세계의 중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천하의 지배자를 천자天子라 불렀다. 주周의 통치자가 스스로 하늘의 명(天命)을 받들어 천하를 지배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런데 천하라고 할 수 있을만큼 넓은 땅을 천자 1인이 다스리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새로운 체제가 개발된다. 은殷을 무너뜨리고 천자의 자리에 오른 주무왕周武王은 공신과 자신의 친족들에게 땅을 떼어 제후로 삼았는데 이를 ‘봉토건국封土建國’, 줄여 ‘봉건’이라 한다. 중앙에는 천자의 나라가 그 주변에는 여러 제후의 나라가 있는 형태가 주나라 체제의 특징이었다. 이 제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바로 <세가>이다.

이것을 보면 기존의 편년체가 가지고 있던 딱딱한 역사를 보다 풍성하게 기록한 것이 <사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마천의 능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열전>이라는 또 다를 틀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글에 담았다. 열전은 총 70편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보통은 사람의 이름을 따 제목을 삼았는데 많은 경우 한 사람이 아니라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을 함께 묶어 서술했기에 <열전>은 수백백명의 인물을 다룬다.

종합해보면 <사기> 130편은 총 다섯부분으로 구성된다. 12 <서>, 10 <표>, 8 <서>, 30 <세가>, 70 <열전>으로. 그 가운데 후대 사람들이 크게 사랑한 부분이 바로 <열전>이다. 천자와 제후들의 이야기가 역사의 전부가 아님을 사마천은 알았던 것이다. 흔히 역사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때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 않는가? 역사란 승리하여 권력의 얻은 자들의 입맛에 따라 서술되기 쉽다. 그러다보니 역사에서 다루는 것이란 국가의 흥망, 통치자의 변고 따위에 그치곤한다. 이처럼 큰 흐름에만 주목하는 것이 역사가 아니라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흔히 ‘미시사’라 불리는 분야의 다양한 연구가 그것이리라.

사마천은 이미 오래전부터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왕조의 교체, 제후국의 흥망성쇠가 중요하기는 하나 그것이 역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역사가 수많은 삶들이 엮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무늬라면 시대의 날줄만큼 이를 가로지르는 각 인간들의 씨줄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를 놓친다면 날줄만 있고 씨줄은 없는 별볼일 없는 모양이 되고 말 것이다.

인문학이라고 할 때, ‘인문人文’이란 사람들이(人) 짜놓은 무늬(文)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의 거친 이 무늬의 모습이란 분명 찬란하게 빛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양한 힘들이 이 빛을 가린다는 데 있다. 시대의 망각이, 권력자의 어두운 욕망이, 때로는 소박한 무관심이 이를 무디게 만든다. 인문학이란 어떻게 보면 그러한 힘에 저항하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아름답고도 풍성한, 생생한 무늬를 가능한 민감하게 느끼고자 하는.

사마천은 ‘기전체’라는 독특한 방법을 고안하여 그 무늬를 자신의 글에 담아내고자 했다. 날줄과 씨줄이 엮이는 가운데 사마천의 <사기>는 다른 어떤 역사 기록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훌륭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일찍이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 역사의 최고봉이자 운율없는 최고의 시라고.

사랑은 변하는 것

사랑은 변하는 것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어느 영화의 대사는 사랑은 결코 변할 수 없다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나 역시 영화관에서 저 대사를 들으며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그래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하고 말테야’라며. 그러나 지금 아내가 된 그는 연애 시절 저 멋진 말에 얽힌 환상을 손쉽게 깨뜨려버렸다. 사람이 변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변하지 않겠냐고. 요는 사람이 변하므로 사랑도 변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야 말로 부질없는 집착, 혹은 고집 같은 건 아닐까?

