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12-1

12-1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이을호 역

안연이 사람 구실에 대하여 물은즉, 선생 “사욕私慾을 억누르고 예법대로 실천하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으니, 하루만 사욕을 억누르고 예법을 실천하더라도 천하 사람들이 모두 사람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람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은 내게서 되는 것이지 남에게서 될 법이나 할 일이냐!” 안연 “자세한 것을 일러 주십시오.” 선생 “예법대로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법대로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법대로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법대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안연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말씀대로 해 보겠습니다.”
[평설] 사람으로서 나는 二重構造的이다. 道心과 人心, 道義와 慾心, 大體와 小體, 心之官과 耳目之官 등등 전자가 후자를 克服한다면 그것을 克己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克己란 내가 나를 이기는 행위요, 일차적인 자기부정에서 새로운 도덕적 자아를 발견하는 능동적 행위인 것이다.

임자헌 역

안연이 공자에게 ‘온전한 사람다움(仁)’이란 게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서서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는 게 온전한 사람다움이지. 하루라도 제대로 ‘나’를 넘어서서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예의’를 생각할 수 있다면 세상은 온전한 사람다움이 지닌 가능성을 신뢰하게 될 거네. 온전한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건 다 내 할 탓이지 다른 사람이 해주지 않아. 이게 어려운 점이지.” 공자의 말을 듣고 안연이 다시 물었다.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는 뭐가 있을까요?” 공자가 말했다. “‘함께’와 ‘그 함께를 위한 질서’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네. 이 개념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아야 하지.” 안연이 자못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이 말씀대로 따라보도록 할게요!”
: 사람은 육체에 갇혀 있다. ‘나’와 ‘너’가 당연히 별개의 존재로 느껴진다. 그래서 종종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너’와 ‘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일부러 이기심을 부리든 아니든, 개인의 모든 단추는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채워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입장에서만 단추를 채우면 어떻게 될까? 한두개 잘 채워지는가 싶더니 얼마 못 가서 내 단추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단추에, 어라? 네 손이 불쑥 나와서 자기 단추라며 채우고 있고, 어쩌면 서너 명이 한 개의 단추에 달려들기도 해서 네 거네 내 거네 하며 다툼이 일어나는 일도 다반사다. 세상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얽혀 있는 곳이니까.
적절한 간격 조정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예禮’ 가 등장한다. 예는 ‘나와 너’가 함께 하는 이 사회란 곳이 무난하게 돌아갈 수 있는 질서와 규범이다. 안 지키면 욕먹고, 벌맏고, 벌금 내고, 그렇게 귀찮고 손해나는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나’가 잘살기 위해서는 ‘너’의 자리를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어쩌면 ‘너’의 자리부터 생각해주는 것이 ‘나’도 내 자리를 인정받으며 살 수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예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삶이 타인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인公人 아닌 사람이 없다.

<논어주소> 정태현 역

[注]馬曰 克已約身
馬曰 克已는 約身(몸을 단속함)이다.
[疏]人君若能一日行克已復禮 則天下皆歸此仁德之君也 一日猶見歸 況終身行仁乎
임금이 만약 하루라도 몸을 단속해 예로 돌아오는 일을 행한다면 천하가 모두 이 仁德을 가진 임금에게 歸依한다는 말이다. 하루만 (克己復禮) 하여도 (천하 사람이) 歸依하는 (효과를) 볼 수 있는데, 하물며 終身토록 仁을 행함에랴.
[疏]劉炫云 克訓勝也 已謂身也 身有嗜慾 當以禮義齊之 嗜慾與禮義戰 使禮義勝其嗜慾 身得歸復於禮 如是乃為仁也
劉炫은 “克의 訓詁는 勝(이김)이고, 義와 싸울 때에 禮義가 嗜慾을 이기게 하면 몸이 禮로 回歸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야 仁이 된다.’라고 하였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仁者 本心之全德 克 勝也 己 謂身之私欲也 復 反也 禮者 天理之節文也
인仁은 본심의 온전한 덕이다. 극克은 이김, 기己는 자신의 사욕, 예禮는 천리의 절문節文(절도와 격식)이다.
歸 猶與也 又言一日克己復禮 則天下之人皆與其仁 極言其效之甚速而至大也
귀歸는 인정함(與)과 같다. 또 ‘하루라도 사심을 이기고 예를 실천한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어질다고 인정한다고 말한 것은, 그 효과가 신속하고 지대함을 강조한 표현이다.
[어류] “’국가는 예로써 다스린다(爲國以禮)’고 할 때의 예가 곧 ‘극기복례’의 예입니까?’” “예는 저 천지자연의 이치(理)이다. 이해를 하면 번다한 형식과 절차가 모두 그 안에 있다. … 어느 것인들 천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투철하게 깨달으면 모두가 천리이다. …”
[어류] “하루 사이에 어찌 이처럼 (천하 사람들이 나서서) 인정할 수 있습니까?” “하루 사이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하루 동안 극기복례 했다 하여, 어떻게 온 세상 사람이 어질다고 인정합니까?” “극기복례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다. …”
[어류]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성인 문하에서 안 자도 질문을 잘하였다. … 반대로 사마 우가 질문하는 태도는 비뚤어졌다. 인을 질문하여 공자가 답해주자, 사마 우는 ‘말이 신중하기만 하면 곧 인이라 합니까?”라고 되물었다. 사마 우의 마음이 모두 바깥으로 향해 있고(向外去), 그 문제를 자기에게 절실한 공부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되물은 것이다. 또 군자에 대한 문답의 경우도 사마 우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군자라고 합니까?”라고 되물었다. 마치 성인을 꺾어 넘어뜨릴 듯한 말투이다. 이런 것들이 질문을 할 줄 모르는 모습이다.
[어류] “극은 이기다(勝) 보다 다스리다(治)로 풀면 더 온당하지 않습니까?” “다스린다는 말은 느슨하다. 1할을 막아도 다스림이고, 2할을 막아도 다스림이다. ‘이김’은 사심을 깨끗이 죽여 없앤다는 뜻이다.” 성인께서 ‘극’자를 쓴 것은, 비유컨대 서로 죽이는 것과 같다. 적(사욕)을 반드시 이겨서 제압해야 한다.
[어류] 불교는 ‘극기’만 있고 ‘복례’ 공부가 없다. 그래서 질서와 예법에 어긋나고, 군신을 부자로 여기고 부자를 군신으로 여겨 모조리 혼란시켰다.

