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사상사 약론]_장타이옌의 ‘구분진화론’

근대 중국사상사 약론
천샤오밍 외 지음, 김영진 옮김/그린비

진화가 진화일 수 있는 까닭은 한 방향으로 진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한 방향의 진화를 들라면 지식의 진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약 도덕으로써 이야기하자면 선도 진화하고 악도 진화한다. 생활로써 말하자면 쾌락도 진화하고 고통도 진화한다. 쌍방향의 병진은 마치 그림자가 사물을 따르는 것이나 반그림자가 그림자를 따르는 것과 같다.

246쪽: 2부_불법이 세상으로 뛰어들다 - 무신교의 건립

장타이옌(장태염, 章太炎)의 ‘구분진화론’이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류 사회의 발전, 진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벌어지지 않는다. 200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경험한 정치 공간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축제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높게 쌓인 ‘명박산성’을 마주했다. 21세기 천만의 인구가 모여 사는 수도에 쌓인 컨테이너 산성. 잃어버린 10년이니, 20-30년 전으로의 회귀니 말하고 있지만 사실 우린 그 자리를 그렇게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맹자를 읽는 우리의 자세

 

맹자 - 8점
맹가 지음, 안외순 옮김/책세상

 

고전은 어떤 책일까? 우선은 오래된() 책이다. 그것도 수십 단위가 아니라 수백 때로는 수천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닳도록 읽혀온 책을 말한다. 너무나 유명한 책이다 보니 책을 직접 읽지 않아도 내용을 훤히 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실제로 이러한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그렇기에 고전은 사람들이 가장 아는 책이자 동시에 가장 읽지 않는 책이다

이러한 법칙은 <맹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맹자>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제대로 읽어본 사람도 거의 없다. <맹자> 전혀(이름조차!) 모르는 아주 소수와 <맹자> 읽어본 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맹자>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맹자> 안다는착각 빠져 있다.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바로 여기,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맹자> 어떻게 읽어야 할까? 물론 <맹자> 직접 읽는 것만으로도(그것이 설령 번역본 일지라도), 우리는 <맹자> 읽어본 소수의 뛰어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주의할 . 그냥 읽다가는 읽는 대로 <맹자>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온 대로 <맹자> 읽기 쉽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으로 <맹자> 읽기 쉽다는 뜻이다. 사람은 <맹자> 읽었지만 <맹자> 대해서는 조금도 알게 것이 없는 사람이다. 고전을 읽을 빠지기 쉬운 함정이 이것이다. 특히 닳고 닳도록 유명한 사상가의 책일수록 더욱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을 , 공자의 논어를 읽을 ,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을 읽을 , 우리는 활자를 통해 만나는 그들의 목소리에 기울이기보다는 사방에서 울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에 바쁘다. 책은 눈으로 읽지만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이해하는 역설적인 해석의 법칙!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긍정했으며 공자는 삼강오륜만 지겹도록 주장했고 예수는 권위에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씻고 보면 정작 그런 말을 적이 없거나, 했더라도 전혀 다른 맥락에서 말한 것을 부풀린 것에 불과하다. 마치 카더라 통신의 조선일보식 해석이랄까?

그래서 우리는 <맹자> 읽을 , 우리의 눈을 예리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과연 그것이 맹자가 직접 말인지 아닌지를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귀를 씻을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을 잠깐은 잊을 필요가 있다.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영화관 자리에 앉는 동시에 스포일러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때론 광고를 통해 소개되었던 내용까지도 잊을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비춰지는 자체, 눈앞에 지금 보이는 대로만 즐기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맹자> 가진 독특한 매력을 전혀 이해할 없다. 그건 마치 단지 아이돌스타라는 이유만으로 소방차, 서태지와 아이들, DJ DOC 거기다 NRG, HOT 모두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흡사하다. 실제로 방송에 관심 없는 어른들은 요즘 나오는 SS501이나 빅뱅이 서태지와 아이들과 어떻게 다른지조차 구별할 없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를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 수를 세어보면 된다. 간단한 것조차 없는 대상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공자나 맹자, 노자나 장자, 순자나 한비자가 모두 똑같다고? 그렇다면 그건 무관심 때문이다. 수업에서 텍스트를 자세히 여러 읽으라는 것도 그런 의미이다

이제부터 익숙하지만 낯선 <맹자> 읽는다. 우선은 지금까지 들어온 스포일러를 까맣게 잊을 ! 잊을 없다면 내가 읽는 <맹자>에서 정말 그런 말이 있는지를 확인할 ! (영화도 그렇지만 <맹자> 예고편과 본편이 전혀 다를 있다!) 그리고 끊임없는 관심을 가질 ! 수업을 통해 누구나 <맹자>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럴 수도 없고. 대신 모두 <맹자> 이해할 수는 있다. 잊지 ! 이것이 진정으로 텍스트를 사랑하는 자세다.