사랑이라는 게 꼭 사람들 사이에만 있는 건 아닐테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도 사랑이 필요하다. ‘철학-Philosophy’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나. 공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호학好學’이라고. 누군가 어떻게 《논어》 같은 책을 공부하게 되었느냐 물었는데 구구절절 사연을 다 지우면 하나의 사실이 남는다. 《논어》라는 책이 좋아서.

그런데 처음 그 마음처럼 똑같이 책을 사랑하지 못하겠더라. 너무 가까이했던 걸까? 좀 질리는 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사대부고 친구들과 《논어》 공부를 시작할 때만하더라도 미적지근했다. 그런데 막상 강의를 시작하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논어》가 새롭게 재미있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첫 사랑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할까?

한 학기동안 《논어》를 만난 친구 가운데는 이런 사랑타령에 손사래를 치는 경우도 있을테다. 그렇게 갑갑한 책에 사랑을 운운하다니! 그러나 《논어》와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다. 언젠가 이 책을 다시 만날 날이 있으니. 그때엔 다른 방법으로 저마디 이 책을 또 다르게 사랑할 길을 찾아보자. 지금 사랑하고 있는, 아직 사랑하지 못하는 모두.

한 학기 동안 다들 《논어》라는 낯선 책을 읽으며 얼마나 수고했는가. 이 책을 읽고 이야기한만큼 우리의 정신이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성장의 열매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명한 소설의 맺음말을 빌려 인사를 대신하려 한다.

‘지구에 살든, 혹성에 살든,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이다. … 다른 인사말은 서로 생략하기로 하자.’ (난쏘공 中)

사대부고 《논어》 강의 7강 – 공자, 그 이후

백가쟁명百家爭鳴

‘춘추전국春秋戰國’이란 말은 지금까지도 일종의 혼란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본래 이 말은 《춘추》라는 책과 《전국책》이라는 두권의 책에서 이름을 따왔다. 《춘추》는 공자의 고향 노나라의 역사서이며, 《전국책》은 여러 나라들의 전쟁, 책사들의 활약을 기록한 책이다. 책의 배경에 따라 ‘춘추전국’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기에 칼로 자르듯 구분지어지지 않는다. 학자들마다 둘을 구분하는 시점이 서로 다르기도 하다.

대략적으로 ‘춘추시대’란 주周나라가 서쪽의 수도를 버리고 동쪽으로 천도하면서부터 시작하여, 진晉나라가 셋으로 나뉜 시기까지를 이야기한다. 기원전 770년 ~ 기원전 403년까지가 이 기간이다. 중국의 고대 왕조인 주周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매우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의 왕은 스스로를 천명天命을 받았은 천자天子로 주장하며 천하의 지배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넓은 땅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자신의 친족이나 공신을 내려보내 주어 다스리게 했다. 이를 ‘봉토건국封土建國’, 즉 땅을 나누어 나라를 세워주었다고 말하며 간단히 줄여 ‘봉건封建’이라 말한다.

주나라의 천자에게 땅을 떼어받아 나라를 맡은 이를 제후諸侯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호칭은 공公이었다. 이들은 주왕실에 문제가 있을 때 군대를 이끌고 천자를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노나라는 주나라를 건국한 주무왕의 조카에게 떼어준 나라였다. 공자가 그토록 존경했던 주공周公은 주무왕의 동생이었고, 노나라의 시조는 주공의 아들 백금이었다. 한편 《논어》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웃 제나라는 그 유명한 강태공에게 떼어준 나라였다. 주무왕은 은나라 주왕의 폭거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고자했는데, 그의 모사역할을 해주었던 것이 강태공 여상이었다. 그는 주나라를 건립한 이후 제나라의 초대 제후가 되었다.

