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후기 – 10월 27일 정선고등학교

정선이 어디더라…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당최 어디 붙어 있는 곳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강원도의 지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멀어 보았자 얼마나 멀겠냐는 생각에 마음을 느긋하게 놓고 있다 큰 코를 다치고 말았다. 오후에 강의라 오전 공부를 마치고 출발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도무지 그렇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더라. 결국 아침 공부를 갑작스럽게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니 졸음이 솔솔 온다. 꾸뻑 졸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산을 옆으로 끼고 달리니 좀 가까워졌나 했는데 그렇지도 않다. 정선 70km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길에는 가끔 해발 몇 백미터인지를 알리는 표지판도 보인다. 같은 강원도라지만 앞서 철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번에도 직행이 아니다. 중간에 이곳저곳 멈추는 곳이 많다. 평창 터미널에서 버스 기사가 소리친다. 화장실 다녀오세요. 차 타면 바로 출발합니다. 시간 없으니 빨리 다녀오세요. 시간이 많이 늦었나보다. 그러고보니 출발할 때 공사중이니 다른 길로 간다고 이야기하더라.

정선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보다 한참이나 늦었다. 예정대로면 1시간도 넘게 여유 시간이 있을테지만 겨우 30분 남짓 시간이 남았다. 바로 학교로 갈까 하다가 터미널 옆 식당에서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밥도 먹지 않고 이야기를 하려면 힘들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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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조금 조금 넘어 학교에 도착했는데 운동장에 학생들이 가득하다. 축제인가 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점심시간이란다. 중학교와 시간을 겹치면 안되어 점심 시간이 많이 늦단다. 도서관에 모인 얼굴들을 보니 진지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딱딱하지 않아 다행이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데, 늘 그 시작이 쉽지는 않다. <논어>, 공자, 공부…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좀 생동감있는 언어로 나누고자 하는 게 목표인데, 그러려면 서로 마음을 열고 만나야 한다.

이야기를 들으니 책에서 재미있었다는 부분이 서로 엇갈린다. 누구는 루소를 이야기한 부분이 재미있었다고 하고, 누구는 카프카의 <변신>이 인상적이었단다. 하긴… 총 다섯 원고 가운데 공자의 <논어>는 별로 재미있는 편에 속하지는 않을테다. 그런데 어쩌나, <논어>를 주제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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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마치고는 도서관에서 준비한 책갈피 만들기 시간이 있었다.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 쓰고 만들기로 했는데, <논어> 문장을 한문으로 쓰는 친구들이 제법 보인다. 나름 유의미한 시간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에서 책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 중에는 루쉰의 책도 있었다. 반가운 나머지 <들풀> 서문과 ‘개의 힐난’이라는 글을 뽑아 읽어주었다. 강의 때마다 이야기하는 말이지만 소리내어 읽는 것은 참 좋다. 여럿이 모여 소리내어 책을 읽어보라고도 이야기해주었다. 작은 모임이라도 만들고 생각을 나누면 더 즐거운 학교 생활이 되지 않을까?

강의를 마치고 서명을 부탁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한 친구는 책 구석에 그림을 그렸다. 제법 멋진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림을 그리는 게 취미라고. 진로도 그쪽으로 생각한다고 하는데, 너무 잘 나온 거 같아 사진을 찍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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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된 그림 ^^

정선을 좀 둘러보면 좋으려만 강의를 끝내고는 바로 돌아와야 한다. 5시 40분 쯤에 끝났는데 6시 20분에 막차가 있단다. 밖에 나와보니 벌써 해가 어둑어둑 지고 있다. 차를 타고 긴 시간을 와서 학교에서 강의만 하고 돌아가기에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터미널까지 한 20분 정도 걸은 것으로 만족해야지.

#4 인간세 – 굽이굽이 걸어가는 길

장자과 노자… 장자와 공자

전국시대 이후 《노자》학은 한대 초엽에 성행했고, 장자학은 한대 말엽에 성행했다. … 사마담은 도가를 일컬어 “항상 시대적 추이와 함게 하고 사물에 순응하여 변화했으니, 풍속을 수립하고 정사를 베푸는 데에 온당하지 못한 바가 없고, 그 종지가 간략하여 견지하기가 쉽고 공력은 적게 들여도 효과는 많다”고 했다. 《한서》 〈예문지〉는 도가를 일컬어 “군주의 통치술이라고 했다. 한나라 사람이 말한 도가는 실은 《노자》학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학은 처세법을 서술하지만 장자학은 인간사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한이 흥기하면서 황로의 학설이 성행하여”, 청정무위에 바탕한 정치를 주장했을 때 그것은 《노자》학이었다. “한나라 말에 이르러 현허玄虛를 숭상하게 되자”, 비로소 《노자》를 장자학화하여 노장을 병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노자》는 《노자》, 장자는 장자이다. – 《중국철학사 상》, 펑유란, 280쪽.

《노자》와 《장자》를 한두 구절씩 읽어보아도,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노자와 장자는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에서 나름대로 사유를 전개했지만 서로 다른 점이 많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두 사람은 관심 분야도 확연히 다르다. 노자는 무엇보다 국가와 통치자에 자신의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제국을 소유하려면 통치자가 무위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반면에 장자는 험난한 시대를 사는 개인을 위해서 사유를 전개했다. 장자는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연못물 같은 맑은 마음, 즉 선입견이 전혀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렇게 해야만 풍속이 다른 공동체에 가서도 그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장자&노자 – 道에 딴지 걸기》, 강신주, 19쪽.

… 《노자》는 기본적으로 ‘누가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격언들의 모음집이다. … 《노자》는 평범한 백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노자》의 독자는 《노자》를 읽고 그 내용을 실천해 천하를 다스릴 방법과 힘을 체득해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을 호모 임페리알리스, 즉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과학 기술적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달리 말해 《노자》의 독자들은 천하의 대권 지망자들로서, 바로 《노자》를 읽고 실천 방법을 모색하려 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노자》는 철저하게 권력의 기술에 관한 책 이라고 할 수 있다. –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김시천, 57쪽.

메이컴은 《장자》에 묘사된 공자의 모습이 《논어》에 묘사된 공자의 모습과 유사하고, 유가에 속하는 《맹자》나 《순자》 그리고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묘사된 공자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장자》에 나오는 공자의 모습이 본래에 더 가까울 수 있다고 본다. – 앞의 책, 159쪽.

동양사상 혹은 중국철학의 커다란 두 조류로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꼽는다. 이 둘이 상호 보완하여 발전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서술이다. 치세治世, 즉 평화로운 시기에는 유가가 난세亂世, 어지러운 세상에는 도가가 발전했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과연 정말 그런지는 따져보아야 할 일이나 이처럼 유가와 도가를 짝지어 서술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다. 이런 토대에서 불가佛家를 또 다른 요소로 넣어 유불도儒佛道 삼가三家의 회통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편 불가의 자리에는 법가法家가 놓이기도 한다.

이런 도식적인 이해는 매우 편리한 방법임에 틀림없지만 틀에 끼워맞춘 경우가 많은 까닭에 실제를 이해하는 데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과연 유가와 도가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었을까? 도가는 유가의 폐단을 극복하는 데만 가치가 있는 사상일까? 도가라는 사유의 독립적 특성은 없는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과연 ‘도가’라는 학파, 혹은 일관성 있는 사상의 조류가 존재했던 것일까?

흔히 도가라고 하면 노자와 장자 두 인물을 꼽는다. 그래서 도가를 다른 말로 노장학老莊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노자와 장자의 학문이라는 뜻이다. 언제부터 이 말이 쓰였는지는 모르나 이는 분명, 유가의 공맹학孔孟學을 염두해놓고 만든 말임에 틀림없다. 공자가 유가를 창시했고 맹자가 발전시켰듯 도가는 노자에 의해 창시되었고 장자에 의해 발전되었다는 식의 서술이 일반적이다. 이런 식으로 공자와 노자를 유가와 도가의 시초로 보기 때문에 공자가 앞서느냐 노자가 앞서느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동양사상, 중국철학의 뿌리를 찾으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계통을 찾는 일은 필연적으로 그 고유성에 대해 덜 주목하게 만든다. 누구의 자식이라는 말은 그가 누구인지를 까먹게 만든다. 그 이름 석자 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마찬가지로 노장학이라는 말은 노자의 사상적 자식이 장자라는 뜻이며, 이러한 구도는 필연적으로 장자의 고유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심하게 말하면 《노자》 오천자의 주석으로 《장자》를 읽는 것이다. 만약 장자가 《노자》의 충실한 계승자였다면 이런 접근이 도움이 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는 오독으로 이어질 수 밖에.

앞에서 인용한 글들은 모두 노자와 장자의 연관성에 의문을 던지는 글이다. 《중국철학사》를 서술한 펑유란은 《노자》와 《장자》가 서로 다른 시기에 구성되었고, 나아가 노자와 장자의 문제 의식이 서로 상이하다는 주장에 까지 이른다. ‘《노자》는 《노자》, 장자는 장자이다.’ 이어서 아래는 강신주의 글이다. 그는 더 강하게 노자와 장자의 연관성을 부정한다. 그것은 이 둘의 사유가 정반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가 국가와 통치를 다룬다면 장자는 반대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지향한다. 그는 장자를 사랑하는 동시에 노자를 배척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노자와 장자는 상극이다.

김시천은 《노자》를 두고 ‘호모 임페리알리스’를 꿈꾼 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 소국과민小國寡民이니 하는 식으로 《노자》를 이해했던 것이 맞는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노자》를 자유, 자연, 생태, 여성, 평등 등의 개념과 연관지어 읽어온 역사보다 병가兵家 혹은 법가法家와의 연속성에서 읽어온 역사가 더 깊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중적인 《노자》의 이해는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장자》를 이야기해야 하므로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말자.

김시천의 이어지는 주장은 매우 흥미롭다. 장자와 공자의 연관성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와 장자를 묶고 이를 공자와 대립키키는 관점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도가를, 장자를 유가의 폐해를 극복하려했다고 이해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런 주장이 아주 근거가 없지 않은 것이 〈인간세〉 편에서 공자의 이야기가 잔뜩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공자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서.

《논어》가 과연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시천이 이야기하듯 《맹자》와 《순자》에 묘사된 공자의 모습이 《논어》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염두해 둔다면, 이 《맹자》와 《순자》, 두 책 이후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설사 그 이전에 완성되었거나 일부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맹자 학파나 순자 학파와는 거리를 두고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장자》와의 관련성은 어떨까? 최소한 《장자》에 언급된 공자의 행적을 보건데, 《논어》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더라도 완전히 무관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논어》의 문장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이야 장자와 공자를 연관지어 생각해볼 여지가 별로 없지만 과거 학자들 가운데는 장자와 공자의 연관성을 이야기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가설도 가능하다. 장자는 공자 학파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혹시 장자는 공자가 제기한 어떤 문제를 심화 발전시켰던 인물은 아닐까?

 

2. 가시나무야 가시나무야!

《논어》 연구자에게 〈인간세〉는 매우 흥미로롭다. 왜냐하면 <논어>의 문장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세〉의 마지막, 접여가 공자를 만나는 부분이 그렇다.