옹달메모

: 이을호는 극기복례를 ‘사욕을 억누르고 예법대로 실천함’으로 풀었다. 평설에서 언급하듯 이는 인간을 이중구조로 분석하는 태도에서 가능하다. 욕심과 도의라는 이중구조.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서 인간은 자기 분열증적 인간이 되기 십상이다. 루쉰은 이를 두고 사람을 죽인다 하지 않았나.
: 임자헌의 풀이가 매력적이다. 禮를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예의’, ‘함께를 위한 질서’로 풀고 있다. 이을호처럼 개별 인간 내부의 모순, 투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문제로 본다. 예를 내면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해석할 때에야 ‘예’가 갖는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까. ‘우리’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나만의 나’를 넘어설 때야 공자가 꿈꾼 禮를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 <주소>를 보면 고주에서는 ‘극기’를 행위의 문제로 풀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이를 ‘자기를 이김’으로 풀이하는 전통이 생겼음을 볼 수 있다. 한편 고주에서는 이를 임금에 대한 이야기로 보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 주희의 풀이는 대단히 개념적이며 답답한 구석이 적지 않다. ‘이치’를 빌어 이 문장을 해석하는데 제자들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사마우를 비판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뭐 그렇게까지 볼 필요가 있었을지.
: 주희가 버린 풀이에 개인적으로 눈이 간다. 극기를 治己, 자기를 다스림으로 푸는 것. 임자헌의 풀이처럼 자기 수양과 공동체적 삶의 발견으로 풀이하는 게 <논어>의 소박한 본의에 맞는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풀이하면 후대 유학자들이 주목했던 감각기관에 대한 경계에 크게 주목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과연 공자가 주장한 예라는 것이 그처럼 세세한 규범을 동반한 것이었는가? 후대 예교비판의 관점을 참고할 때 아무리 보아도 주희의 보수적 해석에 동의하기 힘들다.

4월 7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11-3

11-3
德行 顏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
言語 宰我 子貢
政事 冉有 季路
文學 子游 子夏

이을호 역

인격이 뛰어나기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요. 말재주에는 재아, 자공이요. 정치가로는 염유, 계로요. 문학에는 자유, 자하다.

[평설]

일컬을 때 모두 字를 쓴 것으로 보아 공자의 말이 아니다.

소위 孔門의 四科 十哲이라 하지만 여기에 빠진 제자라고 해서 다들 才德이 모자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陳•蔡에 따라가 있던 제자들 중에서 추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十哲 중에 曾子 有若 公西華 高柴 등이 빠진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임자헌 역

공자의 제자들을 재능을 보이는 분야에 따라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덕행: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 재아, 자공. 정치•행정: 염유, 자로. 문학: 자유, 자하.

<논어주소> 정태현 역

[疏] 正義曰 此章因前章言弟子失所 不及仕進 遂舉弟子之中 才德尢高可仕進之人 鄭氏以合前章 皇氏別為一章

이 장은 前章에 弟子들이 仕進에 미치지 못하여 당연히 얻어야 할 자리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어 드디어 제자들 중에 재주와 덕이 더욱 높아 仕進할 만한 사람들을 擧論하신 것이다. 鄭氏는 이 대목을 前章과 합쳐 (한 章으로 만들었고,) 皇氏는 別個의 한 章으로 만들었다.

[疏] 然夫子門徒三千 達者七十有二 而此四科唯舉十人者 但言其翹楚者耳 或時在陳言之 唯舉從者 其不從者 雖有才德 亦言不及也

그러나 夫子의 門徒 3천 명 중에 (六藝를) 通達한 이가 72인이었는데, 이 四科에 오직 열 사람만을 들어 말씀하신 것은 단지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만을 말씀하신 것뿐이다. 혹은 陳나라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이어서 오직 당시에 隨從한 자들만을 들어 말씀하시고, 수종하지 않은 자는 비록 才德이 있어도 言及하지 않으신 것인 듯하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曾子傳道而不與焉 故知十哲世俗論也

증자가 도를 전수받고도 여기에 끼지 못했다, 십철은 속설임을 알 수 있다.

[어류] 다만 그 순서는 반드시 덕행을 우선하였다. 참으로 궁행실천은 성인의 경지를 구현하는 일로서, 학문의 중심이 거기에 있다. 다른 세 부류가 각각 한 가지 일에만 능한 경우와는 다르다.

십철: 여기에 나오는 열 명의 제자, 공묘孔廟에서 공자 양쪽에 십철을 모시고 있었다. 나중에 안연을 배향으로 승격시키고, 증삼을 보충하였다. 다시 증삼도 배향하고, 자장을 보충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주희를 넣어 ‘십일철’로 하다가, 다시 유약을 넣어 ‘십이철’로 하였다.

옹달메모

: 이을호의 평설이 날카롭다. 보통 공자는 제자들과 대화할 때 혹은 그들을 부를 때 이름(名)을 사용했지 자字를 쓰지 않았다. 이 명단은 확실히 후대의 편집자 혹은 그 이후의 누군가의 글일 것이다.

: 그러나 여기에 증삼, 유약, 공서화, 고시가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증자와 유자가 아니라, 증자와 유약이라 한 데서 벌써 증자를 존숭하는 태도가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은 도통론에서 벗어나 <논어>를 읽으면 증삼의 말은 <논어>의 여느 말들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공자의 가까운 제자로 증삼을 뽑는 데 반대한다. 증삼은 공자의 제자로서의 위치보다는 <논어> 편집자의 스승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약, 공서화, 고시 등은 <논어>에서 존재가 미미하다. 도리어 자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 임자헌의 풀이가 갖는 장점이 보인다. 그는 모든 <논어> 문장을 ‘어록’으로 풀이하지 않는다. 풀이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다.

: 古注에서는 이 문장을 앞 문장과 연결시켜 풀이하곤 했다. 공자의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따져보면, 앞 문장의 주석 혹은 보충 설명 정도로 보는 게 어떨까? 이렇게 보면 공자가 말년에 과거 제자들을 회상한 말에 이어, 공자 학단을 대표하는 제자들의 이름을 나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논어>에서 제자들의 역할은 매우 크다. <논어>는 매우 산만하여 제자들을 중심으로 재편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누구를 중심으로 엮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자로-안연-자공 이 셋을 중심에 놓고 거기에 오래된 제자로 염유와 재아를 더하며, 말년 후학들로 자유, 자하, 자장을 놓으면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 이 문장을 다시 보니 어서 빨리 <공자와 제자들의 유쾌한 교실> 원고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다.