이처럼 주왕실을 중심으로 엮인 관계 때문에 제후국 간에는 큰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한 핏줄, 한 집안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나라가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주나라가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것은 오랑캐의 칩입 때문이었는데, 이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당시 주나라 임금은 유왕幽王이었는데 그는 미인 포사를 후궁으로 들였다. 포사는 웃지 않는 여자여서 유왕은 그를 웃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들였다. 그 가운데는 비싼 비단을 찢기도 했는데, 비단 찢는 소리에 포사가 살짝 웃음을 짓자 유왕은 비싼 비단을 모아다 찢어가며 포사의 웃음을 즐겼다고 한다. 한번은 봉화가 잘못 올라가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모여들었다. 오랑캐의 침입으로 주나라 수도가 위태롭다고 여긴 까닭이다. 그러나 아무일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허탈해 할 수밖에. 그걸 보고 포사는 크게 웃었다 한다. 이를 반갑게 여긴 유왕은 시시때때로 봉화를 올렸고, 제후들은 군사를 이끌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 이제 봉화를 올려도 제후들이 모이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정말로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에 주왕실을 구하러 온 제후는 없었고 이에 주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렇게 되었으니 주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실적인 힘도 약해진 상황. 결국 상징적인 힘만을 갖게 된다. 이것이 춘추시대의 시작이다. 한편 진의 분할은 또다른 사건이기도 한데, 이는 주왕실의 틀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은 한韓, 조趙, 위魏 셋으로 갈리는데 본디 이 셋은 진나라 아래에 있던 대부들이었다. 이들은 세력을 키워 진나라 군주를 몰아내고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힘만이 으뜸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참고로 새로 세워진 위나라의 초대 군주, 위문후魏文侯의 손자가 위혜왕魏惠王이다. 혜왕 시기에 이르러 위나라는 사방 나라의 공격으로 국력이 크게 깎인데다 수도를 대량大梁량으로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위나라라는 이름 대신 양梁을 나라 이름처럼 썼다.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양혜왕’! 맹자에 등장하는 양혜왕이 바로 그다.

《맹자》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위나라는 서쪽의 진秦나라, 동쪽의 제나라에게 크게 패했다. 서쪽의 진나라의 경우 상앙이라 불리는 이의 활약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상앙은 본디 위나라 출신이었는데 위혜왕이 자신을 등용하지 않자 서쪽 진나라로 가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위나라의 재상이었던 공숙좌란 인물은 위혜왕에게 상앙을 등용하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라며. 한편 등용하지 않을 경우엔 그를 죽이라 말했는데 위혜왕은 죽음을 앞둔 이가 판단히 흐려져 내뱉은 말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는 혹독했다. 한편 제나라의 군대를 이끈이는 손빈이라는 이였는데,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그는 위나라 장군이었던 방연의 미움을 사, 무릎뼈가 뽑히고 얼굴에 죄목을 새기는 형벌을 받는다. 그것도 위나라에서! 그의 이름 ‘빈’은 앉은뱅이라는 뜻이다. 그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제나라의 모사가 되어 위나라로 쳐들어온다. 그리고 자신을 그 꼴로 만든 방연을 죽이고 위나라의 태자도 사로잡았다.

한때 제법 강성한 나라였던 위나라는 이렇게 몇 차례의 전쟁으로 초라하게 망가진다. 흥미롭게도 위나라를 공격한 두 나라는 저마다 공을 세울 훌륭한 인재를 가지고 있었다. 위나라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인물! 위혜왕-양혜왕이 맹자와 같은 이들을 불러 모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맹자를 불러놓고 묻는 말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할까, 백성을 늘려 군대를 만들까 하는 생각들이 아니었겠나.