孔子適楚 楚狂接輿遊其門曰 鳳兮鳳兮 何如德之衰也 來世不可待 往世不可追也 天下有道 聖人成焉 天下無道 聖人生焉 方今之時 僅免刑焉 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 已乎已乎 臨人以德 殆乎殆乎 畫地而趨 迷陽迷陽 無傷吾行 吾行卻曲 無傷吾足 山木自寇也 膏火自煎也 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공자가 초나라에 갔다. 그곳에서 현자 접여를 만난다. 본문에는 초광접여楚狂接輿, 즉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라고 했지만 여기서 미쳤다는(狂) 것은 정신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 세상의 일상적인 말이 아닌 또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주는 인물을 가리킨다. 게다가 접여는 《장자:내편》에서 몇번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현자는 공자의 집 문앞을 지나며 노래를 부른다. 학자들에 따라 접여의 노래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의견이 서로 다르다. 위에 인용에서는 ‘山木自寇也’ 이후를 이 장면에 대한 장자의 논평 정도로 보고 있지만 일단은 끝까지 접여의 노래로 보기로 하자. 그의 노래는 ‘봉황새’를 부르며 시작한다. 아마도 이것은 공자를 가리키는 말일테다. 덕이 쇠한 것을 어찌하느냐? 미래는 기대할 것이 없고 지나간 과거도 좇아갈 것이 없다. 어찌해야 하나? 현재만이 남을 뿐이다.

유가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과거와 미래를 많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특히 그들은 과거 성인들의 삶을 좇아 살 것을 주문했다. 공자도 꿈에서 주공을 뵙느니 운운하지 않았나. 요순시대의 아름다운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 유가의 공통된 목표였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내놓은 삶의 방법, 그 대표를 주례周禮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따르면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 해도 태평성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과거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장자는 바로 지금, 여기를 이야기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지금 천하가 무도無道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과거 성인이 보여주었던 삶의 모습은 더 이상 오늘과 같은 혼란 속에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은 겨우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조심하라. 이것이 접여가 초나라에까지 찾아온 공자에게 들려준 말이다.

역사적으로 공자가 정말 초나라에까지 이르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공자의 여행이 초나라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튼 공자는 방랑하는 자였다.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주공周公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그는 어디선가 과거의 영광을 미래에 싹티우고자 했다. 그러나 접여-장자가 보기에 그의 꿈은 허망한 것이다. 그는 시대를 볼 줄 모르던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거의 유사한 문장이 《논어》에 등장한다.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 鳳兮 鳳兮 何德之衰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殆而 孔子下 欲與之言 趨而辟之 不得與之言 – 《論語》 18微子 5.
초나라의 광사 접여가 공자 곁을 지나가며 이렇게 노래하였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이 꼴이 되었는가? 과거는 탓할 수 없지만, 앞일은 그래도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두라! 그만두라!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위태로울 따름이다!” 공자가 수레에 내려 그와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피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 《논어집주》, 박성규 역. 713쪽.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논어》에서는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라. 이 장면이 실린 〈미자微子〉편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은자隱者가 되는 것이다. 세속 일과 거리를 둔 사람이 되는 것.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장자》의 것은 접여의 노래만 실려 있는 반면, 《논어》에는 공자의 반응도 실려 있다는 점이다. 공자는 접여를 만나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이 둘은 만나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논어》의 편집자들이 품고 있었던 고민의 결과인지 모른다.

〈미자〉편에서는 은자들의 삶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공자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다만 그들과 결코 만나지 못한다. 《논어》에서는 은자의 삶을 동경하나 그 거리를 확실히 할 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삶, 천하의 일에서 손을 떼라는 충고는 긴장감을 낳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이 세계에 속하는, 바로 공자와 같은 삶이다.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을 시도하는 삶.

그러나 《장자》에는 그런 긴장이 사라져버렸다. 도리어 여기에는 더 참혹한 현실이 마주하고 있다. 天下有道,聖人成焉;天下無道,聖人生焉。方今之時,僅免刑焉。장자에게 성인은 시대를 변화시키고 새 시대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다. 도리어 성인 조차 한 시대의 인물이다. 천하가 평안했던 시대에 성인이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무도한 세상에서는 성인도 그저 살아갈 뿐이다. 게다가 지금은 겨우 형벌을 피할 수 있을 뿐.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큰 길로 다닌다. 그들의 길은 곧다. 그것은 바로 인의仁義의 길일 테다. 그러나 장자가 제시하는 삶의 태도는 이와 다르다. 迷陽迷陽,無傷吾行!吾行卻曲,無傷吾足! 굽이굽이 가시나무를 피해 사는 삶이다. 가시나무로 얽힌 길을 가면서도 곧게 나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미련한가! 그는 스스로를 상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굽이굽이, 위험을 피할 줄 알아야 한다.

맨 마지막 충고가 뼈 아프다. 山木自寇也,膏火自煎也。桂可食,故伐之;漆可用,故割之。人皆知有用之用,而莫知無用之用也。산의 나무, 재목材木이란 스스로를 해칠 뿐이다. 쓸모 있음, 유용有用이란 결국 베어지고 잘려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 쓰임은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위험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용함을 위해 오늘도 애쓴다. 그들에게는 삶의 현장이 증발해버렸다. 삶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도리어 삶을 해치는 것을 위해 살고 있다. 따라서 그를 해치는 것은 그 자신이다! 결국 장자가 제시하는 것은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 없음의 쓸모이다.

 

3. 저 사마귀를 보라

어쨌든 유가의 정서는 유용한 인물이 되는데 있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써줄 군주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열망은 매우 큰 것이어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과 함께 일을 도모할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제자 가운데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하는 자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공자는 자신이 쓰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공자에게 학문이란 정치적인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사士 계층 출신으로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려면 군주에게 발탁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공자가 위대한 인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끝내 번듯한 관직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에게 주나라의 영광을 회복할 역량이 있다고 믿었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의문이다. 이웃 나라의 위대한 재상이었던 관중이나, 그가 훌륭하다 평가한 정나라의 자산과 비교해서 더 나은 정치를 펼쳤을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장자는 반대로 쓸모없음을 추구한다. 공자와 장자의 주장이 서로 다른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장자와 공자의 근본적인 차이라기 보다는 당면한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춘추시대에 희미하게 드리워졌던 전란의 먹구름은, 전국시대에 이르러 천하를 온통 혼란속으로 빠뜨렸다. 공자의 시대는 그나마 주공으로 대표되는 이상을 말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면, 장자의 시대는 그 이상을 폐기해야 하는 시대였다. 앞서 본 초광접여와의 만남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시대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장자가 공자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변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문헌학적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접여의 이야기는 《논어》의 것이 먼저 있고, 《장자》에 기록된 것이 후대에 고쳐졌으리라 보여진다. 이 이외에도 《논어》에 기록된 것을 의도적으로 변경한 부분이 많이 보인다. 이를 보건데 장자는 생각보다 《논어》에 언급된 공자의 이야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인간세〉는 공자와 안회의 대화로 시작한다. 안회가 위衛나라로 떠나겠단다. 그것은 위나라 군주가 포악한 정치를 펼치기 때문이다.

顏回見仲尼請行 曰 奚之 曰 將之衛 曰 奚為焉 曰 回聞衛君 其年壯 其行獨 輕用其國 而不見其過 輕用民死 死者以國量乎澤 若蕉 民其无如矣 回嘗聞之夫子曰 治國去之 亂國就之 醫門多疾

역기서 눈여겨 볼만한 부분은 둘이다. 하나는 안회가 가겠다고 하는 위나라의 상황이다.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마도 위장공衛莊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위나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군주였던 영공靈公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게다가 그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만났는데 그 바람에 추문이 생기기도 했다. 공자는 위나라에서 무엇인가를 도모해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위나라는 매우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훗날 장공이 되는 공자公子 괴외는 남자의 권력 다툼을 벌이다 국외추방을 당했다. 결국 손자인 첩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문제는 장공이 돌아와 자리를 되찾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들과 아비가 제후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공자의 대답은 그 유명한 정명正名이었다. 결국 공자는 그 혼란스런 상황에서 몸을 뺀다. 제자 자로는 위나라에 남아 있다가 목숨을 잃었다. 위나라의 혼란스런 상황은 공자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런 배경에서 안회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흥미롭다. 분명 지어낸 이야기일테지만 안회가 그 혼란스러운 위나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 이유인즉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란다. 어지러운 나라에 들어가 나라를 바로 잡으라! 그러나 앞서 말했듯 공자 본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공자의 말을 꼬아놓은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治國去之,亂國就之’라는 말은 《논어》의 이 문장을 바꿔놓은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공자는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머물지 말라고 말한다. 어찌보면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뒤에 나오는 ‘古之至人,先存諸己,而後存諸人。所存於己者未定,何暇至於暴人之所行!’라는 말도, ‘守死善道’라는 가르침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을 법하다.

이 둘의공통성과 차이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논어》에서 제기되었던 다양한 주제 가운데 하나를 장자가 심화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은 어떨까? 본디 《논어》에는 다양한 주제가 섞여 있다. 아니, 공자라는 인물 자체가 상반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나. 통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지만, 막무가내로 모든 일을 맡지는 않는다. 그는 갈등하며 방황한다. 그 방황이 낳은 한 길이 장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名 實者 聖人之所不能勝也 而況若乎

명실이란 성인도 이기지 못한다. 하물며 너는 어떻겠느냐? 장자가 보기엔 성인 역시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그도 세상사의 흐름에 이러저리 흔들리는 존재다. 보통 유가에서 성인으로 꼽히는 비간이나 관용봉에 대한 평가를 보면 잘 볼 수 있다. 이들은 걸왕과 주왕의 시대라는 난세에 태어나 세상을 바꾸려다 실패한 이들이다. 유가는 이들의 의기를 높이샀다. 그러나 장자가 보기에 이들은 명실名實, 즉 명성과 이익에 눈이 멀어 쓸데 없이 자신의 삶을 희생한 이들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해결책이란 무엇인가? 공자는 심제心齊를 제시한다. 심제란 무엇일까? 본디 ‘제齊’란 제사와 같은 큰 일을 앞두고 몸을 단정히 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 취했던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음식을 삼가는 것이다. 술이나 고기, 자극적인 음식을 멀리하고 식사를 소박하게 하는 것. 심제란 마음을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이를 두고 오강남은 ‘마음의 굶김’이라 했는데 적절한 번역이다.

回曰 敢問心齋 仲尼曰 若一志 无聽之以耳而聽之以心 无聽之以心而聽之以氣 聽止於耳 心止於符 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 心齋也

심제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목耳目, 기본적인 기관으로 들어오는 감각을 멈추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귀로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마음으로 듣지도 말라고 한다. 마음이란 다양한 감각들이 들어와 저마다의 소리로 복잡한 그런 공간이기 때문일테다. 그럼 어떻게 듣는가? 장자는 기氣로 들으라고 말한다. 장자에게 이 기氣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 참고로 이는 앞서 포정의 이야기에 나왔던 ‘方今之時,臣以神遇,而不以目視,官知止而神欲行。’을 떠오르게 한다. 눈으로 귀로 듣는 것 이외에 보고 듣는 방법이 있다.

이런 부정의 방법, 이를 다르게 말하면 날게 없이 날고, 무지로 앎을 체득하는 방법이라 하겠다.