4월 6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11-2

11-2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이을호 역

선생 “나를 따라서, 진•채 지방까지 왔던 애들이 모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평설]
: 魯哀公 6년에 공자가 楚昭王의 초청을 받고 가던 도중 陳•蔡 지방에서 방해를 받고 衛로 돌아왔는데, 그 때 성문까지 제자들이 당도하지 못했던 일을 회상한 말이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내가 곤경을 당했을 대 따랐던 자들 중 지금 내 문하생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 공자의 만년의 풍경. 쓸쓸하기 그지없다. …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머물고 있을 때 강대국인 초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공자를 자기 나라로 모셔가려 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나라와 채나라는 자기들의 행동이 공자의 평소 주장과 맞지 않는데 공자가 강대국 초나라의 책사가 되기라도 하면 분명 초나라가 자기들을 치러 오게 될 것이라며 공자가 초나라에 갈 수 없도록 공자를 포위해버렸다. 그래서 공자 무리는 오도 가도 못한 채 식량까지 떨어지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논어주소> 정태현 역

[疏]正義曰 此章孔子閔弟子之失所 言弟子從我而厄於陳蔡者 皆不及仕進之門 而失其所也
正義曰: 이 장은 孔子께서 弟子들이 당연히 얻어야 할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을 가엾게 여기신 것이다. 당신을 따르면서 陳나라와 蔡나라에서 困厄을 당한 제자들이 모두 仕進의 門에 미치지 못하여 당연히 얻어야 할 자리를 얻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孔子嘗厄於陳蔡之間 弟子多從之者 此時皆不在門 故孔子思之 蓋不忘其相從於患難之中也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재앙을 당했을 때에는 많은 제자가 따랐는데 지금은 모두 문하에 없기에, 공자가 그들을 회상하였다. 환난 속에서 상종했던 일을 잊지 못한 때문이리라.

<집 잃은 개>, 리링, 김갑수 역

이 말은 분명히 공자 만년에 한 것으로 보이며, 역시 회고적 성격을 띠고 있다. 감상적인 내용의 말이다.
… 유보남은 또 “군자께서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재앙을 만난 것은 위아래의 교섭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구절은 공자에게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관리를 지낸 제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청탁을 넣을 만한 채널을 찾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스승의 문하에 이르지 못했다. 즉 이들 충성심이 불타오르던 제자들은 아무도 공자 근처에 없고 모두 스승의 문하를 떠났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집주>) 나는 뒤쪽의 주장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공자의 서글픈 탄식으로서 기원전 484년, 즉 공자가 68세 되던 해에 한 말이거나, 심지어는 안회와 자로가 죽은 공자 최후의 2년, 즉 기원전 480년 혹은 기원전 479년에 한 말일 것으로 추측된다. (589-590)

<수사고신록>, 이재하 외 역

당시 채나라는 오나라를 섬겼고, 진나라는 초나라를 섬기던 참이었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포위하자 진나라는 초나라를 지원했으며, 진나라가 채나라를 포위하자 오나라는 진나라를 공격했다. 이처럼 진나라와 채나라는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331)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인정으로 비추어보아도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세상의 선비란 사람들이 거의 믿고 있으니, 이 또한 이상스러울 따름이다! (332)

<장자> 안병주 외 역.

[天運] 圍於陳 蔡之間 七日不火食 死生相與鄰 是非其眯邪
陳나라와 蔡나라의 국경에서는 포위당해 7일간이나 불로 요리한 음식을 먹지 못해서 죽음과 삶이 서로 이웃이 될 정도로 죽도록 고생했으니 이것이 바로 가위눌려 고통을 당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2권, 320)
[讓王] 孔子窮於陳蔡之間 七日不火食 藜羹不糝 顏色甚憊 而弦歌於室
孔子가 陳나라와 蔡나라 사이에서 궁지에 빠져 7일간 불로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명아주 국에 쌀을 섞어 넣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안색이 몹시 고달팠는데도 방안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옹달메모

: 이 방대한 내용을 누가 읽는가 싶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정리.
: 이을호는 이 문장이 초나라로 가던 도중에 제자들과 떨어졌을 때 남긴 말이라고 본다. 과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남긴 말이 전해졌을까?
: 임자헌 역시 사마천 등의 주장을 참고하여 초나라로 가던 도중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공자의 생애를 참고하면 그가 초나라에 초청에 응했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우며, 그가 초나라에서 자리를 얻는 것을 이웃 나라가 견제했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공자와 같은 몽상가가 관직을 얻은 들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주나라 중심에서 볼 때 초나라는 오랑캐 지역으로 여겨졌을 것인데 주례를 중시하는 공자가 과연 초나라에 가려했을까 의문이다. 아니, 다른 걸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멀리 가기엔 힘들지 않았을지. (이 부분은 더 고민해야 할 부분) 설사 그가 초나라로 가려했다 하더라도 역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책사’는 결코 되지 못했을 거다. 공자, 혹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과연 당시의 치열한 정세에 무슨 커다란 위협이 되었을까.
: <주소>에서는 제자들이 자리를 얻디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는 뜻으로 풀었다. 이는 이어지는 11-3 문장과 이어 풀었기 때문이다.
: 주희는 주변의 제자가 남아 있지 않았음을 탄식한 것이라 보았다. 리링의 풀이가 인상 깊다. 말년 공자의 곁에는 누가 있었을까?
: 최술은 이 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는다. 첫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지 않으며, 둘째, <장자>에서 자주 언급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첫째 부분은 따로 찾아보아야 하는 상황이나 둘째 이유는 과연 어떨지 고민된다.
: 최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장자>와 <공자가어>에는 이때 상황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장자>에는 천운, 산목, 양왕, 도척, 어부 등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 개인적으로 <장자>가 그리는 공자의 모습이 <논어> 등에서 그리는 공자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고 본다. 물론 전통적인 입장처럼 유가를 비판하기 위해 공자의 모습을 왜곡한 부분도 있겠지만 <장자>에서 그려내는 공자의 모습은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거꾸로 <사기>에서 정리된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신뢰하기 힘들다. 누구의 해석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전쟁에 휘말려 중간에 고립되었다는 게 더 적당한 접근이다. 고생의 이유보다는 고생의 상황이 더 중요하다는 것.
: 당시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공자 학단의 방향이나 색깔을 정하는 데 커다란 지표가 되지 않았을까? 15-2 문장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민이 그 경험과 함께 닥쳤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 리링의 지적처럼 과거 자신과 함께 산전수전을 겪은 제자들은 모두 곁에 없다. 특히 늘 곁을 지켰던 자로, 끔찍이 사랑했던 안회 모두 곁에 없다. 물론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만난 제자가 있었겠지만 옛날 동고동락했던 제자들과 비할 수 있었을까. 깊은 쓸쓸함, 적잖은 안타까움, 인간 공자의 면모를 만나는 게 <논어>의 큰 매력이다.