각 나라가 서로 군사력을 두고 다투는 시대에, 유리한 조건을 취하려면 인재를 많이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인물이 내놓는 책략, 제도 개혁에 따라 나라가 흥할수도 있고 망할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위혜왕이 내친 상앙은 진나라의 기틀을 닦고, 훗날 진나라는 상항이 닦은 기틀 위에서 천하를 통일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군주들이 인재를 찾은만큼 저마다 공을 세워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편 공을 세우기 보다는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두고 저마다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학설을 가진 사상가와 그 학파를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른다. 이들은 저마다의 주장을 날카롭게 내세우며 치열한 논쟁을 그치지 않았는데 이를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 맹자와 장자, 순자, 한비자, 묵자, 소진, 장의 같은 인물이다. 이들이 활약한 시대에는 당연히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 부른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공자로 돌아오면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를 살았다. 주나라의 체제가 무너지고 제후국 안에서도 슬슬 새로운 힘들이 등장할 시대! 노나라의 군주는 계손씨 등의 대부에 힘을 다 빼앗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웃 제나라의 정치도 혼란스러워 군주가 대부의 집에서 죽음을 맞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의 체제가 그나마 남아 있었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주공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꿈에서 주공을 만나볼 수 없다고 한탄하지 않았나. 주나라의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들이 꿈꾼 것은 무엇이었을까?

공자의 후예들

《논어》를 읽어보면 여러 제자들이 등장한다. 이 제자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텐데, 자로, 안연, 자공, 염유 등 《논어》 전반부에 많이 등장하는 제자들이 하나라면, 증삼, 자유, 자하, 자장 등과 후반부에 주로 등장하는 제자도 있다. 전자는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공자를 따라다닌 제자로 추정되며, 후자는 공자가 고향 노나라에 돌아온 이후에나 공자의 제자가 된 이들로 여겨진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공자의 제자들은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그 다음 공자의 자리를 대신할 인물을 세우는데 그가 바로 유약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용모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용모야 말로 그의 덕德이 표현된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약이 스승 공자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은 거꾸로 스승과 비슷한 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는 이에 반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증삼이 그 대표 인물이었다.

어쨌든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제자들은 여러 흐름으로 나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성공한 인물은 자공이었는데, 《논어》를 보면 그가 얼마나 큰 명성을 얻었는지, 스승 공자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물론 그는 빼어난 말솜씨로 그러한 칭찬에서 빗겨나간다. 〈자장〉을 보면 자유, 자하, 자장 등이 서로 충돌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 서로 다른 학파를 구성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실재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 여겨지는 인물들은 정작 자신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이어갈 제자를 만들지 못했다. 그의 가르침은 직접 대면하여 함께 했던 인물이 아닌 다른 이들을 통해 새롭게 계승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조차 그의 가르침을 이어, 발전시킨 것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도, 반석 베드로도, 형 야고보도 아닌 예수와 일면식도 없는 바울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 후에 그를 계승한다며 큰 소리를 치고 세상에 나온 인물이 있으니, 바로 맹자이다. 그는 스스로 자사의 제자에게 배웠다고는 하나 그 계통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맹자 자신의 주장일 뿐. 어쨌건 후대에 그려지는 계보는 이렇다. 공자 – 증삼 – 자사 – 맹자.

이 계보는 후대에 교과서적인 공식 흐름이 된다. 이를 매우 중시여긴 인물이 바로 주희였다. 그는 네 권의 책에 주석을 달고 이를 경전으로 높였는데, 바로 사서四書 - 《論語》,《孟子》,《大學》,《中庸》이 이것이다. 우리가 흔이 알고 있는 사서삼경은 여기에 《시경》, 《서경》, 《역경》을 더한 것이며 사서오경이란 여기에 다시 《예기》와 《춘추》를 합한 것이다. 그러나 주희의 이런 해석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흐름을 배척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바로 순자의 것이 그렇다.
순자는 맹자의 후배격인 인물이었는데 그는 맹자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였다. 그가 맹자를 비판한 이유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이상한 주장을 덧붙였다는 것이다. 그는 증삼과 맹자를 한데 묶어 비판한다. 한편 다른 공자의 제자들도 그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말은 무덤덤하며, 우 임금의 걸음에 순 임금의 달리기를 흉내내는 자들은 자장씨 부류의 천한 유생이다. 의관을 바로 하고, 표정을 엄숙하게 하며, 겸손한 듯 하루 종일 아무 말이 없는 자들은 자하씨 부류의 천한 유생이다. 고생을 꺼려 일을 무서워하고, 염치가 없어 먹고 마시는 것만 좋아하면서, 군자는 힘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유씨 부류의 천한 유생이다.” – 《순자》, 책세상, 장형근 옮김. 31-32쪽