聞以有翼飛者矣 未聞以无翼飛者也 聞以有知知者矣 未聞以无知知者也

이어지는 이야기는 섭공 자고의 상담이다. 섭공 자고 역시 《논어》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초나라의 유력 정치인이었는데, 공자와 생각을 달리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장자》에서는 공자에게 상담을 요청한다. 사신으로 가려는데 여러 힘든 일이 있다고. 일단 사신으로 가게 된 일이 만만치 않았나보다. 하긴 과거에 사신으로 이웃 나라에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이다. 행여나 일을 무사히 완수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있다. 마음이 영 불편하다. 요즘 이야기로 바꾸면 이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괴롭다. 목구멍으로 밥도 넘어가지 않는다.

仲尼曰:「天下有大戒二:其一,命也;其一,義也。子之愛親,命也,不可解於心;臣之事君,義也,無適而非君也,無所逃於天地之間。是之謂大戒。是以夫事其親者,不擇地而安之,孝之至也;夫事其君者,不擇事而安之,忠之盛也;自事其心者,哀樂不易施乎前,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德之至也。為人臣子者,固有所不得已,行事之情而忘其身,何暇至於悅生而惡死!夫子其行可矣!」

공자가 보기에 이 세계는 닫혀있다. 누구에게나 부모가 있듯, 신하란 자들은 군주의 그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자식이 자식 아님을 선언할 수 없듯, 신하는 군주의 명을 바꿀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군주의 명을 따를 수 밖에. 본디 신하된 자들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為人臣子者,固有所不得已’

그렇다면 기계적으로 일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단 말인가? 장자가 일의 성패보다는 마음의 문제에 주목함을 눈여겨보자. 일은 그렇다치고 마음을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어찌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러니 일은 일대로 맡겨두고 마음을 가꾸자. 다만 이때 장자가 지향하는 마음이란 특정한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고요한 마음.그렇다면 이것으로 해결된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장자는 여지를 남겨둔다. 결코 쉽지 않으리란 경고와 함께.

且夫乘物以遊心,託不得已以養中,至矣。何作為報也!莫若為致命。此其難者。

이어지는 이야기는 안합과 거백옥의 이야기이다. 거백옥은 위나라의 대부로,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 당시 공자를 도와준 인물이기도 하다. 공자는 거백옥을 두고 군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공자가 빠졌다하나 공자의 이미지는 완벽하게 벗겨지지 않았다.

사건은 이렇다. 안합이 영공의 태자, 앞에서 언급했던 장공 괴외의 사부가 되었단다. 그런데 괴외의 성정이 포악하여 걱정이다. 가만히 버려두자니 나라가 위태롭고, 그를 바로잡으려니 자기 일신이 걱정된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참고로 유가는 이후 성학聖學, 즉 성인이 되는 학문을 한다고 자처했다. 이때의 성인이란 자기 수양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군주를 성군聖君으로 만드는 비전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했다. 퇴계의 성학십도나 율곡의 성학집요 따위를 생각해보라. 이들은 군주를 성인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고, 군주의 스승이 되겠다고 자처했다. 그러나 장자의 생각은 다르다. 포악한 성정을 타고난 군주를 어찌하랴?

汝不知夫螳蜋乎?怒其臂以當車轍,不知其不勝任也,是其才之美者也。戒之慎之!積伐而美者以犯之,幾矣。

저 사마귀를 보라. 그는 강력한 턱과 날카로운 앞다리를 믿고 사납게 대든다. 거대한 수레 바퀴 앞에서도!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자신의 능력은 헤아리지 못하고 무턱대고 덤비는 꼴을 비꼬는 말이다. 사마귀에게 수레바퀴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장자가 보는 군주도 그렇다. 수레바퀴 앞에서 사납게 기세를 올렸던 사마귀의 운명은 뻔하다. 헛된 죽음 뿐이다.

장자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인간세〉 안에서 표현된 힘은 둘이다. 하나는 시대적 상황, 또 하나는 군주와 신하라는 관계. 장자가 보기에 당대의 상황은 어찌할 수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대의 폭력 앞에 겨우 형벌을 면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어떤가. 이 갑을관계 앞에 철저히 무력한 존재로 던져졌다. 장자가 골몰하는 것은 이 감당할 수 없는 폭력앞에 보신保身하는 삶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완벽하게 내버려두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은 맞지만 어찌할 수 없으니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여기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아마도 이어지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둘이 그 힌트가 아닐까? 하나는 호랑이 사육자 이야기, 또 하나는 말 애호가의 이야기.

호랑이와 사람의 힘을 비교하면 절대적으로 사람이 불리하다. 전설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사람이 있기는하나 이야기는 이야기로 흘려 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힘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호랑이를 기른다면 어떨까? 어떤가 이것은 해볼만 하지 않나? 다만 여기에는 어떤 지혜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생물을 주지 말것,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도록 적절한 때에 먹이를 줄 것. 호랑이의 본성을 잘 알고 대처하면 몸을 상할일은 없다.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이 조건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분명 군주를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호랑이를 잘 구슬려 이용할 수 있듯, 군주도 그렇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중요한 것은 호랑이는 끝까지 호랑이다. 마찬가지로 군주는 늘 군주이다.

혹여나 말을 잘 듣는 군주가 있다고 하자. 성군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요행이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경계심을 놓치지 말라고 한다. 바로 말 애호가의 이야기가 그렇다. 온갖 정성을 다해 말을 기르지만 이 말이 포악스럽게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장자가 보는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각자 정해진 깜냥이 있어서 그 한계를 넘어서 행동하다가는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계한다. 그러나 더 문제는 그 깜냥대로 행동하더라도 언제 화를 입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장자에게 세상은 일상적인 폭력으로 가득찬 곳이다. 언제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른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4. 쓸모 없음의 쓸모

〈인간세〉 마지막에 언급된 ‘無用之用’이야 말로 장자가 추구하는 삶의 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자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쓸모가 있단다. 쓸모 없음의 쓸모! 이 모순된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공자와 접여의 이야기에 앞서 등장한 커다란 상수리 나무를 생각해야 한다.

匠石之齊,至乎曲轅,見櫟社樹。其大蔽數千牛,絜之百圍,其高臨山十仞而後有枝,其可以為舟者旁十數。觀者如市,匠伯不顧,遂行不輟。

장석이 제나라로 가는 길에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여기서 하나 던져볼만한 질문이란 이것이다. 장석은 어째서 제나라로 갔을까? 이야기만 놓고 보면 제나라로 갔다는 점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왜 제나라로 가는 길에 이 나무를 보았다고 했을까? 이 우화를 하나의 비유로 생각하면 어떨까? 제나라로 가는 길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있지 않을까?

제나라는 천하의 지배자로 손꼽히는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7개 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전국 칠웅! 그런데 이 가운데 진나라가 가장 강력했고, 이를 견제할 만한 나라는 동쪽의 제나라 남쪽의 초나라가 있었다. 당시에는 전국 사공자라고 하여 각 나라에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제나라에는 맹상군 전분이 있었다. 계명구도로 유명한 그는 천하의 재주있는 인물을 여럿 불러모았다. 장석 역시 자신의 재주를 팔러 돌아다니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혹은 그를 나무꾼으로 볼 것이 아니라 유세객 가운데 하나로 보면 어떤가? 제 2의 소진이나 장의를 꿈꾸는 야심찬 정치 지망생 아니었을까?

그가 제나라로 가며 곡원이라는 곳을 지났다. 거기서 커다란 나무를 보았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소요유에 나왔던 혜시가 말했던 커다란 나무는 저리가라 할 정도다. 이 커다란 나무를 보고도 장석을 그저 지나간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장석을 따라가던 제자는 이 커다란 나무를 쳐다보고는 할 말을 잃는다. 이 커다란 나무는 얼마나 훌륭한가! 실컫 구경하다 뒤쳐지고 말았다. 뒤늦게 스승을 좇아가 묻는다. 저렇게 훌륭한 나무를 거들떠 보지도 않다니 어째서입니까?

是不材之木也,無所可用,故能若是之壽。

장석의 말이 명쾌하다. 쓸모 없는(不材) 나무였기 때문에 저렇게 크고 말았다. 쓸 데가 있었다면 진작에 잘려버렸을 게다. 상수리 나무를 하나의 비유로 생각하면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사람을 여럿 끌어 모은 인물을 보았다. 제자는 그 인물의 능력을 보고 놀란다. 그러나 장석의 말은 간단하다. 그가 그토록 능력이 있었다면 벌써 군주들에게 불려갔을 것이다. 저가 저토록 주목받는 것은 쓸모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쓸모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송나라 형씨라는 곳의 나무들을 기억하라. 그곳에서는 각기 쓸모에 따라 나무를 베어간다. 결국 남는 것은 괴상한 나무들 뿐이다. 장석의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남백자기의 이야기를 보자. 그도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그런데 그 나무의 상태가 영 아니다. 가지는 구불구불 하고, 밑둥은 갈라져 있다. 잎은 사람의 혀를 상하게 하고, 고약한 냄새가 난다. 괴상함이 그를 크게 만들었다. 괴상함이란 곧 쓸모 없음이다.

그런데 장석의 꿈에 그 커다란 사당 나무가 나와 이야기한다. 이 거대한 나무는 장석의 평가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且予求無所可用久矣,幾死,乃今得之,為予大用。使予也而有用,且得有此大也邪?

쓸모 없음, 이는 한 시대와 사회의 가치 척도를 통해 평가된 결과이다. 그 쓸모 없음이란 누구의 것인가? 적어도 나의 것은 아니다. 그런면에서 그는 ‘쓸모’를 뒤집는다. 세상의 쓸모 없음이 나에게는 쓸모가 있다. 그것도 크게! 為予大用. 그것은 세상의 칼날을 피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끼질을 피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쓸모 없음의 쓸모란 이것이다.

그러나 여기 또 중요한 것이 있다. 그 나무가 처음부터 쓸모 없던 게 아니었다는 거다. 그 나무는 쓸모 없기를 바랐다. 무용한 것 되기! 이것이 필요하다. 쓸모 없음이란 결코 간단치 않다. 아무나 여기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커다란 나무를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었을까? 쓸모 없음을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支離疏者,頤隱於臍,肩高於頂,會撮指天,五管在上,兩髀為脅。挫鍼治繲,足以餬口;鼓筴播精,足以食十人。上徵武士,則支離攘臂而遊於其間;上有大役,則支離以有常疾不受功;上與病者粟,則受三鐘與十束薪。夫支離其形者,猶足以養其身,終其天年,又況支離其德者乎!」

그렇기 때문에 지리소의 이야기를 잘 이해해야 한다. 지리소는 몸이 불구이다. 그러나 그는 삶을 영위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없다. 도리어 노역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상황에서 그는 빗나가 있다. 시대의 폭력에서 빗나가 있기.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못난이로 자처하기.

한편 그에게 《논어》 등에 보이는 은자隱者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논어》의 은자는 개인적인 삶을 추구하며 세속에서 벗어난 인간을 말한다. 이를 위해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개인적인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방안이다. 대부분 소규모로 농사짓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장자에게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대체 어째서 일까? 이 세계가 폭력적이라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장자는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경험한 세계의 폭력이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 제물론 & 양생주 : 삶을 가꾸는 법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제물론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첫 시작, 남곽자기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겠다. 대체 남곽자기의 말이 어디서 끝나는지 조차 모호하다. 다만 자유의 질문에 대한 남곽자기의 대답까지는 대화가 연결되는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 마지막 대화의 의미조차 해석이 분분하다는데 있다. 별 내용이 아니라면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안성자유의 질문이 그런 방만함을 막는다. ‘대체 천뢰란 무엇입까?’