4월 4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9-12

9-12
子疾病 子路使門人爲臣
病間 曰
久矣哉 由之行詐也
無臣而爲有臣 吾誰欺 欺天乎
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
且予縱不得大葬 予死於道路乎

이을호 역

선생이 병석에 누웠을 때 자로가 제자들로 신하처럼 꾸미려고 하였다. 병이 웬만하자 이 사실을 알고 말하기를 “진작부터였던가. 유가 속임수를 쓴 것은! 신하도 없으면서 신하를 만들다니, 내가 누구를 속일까! 하늘을 속인단 말이냐? 나야 거짓 신하들의 손에서 죽는 것보다는 몇 사람 제자들의 손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기야 훌륭한 장례는 못 지낼 망정 길가에서 죽기야 할라구!
: 欺天乎의 天은 上帝天임이 분명하다. 모름지기 공자의 天에 대한 內省的 信仰의 篤實함을 엿볼 수 있다.

임자헌 역

공자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로가 스승님의 장례식을 격을 높여서 치러드리고 싶은 마음에 문하생들을 장례를 집행할 신하로 세우는 장례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공자의 병이 호전되었다. 병이 호전되고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공자는 자로의 무리한 행동에 실망해서 적잖이 화가 났다. “자로가 참 오래도 사기를 쳤구나! 나한테 무슨 신하가 있었다고 신하를 세워? 그럼 내가 누구한테 사기를 친 거냐? 하늘한테 사기를 친거 아니냐? 나는 나한테 있지도 않았던 신하들 시중 받으며 죽고 싶지 않아. 그저 너희들 품에서 죽으면 된다고! 내 비록 거창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다고 해도 그렇다고 내 시체가 길거리에 버려지는 건 아니잖아.”
: 공자가 자로의 마음은 이해했으리라.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꾸짖을 땐 여지를 주지 말아야 다시는 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로처럼 행동에 뛰어난 사람은 또다시 마음만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원칙만 분명히 밝혀주는 게 아니라 말도 모질게 해서 꾸짖는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병이 위독해져서 죽음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이 무슨 시운에 이렇게 화를 냈겠는가? 또 스승의 그 마음을 잘 아니까 자로는 만날 퉁을 먹으면서도 공자가 그렇게 좋다며 늘 그 옆에 있었던 거겠지.

<논어주소> 정태현 역

[注] 鄭曰 孔子嘗為大夫 故子路欲使弟子行其臣之禮
鄭曰: 孔子께서 大夫가 되신 적이 있기 때문에 子路가 弟子들로 하여금 家臣의 禮를 행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疏] 我既去大夫 是無臣也 女使門人為臣 是無臣而為有臣
내가 이미 大夫에서 물러났으니 家臣이 없어야 한데 그런데 네가 門人들로 하여금 家臣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家臣이 없어야 하는데 家臣두는 일을 한 것이다.
[疏] 言就使我有臣 且我等其死於臣之手 寧如死於其弟子之手乎
가령 나에게 家臣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家臣의 손에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내 弟子들의 손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注] 夫子時已去位 無家臣
공자가 이때는 이미 직위를 떠나 가신이 없었다.
[注] 我之不當有家臣 人皆知之 不可欺也 而為有臣 則是欺天而已 人而欺天 莫大之罪
내가 마땅히 가신을 두면 안 됨은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니 속일 수 없다. 그런데 가신을 둔다고 하면, 이는 하늘을 속이는 일일 뿐이다. 사람으로서 하늘을 속이는 일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공자, 인간과 신화>, H.G.크릴, 이성규 역

공자의 제자들은 선생이 인정받는 것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만약 공자가 그런 자리를 실제 얻었다면 그들은 <논어>에 이 성공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에는 공자가 무언가 높은 자리를 지냈다는 시사조차 없는 것이다. 공자가 사구였다는 맹자의 기록은 단지 100년 뒤에 공자의 전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한 것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64쪽)

옹달메모

: <논어>에서 공자는 몇 차례 天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이을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제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이을호가 참고하는 다산의 해석을 따르자면 그렇게 풀이해야겠지만 <논어>에서 명확한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공자가 말한 하늘은 보다 추상적인 의미가 아닐지? 이를 보려면 춘추시대 다른 문헌을 참고해야 하나 그럴 여력이 없다. 의문을 남겨둔다.
: 공자와 자로의 관계에 주목하는 임자헌의 풀이가 인상 깊다. <논어>에서 공자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자로였을 테다.
: 하안 이래로, 아니 맹자 이래로 공자가 노나라의 높은 자리에 올랐을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크릴의 비판처럼 정작 <논어>에서는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전통적으로는 공자가 사구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리라 추정하나 근거는 없다. 혹자는 下大夫였을 거라 추정하나 그도 분명하게 알기 힘들다. 크릴은 그가 아무런 자리를 얻지 못했으리라 추정한다.
: 다산은 자신의 관직생활을 근거로 송대 학자들의 주석을 대차게 비판한다. 실무경험이 없으니 그들의 주석이 공리공담에 불과할 뿐이라는 식으로. 그러나 정작 공자는 어땠을까? 개인적으로 공자가 관직을 얻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설사 관직을 얻었다 하더라도 매우 낮거나 명예직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염유나 자로 등 계씨의 가신이 된 제자들과의 갈등이 쉽게 이해된다.
: 이 문장은 아무래도 방황길에 벌어진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떠나 떠도는 가운데 공자가 위독한 병에 걸렸다. 심각한 상황에서 자로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다. 비록 스승이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나 장례라도 대부의 예로 치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나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공자는 제자를 꾸짖는다. 허례는 필요 없다. 나아가 그에게는 대부의 자리보다 제자들과 함께 했다는 그 사실이 더 중요했다. 공자는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으나 선생으로서 그는 지울 수 없는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제자 그리고 <논어>가 그의 행적을 증거한다.