[천하를 돌아다니다 맹수레 맹자]_천하무적 떠돌이 맹자!

천하를 돌아다니다 맹수레 맹자 - 8점
전호근 지음, 이예휘 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삼성출판사

맹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400여 년 전 중국의 전국 시대에 태어나 활동했던 대철학자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字)는 거(車)라 했습니다. 자(字)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고 이름 대신 부르는 일종의 별명입니다. 그런데 맹자의 이름과 자의 글자를 잘 살펴보면, 수레를 뜻하는 ‘거(車)’자가 모두 들어 있지요? 이름대로 맹자는 평생 동안 수레를 타고 온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임금을 찾아다녔습니다. … 당나라 때의 대문장가였던 한유는 맹자를 두고 철환천하(轍環天下), 곧 수레의 바퀴가 온 천하를 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공언무시(空言無施), 곧 빈 말만 요란했지 실제로 한 일은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머리글, 맹자는 모르겠고 맹자 어머니는 안다고요?

공자와 맹자,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건 없는 법이다. 공자와 맹자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친해지기도 쉽지 않다. 이 책은 맹자를 아주 쉽게 소개해 주는 책이다. 맹자는 어떤 사람이었나? 저자 전호근은 제목에 맹자의 삶을 압축해 놓았다. 바로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닌 사람, 그래서 이름에까지 수레(車)를 붙이게 된 사람, 그가 바로 맹자이다. 저자는 맹자의 자(字), 맹거(孟車)를 ‘맹수레’로 번역해서 소개한다. 맹자가 아닌 ‘맹수레’, 이름부터 친근하지 않는가?

저자는 이미 여러 곳에서 맹자 강의로 유명하다. 나도 공부를 시작할 무렵 전통문화연구원에서 전호근 선생의 맹자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맹자 원문뿐만 아니라 맹자를 둘러싼 당시의 사회, 역사적 배경까지 더불어 설명해주는 바람에 제법 재미있게 공부한 기억이 있다. 그런 맹자 전문가가 쉽게 풀어놓은 책인 덕에 쉽되 너무 가볍지 않고, 명쾌하되 어수선하지 않다. 표지에 쓰인 것처럼 중1부터 고1까지의 청소년 친구들도 읽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수년간 맹자를 공부해온 저자의 내공이 나름 느껴지는 부분이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창과 칼이 난무하는 전쟁의 시대라고 보통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측면에 주목한다.

사실 맹수레가 활동했던 전국 시대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생산력이 엄청나게 발달한 시기였습니다. 곡식 종자를 땅에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이랑을 판 다음 이랑 속에 뿌리는 이랑 재배가 시작되면서 곡식 종자의 생존율이 급격히 향상되었고, 호미와 같은 철제 농기구의 보급으로 곡식의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를 힘들이지 않고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소를 이용하여 힘든 일도 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레박이나 수차 등을 발명하고, 관개수로를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이전까지는 불모지로 방치되어 왔던 물이 없는 지역 또한 경작지로 쓸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당시에 생산된 생산물의 양은 그 이전 시기의 수백 배 수천 배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처럼 부유한 시대였음에도 백성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20쪽: 나라는 부강한데 백성들은 가난했던 시대

철기문화가 시작된 시기, 그래서 엄청나게 생산량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풍요는 백성의 삶과 전혀 상관없었다. 여전히 잔인한 전쟁터로 내몰렸던 사람들, 가족이 굶주려 죽는 것을 눈앞에 보며 가슴을 찢는 사람들, 저자는 그들 가운데 맹자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점이 바로 맹자가 삶-정치의 텍스트인 이유이다. 맹자에 등장한 여러 정치적 문제가 결코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었단 사실, 여기에 맹자가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이유가 있다.