子游曰 地籟則眾竅是已 人籟則比竹是已 敢問天籟 子綦曰 夫吹萬不同 而使其自已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남곽자기는 ‘오상아吾喪我’, 자기 상실을 이야기하며 그 이류로 천뢰를 들었다고 말한다. 대체 천뢰란 무엇이기에! 그런데 남곽자기의 대답은 그 질문을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지뢰에 대해서는 그토록 한참을 이야기해놓고 천뢰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쏙 빼놓았다. 곤혹스럽다. 이런 곤혹스러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야 말로 장자를 읽는 매력 가운데 하나지만 쉽지 않다.

남곽자기의 말은 대체로 크게 두 방향으로 해석되었는데, 문제는 이 두 해석이 서로 정반대라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위진시대 곽상의 해석이 있다. 참고로 곽상은 〈장자〉의 해석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인물 가운데 하나다. 곽상의 해석에 대한 안병주의 풀이를 옮긴다.

‘咸其自取 怒者其誰邪’를 ‘怒者其誰邪 咸其自取’의 도치형문장으로 보아 “소리나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모두 스스로 취하는 것이지 소리나게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즉 이 해석은 바람 소리나는 것이 모두 자기 원인에 의해 그런 것이지 소리나게 하는 배후의 주재자가 따로 없다는 뜻이다. 곽상의 주가 이와 같은 해석의 원류인데 곽상은 “物은 그것이 生하여 나오도록 하는 원인이 따로 없이 自生한다. 이것이 天道이다.”라고 하고 또 “物은 각각 自得할 따름이다. 누가 그것을 그렇도록 소리나게 主宰하는가. 이것은 天籟를 거듭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재가 따로 없이 모두가 자기 원인에 의해 自生自化하는 것으로 보는 이 곽상 류의 주석을 따르면 하문下文에 보이는 ‘진재眞宰’도 이것을 유전변화流轉變化하는 현상계現象界의 밖에 따로 실재하는 주재자로 보지 않고 천天 즉 자연自然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게 된다. – 안병주역, 전통문화연구회. 72쪽.

만물의 독자적 존재론, 창조주나 주재자와 같은 신적인 존재 근거를 가지지 않는 것은 동양 사상의 고유한 특징인 것처럼 여겨졌다. 아마 여기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등을 기반으로 세계의 움직임을 음양오행을 통해 설명하는 방법이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고대철학에서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천天, 주재자로서의 상제上帝 관념은 흔히 서구의 것이라 부르는 유신론적 관점과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족으로 덧붙이면 여기에 주목하여 보유론補儒論, 즉 유가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유가를 한층 더 완성하겠다고 주장했던 이가 바로 마테오 리치였다.

장자에도 이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논어》 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주재자를 암시하는 듯한 표현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특히 ‘若有真宰,而特不得其眹。可行已信,而不見其形,有情而無形。’이라는 부분이 그렇다. 여기서 ‘진재真宰’란 참된 주재자로 옮길 수 있을텐데, 장자는 이것의 조짐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참된 주재자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존재가 이 세계와 무관한 단절된 존재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것의 움직임은 명확하나 그 형체를 볼 수 없단다. 실질적이는 하나 형채가 없는 것!(有情而無形) 곽상식으로 해석하면 이 문장이 진재真宰에 대한 의문으로 읽어야 한다. 혹은 주재’자’라는 식으로 인격화 혹은 존재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표현이 뒤에도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이해에 그칠 수 없어 보인다. <대종사>를 보면 이런 부분이 있다.

夫道 有情有信 無為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在太極之先而不為高 在六極之下而不為深 先天地生而不為久 長於上古而不為老

도를 이야기하는 표현, ‘有情有信 無為無形’은 진재에 대한 표현과 유사하다. 게다가 여기서 도란 천지만물을 낳고 개별적인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무엇 아닌가? 따라서 다른 한쪽에서는 초월적 대상이 무엇인가 있다고 해석한다. 그렇다고 이 해석이 곽상류의 해석이 비판하는 것처럼 단일한 주재자나 창조주의 확실한 존재를 이야기하며 나아가 이 존재가 개별 사물의 능력을 박탈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장자의 관심은 이 주재자, 혹은 도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장자는 도가 무엇이냐에 대해 다루기 보다는 도를 인식하거나 체득하는 문제에 주목한다.

더불어 중요한 하나의 포인트는, 장자가 인간을 이 주재자로부터, 이 주재자가 생성한 세계로부터 소외된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제물론에서는 특히 그것이 인식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간결하게 요약하면 소외된 인간은 이 참된 존재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세계의 참된 실상은 어떤 의문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설결과 왕예의 대화를 이해해보자.

齧缺問乎王倪曰 子知物之所同是乎 曰 吾惡乎知之 子知子之所不知邪 曰 吾惡乎知之 然則物無知邪 曰 吾惡乎知之 雖然 嘗試言之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왕예의 대답은 반복된다. ‘吾惡乎知之!, 내가 그것을 어찌 알랴?’ 이 질문은 근본적인 자기 부정에까지 이른다. 내가 모른다는 인식조차 어찌 알 수 있을까? 앎(知)이란 불안한 지반 위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늘 특정한 조건 위에서 가능한 것인데 이 조건을 제거해 버리면 앎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따라서 이어지는 왕예의 질문,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는 질문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自我觀之 仁義之端 是非之塗 樊然殽亂 吾惡能知其辯

‘나’로부터 살펴보건데 인의의 근거나 시비판단이란 소란스럽고 난잡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그것을 명확히 알 수 있으리랴. 이런 부정, 우리가 익히 알아 왔던 가치에 대한 의문이 다른 가치에 대한 존중, 나아가 모든 개별적 존재를 ‘긍정’하는 데까지 이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장자의 말이 이러한 차이와 가치화에 의문을 던지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한편 여기서 하나 짚어 보고 싶은 것은 我와 吾의 쓰임이다. 과연 장자가 이 둘을 의식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는가, 일관성있게 개념어로 썼는가는 의문이다. 다만 ‘오상아’와의 연결고리로서 생각해보자.

앞서 장자는 ‘나를 잃어버렸다’말했다. 그러나 ‘내’가 완벽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를 잃어버린’, 자기 상실의 주체, 吾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앞선 남곽자기의 이야기를 연결시키면 천뢰를 들은, 자기도 하늘의 호흡에 따라 연주되는 피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기존의 내 생각과 나의 앎이라 생각했던 것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여기서의 ‘나’ 역시 인의나 시비의 판단으로 구성된 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일시적 존재인 ‘나’로부터 보자면 사람들의 말이란 번잡하여 세계를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다. 도리어 우리에겐 또 다른 ‘나’가 필요한데, 그것은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고 질문하는 나이다.

따라서 장자의 말은 불안한 인식 기반 위에 있는 나를 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를 잃어버린 나를 아는 또 다른 ‘나’. 여기서 출발하는 앎이란 다르지 않을까? 다만 장자는 바로 여기서 ‘또 다른 앎’을 이야기하지 않고 한번 질문해보는, 말하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嘗試言之 / 且吾嘗試問乎女. 앎이 끊어진 곳에서, 말이 끊어진 곳에서도 앎과 말은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2. 꿈에서 깨어나보니 그림자더라

현대에 자기 인식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는 바로 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미 장자는 2000년 전에 이 꿈에 대해 이야기해놓았다.

夢飲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為覺 竊竊然知之 君乎 牧乎 固哉 丘也 與女皆夢也 予謂女夢 亦夢也 是其言也 其名為弔詭

꿈은 욕망의 실현 공간이기도 하지만. 덧없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동양에서 꿈은 허망함을 이야기하는 소재가 된다. 왜 그런가? 꿈은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울다가고 깨어나서는 웃기도 하며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속인다는 것인데, 이 감쪽같은 속임은 속는줄도 모르게 만들곤한다. 따라서 이런 일도 가능하다. 꿈 속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일!

커다란 깨어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커다란 꿈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스스로 깨어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있단다. 그런 이들이 군주니, 남을 이끄는 목자니 이런 말을 내놓는다. 깨어 있다고 자처하는 이들, 그래서 거꾸로 남을 깨울 수 있다고, 깨워야 한다고 자처하는 이들이야 말로 장자가 비난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더욱 꿈 속으로 잠들 뿐이다. 그렇다면 커다란 깨어남이란 무엇일까? 장자는 이것이 꿈임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꿈을 꾸고 있다. 그도, 너도, 나도!

알 수 없는 것을 알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마찬가지로 꿈을 꾸며 깨어 있기. 이런 모순적인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런 모호한 말은 더욱 의문을 증폭시킬 뿐이다. 장자의 말을 빌리면, 나 역시 이것이 장자의 말을 제대로 풀이한 것인지, 제대로 풀이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번 이야기해 보련다. 다만 이러한 기묘한 표현 가운데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장자가 이 꿈을 지워내는 것을, 어두컴컴하며 희뿌연 그 무엇을 완벽하게 청소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인식의 청소부가 아니었다. 도리어 인식이란 늘 왜곡과 자기 한계 속에 허우적대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이 왜곡과 허우적댐에서 멈춰 있을 수는 없다.

罔兩問景曰 曩子行 今子止 曩子坐 今子起 何其無特操與 景曰 吾有待而然者邪 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 吾待蛇蚹 蜩翼邪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옅은 그림자, 망량의 이야기는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옅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뭍는다. 너는 어째 그리 지조가 없느냐? 그러나 그림자는 억울하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반문하고 싶었으리라. 나라고 가만히 있고 싶지 않든?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림자 역시 딸린 존재인 것을. 그림자는 물체를 따라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하다. 어쩌면 ‘존재’라는 호칭조차 의문시 되는. 그렇다면 그림자를 부리는 그 신체는 ‘존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개별적 주체’인가? 아니,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림자는 묻는다. 내가 따라 움직이는 저 신체도 무엇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마치 뱀이나 매미의 껍데기와 같은 건 아닐까?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 실재를 찾는 것이 장자의 목표가 아님을 명심하자. 맹자라면 인심人心, 혹은 성性을 찾는 것이 그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런 개별적인 고유성을 지니는 출발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런 현실이야 말로 인식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망량은 망량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휘둘리는 삶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는가? 복잡하게 꼬인 세계의 흐름 속에 자유를 찾을 길은 없을까? 같은 방법으로 이야기하면 어떨까? 말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으며, 알 수 없으나 알 수 있는 것이 있듯, 자유로울 수 없으나 자유롭게 살 수는 있다고.

또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자유와 부자유 사이의 무엇. 왕예의 질문을 기억하라.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모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 아닌가?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가?

〈제물론〉 마지막의 호접지몽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昔者莊周夢為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喻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為胡蝶與 胡蝶之夢為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아니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었다. 장자의 꿈 속 나비는 자신이 스스로 장자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장자가 된 나비는 자신이 나비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 몰랐을 것이다. 깨어난 뒤에야 스스로가 장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꿈 속의 나비. 그러나 이 깨어남이야 말로 또 다른 꿈 속으로 이끈다. 깨어났다지만 이것이 꿈이 아님을 어찌 알랴. 이러한 의문과 의심, 여기에 변화의 실마리도 있다.

 

3. 또 다른 앎이 필요하다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已 已而為知者 殆而已矣 為善无近名 為惡无近刑 緣督以為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양생주〉의 시작은 흥미롭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나 그가 추구하는 앎은 무한하다. 그런데 인간은 종종 그 무한함을 좇아가려 그 무한한 삶을 다 소진하곤 한다.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언뜻 보면 장자는 여기서 무지無知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지 말라! 그러나 앞에서 한참을 보았듯 장자는 특정한 앎을 이야기한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도에 가까운 앎이 있다!