3월 30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7-8

7-8
子曰
不憤不啟 不悱不發
舉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이을호 역

선생 “달려들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았고, 애태우지 않으면 튕겨 주지 않았고, 한 귀를 보여 줄 때 셋까지 깨닫지 못하면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저는 학생이 애가 탈 정도로 알고 싶어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고,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가 아니면 말문을 틔워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각형 한 귀퉁이를 제가 보여줬을 때, 학생이 그걸 보고 곧장 ‘어? 나머지 세 귀퉁이가 있겠군요!’라고 대답하지 않고 ‘응? 뭐지? 뭘까요?’라는 반응을 보이면 더는 알려주지 않죠.

<논어주소> 정태현 등 역

鄭曰 孔子與人言 必待其人心憤憤 口悱悱 乃後啟發為說之 如此則識思之深也 說則舉一隅以語之 其人不思其類 則不復重教之
鄭曰: 孔子께서 남과 이야기하실 때에 반드시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알려고 노력하고 입으로 표현하려고 애쓰기를 기다린 뒤에 깨우치고 틔워주기 위해 말씀을 해주셨으니, 이와 같이 하면 識見과 생각이 깊어진다. 말해 주실 때는 한 모퉁이를 들어 일러주시고, 그 사람이 나머지 세 모퉁이를 類推하여 생각지 못하면 다시 일러주지 않으셨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又曰 不待憤悱而發 則知之不能堅固 待其憤悱而後發 則沛然矣
번민하거나 끙끙거림을 기다리지 않고 열어 주면, 아는 것이 견고할 수 없다. 번민하고 끙끙거림을 기다린 다음에 열어 주어야 힘차게 나아간다. – 명도
[어류]
끙끙거림(悱)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니고, 3~5할은 이해하지만 다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71) 학생은 번민하고 끙끙거린다면(憤悱), 그 마음이 이미 대략은 뚫린 상태이다. 다만 마음으로는 깨달았지만 확실한 믿음이 없고, 입은 말하려고 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성인이 거기서 계발시켜준다.(69) 번민하고 끙끙거려야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번민하거나 끙끙거리지도 않았는데 계발시켜주면, 결국 세 귀퉁이를 유추하는 대답을 못하게 되고, 따라서 그는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또한 가르침을 듣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옹달메모

이을호의 풀이가 재미있다. 분憤을 ‘달려들다’로 풀었는데 이는 다산의 풀이를 참고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산은 ‘心之怒: 성냄’이라고 풀이했다. 주희는 ‘心求通而未得之意: 깨닫고자 하여도 얻지 못함’이라고 풀이했다. 문득 궁금해서 더 찾아보았더니 <강희자전>에는 ‘鬱積而怒滿: 울적하여 가득 성남’이라 풀이했다. 다산의 풀이가 더 적극적이나 실제 경험으로 옮기면 답답해하는 경우는 있어도, 저렇게 달려든다고 할 정도의 사람을 만나기는 매우 힘들다.
임자헌의 풀이는 좀 과하다. ‘삼우반三隅反’에 대한 풀이가 너무 번잡하다.
하안과 주희는 모두 기다림(待)과 따져봄(類)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생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학생은 스스로 따져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둘이 마주칠 때야 비로소 배움이 일어난다.
확실히 공자는 오늘날 사람들이 기대하는 ‘친절한 선생’과는 거리가 멀다. <논어>를 보면 그의 기준은 확고하다. 그는 결코 제자들을 쉽게 칭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긴장이 담겨 있다.

3월 29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7-5

7-5
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이을호 역

선생 “나는 정말 늙어 버렸나 보다! 오래도록 나는 주공을 다시는 꿈에 보지 못하니……”
[평설] 공자의 尊周思想은 사실상 周公에 대한 心醉에서 비롯한다. 공자의 道의 淵源은 堯舜에서 비롯하지만 현실적 근원은 周公의 제도-周禮-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道를 堯舜周公의 道라는 所以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아아, 내가 너무 늙었구나! 꿈에 나의 롤 모델이신 주공周公님을 못 뵌지가 한참이나 되었어!”

옹달메모

<주소>와 <집주>에서는 따로 참고할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이을호는 공자의 사상이 요순에까지 이른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후대 도통론의 관점에서 보면이야 공자의 사상을 그렇게 심원한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겠지만 <논어>에서 요순은 그렇게 크게 중요한 인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역사적 인물로서 주공 단이 요순을 계승하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가졌는지도 의문이다. 공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주공을 크게 숭상했다는 점이며, 이는 곧 周禮에 대한 깊은 선망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공자는 주나라의 체제야 말로 돌아갈 하나의 모범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공자보다 앞서 주나라의 체제가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대의 변화, 춘추전국에서 진한의 통일 제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주례를 붙잡고 있는 공자에게는 낡은 냄새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정말로 봉건封建-‘전근대’의 의미가 아니라 주왕실을 중심으로 한 주나라 체제-을 고수하려 한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공자가 노예제 사회를 유지하려 했다느니, 혹은 시대에 뒤쳐진 인물이라느니 하는 말은 일견 타당하다.
그렇다고 공자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릴 사람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당대의 변화를 낯설게 느꼈던 인물이었다. 거꾸로 돌아가려 했다기보다는 멈추어 있으려 했다. 그가 꿈꾸었던 새로운 주나라의 이상이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꿈이 의미 없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논어>에서는 이상과 현실 가운데 늘 이상이 패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이 살아 있다. 그렇기에 <논어>는 儒家의 聖典이 될 수 있었다.
한편 과거-현재-미래라는 도식 안에서 그는 과거에 뿌리 박힌 인물이지만 미래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한 다양한 성격의 제자들로 孔門의 미래가 쓰였다. 꿈에서도 주공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현실-시대의 변화, 자신의 노쇠함-이 만만치 않았으나 그의 곁에는 이런 그의 푸념을 들어줄 수많은 인물이 있었다. 일부는 <논어>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고, 일부는 이 말을 후대에 전해주는데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공자에게 이들, 제자들이 없었다면 그 역시 역사에 휩쓸려간 필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으리라.

3월 27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4-8

4-8.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이을호 역

선생 “진리를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
[평설] 聞道는 聞天命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知天命과도 동의어가 아닐 수 없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아침에 내가 참답게 살 길을 깨달았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지 뭐.”