그의 비판을 떠나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은 간단하다. 자신이야 말로 공자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를 보면 그는 이단으로 치부되었고 맹자야 말로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다른 시각의 연구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맹자를 과연 공자의 후예로 넣을 수 있는가 의문이다. 맹자는 스스로 공자의 가르침을 이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맹자가 이야기하는 공자의 모습과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모습이 적지 않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공자의 학문은 맹자와 순자라는 서로 다른 흐름으로 계승되었다고 본다. 이 두 흐름 가운데 실제로 살아남은 흐름은 순자의 흐름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순자의 제자로 이름을 떨친 것은 한비자와 이사였다. 둘 가운데 이사는 진시황을 보좌하여 진의 천하통일을 도운 인물로 유명하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휴대의 유학자들이 순자를 그토록 미워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자 새로운 체제를 만들고자 한다. 일단 기존의 천자를 왕이라 불렀지만 새로운 칭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황제’라는 칭호다. 진시황이란 ‘진나라의 첫번째 황제’라는 뜻으로 그가 스스로 만들어 붙이니 호칭이다. 한편 그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를 세웠으며, 언어도 통일시켰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저 큰 중국이 커다란 몸집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의 업적 때문이라 말하는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이러한 진시황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다. 옛 제도를 운운하며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결국 이들을 땅에 파묻고 이들의 말을 기록한 책을 불태우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다. 일종의 사상 탄압이 일어난 것인데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여튼 통상적인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공자의 말도, 그의 후예를 자처하는 지식인들도 싸그리 사라졌다.

진시황의 통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고작 20년 정도를 통치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매우 비참했는데, 지방을 순회하던 길에 죽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죽을 경우 수도로 빨리 돌아가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환관 조고와 이사는 꾀를 내어 일을 꾸민다. 첫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어린 호해라는 이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어린 황제는 아무 일도 스스로 못했는데, 한번은 조고가 사슴을 데리고 왔다. 황제가 이를 사슴이라 하자 조고가 이를 말이라 우겼는데 신하들도 모두 조고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러니 나라가 무너지는 것도 한 순간이다. 두번째 황제가 나라를 다스린 것은 고작 2-3년 밖에 되지 않는다. 천하는 다시 어지러워지고 이때 크게 일어난 인물이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였다. 이 둘의 싸움은 오늘도 장기판 위에서 반복된다. 결과는 한나라의 승! 결국 천하의 새로운 지배자는 유방이 된다. 유방은 본디 비천한 출신으로 산적떼의 우두머리였다. 역사에는 그의 거침없는 행동이 많이 담겨 있다. 그에게는 여러 인물이 모여들었는데, 유학자를 자처하는 이를 만날 때면 갓을 벗게 하고 그 갓에 오줌을 누었다한다.

그런 그였지만 역생이라는 유학자의 말을 듣고는 달라진다. 그가 했던 말은 유명하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리를 수는 없습니다.’ 즉 전쟁으로 천하를 일시적으로 지배할 수는 있지만, 안정적으로 다스리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 활약한 인물이 바로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관직을 어떻게 정하며, 임금과 신하의 복식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했다.