그런데 이 앎은 단순히 지각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지혜는 특정한 삶을 낳는다. 그 삶은 무엇일까? 장자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명성을 가까이 하지말며, 형벌을 가까이 하지 말라. 장자에게 명성과 형벌은 서로 가깝다. 이 둘 모두 삶의 본질적인 자리에서 벗어나 특정한 가치에 종속된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연독緣督이란 이런 종속에서 벗어난 다른 삶의 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길을 통해 삶을 가꾸고, 보살필 수 있다. 삶을 보살피는 길, ‘양생養生’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양생주〉는 다른 편과 달리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가 편 전체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한다.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던 포정의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이 포정의 이야기만 자세히 검토해보자.

庖丁為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포정과 문혜군의 만남이다. 여기서 문혜군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가상의 인물로 보이는데,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군君’이라 불렸던 것을 보면 한 나라의 통치자임에 틀림없다. 반면 이야기의 상대자는 포정庖丁, 즉 백정이다. 백정과 군왕의 만남. 이 자체로도 매우 특이한 것이다. 최고 통치자와 하층민의 만남. 뒤에서 보겠지만 여기서 지혜를 구하는 것은 문혜군이며, 소잡은 백정인 포정은 지혜자로 등장한다. 신분권력을 완벽히 전도한 이 대화는 의도된 것이 분명하다. 이를 통해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보잘것 없는 것 속에 지혜가 들어 있다!

포정에게 문혜군이 주목했던 것은 그의 화려한 기술 때문이었다. 그의 칼솜씨가 어찌나 유려한지 몸 놀림 하나하나가 연주되는 음악에 맞춰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 그는 기술만으로도 문혜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포정이 말하는 것은 기술의 측면이 아니다. 뛰어난 기술로 가능한 경지가 아니다. 그는 도를 체득한 인물이었다.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郤 導大窾 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도의 체득이란 단순히 찰나의 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어쨌든 특정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포정에게는 19년이 걸렸다. 경험의 축적으로만 환원되지 않지만 그래도 경험이 중요하다. 무수한 반복적인 경험은 우리에게 특정한 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해준다. 고로 반복은 위대하다.

그렇다고 19년의 시간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19년의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소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이제 소 전체를 보지 않는다. 소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무수한 조각들이 얽혀 구성된 집합체이다. 그 조각들 사이에는 틈이 존재한다. 포정은 이 틈을 보는 눈을 지녔다. 그러나 이 눈은 ‘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의 작용이 그친 이후에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눈으로 보지 않을 때 또 다른 눈이 열린다. 장자는 이를 ‘신神’이라 표현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인간이 지닌 또 다른 능력 가운데 하나라고만 해두자. 거꾸로 말하면 인간에게는 기존의 감각기관 이외에 또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세계의 참 모습을 파악하는 진정한 능력이리라.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間 而刀刃者无厚 以无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為 怵然為戒 視為止 行為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土委地 提刀而立 為之四顧 為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소를 보는 눈이 달라지자 포정의 칼놀림 역시 달라졌다. 기존의 백정은 살을 베고 뼈를 잘랐다. 그러다보니 칼이 쉽게 상하곤했다. 이렇게 무뎌진 칼을 버리고 새 칼을 잡는다. 그러나 포정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칼이 19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칼은 이가 빠지지 않았다. 마치 숫돌에 방금 간 듯 날카롭다. 그렇다고 이 칼이 그저 칼집 속에 고이 모셔졌던 것은 아니다. 포정은 이 칼로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다고 말한다.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포정은 그 비밀을 틈에서 찾는다. 그의 칼날은 뼈와 근육을 가로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틈을 노닐며(遊) 근육과 뼈, 근육과 근육을 서로 분리해냈다. 포정은 소가 지닌 특정한 결, 그것이 구성된 복잡한 체계를 꿰뚫어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칼놀림은 자르고 베는 것이 아니라 떼어내는 것이었다. 포정의 위대함이란 단순히 화려한 칼질에 있던게 아니었다. 칼날을 상하지 않는 세밀한 기술 바로 여기에 포정의 비밀이 있다.

그런데 문혜군의 말이 흥미롭다. 포정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삶을 가꾸는 방법’을 알았다고 말한다. 대체 무엇이 그에게 그런 가르침을 전해주었을까? 이런 문혜군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요리사와 칼과 소가 양생이라는 주제 아래서 각각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각각 사람, 생명, 그리고 사회를 대표한다. … 소 잡는 우화를 통해 장자가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만 우리가 그 속에 몸을 둘 수 있고, 또 상해를 입지 않을 수 있으며, 나아가 유유자적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 《장자를 읽다》, 왕보, 바다출판사. 144~145쪽.

포정의 눈앞에는 소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상이 놓여 있었다. 포정은 칼을 들고 이 거대한 소를 해체해야 한다. 대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 어려움은 어려움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 어려움은 결국 그 손에 쥔 칼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포정의 기술에 따라 칼의 수명이 달라진다. 똑같은 칼날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채 1년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10년 넘게 쓰는 경우도 있다.

앞서 〈양생주〉의 시작에 주목하라. 어떤 앎은 삶을 해친다고 말한다. 그것에서 벗어나 삶을 가꾸는 지혜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자신의 유한한 삶을 가꾸고, 생명을 보살피는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장자는 그것이 틈을 노니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물에는 고유의 결이 있으며, 흐름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따르면 해를 입지 않는다. 그것을 거스르면 삶이 망가질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장자의 소극적 태도이다. 〈양생주〉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결국 상하지 않는 것, 다르게 말하면 다치지 않는 삶이다. 이 위협을 최소화 하는 길, 나아가 삶의 고유한 생명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장자가 추구했던 삶의 모습이었다. 이는 반대로 그가 담당했던 삶의 현실이 얼마나 고달픈 것이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칼날이 번뜩이는 인간들의 삶 속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봐야 할 때이다.

SF 소설 읽기 1강_ 로봇, 생각하는 기계

흔히 로봇이라고 하면 ‘인간을 닮은 기계’를 떠올리지만 본래 의미는 이와는 다르다. 잘 알려져있듯 ‘로봇’은 체코어로 노동을 뜻하는 ‘robota’가 어원이다. 즉,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기계가 로봇이다. 여기서 인간 노동이란 주로 공장 노동자의 일을 가리킨다. 공장에 들어있는 수 많은 로봇 팔 등을 떠올리면 된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 정밀하고 정확한 일에 로봇이 쓰인다.

그러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아이, 로봇>에서 말하는 로봇은 이처럼 단순히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기계 덩어리를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로봇, 인간을 닮아 인간의 일상적인 일을 대신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첫 등장하는 유모 로봇 로비가 바로 그렇다. 유모, 아이 돌봄이란 ‘노동-일’이기도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공장노동’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아직까지도 육아는 ‘노동’의 영역에 잘 들어오지 못한다. 이 때문에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로봇은 위에서 소개한 공장에서 일하는 기계와는 전혀 다른 문제를 던져준다. 로봇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를 넘어,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를 묻게 만든다. 만약 뒤에 나오는 로봇, 예를 들어 광물을 채취한다던가 공사를 대신하던가 하는 로봇으로 소설을 시작했다면 전혀 느낌이 달랐을 것이다. 이 소설은 ‘로봇이 우리 가까이 있으면 어떨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내 말 잘 들어요. 앞으로는 우리 딸을 기계한테 맡기지 않을 거예요. 그 기계가 아무리 똑똑해도 말이에요. 기계는 영혼도 없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아이는 금속 기계한테 맡겨지려고 태어난 게 아니에요.” (23쪽)

웨스턴 부인의 저 말은 위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기계 덩어리를 곁에 두는 것은 뭔가 꺼림직하다.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기계는 끔찍하기까지 하다. 여러분이라면 어떤가? 아이를 로봇에게 맡기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만약 어린 시절 부모가 로봇에게 여러분을 맡겼다면? 여러 생각이 들텐데, 그것은 ‘인간의 일’이라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수잔 캘빈 박사를 인터뷰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수잔 캘빈 박사는 U.S. 로보틱스에서 일하면서 로봇에게 일어난 다양한 문제를 경험한 인물이다. 소설을 읽으면 로봇의 발전사를 대충 훑어볼 수 있는데, 처음에 등장한 로비가 인간의 말에 단순하게 반응하는 존재였다면 이후에는 말을 하기도 하며, 욕구를 갖기도 하고, 딜레마에 빠져 망가지기도 한다. 결국 나중에는 세계를 ‘조정’ – 이를 ‘지배’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할지도 –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로봇을 따라 사회도 덩달아 발전하는데, 나중에 가면 초공간 우주 여행으로 우주에 여러 식민지를 만들기도 한다.

놀랍게도 소설 속에서 수잔 박사는 1982년 생이다. 그가 로봇 심리학자로 U.S. 로보틱스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이었다! 첫 주인공 로비는 20세기 후반, 1998년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2016년에 사는 우리는 로봇을 볼 기회도 별로 없다. 장난감 로봇이라면 몰라도, 로비처럼 숨바꼭질을 하며 놀 수 있는 로봇이란 아직도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1950년 대에 쓰여졌는데 작가가  상상한  반세기  후는  꽤 매력적인 세상이었다. 현실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소설에서 던지는 질문에 지혜롭게 답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로봇은 인간을 닮고, 인간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기에 이른다. 세번째 등장하는 로봇 큐티의 질문을 보자. 큐티는 인간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하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 열등한 존재가 우월한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두 사람 자신을 보세요. 깔보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두 사람 자신을 보라고요! 두 사람을 구성하는 물질은 약하고, 강도와 지구력도 떨어지고, 에너지를 유기물의 완전한 산화 작용에 의존하고 있어요. …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의식을 잃고, 기온이나 기압이나 습기나 열기가 조금만 변해도 효율성이 떨어져요. 두 사람은 임시 방편으로 만든 제품이 분명해요. 하지만 난 완성된 제품이에요. 전기 에너지를 직접 흡수해서 거의 백 퍼센트 효율적으로 활용하죠. 몸은 단단한 금속으로 구성되어 있고, 항상 의식이 깨어 있고, 극단적인 환경을 쉽게 견딜 수 있어요. 이런 사실은 그 어떤 존재도 자신보다 우수한 존재를 만들 수 없다는 확실한 명제에서 볼 때, 두 사람의 멍청한 가설이 엉터리라는 걸 증명해요.” (91쪽)

오류는 인간의 것

오류는 인간의 것

이 얼마나 멋진 ‘합리적 의심’인가? 그런데도 로봇은 인간의 명령을 따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다. 그것은 모든 로봇이 제1원칙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좀 거칠지만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로봇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과연 인간에게 끼칠 수 있는 ‘해로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허비, 마음을 읽어 거짓말 하는 로봇은 이 문제 때문에 결국 딜레마에 빠져 망가져버리고 만다.

“어떤 종류의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걸까요? … 어떤 종류든! 그렇다면 마음이 상하는 건 어떨까요? 인간의 자아가 위축되는 건? 인간의 희망이 사라지는 건? 이것도 해가 될까요?”(184쪽)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란 없다. 개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인간 사이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쉽게 생각하자. A에게는 A가 좋다고 하고, B에게는 B가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만약 그가 여러분의 이성친구라면! 그는 여러분에게 과연 이로운 존재일까? 한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다른 인간에게도 이로울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거의 대부분 한쪽의 이익은 다른쪽의 손해를 낳는다.