맹자는 어긋난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천하를 떠돌아다닌다. 자신의 뜻을 펼쳐 줄 여러 왕을 만나면서도 그는 결코 굽히지 않는다. 왕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맹자를 공격하는 경추씨에게 쏘아붙이는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맹수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훌륭한 인격과 높은 벼슬, 그리고 나이를 들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벼슬의 등급을 기준으로 높낮이를 가리고, 고을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우선입니다. 또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들을 도덕적으로 감화시키는 것은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제나라 임금보다 나이도 많고 인격도 훌륭합니다. 그에 비해 제나라 임금이 나보다 나은 것은 벼슬뿐입니다. 어떻게 하나 가진 사람이 둘 가진 사람을 오라 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왕이 가진 벼슬은 인위적으로 만든 벼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덕성은 하늘이 만들어 준 벼슬입니다. 벼슬로 치더라도 내가 높은 셈이지요.

61쪽: 하늘이 준 벼슬과 사람이 만든 벼슬

언뜻 보면 억지인듯 싶을 정도로 맹자는 자신이 왕보다 더 귀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나이도 많을뿐더러 인품마저 훌륭하다! 맹자가 말했던 인자무적(仁者無敵), 인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리라. 천하를 돌아다니면서도 비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이익과 인의 가운데 철저히 인의를 따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마저 조금 굽히면 안 되겠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았으니 오죽하겠는가.

맹자, 맹수레는 천하의 떠돌이였지만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천하무적! 천하를 상대로 자신의 뜻을 끝까지 펼치려 한, 시대의 반항아가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공자보단 맹자가 더 매력적이다. 그것은 그가 대결하고 있는 삶의 현장이 훨씬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말은 공리공담이 아닌 오늘도 불온한 언어로 살아 있다.

사직은 토지신과 곡물신을 말하는데, 국가를 상징하는 신성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제사를 지냅니다. 하지만 홍수나 가뭄이 일어나 농사를 망치게 되면 그런 사직을 갈아엎고 다시 세웁니다. 그들에게 제사 지내는 이유는 땅에서 자란 곡물로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인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면 사직이 제 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것이지요. 결국 맹수레의 이야기는, 그 어떤 신성한 국가의 상징도 백성들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31쪽: 백성이 가장 존귀하다.

맹자는 백성에게 해를 끼친다면 신(神)도 갈아 치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물며 왕은 어떻겠는가. 2008년 대한민국에서는 무릇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왕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건 말건, 스스로는 이미 왕이 되었다. 그러기에 맹자의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맹자가 첨단인 걸까? 아니면 우리가 거꾸로 가는 것일까?

그래 경찰은 법과 원칙만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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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경찰은 법과 원칙만을 지켜라.

경찰=공권력이라고 한다. 공(公)권력이란 무엇이냐? 사적인 권력이 아니란 말이다.

Daum 국어사전에서는 ‘경찰’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국가 사회의 공공질서와 안녕을 보장하고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조직.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보호하고 범죄의 예방과 수사, 피의자의 체포, 공안의 유지 따위를 담당한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과연 무엇이 공공질서와 안녕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명령만을 지키며 그것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경찰을 과연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명박 정권 이후 경찰은 마치 이명박의 사조직 마냥 동원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까지 불법적으로 잡아가고 국회의원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경찰은 일부 권력자들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 경찰은 법과 원칙만을 지켜라.

경찰은 아무런 이유없이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가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러서 부득이하게 그들을 검거할지라도 미란다 원칙을 고지해야 하며 검거 이유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러지 않고 그냥 검거한다면 그것은 납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찰이라면 자신의 신분과 조직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복을 입은 경찰이 아무런 고지 없이 시민들을 잡아간다면 용역 깡패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경찰은 대답하라. 과연 자신과 용역 깡패가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이제는 검거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받겠다고까지 한다. 성과급에 움직이는 그들을 과연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존재한고 말할 수 있는가?

아무런 기준 없이 위에서 하달되는 명령에 따르기만 한다면 경찰은 단지 권력의 시녀일 뿐이다. 아니, 권력의 개일 뿐이다. 개의 주인은 개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다. 그 밥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밥통에 밥을 던져주는 이, 그가 바로 그 개의 주인이다.