한나라 초기는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한무제에 이르면 크게 안정되어 국력이 매우 탄탄해진다. 이때 이르러 유가, 유학자의 학문은 한나라를 통치하는 지배 이념이 된다. 이제 공자는 제자백가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유일한 스승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논어》와 그의 해석자들

분서갱유의 결과 고대의 문헌이 많이 사라졌다. 분서갱유 자체의 신빙성에 의문을 던지는 연구자들은 고대 문헌이 많이 사라진 것은 오랜 전쟁의 결과이며, 설사 사상 탄압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부에 그쳤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적 사실이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옛 문헌이 정리 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논어》의 경우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공자의 고향 노나라에 전해지는 논어가 있고, 이웃 제나라에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한다. 한편 분서갱유를 피해 공자의 집 벽 속에 숨겨둔 논어가 후대에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한나라 시대에 유가가 지배 이념이 되면서 《논어》도 정리해야 했는데, 초기 학자들은 이 셋을 묶어 하나의 책으로 정리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보는 20편의 《논어》가 완성되었다. 다만 오늘날 한나라 시대에 정리되었다는 그 《논어》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대의 글이 모두 썩거나 불태워진 까닭이다.

오늘날에도 《논어》 문장만을 가지고는 아리송하듯 옛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설이 붙어야 했는데, 옛날의 방법은 각 문장에 주석을 붙이는 식이었다. 여러 주석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주석은 한나라 말기에 하안이 정리한 《논어집해》이다. 그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논어》에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하안 이후 가장 중요한 사람은 송나라의 《주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른바 ‘주자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는 앞서 이야기했듯 《논어》를 비롯한 여러 책에 주석을 붙였는데 원나라 이후 그의 주석은 교과서의 지위를 얻는다. 과거 시험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주희의 주석을 기준으로 답안을 제출해야 했다. 우리가 아는 유학자 대부분, 그러니까 조선의 선비들은 주희의 주석을 달달 읽고 외웠다고 보면 된다.

그의 주석에 대해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의 경우 후기에 이르면 그의 주석과 다른 해석을 내놓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논어고금주》라는 책을 내놓는데, 여기에 주희의 주장과는 다른 여러 해석을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번역되는 《논어》는 다산의 해석을 참고한 경우가 많다.

20세기에 이르러 서구와의 접촉은 적지않은 충격을 선물했다. 이른바 근대의 흐름에서 《논어》와 공자는 이전과는 다른 지위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공자의 지위는 점점 높아져 나중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사상계의 천자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충격에 대해서는 공자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중국에서는 전통의 낡은 구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운동을 벌이자는 흐름이 생겨났는데 그때의 구호가 ‘타도공가점’, 공자의 무리를 쳐부수자 였다. 이제 공자는 성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낡은 전통과 쓸모없는 허례허식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 한정하녀 말하면, 공자의 지위는 최근들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자신의 문화와 문명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새로운 위상을 체득했다. 《논어》를 읽는 흐름이 새롭게 생긴 것도 이러한 흐름의 결과이다. 중국의 일부 학교에서는 어려서 《논어》를 읽고 암송시키기도 한다고 한다.

모든 고전은 시대의 조건에 따라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 해석의 여지가 사라진다면, 다 소전되어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껍데기 뿐이라면, 고전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논어》의 자리는 견고해 보인다. 단순히 《논어》를 읽는 사람이 많고, 끊임없는 번역본이 나오고 있다는 뜻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지난 2000년의 변화 가운데서도 어쨌든 인간 공자의 삶을 증거하며,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유일한 책이 바로 《논어》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의 경우 오래되었다는 자체로 새로운 힘을 얻는 경우가 있다. 손 때 묻은 책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선물한다. 《논어》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그 숱한 전란에도, 혼란에도, 불타고, 파묻히는 위기에도 이 책은 살아남았다. 단순히 콘크리트 속에 묻혀, 방부제 틈 속에서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추어 끊임없이 해석되었고, 새로운 의미들을 낳았다. 누군가 시간의 흐름은, 역사는 강력한 이빨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날카로운 이빨은 여러 가지를 물어 뜯는다. 그래서 흔적조차 찾지 못하도록 없애버린다. 《논어》는, 공자는 그 매서운 시대의 이빨에도 살아남았다.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대의 이빨의 힘에 저항한다는 뜻이며, 거꾸로 시대에 집어 삼키지 않고 반대로 시대를 짓이기고 새로운 길을 내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