이를 조금 수정하자. 만약 로봇이 소유주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여기서 즉각 나오는 문제는 한 인간이 로봇을 도구로 다른 인간을 해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로봇을 군대나 도둑으로 만드는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특정한 조작으로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하자. 다른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한 인간에게 이로움을 준다고 하자. 그러면 괜찮을까?

여기에도 문제는 발생한다. 한 인간에게 한 때 이로운 일이 과연 이후에도 그럴까? 여러분의 일상을 돕는 로봇을 상상하자. 청소년의 게임에 대해서 로봇은 무엇이라 반응할까? 마약과 같이 짧은 쾌락을 주지만 건강을 망치는 것은 어떤가? 자살은? 더 나아가 존엄사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까?

개구쟁이 천재로 소개된 브레인은 초공간 여행을 가능케했다. 비록 인간이 초공간 이동 순간 죽음을 경험하지만 무사히 돌아올 것을 알기에 브레인은 초공간 여행을 실행했다. 물론 그 긴장-불안정 때문에 유머(!)를 갖게 되었지만.

“… 딜레마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예요. 비록 죽음은 한순간이고 그 의가 약화되었는데도 브레인을 불안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거든요. … 그 결과는 일종의 유머로 나타났어요. 유머는 브레인이 현실을 부분적으로 도피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정말 짓궂은 장난꾸러니가 된 거죠.” (282쪽)

소설 속에서 거의 모르모트 수준으로 갖은 고생을 하는 두 인물 파웰과 도노반은 인류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초공간 여행을 경험한다. 매끈한 우주선으로 실려 갔다가 돌아온 것에 불과했지만. 생각보다 우주선은 안전했고, 브레인의 계산은 틀림이 없었다. 음식도 충분했다. 그러나 만약 그 둘이 폐쇄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면? 혹은 목욕도 못하고 콩 따위나 먹는 상황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미쳐버리거나 했다면? 그들이 유쾌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생명에는 해가 되지 않더라도.

k-20080823-072200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거꾸로 이런 로봇도 가능하다. 우울한 로봇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마빈

이제 로봇은 인간의 연산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라는 게 여러 경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물론 그 ‘해로움’에 대한 의문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는 잠시 잊어두자. 만약 그렇다면 그토록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로봇을 공직자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어떤가?

“… 난 로봇이 좋아요. 인간보다 훨씬 좋아하지요. 만일 로봇이 공직 생활을 해도 된다면 정말 훌륭한 공직자가 될 거예요. 로봇의 기본 원칙 때문에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독재나 부정부패는 물론이고 멍청한 편견도 갖지 않을 테니까요.” (326쪽)

수잔 박사의 이 말은 어떤가.  고개를 끄덕일  만하지  않나? 정치란 늘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는 게 문제니. 만약 내년 대선에 완전한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어떨까? 투표권이 있다면 인간에게 투표하겠는가 아니면 완벽한 인공지능에게 투표할 것인가?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치가 ‘지배’를 위한 게 아니라 ‘조정’을 위한 것이라면 합리적 조정자, 로봇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결국 소설은 수퍼 컴퓨터가 세계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데 이른다. 그런데도 세계의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수잔 박사는 그 모든 것이 수퍼 컴퓨터의 계산 안에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지역적으로는 갈등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이것은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제 또 다른 원칙이 필요하다. 제0원칙이라 불리는 것이다.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류를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앞에서 질문한 첫째 문제, 한쪽의 이익이 다른쪽의 해로움일 경우에 대한 대답이다. 비슷하게 앞에 던졌던 둘째 질문에 대한 대답도 가능하다. ‘로봇은 인간의 삶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의 삶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한가? 모르겠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다.

과연 ‘인류의 이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한 때 서점가를 달구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빌려보자. 여러분이 버스의 운전사다. 그런데 앞에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을 피하려면 핸들을 옆으로 꺾어야 한다. 그런데 절벽 옆 좁은 도로 위다. 핸들을 옆으로 꺾으면 승객이 위험하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가정을 더하자. 승객이 10명, 도로에 등장한 사람이 1사람이라면? 거꾸로라면? 혹은 여러분의 버스가 일반 버스가 아니라 죄수 호송차였다면? 그리고 앞에 나타난 것이 어린 아이였다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아직도 많이 있다.

이런 까다로운 순간 수퍼 컴퓨터는 어떻게 판단할까? 그리고 그 선택은 만족스러운 선택이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이로움과 해로움을 결정하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움을 선택하기에 앞서 이로움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로봇의 3원칙에 0원칙을 더하더라도,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무엇이 해로움인가? 무엇이 이로움인가?’ 사실 이것은 인간이 답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단순히 재미난 소설을 넘어 묵직한 질문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러한 문제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로봇과 인공지능을 섞어 사용했다. 사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2016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알파고’를 기억하자. 알파고는 바둑 ‘두는 법을 계산’하는 기계이기는 했지만 바둑을 ‘두는’ 기계는 아니었다. 중계 방송을 본 사람은 알파고의 결과에 따라 사람이 바둑을 놓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한편 일본 만화에 흔히 등장하는 로봇을 생각하자. 마징가, 건담 따위의 로봇은 인간이 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무쇠 덩어리에 불과하다. 인간을 닮은 기계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소설은 이 둘이 결합되어 있다. 양자두뇌를 탑재한 로봇.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이 둘은 다르며 현실에서도 서로 따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을 닮은 로봇과 인간처럼 사고하는 컴퓨터로. 과연 이 둘이 결합되어 진짜 인간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 날이 올까?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로봇의 금속 뼈대에 인간의 피부를 입히는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유명한 예다. 이 소설도 그와 비슷한 문제를 다룬다. ‘바이어리’가 그렇다. 이를 ‘안드로이드’라고 부른다. 인간과 구분하기 힘든 로봇!

한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인간이 상실한 기능의 일부를 로봇이 대신한다고 하자. 예를 들어 팔을 잃은 사람이 로봇팔로 교체한다면? 현실에서도 일부 가능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것만큼 만족할만하지는 않다. 기계와 결합한 인간, 이를 ‘사이보그’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인물로 스티븐 호킹이 있다. 만약 과학이 더 발전하면 어떨까? 사이보그는 인간보다 더 훌륭한 능력을 갖지 않을까? 훨씬 힘이 세다던가 하는. 나중에는 무한한 생명을 위해 기계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인간마저 상상할 수 있다. <은하철도999>의 철이가 바로 이를 목표로 여행을 떠나는 인물이다.

..?!!?

..?!!?

인간과 로봇,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 이는 결국 인간의 경계를 묻는 질문을 가져온다. 이들이 마구 뒤섞인 사회에 산다면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 몸 전체를 기계로 바꾼 것은 인간인가? 거꾸로 인간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기계, 인간과 똑같은 그는 여전히 기계에 불과한 것일까? 소설에서는 실리지 않은 또 다른 로봇의 이야기가 있다. 바이어리의 이야기에서 이미 이 문제가 간단히 다루어지기도 했다. 소설에서는 그를 로봇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로봇이라면 시민권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314쪽)

아무래도 인간이 기계가 되는 쪽보다는, 기계가 인간이 되는 쪽이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것은 불가능할까? 아이작 아시모프의 다른 소설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링크)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에서 아이작 아시모프는 기계가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가능성 여부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생각이 궁금하다면 소설을 읽어보자.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을 보는 것도 좋다.

기왕에 상상의 나래를 펼친 이상 하나 질문을 더해보자.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가 뒤섞인 세상, 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열렸다고 하자. 그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사이보그도 인간도, 안드로이드도 모두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안드로이드 친구도, 사이보그 친구도 있다. 그렇다면 가족이란 어떻게 될까? 만약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를 이성친구로 만들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안드로이드 혹은 사이보그와도 결혼할 수 있을까?

거듭 말하지만 이런 질문은 단순한 공상에 그치지 않는다.

 

2012년 청소년 고전학교 4학기 – 은둔과 탈주의 철학,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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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지몽, 장주와 나비…
장주가 나비고, 나비가 장주니!

거대한 현실의 폭력에 개인은 언제나 무력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당당하게 그 현실에 대항하기도 합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현실에 정면으로 대항하기보다는 현실을 빗겨가는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지난 번에 만난 <맹자>가 전자의 경우라면 이번에 만날 <장자>는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부귀와 명성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재물도, 재상처럼 높은 지위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가 도리어 자신의 삶을 해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진흙탕과 같은 지저분한 삶이지만 장자는 그 속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말합니다.

<장자>는 다양한 우화와 알쏭달쏭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연 장자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들을 통해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4개월간 <장자> 전문을 읽어가며 장자가 꿈꿨던 은둔과 탈주의 삶에 대해 알아봅시다. 더불어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는 그의 통쾌한 사유를 만나봅니다.

  • 강사: 기픈옹달 일시: 2012년 9월 2일 ~ 12월 30일 /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 대상: 중고등학생 또는 그 또래의 청(소)년 약 20명

– 수업은 주로 토론 위주로 진행합니다. 따라서 <장자>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와야 톤론에 성실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 교재는 나중에 공지합니다. 좋은 번역본을 골라 <장자> 전문을 완독합니다. 참여자는 모두 교재를 가져와야 합니다.
– 매주 암송 과제가 있습니다. <장자> 원문 가운데 일부를 골라 한문으로 읽고 암송합니다.
– 참여자는 돌아가면서 발제문을 써와야 합니다. 한편 원활한 토론을 위해 매주 토론자를 지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참여자는 2~3번 정도 발제자나 토론자로 세미나를 이끌어야 합니다.
– 넉 달간 쉬지 않고 진행합니다. 다만 일정 중간에 시험기간을 고려하여 2주 정도 영화를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번에 볼 영화는 <메트릭스>와 <와호장룡>입니다. 모두 <장자>와 연관 지을 수 있는 영화니 기대하시길!
– 마지막 주에는 <장자> 전문을 읽고 멋진 에세이를 써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장자>를 읽고 멋진 글을 한편 쓰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 넉 달간 끝까지 지치지 않고 충실하게 참여할 친구들만 신청해주세요. 중간에 포기하면 아무런 공부도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보다 얼마나 성실하게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끝까지 지각, 결석을 하지 않을 친구들과 함게 공부하고 싶습니다.

 

Q: 장자는 어떤 사람?

장 자莊子는 몽蒙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다. 그는 일찍이 몽지방의 칠원漆園이라는 곳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했고 양혜왕梁惠王, 제선왕齊宣王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그는 학문이 넓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 학문의 요체는 노자의 말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학설로 돌아간다. 십여 만 자에 이르는 그의 책은 대부분 우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어부漁父>, <도척盜跖, <거협胠篋> 편을 지어서 공자 무리를 비판하고 노자의 가르침을 밝혔다. 외루허畏累虛, 항상자亢桑子 같은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라 꾸며 낸 이야기이다.