경찰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행사하는 폭력이, 폭력이 아닌 공권력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단순한 폭력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던져지는 성과급조차 이명박의 사비가 아닌 국민의 세금이 아니던가?

자기 주인을 물어뜯을 수는 없겠는가? 그게 가진 일말의 충성심인가?

제발 경찰은 법과 원칙만을 지켜라!!

[マンガこの一冊で中國の歷史がわかる!]_080813.교보문고에서 산 책

マンガこの一冊で中國の歷史がわかる

マンガこの一冊で中國の歷史がわかる

오늘 저녁을 먹고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았다. 서점이야 주로 인터넷 알라딘 서점을 이용하지만 무작정 관심 있는 책을 찾으려면 그래도 직접 서점을 가보는 것이 제일이다. 더구나 요즘 일본어 공부를 하는 터라 일본어로 볼 수 있는 책을 찾아봐야겠기에 집을 나섰다.

그래서 산 책이 이 책이다. 가격은 1,200엔. 원화로 환산하니 11,200원 정도. 붙어 있는 책값은 세금이 붙어서인지 15,130원이다. 근데 외서라고 10%를 할인해준다!! 결국 구입가격은 약 13,000원가량. 어차피 관심분야의 책을 읽어야 하기에 역사나 철학책을 골랐는데 역시나 읽을 만한 책을 찾기란 쉽지 않더라. 하긴, 이제 겨우 더듬더듬 일본어를 읽는 수준에서 무슨 책을 읽겠다고… 그래서 고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제목은 ‘マンガこの一冊で中國の歷史がわかる!’, 한국어로 번역하면 ‘만화, 이 책 한 권으로 중국 역사를 이해한다!’이다.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다면 아마도 ‘만화로 읽는 중국역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일본 아마존 서점을 찾아보니 금방 이 책을 찾을 수 있었다. 책의 저자는 ‘다카모치 겐’이라는 일본 만화가다. 찾아보니 국내에 번역된 그의 만화가 있다. [경찰서장]이라는 제목의 만화인데, 나는 첨 듣는다. ㅡㅡ; 훑어본 결과 그림은 제법 깔끔하다.

그리고 미야자키 마사카츠(宮岐正勝)라는 사람이 감수했다고 한다. 만화가 이름은 히라가나로 되어 있는데 감수자 이름은 왜 한문인 건지! 그래도 유명한 사람이라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찾아보니 꽤 유명한 일본 역사학자인듯 하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저서도 많으니 말이다.

시간 되는 대로 이 책을 조금씩 번역해 볼까 한다. 중국 역사도 전체적으로 정리해보고 일본어 실력도 늘릴 겸!

밑줄긋기_[공자&맹자 유학의 변신은 무죄: 강신주 지음]

공자 & 맹자 강신주 지음/김영사

이 책을 조금 넘겨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공자와 맹자를 조금의 결점도 없는 완벽한 인간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저는 종교인이 아니라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 유학 사상은 ‘공자 왈’, ‘맹자 왈’이라고 해서 마치 절대적인 규범이라도 되는 양 권위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런 시선은 아마 몇몇 분들에게는 신성모독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식여행을 떠나며 - 유학 사상의 한계와 가능성

지난 일요일 남산도서관을 갈 일이 있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월요학교 맹자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맹자에 관해 나온 쉬운 책을 좀 찾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에서 골랐다. 이 책과 함께 전호근 선생이 쓴 [천하를 돌아다니다 맹수레 맹자]라는 책을 빌렸다. 두 책 가운데 우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열며, 저자의 첫 글에 눈이 간다. 저자 강신주는 첫 머리부터 공자와 맹자에 대해 ‘정직하게’ 쓰고자 했다고 밝힌다. 과연 정직하게 쓴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덧붙여 그러는 이유는 스스로가 종교인이 아닌 ‘철학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양 사상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도 논어나 맹자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 것이다. 성인이라 불리는 이들, 공자-맹자-주희를 비판적으로 읽기란 쉽지 않다. 주희야 워낙 욕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공자와 맹자를 씹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같은 책이 나와서 세간의 주목을 받긴 했지만 그 뿐이다. 아직도 이른바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공자와 맹자의 위치는 견고하다. 이러한 시선은 텍스트를 읽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텍스트를 대하는 데 항상 베베 꼬아 볼 것은 아니지만 논어, 맹자를 읽은 데는 일단 존숭의 시선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그들의 사유를 적절히 판단 비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는 일단 호주제 폐지에서부터 문제를 시작한다. 호주제가 폐지되었을 때 거리로 나선 유림들로부터 질문을 던진다.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숭고한 가치, 삼강오륜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 연원은 공자가 사모해 마지 않았던 시대, 즉 주나라로부터 시작했다고 본다. 주나라를 지탱했던 봉건제가 가족주의인 동시에 국가주의였다는 점, 따라서 주례(周禮)로 돌아가고자 했던 공자의 사유는 결국 국가와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과연 이 한계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유학이 오늘날에도 의미있다고 할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필수적이다.