<논어주소>, 정태현 등 역

[注] 言將至死不聞世之有道
거의 죽을 때에 이르렀는데도 세상에 道가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疏] 正義曰 此章疾世無道也
正義曰: 이 장은 세상에 道가 없음을 미워하신 것이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注] 道者 事物當然之理
도는 사물이 마땅히 그래야 할 이치이다.
[혹문]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함은 불교의 설에 가깝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도는 본디 저들이 말하는 도가 아니다. 우선 성인의 뜻은 오직 도를 깨닫는(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 저들처럼 깨달음에 의지하여 죽는다는 차원과는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도는 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 사이에 마땅히 그래야 할(當然) 실질적인 이치(實理)이다. 저들이 말하는 도는 그것들을 환상으로 여기고 망령으로 여겨 멸절시킴으로써, 저들이 말하는 청정적멸淸淨寂滅의 경지를 구하는 것이다.”
[어류] “‘도가 사물이 마땅히 그래야 할 이치’라면, 제 생각에는 중대한 도라고 해도 군신, 부자, 부부, 친구 사이의 윤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서로 친애, 의리, 분별,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만약 하루라도 제대로 배우면 누가 그런 것을 알지(듣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듣고 죽어도 된다는 논리라면 그다지 쓸모없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도란 어디에 참으로 절실하고 지극히 마땅하게 그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까? 또 어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들으면 곧 죽어도 유감이 없게 만드는 것이 됩니까?” “도는 참으로 일상생활에서 늘 행하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그다지 쓸모없다’고 말한 것은, 오직 그대의 인식이 참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이른바 깨달음(들음)이란 크게는 우주, 작게는 초목, 나아가 저승의 귀신과 이승의 인간사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모르는 거싱 없는 경지 아닙니까?” “꼭 그렇게 여길 필요는 없다. 요컨대 인간다운 도리를 알면 된다.”

옹달메모

– 짧고도 굵직한 문장이다. 이을호는 ‘진리’로 풀었다. 道를 眞理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나름 중요한 풀이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다. 참고로 <집 잃은 개>에서도 ‘진리’로 풀었고(원문은 확인 못했다), 리쩌허우의 <論語今讀>에서도 그렇게 풀었다. 다만 평설의 풀이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다.
– 임자헌의 풀이는 ‘참답게 살 길’로 풀이했다. 道를 人道 혹은 仁道로 풀이한 것인데. 수긍할만한 풀이이다. 道를 길로 풀이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은데 너무 가벼워 보이기 때문일지 길로 풀이하는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다.
– 주희는 그 유명한 ‘當然之理’라는 말로 道를 옮겼다. 주희의 道는 일상의 윤리이자, 사회적 존재가 마땅히 따라야 하는 규범이 된다. 주희는 이를 불가의 깨달음과 구분하려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풀이할 때 참고하는 것은 古注이다. ‘世之有道’, 세상이 바르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로 풀이하는 것이 가장 낫다 생각한다. 밋밋한 구석은 있지만 그것이 <논어>에 담긴 공자의 삶과 입장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풀이일 테다. 그는 후대의 사상가들이 골몰한 天理에 별 관심이 없었으며, 더불어 개인의 삶에 강한 윤리적 기준을 세우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를 괴롭힌 것은 無道한 세상이라는 현실이었다. 그 현실 위에 그는 둥둥 떠다니고 있다.

3월 24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4-1

4-1
子曰
里仁為美
擇不處仁 焉得知

이을호 역

선생 “사람 구실이란 집에서 사는 게 아름다운 거야. 사람 구실이란 집을 골라 잠을 잘 줄 모르면 뉘라서 지혜롭다 하겠나!”
[평설] 맹자는 “仁이란 사람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집이요, 義란 사람들이 바르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편안한 집을 텅 비워놓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리고 그 길로 가지 않으니 슬픈 일이야!”(<離累上>) 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仁은 집이 분명하고 里는 사는 곳이 아니라 산다는 동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곧 사람과 사람 사이(仁)에서 사람 구실을 하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하므로 인간은 仁이란 주택의 울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윤리적 동물인가 보다. 종래는 “동리가 仁해야”하는 식으로 해석하였으므로 좀 긴 설명을 붙인 것이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로 가득한 마을이 진짜 멋진 마을이지요. 살 곳을 정할 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곳을 골라 그런 곳에서 살지 않으면 어떻게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어요?”

<논어주소>, 정태현 등 역

* 鄭曰 里者 民之所居 居於仁者之里 是為美
鄭曰: 里는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仁者의 마을에 거주하는 것이 아름다움이 된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 里有仁厚之俗為美
마을은 어질고 후덕한 풍속이 있어야 아름답다.
[혹문]
“里仁의 주장은 맹자가 ‘직업 선택(擇術)’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을 선택’으로 해설하는 것은 왜입니까” “성인 공자의 본의가 그런 것 같다. 맹자는 이 구절을 빌려 자기 생각을 설명했을 뿐이다.”
[어류]
맹자처럼 풀이해도 해는 없다.

옹달메모

* 이을호의 역은 ‘里’를 술어로 보았다. 맹자의 풀이를 참고하였는데 낯선 풀이이다. <맹자>로 <논어>를 풀이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논어>는 <논어>대로 <맹자>는 <맹자>대로 풀이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공자는 仁을 그렇게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 임자헌은 仁을 ‘사람답게 사는 사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곳’으로 풀었다. ‘사람 냄새’라는 표현이 인상 깊다. 보다 정감적인 표현인데 마음에 든다.
* 정현은 里를 民之所居,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풀었다. 이 풀이를 따르면 공자가 살 곳을 찾았다는 말이 된다. 다산은 이 풀이가 틀렸다고 보았지만, <논어>의 다른 구절과 어긋난다는 면에서, 공자를 방랑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이 풀이가 적당하다.
* 주희는 仁을 보다 개념적으로 풀이하는 바람에 ‘仁厚之俗’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번잡하다. 이을호 식의 풀이도 주희와 제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공자가 갖고 있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주유천하周遊天下, 여러 나라를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이다. 이 말을 남긴 그는 대체 무엇을 찾아 떠돌았던 걸까? 어쩌면 그는 인仁, 사람다움이 소거된 천하에 살았기에 그렇게 쉬지 않고 돌아다녔던 것은 아닐까?