장 자는 빼어난 문장으로 세상일과 인간의 마음을 살피고 이에 어울리는 비유를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했다. 당대의 학문이 무르익은 위대한 학자들도 장주의 공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의 말은 거센 물결처럼 거침이 없으으로 왕공王公이나 대인大人들에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초나라 위왕威王은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 천 금千金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이지요. 그대는 교제(郊祭 고대 제왕이 해마다 동짓날에 도성의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올린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 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 83~84쪽. <노자, 한비 열전> 중

2012년 청소년 고전학교 3학기 – 성리학 : 학자들의 나라를 꿈꾸다 (7월 15일 개강)

PLCT00005060이번 여름 강좌의 주제는 ‘성리학’입니다. 흔히 유학 혹은 성리학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한 따분한 학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의범절이나 강조하고 쓸데 없는 규범들로 사람들을 옭아맨 족쇄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오늘날에도 참고해볼만한 멋진 생각들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본 강의에서는 7가지 키워드로 성리학을 배워보고자 합니다. 성리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들은 우주를,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자 했을까요? 그들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라고 생각했을까요? 등등. 중요한 질문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삶을 꿈꾸는 청소년들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1강_ 7월 15일: 사대부士大夫 – 새로운 지식인의 탄생
2강_ 7월 22일: 태극太極 – 이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3강_ 7월 29일: 학學 – 성인이 되는 공부, 나를 위한 공부
4강_ 8월   5일: 지知 – 안다는 것, 세계를 책임진다는 것
5강_ 8월 12일: 인仁 – 천하만물과 하나가 되리
6강_ 8월 19일: 성性 –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할까 악할까?
7강_ 8월 26일: 심心 – 마음 뿐이니 마음 밖엔 아무것도 없도다

  • 매주 강의안을 나누어줍니다.
  • 강의 후 해당하는 관련된 문장을 한문 원문으로 강독합니다.
  • 강사: 기픈옹달
  • 일시: 2012년 7월 15일 ~ 8월 26일 /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 대상: 중고등학생 또는 그 또래의 청(소)년 약 20명
청소년 고전학교에서는 청소년과 함께 다양한 동양 고전을 읽습니다. 방학중에는 강좌를 중심으로, 학기 중에는 세미나를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2012년 올해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 1학기   (1~2월): 강좌_ 춘추전국, 창조적 사상가들의 시대
  • 2학기   (3~6월): 세미나_ <맹자>, 천하무적 맹자가 나가신다
  • 3학기   (7~8월): 강좌_ 성리학, 학자들의 나라를 꿈꾸다
  • 4학기 (9~12월): 세미나_ <장자>, 탈주와 은둔의 철학(가제)

* 강좌 회비는 강좌 시작 후 환불이 불가능합니다. 강좌 회비는 강사료, 공간 운영비, 꼬뮨의 활동비로 지출됩니다. 강좌를 신청하실 때에는 향후 일정을 잘 고려하셔서 신청해 주세요. 

* 그 밖에 궁금하신 점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2012년 청소년 고전학교 2학기 – 천하무적 맹자가 나가신다 (3월 4일 개강)

맹자2춘추전국春秋戰國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우리가 만나볼 사람은 ‘맹자’라는 인물입니다. ‘천하무적’, 이 말보다 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맹자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모두 맹자의 날카로운 언변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꾸라집니다. 그렇다고 맹자를 말재주나 있는 뛰어난 논쟁가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는 선배였던 공자처럼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꿈꾸며 천하를 돌아다녔던 방랑객이기도 합니다. 한편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일찌감치 관심을 두었던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많은 말보다 맹자를 제대로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맹자>를 읽어보는 것입니다. 이번 청소년 고전학교에서는 번역문으로 된 <맹자> 전문을 읽고 맹자가 꿈꾼 이상 사회가 무엇인지, 그 이상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어때야 하는지, 나아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까지 꼼꼼하게 살펴봅니다. 춘추전국이라는 혼란을 극복하고자 한 맹자의 사유를 살펴보며 불안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현주소를 점검해봅시다.

  • 강사: 기픈옹달
  • 일시: 2012년 3월 4일 ~ 6월 24일(4개월) / 매주 일요일 오후 2시~5시 30분
  • 대상: 중고등학생 또는 그 또래의 청(소)년 15명

<수업 내용>

1교시: 강의 및 고전 암송 – 한문으로 <맹자> 명문을 읽고 암송합니다.
2교시: 세미나 – 발제문을 바탕으로 <맹자>에 대해 토론해봅니다.

  • 준비물: 필기도구(연필, 지우개), 한문 공책
  • 교재: <맹자>, 홍익출판사, 박경환 옮김
  • 참고도서: <천하를 돌아다니다 맹수레 맹자>, 전호근, 삼성출판사 / <청소년을 위한 맹자>, 황광욱, 두리미디어
  • 매주 정해진 분량의 텍스트를 꼭 읽어와야 합니다. 4개월 동안 번역본으로 된 <맹자> 전문을 읽습니다.
  • 매주 암송 과제가 있으며 돌아가면서 발제문을 써와야 합니다. 마지막 주에는 에세이를 써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 모든 공부에는 성실함과 꾸준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끝까지 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분만 신청해주세요.
  • 시험 기간에 상관없이 수업은 계속 됩니다. 다만 중간에 한 주 정도 시간을 내어 특별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등산이나 영화 관람등)
  • 청소년 고전학교에서는…

– 청소년 고전학교에서는 청소년과 함께 다양한 동양 고전을 읽어갑니다. 방학중에는 2달간 강좌를 중심으로, 학기 중에는 세미나를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올 한해의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1학기   (1~2월): 강좌_ 춘추전국, 창조적 사상가들의 시대
2학기   (3~6월): 세미나_ <맹자>, 천하무적 맹자가 나가신다
3학기   (7~8월): 강좌_ 성리학, 학자들의 나라(가제)
4학기 (9~12월): 세미나_ <장자>, 탈주와 은둔의 철학(가제)

꼭 기억해 주세요

  • ‘수유너머R’은 연구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좋은 배움으로 좋은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활동의 연장선에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수강료를 내고 강의를 듣는 ‘학원’과 같은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해주시기 바랍니다.
  •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를 비롯해서 연구실에 계신 모든 분들은 함께 공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청소년 강좌의 경우에도 따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행정적인 업무가 미흡하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궁금하신 사항이 있다면 홈페이지에 댓글로 남겨주시거나 직접 연구실로 전화해주시면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강의가 시작되면 수강료는 반환되지 않습니다. 강좌회비는 전액 강사료와 공간 이용료 등 꼬뮨의 활동비로 지출됩니다. 또한 일부를 수강할 경우에도 1/N으로 나누어 계산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수강 신청시 이후 일정등을 고려해서 신중히 신청해주세요.
  • 주차 공간이 따로 없습니다. 오실 때에는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세요.

2012년 겨울 청소년 강좌 – 초등반 토요서당 & 청소년 고전학교

초등반 토요서당 2012년 1월 7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png배움이란 신체와 텍스트가 만나는 역동적인 활동입니다. 좋은 배움을 위해서는 열심히 몸을 써야 합니다. 텍스트를 쓰는 손, 읽는 입, 보는 눈, 듣는 귀가 모두 필요합니다. 모든 신체가 깨어서 배울 때 앎과 삶의 일치, 넓은 마음과 건강한 신체의 비전을 고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요서당에서는 몸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들을 환영합니다. 고전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필요한 것은 함께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입니다. ‘한자’와 ‘한문’을 전혀 모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고전을 처음 배우더라도 괜찮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더 재미있게, 더 즐겁게 고전을 배워봅시다.

<수업 내용>
1교시(14:00 ~ 15:20) – 고전 암송: <논어>에서 뽑은 멋진 문장과 아름다운 시 한편을 배웁니다.
2교시(15:30 ~ 16:30) – 고전 읽기: 다양한 고전 작품을 소리내어 읽고 직접 원고지에 써봅니다.

  • 강사: 기픈옹달, 나무, 한준
  • 일시: 2012년 1월 7일 개강 /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 4시 30분
  • 대상 및 정원: 초등학교 3-4학년 약 12명 / 5-6학년 약 12명

* 준비물: 필기도구(연필, 지우개), 클리어 파일 / 고전 읽기 교재: <일곱가지 밤> 이옥, 알마
* 매주 수업 자료를 나누어 줍니다. 고전 읽기 시간에는 매주 정해진 분량을 읽고 와야 합니다.(범위는 추후공지)
* 고전 읽기 수업은 학년별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3-4학년은 나무 선생님과, 5-6학년은 기픈옹달 선생님과 함께 공부합니다.

*2012년 토요서당은 상시로 운영됩니다. 따라서 언제든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단, 2달씩 등록 가능하며 신청은 매월 첫째 주와 마지막 주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2월부터 수업을 듣는 학생은 1월 마지막 주와 2월 첫째 주 사이에 등록 가능합니다. (정원이 다 차있는 경우에는 신청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3월에는 1, 2월 신청자 가운데 재등록 하는 인원을 제외하고 신청받도록 하겠습니다. 꾸준히 함께 공부하시는 분에게 먼저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3월부터는 주 5일제 시행에 따라 오전 10시로 수업 시간을 옮깁니다. 참고하세요.

 

춘추전국, 창조적 사상가들의 시대 2012년 1월 8일 개강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전국戰國‘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이 시기엔 나라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혼란을 해결하고자 다양한 사상가들이 나왔습니다. 공자, 맹자, 장자, 노자 등 ‘자子’로 끝나는 사상가들이 모두 이때에 출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당면한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본 강의에서는 이들의 주장이 담긴 핵심적인 문장을 읽고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비록 창과 칼은 사라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춘추전국 시대 못지않은 혼란기입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해답을 찾아보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1강_ 1월 8일: <사기열전>, 춘추전국 시대로 가는 친절한 안내서
2강_ 1월 15일: <논어>, 예禮로 천하를 바꾸리라
3강_ 1월 29일: <맹자>, 오직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
4강_ 2월 5일: <장자>, 하늘 높이 나는 대붕大鵬이 되어
5강_ 2월 12일: <노자>, 말할 수 있는 도道는 도가 아니다
6강_ 2월 19일: <대학>, 자신을 바르게 하는 자가 천하를 평안케 하리라
7강_ 2월 26일: <주역>,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 강사: 기픈옹달
  • 일시: 2012년 1월 8일 ~ 2월 26일 /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 대상: 중고등학생 또는 그 또래의 청(소)년

*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획되었지만 강의에 관심있는 ‘청년-잉여’ 세대도 환영합니다. 먼저 전화로 문의해주세요.
* 청소년 고전학교에서는 청소년과 함께 다양한 동양 고전을 읽어갑니다. 방학중에는 강좌를 중심으로, 학기 중에는 세미나를 중심으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이어서

* 3월~6월에는 <맹자>를 읽습니다. 올 한해의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1학기 (1~2월): 강좌_ 춘추전국, 창조적 사상가들의 시대
2학기 (3~6월): 세미나_ <맹자>, 천하무적 맹자가 나가신다
3학기 (7~8월): 강좌_ 성리학, 학자들의 나라(가제)
4학기 (9~12월): 세미나_ <장자>, 탈주와 은둔의 철학(가제)

2011년 가을 청소년 강좌 – 토요서당 <대학>, 청소년 고전학교 <논어>

토요서당: 큰 사람이 되는 공부, <대학>_ 10월 15일 ~ 12월 17일


배움이란 신체와 텍스트가 만나는 역동적인 활동입니다. 따라서 좋은 배움을 위해서는 열심히 몸을 써야 합니다. 텍스트를 쓰는 손, 읽는 입, 보는 눈, 듣는 귀까지. 모든 신체가 깨어서 배울 때 앎과 삶의 일치, 넓은 마음과 건강한 신체의 비전을 고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토요서당에서는 몸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들을 환영합니다. ‘한자’와 ‘한문’을 전혀 모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고전을 처음 배우더라도 괜찮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더 재미있게, 더 즐겁게 고전을 배워봅시다.