일단 저자가 선택하는 방법은 유학의 역사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공자-맹자-순자-주희-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연속선 위에서 유학이 스스로 자기의 한계성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공자의 사상적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 혹은 사상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지점을 밝히고자 한다. 다행이도 무리하게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결론이 궁금하다. 아직 읽을 양이 많이 남아 있기에 저자가 결론으로 내놓을 대답이 기대된다. 그가 밝힌 ‘신성모독’이 단순히 까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을지, 그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밑줄긋기_[왕필의 노자주: 왕필]

왕필의 노자주 - 6점 왕필 지음, 임채우 옮김/한길사

美者, 人心之所進樂也. 惡者, 人心之所惡疾也. 美惡猶喜怒也, 善不善猶是非也. 喜怒同根, 是非同門, 故不可得而偏擧也.아름다움이란 사람의 마음이 (자연히) 끌려 좋아하게 되는 것이요, 추함이란 사람의 마음이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아름답게 여기는 것과 추하게 여기는 것은 기뻐하고 성내는 것과 같고, 착하고 찾하지 않은 것은 옳고 그름과 같다. 기뻐하고 성내는 것은 뿌리가 같고, 옳고 그름은 문을 같이하니 그러므로 한쪽만 들 수가 없다.

54쪽: 왕필 노자주 2장

이런 부분은 번역보다는 원문으로 살펴보는 것이 훨씬 낫다. ‘美’를 아름다움으로, ‘惡’를 추함으로, ‘善’을 착함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째 어색하다. 무엇인가 시원하게 해석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여튼, 왕필은 여기서 美惡 혹은 善惡, 是非가 마음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不可得而偏擧也’, ‘한쪽만 들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가 반대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보다는, 현실에서는 서로가 마구 뒤섞여 나타난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옳다 그르다고 완전하게 선을 긋기는 힘들다. 일정한 도식으로 짜맞추어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에서 발현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왕필의 노자주를 다 읽지는 못했지만 매우 재미있다. 중국 사상사 가운데서 천재로 손꼽히는 인물답다. 약관의 나이에 쓴 글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왕필에서 송대 유학자들의 사유의 단초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일듯 하다.

[근대 중국사상사 약론]_중국 사상사의 해석틀

근대 중국사상사 약론 - 10점
천샤오밍 외 지음, 김영진 옮김/그린비

저우위퉁(周予同, 1898~1981)은 역사적 맥락에 근거해서 경학을 세 가지 유파로 분류했다. ‘서한(西漢) 금문학’, ‘동한(東漢) 고문학’ 그리고 ‘송학’이다. 이런 분류법은 상당히 유용하다. 역사 발전과 학파의 형성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그것을 중국 학술 사상사 가운데서 주요한 학술 분과의 탄생과 연결시켰다.