3월 21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2-1

子曰
為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眾星共之

이을호 역

선생 “정치는 곧은 마음으로 해야 함은 마치 북극성이 제 자리에서 뭇 별들을 이끌고 함께 돌아가는 것 같은 거야!”
* 政: 옛날 정치란 行政이란 뜻을 강하게 풍긴다. 위정이란 곧 행정인 것이다.
* 共: 같이 한다.
[평설] 몇몇 주해자들은 이를 ‘無爲而治(무위이치)’의 극치에 비하여 ‘居其所(거기소)’를 不移(불이)-不動(부동)-無爲(무위)’라 하였으니, 이는 노장사상에 의한 해석으로서 유가의 ‘正己正物(정기정물)’의 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居其所(거기소)는 正己(정기)의 자세로서’ 共之(공지)’는 그 교화에 따르는 태도인 것이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내면에 갖추어진 바른 가치로써 정치를 하는 건 말이죠, 이를테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다른 많은 별들이 알아서 빙 둘러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논어주소>, 정태현 등 역

* 北辰常居其所而不移 故眾星共尊之 以況人君為政以德 無為清靜 亦眾人共尊之也
北辰이 항상 제 위치에 머물고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뭇별이 共尊하니, 이것으로써 임금이 덕으로써 정치를 하여 無為清靜하면 역시 뭇사람이 共尊함을 비유한 것이다. (疏)

<논어집주>, 박성규 역

* 政之為言正也 所以正人之不正也
정政의 의미는 올바름(正)이니(12-17), 남이 바르지 않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 共 向也 言眾星四面旋繞而歸向之也 為政以德 則無為而天下歸之 其象如此
공共은 향함이니, 모든 별들이 사방에서 돌면서 둘러싸 북극성을 향해 있다는 말이다. 덕으로 정치하면, 일부러 일을 벌이지 않아도(無爲) 천하가 귀의하는 형상이 그와 같다.
[어류]
‘덕으로 정치함’은 덕을 가지고 정치를 편다는 뜻도 아니고, 우두커니 서서 전혀 아무런 작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덕이 임금 몸에 닦여 있어서 인민이 저절로 감화한다는 뜻이다. 감화란 정책이 아닌 덕으로 감화함이다. 정치란 남의 부정을 바로잡는 일이니 작위가 없을 수 없다. 다만 사람이 귀의하는 까닭은 그의 덕 때문이다.”
“노자의 무위 정치도 같은 것 아닙니까?” “노자의 무위는 전혀 일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의 무위는 일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자신을 바르게 하여 남면할 따름이다.”
모기령:”집해의 ‘덕이란 무위이다’는 포함의 설은 황노의 설을 뒤섞은 것이다. 하안은 <집해>를 지을 때 본디 노자에 익숙해 있어서 유가를 도가로 끌어들였다. ‘덕으로 정치함(爲政以德)’이 바로 유위有爲이다. 공자는 이미 명백히 ‘위爲’ 자를 썼다.”

<논어한글역주>, 김용옥

* 덕이란 무엇인가? 공자나 노자나 그 덕의 내용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덕德이란 바로 ‘무위無爲’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위’란 무엇인가? 무위란 문자 그대로 ‘함이 없음’인가? 무위란 함이 없음이 아니요, 바로 북극성과 같은 기능이라는 것이다. 북극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자리를 지키고서 움직이지 않지만 그 주변의 모든 별이 그것을 구심점으로 해서(共之) 돌아가게 만드는 어떤 힘을 갖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 이 ‘공共’을 ‘공拱’자로 해석하면, 모든 별들이 이 북극성을 향해 소매를 들어 공수拱手하면서 고개 숙여 절하고 있는 어떤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마도 이 공共자의 원의는 이러한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나는 정현주에 의거하여 이런 해석을 나의 원문번역에 반영하였다.

옹달메모

– 이 문장을 해석하는 데 몇 가지 까다로운 걸림돌이 있다. ‘정政’이란 무엇인가? ‘덕德’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공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앞의 둘은 다른 문장에서도 언급되므로 간단히만 정리한다.
– 이을호는 ‘정政’을 행정이라 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자의 말을 풍성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정政’은 ‘치治 – 다스림’이기도 하며, ‘정正 – 규범적 교화’이기도 하다. / 共을 ‘함께 돌아감’으로 풀었다. 이는 無爲를 강하게 비판한 다산의 해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 이을호는 ‘곧은 마음(直心)’으로 임자헌은 ‘내면에 갖추어진 바른 가치’로 德을 풀었다. 둘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이을호의 풀이를 따르겠다. 이을호의 풀이는 德을 글자 모양으로 풀이한 것인데, 그보다는 어떤 역량이나 힘, power로 풀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 형병의 소에서는 共을 共尊, 함께 높임이라 풀이하였다. 도덕적 교화를 강조하는 신주의 풀이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이다. 위정자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부분보다는 위정자의 역할, 기능에 대해 공자는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라 했던 것처럼, 위정자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덕이라는 역량을 갖춤만으로도 뭇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을 수 있다.
– 주희는 교화와 감화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하안 및 포함 등의 설을 비판하는데, 無爲라는 표현에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 도올의 풀이를 옮겼다.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풀이다.
– <논어>는 위정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공자가 군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데서 볼 수 있듯, 공자는 권력을 쥔 자에게 더 강한 도덕을 요구했다. 동시에 도덕적인 사람이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보았다. 군자다운 사람(도덕적인 인간/有德者)이 군자(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이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군자는 어떤 통치를 하는가?

2017. 03. 21

3월 20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3-24

儀封人請見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從者見之
出曰
二三子 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為木鐸

 

이을호 역

의 고을 벼슬아치가 만나 보고 싶어하면서 “훌륭한 분들이 이 곳에 올 적마다 나는 만나 뵙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모시고 있던 제자가 만나 뵙도록 하였다. 나와서 말하기를 “여러분은 벼슬자리를 잃고 있는 처지일망정 걱정할 것 없습니다. 천하가 갈 길 몰라 허덕이는 지 이미 오래라, 하늘이 우리 선생님으로 하여금 지도자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임자헌 역

의 땅 국경 관리원이 공자 면담을 청했다. “훌륭한 사람이 이리 오면 제가 안 만난 적이 없어요. 얼굴 한번 보게 해주쇼!” 공자를 모시고 있던 제자들이 면담을 성사시켜주었다. 그가 공자를 만나고 나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댁들도 참, 공자 선생이 벼슬을 잃을까 뭐 그런 걱정을 하고 앉아 있어요?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어제오늘 일이오? 이제 곧 하늘이 선생을 시켜 정신 차리게 해줄 것 같구먼.”