이번에는 10주 동안 <대학大學>을 배웁니다. <대학>은 ‘큰 사람(大人)’이 되는 공부를 말합니다. ‘큰 사람’이란 소인小人의 반대말로, 마음과 생각이 큰 사람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이 ‘큰 사람’의 배움은 단지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것은 물론 천하를 평안케 하는 공부를 말합니다. 그 힘 있고 원대한 공부의 요체를 함께 탐험해 봅시다.

  • 강사: 기픈옹달
  • 일시: 2011년 10월 15일 ~ 12월 17일(10주) /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30분 ~ 4시 30분
  • 대상: 초등학교 고학년

<수업 내용>
1교시: 고전 암송 – 매주 <대학>의 문장을 읽고 쓰며 암송합니다.
2교시: 고전 시가 – 고전 시가를 읽고 재미있게 시를 지어봅니다.

* ‘수유너머R 청소년 강좌를 듣는 친구들에게‘라는 글을 꼭 읽고 신청해 주세요. ?
* 입금 후 홈페이지 게시판에 댓글로 신청자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 준비물: 필기도구, 한문 공책, 200자 원고지 등

 

청소년 고전학교: <논어>, 배움과 우정의 공동체를 찾아서_ 10월 9일 ~ 12월 18일


 

고전이란 단지 낡은 텍스트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늘 새롭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 오늘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텍스트입니다.

청소년 고전학교에서는 고전을 통해 자기 힘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합니다. 시공을 초월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주옥같은 문장을 읽고 옮겨 쓰며 자신의 말이 되기까지 익힙니다. 이번에는 <논어>를 통해 배움과 우정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탐구해 봅니다.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않겠는가?’ <논어>를 여는 첫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 배움과 익힘, 학습學習이 기쁘다는 공자의 말은 낯설기만 합니다. ‘학습’이 ‘노동’이 시대에 기쁨이란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매주 수십 시간을 학교에 매여 있는 청소년들에게 ‘학습-배움’이란 지겹고 따분할 뿐입니다. 과연 공자가 말한 배움의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논어>를 함께 읽으며 이에 대한 답을 찾아봅시다. 공자와 제자들이 만든 배움과 우정의 공동체는 배움에 지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수업 내용>
1교시: 강의 및 고전 암송 – 공자와 제자들에 대한 강의를 듣고 관련된 한문 문장을 암송합니다.
2교시: 자유 토론 – 발제문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논어>에 대해 토론합니다.
3교시: 에세이 쓰기 – 다양한 주제로 매주 짧은 글을 써봅니다.

마지막 주에는 최종 에세이를 써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 ‘수유너머R 청소년 강좌를 듣는 친구들에게‘라는 글을 꼭 읽고 신청해 주세요. ?
* 어떤 공부를 하건 성실함과 꾸준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끝까지 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청소년만 신청해 주세요.
* 입금 후 홈페이지 게시판에 댓글로 이름과 연락처, 간단한 소개 글을 꼭 달아주세요.
* 매주 정해진 과제가 있습니다. 공통 과제로는 암송, 텍스트 읽기 및 에세이 쓰기 등이 있습니다.
* 준비물: 한문노트, 원고지

 

공개 특강: 고전을 읽는다는 것 – 청소년과 고전, 그 기묘한 만남에 대해_ 10월 8일


청소년과 고전은 어떻게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새로운 변화에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구닥다리 고전을 읽으라니! 더구나 입시 공부에 묶여 있는 청소년들에게 고전을 권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고전이야말로 탈출구라고. 청소년이 고전을 읽었을 때 비로소 멋진 비전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청소년과 고전이 만났을 때 멋진 화학반응이 일어난다고. 고전을 읽는다는 것, 특히 청소년들에게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고전의 세계에 관심 있는 학부모, 청소년들을 초대합니다.

  • 강사: 기픈옹달
  • 일시: 2011년 10월 8일 토요일 오후 2시
  • 대상: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나 (약 30명)
  • 강좌 회비는 따로 필요 없습니다. 다만 인원 파악을 위해 강의를 듣기 원하시는 분은 댓글로 신청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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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강생 명과 입금자 명이 다를 경우 꼭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세요.* 모든 강좌의 수강료는 환불되지 않습니다.
*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의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의 공지를 참조해주세요.
* 본 프로그램은 모두 이사 간 삼선동의 새 보금자리에서 시작합니다.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5분)

강의 후기 – 10월 17일 음성고등학교, 무극중학교

지난 여름부터 10월에 강의가 몇 개 잡혔어요. 그 가운데 가장 반가운 곳은 음성이었습니다. 제 외가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내려가면서 생각해보니 거의 10년 만에 음성을 가보는 것이었네요.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명절이면 가끔 찾아가던 곳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갈 일이 없었습니다. 음성에 사시는 할머니는 명절 때면 청주 큰외삼촌 댁으로 나와 계시곤했지요.

음성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갑자기 옛 추억에 젖었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인 게 참 신기했어요. 특히 매점! 몇살 때였는지… 터미널은 사람도 많고 무척이나 넓었는데, 지금 보니 참 작더군요. 씁쓸하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터미널 바로 옆에 ‘반 약국’을 보며 피식 웃었습니다. 고추 이외엔 별로 내세울 것 없던 음성이 ‘반기문’ 때문에 유명세를 탔기 때문입니다. 같은 성씨라는 걸 저렇게 보여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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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오전 오후 강의입니다. 오전은 음성고등학교였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만드셨다는 플래카드가 저를 반기더군요. 너머학교 출판사를 통해 소개 받아 강의를 하는데, 사실 출판사에서 내놓은 다른 책도 있긴 합니다. ‘고전이 건내는 말’이라는 주제로 여러 원고를 모은 책인데, <나를 위해 공부하라>에서는 <논어>를 주제로한 책을 썼어요. 그 이외에도 <장자>, <사기>, <욥기>를 주제로 쓴 원고도 있답니다.

그런데 다른 주제로 강의 요청이 들어오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나를 위해 공부하라’는 말이 학교 선생님들이 보시기에 반가운 말이었나봅니다. 강의 장소에 가 보니 플래카드가 태극기 밑에 붙어 있습니다. 전혀 반길 수 없는 배치인데다, 저의 미적 감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감까지!! 한 친구는 ‘맛난 만남’이라는 표현을 직접 썼는지도 묻더군요. 아니요, 아직 제 감각은 그렇게 죽지 않았습니다.(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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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진행하면서 뒤늦게 제가 ‘작가’로 불려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난감하기도 했습니다.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강의가 끝난 뒤에 ‘어떻게하면 작가가 되나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어요.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엄혹한 세상에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니 반가웠습니다.

예전에는 강의에 내용을 많이 담으려 했는데, 요즘에는 내용보다는 제 생각을 많이 전달하려 노력합니다. 함께 느낌을 공유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를 위해 공부하라’는 주제이지만, 공부를 해야한다는 의무감보다는 공부라는 게 좋은 것이라는 느낌을 전달하려 노력합니다. 학교에서 의무로 하는 그런 공부 말고 다른 공부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면도 있어요.

점심은 급식을 먹었습니다. 도시락을 싸서 학교를 다니던 세대여서 급식이 늘 궁금했습니다. 생각보다는 맛있었어요. 다만 교장 선생님 옆이어서 쉬지 않고 밥만 먹었습니다. 학교 식당이 시끄럽기도 해서 서둘러 먹었네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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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엔 무극중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무극’중학교라는 이름이 흥미로웠는데, 역시나 학교 정문에서 확인해보니 한자로 ‘無極’이더군요. 갑자기 ‘無極而太極’이 생각나고 했는데… 나중에 강의를 마치고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으니 바로 이웃엔 ‘생극生極’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음양오행론적 지명이라니!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침반에 극이 가리키지 않는 곳이어서 그렇게 붙였다고 하네요. 범상치 않는 이름만은 분명합니다.

이번에도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모두 여학생들이었는데요, 역시나 그 활기에 제가 압도당해 버렸습니다. 강의는 준비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래도 끝까지 잘 마쳤습니다. 책을 읽은 친구들이 좀 있었는데요, 어떠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재미없다. 어렵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 아니다 등등. 제 기억엔 출판사에서도, 저도 중학생 또래의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책을 펴낸 것인데 정작 청소년들 입장에서는 영 불만이 많은 책인가 봅니다. 나름 노력한 것이지만 역량이 부족한 것을 어찌할까요.

사과의 말을 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부, 독서에 힘이 든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었습니다. 저절로 재미난 공부, 독서가 있을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바로 재미를 주는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귀중한 앎을 전해주는 것인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강의를 하면서도 그렇지만 늘, 순수한 자발성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있다는 데 고민이 있습니다. <논어>나 공자 따위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만 모여있다면 더 좋았을까요? 아니면 재미있게 설명하고 전달할만큼 제 역량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강의 만족도와 무관하게 늘 어떤 간극이 그 사이에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강의가 끝나고, … 책에 사인을 해달라며 줄을 섰습니다. ;;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저렇게 줄을 서는지. 그래도 그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는게 아닌가 싶어 한명씩 이름을 적어 사인을 남겨 주었습니다. 본디 제 이름 석자를 쓰고 마는데, 한 친구가 이게 사인이냐며 핀잔을 줍니다. 그래서 이름 밑에 흘겨쓰는 사인을 또 해주었어요. 신용카드를 긁고 난 뒤에 하는 그 대충 휘갈기는 사인 말입니다. 그런데도 좋다고 환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누구는 돌아가다 다시 ‘정식 사인’을 받겠다며 돌아왔어요. 이름 석자만 받았다고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참! 하트를 그려 달라는 요청까지 있었네요. 이름 앞이나 위, 크기까지 요청하는 바람에 진땀을 뺐습니다. 하트를 그려본 일이 있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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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마친 뒤에는 외할머니 댁에 들렸습니다. 음성 읍내의 아파트에 홀로 사시는데, 찾아뵙기가 쉽지 않았지요. 할머니께서는 두팔을 벌려 손주를 환영해주십니다. 식당에서 뭐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했는데 벌써 밥을 지어 올려놓고 게셨습니다. 청주에서 어머니도 잠깐 들리셨네요. 어머니와 할머니 셋이서 오랜만에 푸짐한 식탁을 나누었습니다. 음성 도서관에서 또 찾아주신다고 했는데 그때 기회가 되면 더 여유를 가지고 할머니를 찾아 뵈어야겠어요.

저녁을 먹고 일어서려니 벌써 하늘이 어둡습니다. 컴컴한 터미널에 다시 돌아오니 또 옛 생각이 납니다. 언젠지 모르겠는데, 터미널에서 연탄불에 굽던 쥐포가 어찌나 먹고 싶었는지. 그 자리가 그대로 있네요. 지금도 쥐포를 구워 판다면 꼭 사먹었을 텐데… 참! 쥐포나 오징어는 어째 집에서 스스로 구워먹는 건 그리 맛있지 않을까요? 필시 거기에도 무슨 요령이 있는 탓입니다. 터미널 의지를 보니 낡은 세월이 고스란히 보입니다. 테잎으로 대충 기워 놓은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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