이 세 유파의 차이를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금문학은 공자를 정치가로 간주하고 육경을 공자의 정치 학설이라고 본다. 그래서 ‘미언대의’(微言大義: 경전에 담긴 숨은 뜻)에 집중한다. 그것의 특색은 공리(功利)이고 그것의 폐단은 광망(狂妄)이다. 고문학은 공자를 역사가로 간주해서 육경을 공자가 정리한 고대 사료 정도로 여긴다. 그래서 명물훈고(名物訓詁: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명칭과 사물의 해석)에 집중하는데 이것은 고증을 특징으로 하고 번쇄함에 빠지는 폐단이 있다. 송학은 공자를 철학가로 여기고 육경을 공자가 진리를 담은 도구로 간주한다. 그래서 심(心).성(性).이(理).기(氣)에 집중한다. 철학적 사유를 특징으로 하고 공허함이 폐단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 유파는 각각 결점도 있고 장점도 있다. 금문경학이 발생하고 나서야 중국의 사회 철학이나 정치 철학이 분명해졌고, 고문경학이 발생하고서 중국의 문자학이나 고증학이 성립했고, 송학이 발생하고 나서야 중국의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이 완성됐다고 말해도 결코 근거 없거나 견강부회는 아닐 것이다.

44-45쪽: 1장_정치문화로서의 경학/ 세 가지 해석 형태

중국 사상사를 읽는데 저우위퉁이 제시한 것과 같은 도식은 아주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뭔가 불편하다. 금문, 고문 논쟁이 고대 학술사의 중요한 논쟁이었지만 그것이 송학의 특성인 의리론과 같은 수준에서 논의되지는 않았다. 물론 굳이 연결시키자면 도문(道文)논쟁과 연결시킬 수는 있을 듯 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훨씬 복잡해진다. 기존의 논의 틀을 따르면 도학파 안에서는 다시 도문학과 존덕성, 즉 리학파와 심학파로 나눌 수 있고 그와 대척점에는 사장, 훈고를 놓을 수 있다. 훈고는 다시 금문 고문으로 나뉠 수 있다. 사실 중요한 단절을 무엇을 통해 볼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위와 같은 해석틀이 불편한 것은 너무 단순화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근대적 학문틀에 맞춘다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치학-역사학-철학이라고 하는 근대적 학문의 배치를 그대로 가져와서 중국 사상사를 해석하고 있다. 저우위퉁의 해석을 따르면 중국 사상사는 한대 - 송대 - 청대로 구분지어지고 정치/역사 - 철학 - 정치/역사 라는 일종의 변증법적인 발전론이 된다.

또한 이 같은 구분법이 성인 공자를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공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국 사상사의 특징을 규정한다. 정치가로서의 공자는 금문학파에서, 역사가로서의 공자는 고문학파에서, 철학가로서의 공자는 송학에서 발견한다. 이렇게 볼 경우 중국 사상사는 공자의 것이 되고 만다. 물론 공자의 영향력이 지대하기는 하지만 과연 그 정도까지 인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책이 중국 사상사 전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근대 사상가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 첫머리를 여는 캉유웨이(강유위)를 소개하기 위해 이 같은 해석을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한다. 정치-역사-철학 이라는 근대적 학문 배치를 통해 중국 사상사를 이해하는 것은 근대 중국 사상가들의 눈으로 중국 사상사를 읽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건국 60주년, 헌법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8월 15일, 정부는 건국 6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 ‘건국 60주년’을 운운하는 정부에 대해 성토하는 목소리가 많다. 가끔 놀러가는 이정환 닷컴에서도 이를 문제 삼았다.

관련글: 구 맘대로 건국절인가.

꽤나 뒷북이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오는 15일 광복절에 건국 60주년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그 날을 우리나라의 건국으로 삼는다는 해괴한 논리에서다.

우리나라가 1948년에 건국됐나. 이건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이야기다.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지만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 출발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2333년 단군의 고조선 건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누구 맘대로 올해가 건국 60주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

문제를 요약해보면 이렇다. 첫째,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건국이념과 맞지 않는다. 적어도 헌법 전문에서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이라고 보지 않았다. 둘째, 이렇게 될 경우 같은 해 수립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즉 북한과의 문제가 있다. 건국이라고 말할 경우 남북한은 서로 완전히 독립된 개별 국가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등등… 반만년의 역사가 60년으로 단축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광복절이 건국절로 뒤바뀐 데 있어 뉴라이트 친일파의 입김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부수립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을 ‘건국일’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이다. 역사적인 상황들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여튼 찝찝하다. 심심해서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은 1999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찾아봤다. 말하나 차이겠지만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50주년’이라고 했다. 복잡하게 찾아볼 것도 없이 기념 지폐 인증샷을 보면 된다. 좀더 찾아보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0년전, 그러니까 1998년에 우리정부도 기념 화폐를 제작했다. 그런데 그때 명목은 ‘정부수립 50주년‘이었다. (관련글: ‘대한민국 건국60년 기념주화’ 추첨 행사)