<논어집소>, 정태현 등 역

* 孔曰 語諸弟子言 何患於夫子聖德之將喪亡邪 天下之無道已久矣 極衰必盛

孔曰 :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夫子의 聖德이 장차 喪亡(멸망)할 것을 걱정하십니까? 천하가 혼란한 지 이미 오래이니, 衰亂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興盛해지는 것이오.”라고 말한 것이다.

* 孔曰 木鐸 施政教時所振也 言天將命孔子制作法度 以號令於天下

* 言事不常一 盛必有衰 衰極必盛 今天下之衰亂無道亦已久矣 言拯弱興衰屬在夫子

일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성하면 반드시 쇠함이 있고 쇠함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다시 흥성해진다. 지금 천하가 쇠란하여 무도한 지 또한 이미 오래이니, 위란을 구제하고 쇠한 나라를 부흥시키는 일이 부자에게 달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 喪 謂失位去國

* 或曰 木鐸所以祢于道路 言天使夫子失位 周流四方以行其教 如木鐸之祢于道路也

목탁은 도로를 순시할 때 쓰는 도구이다. 하늘이 공자로 하여금 지위를 잃고 사방으로 두루 돌아다니게 함으로써 가르침을 펴게 한 것은, 마치 목탁이 도로를 순시할 때 쓰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 혹자

[혹문] “여러 학자는 ‘상喪’을 ‘斯文의 상실’로 풀이했습니다. 왜 선생님만 ‘지위의 상실’로 풀이하셨습니까?” “이것은 유시독의 설이다. 소식도 이 설에 따랐다. 다만 소식이 ‘하늘이 공자로 하여금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니게 하고 한곳에서 편안하게 살지 못하게 한 것은, 마치 목탁이 도로를 순회하도록 만들어진 것과 같다’고 풀이한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 같다.”

옹달메모

– 이을호 역 : 儀封人을 ‘의 고을 벼슬아치’라 풀고 喪을 ‘벼슬자리를 잃고 있는 처지’라 풀어 이 둘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극적인 대비가 이뤄진다. 공자는 벼슬자리를 잃고 천하를 방황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木鐸 – 지도자’가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

– 임자헌 역: ‘儀封人請見曰의봉인청견왈’이라 하고 ‘從者見之종자현지’라 음을 달았다. <논어집주> ‘請見 見之之見 賢遍反’을 참고하면 모두 ‘현’으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 / 患於喪을 ‘벼슬을 잃을까 머 그런 걱정을 하고’로 풀었는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을 잃고 위나라로 가는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본다.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적절하지 않은 풀이로 보인다. / 無道를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풀었다. 재미있다.

– <논어주소>: 여기서 ‘儀’를 위나라 변경으로 옮긴 것은 정현의 주석에서 시작되었는데 정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리링의 <집 잃은 개>의 풀이를 옮긴다. “‘의儀 봉인封人’에 대하여 정현은 의는 위나라 읍인데, 이 ‘의’가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속한서續漢書: 군국지郡國志>와 <수경주水經注: 거수渠水>에서 <서정기西征記>를 인용하여 의는 한대의 준의浚儀이고, 한대의 준의는 지금은 허난성 카이펑開封에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리쩌허우의 <논어금독>을 펼쳐보니 카이펑으로 풀이하고 있다. / 하안의 주 이후로 목탁木鐸을 공자가 천하를 이끌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풀었다. 과연 그런 희망 혹은 기대를 담은 문장인지는 의문이 든다. / 도리어 주목할 만한 것은 天下之無道也久矣를 다시 치세가 열린다는 뜻으로 풀이한 부분이다. 후대의 역사관과 크게 다른 부분. 공자 시대는 난세의 끝이 아니라 난세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한참 더 내려가야 하는 상황.

– <논어집주>에서는 아무개의 풀이를 따라 목탁을 가르침을 펴게 함(行其教)로 풀이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나마 이 풀이가 가장 나아 보인다. 후대 주석가들 특히 고주古注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희망이나 기대감이 <논어>에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혹문]을 참고하면 ‘喪’에 대한 풀이가 크게 둘로 나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는 ‘斯文의 상실’, 이렇게 읽으면 천하의 무도함을 강조하는 풀이가 된다. 또 하나는 위에 언급된 주석/번역처럼 지위/벼슬의 상실로 풀이하는 것. 이렇게 보면 공자 개인의 불행에 대해 초점을 맞추게 된다.

– 평소 같으면 흘려버렸을 문장이 붙잡아 읽으니 난감하다. 다른 번역을 더 찾아보아야겠으나, 공자가 무도한 천하를 이끌 것이라는 식으로 풀이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자의 방랑/방황에는 어떤 쓸쓸함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양화> 등을 참고하면 공자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공자를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더더욱. 따라서 이 문장은 방랑에 처한 공자에 대한 평가인 동시에 그 제자들을 포함한 공자 무리에 대한 평가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천하가 무도하니 하늘이 공자에게 경계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했다는 정도로. <논어>의 유자들은 새 시대를 고대하나 새로운 시대가 열리라는 확신은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

– 오히려 이번에 읽으면서는 왜 이 문장이 여기에 끼여있는가 하는 질문이 들었다. 위나라에서 경쇠를 쳤다는 문장과 함께 읽어야 하지 않을까? 앞에는 노나라 태사 악에 대해, 뒤에는 순임금의 소에 대한 문장이라는 점을 참고하면 여기서 목탁이란 예악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보면 주희가 살짝 비판한 ‘사문의 상실’로 보는 입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제는 망가진 예악을 그나마 보전하는 사람으로서의 공자 모습.

– 방랑 길 위에 기록된 대부분의 문장이 그렇지만 언제 어디서 벌어진 사건인지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노나라에서 벼슬을 잃고 위나라로 가던 중간에 벌어진 사건인지, 아니면 또 다른 데서 벌어진 사건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화자, 공자도 제자도 아닌 <논어>에서는 낯선 이 화자의 말로 증언되는 공자 무리의 모습은 근심에 싸여 있다. 이들은 무엇인가를 상실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은 당시의 무도한 시대상황에 비추어 보면 당연하기도 한 일이다. 도리어 하늘은 이들에게 어떤 사명을 남기고 있다. 세계는 불친절하나 그래도 이처럼 이들의 행보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게 있다.

2017. 3. 20 좀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