10년 전이 대한민국 ‘수립’ 50주년이었던 것이 왜 갑자기 ‘건국’ 60주년이었이 되었을까? 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 홈페이지를 보면 60년, 즉 환갑이라고 호돌갑이다. 십간과 십이지를 따지는 동아시아 전통에 따르면 60주년, 환갑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50주년, 반 백년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 갑자기 ‘건국’이라는 말은 어째 많이 부담스럽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1998년에도 ‘건국 50주년’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개개인이 명명한 이름이었을 뿐,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표한 이름은 아니었다. ‘정부수립일’과 ‘건국일’은 다르지 않는가.

찾는 김에 현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살펴보았다. (헌법 원문 보기)

헌법 제10호 전부개정 1987.10.29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이상이 현재 헌법의 전문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즉, 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3.1운동의 정신을 이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그 근원을 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60주년으로 제단할 경우 임시정부와는 단절된 역사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담 1948년 최초의 헌법은 어땠을까? 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원문을 다운 받을 수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큰 차이는 없다.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 그러나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밝히고 있어 새로운 국가의 수립이 아닌 나라의 복원이라는 측면을 더 강조하고 있다. 한편 서기가 아닌 단기를 사용하여 단군 조선과의 연속성을 보이려고 한 점도 흥미롭다.

살펴보는 김에 북한 헌법도 살펴보았다. 북한 헌법 전문은 김일성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가득차 있다. (최근 헌법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북한 헌법 원문 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령도를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그 기치밑에 항일혁명투쟁을 조직령도하시여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마련하시고 조국광복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였으며 정치,경제,문화,군사 분야에서 자주독립국가건설의 튼튼한 토대를 닦은데 기초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시였다.

(… 이하 김일성에 대한 찬양 ㅡ”ㅡ)

이쯤되면 아바이 수령을 위해 눈물을 쏟는 인민들을 이해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일종의 신앙인 이상 설명은 무의미하다. 김일성은 나라의 창건자이자, 시조 게다가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기까지하다. 근데 흥미로운 점은 북한의 경우 1948년 건국을 훨씬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점. 마치 지상에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한 양 호돌갑 떨며 자랑하는 그들, 북한의 뒷꽁무니를 좇아 간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건국 60주년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조선일보에서는 북한이 여전히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참고: “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선택은 정당했다” 그래, 북한은 위대한 령도자 김일성에 건국의 이념적 근거를 둔다고 치자! 그렇담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의 이념적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3.1운동과 독립운동과의 연속성을 끊는다면 과연 어디에 이념적 근거를 두어야 할까? 결국 미국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미국과 함께한 60년. 어쩌면 그것이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의 보다 분명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 젠장. 인터넷이 이렇게 발달한 지금도 북한 정보를 찾는 것은 꽤나 힘들다. 1948년 제정된 북한 최초의 헌법을 찾으려 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검색 사이트를 있는 다 찾아 봤는데도 찾을 수 없었다. 구글에서 일부 북한 사이트가 걸리는 듯 했지만 페이지를 볼 수 없었다. 통일부나 국정원 등도 가봤는데 ㅡㅡ” 생각보다 정보가 형편없었다. 혹시라도 1948년 북한의 헌법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시길.

밑줄긋기_[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 8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우리는 ‘대표’(代表, representative)라는 말을 싫어 한다. 누가 누군가를 대표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표해서도 안 된다는 게 우리 생각이다. 연구실의 모든 모임들은 자신을 ‘표현’할 뿐이고, 그것들이 모여 다시 연구실을 ‘표현’한다. 모임과 활용을 조정하는 사람도 있고, 누구보다 좋은 눈으로 연구실 곳곳의 문제들을 잘 발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이 누구를 대신하거나 어떤 활동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사실 ‘대표’라는 말은 그 자체로 권력 냄새가 난다. 보통 우리는 외국어 ‘representation’을 표상(철학), 재현(예술), 대의(정치) 등으로 옮긴다. 이 말들은 모두 실존에 개입하는 어떤 이중작용을 가리키고 있다. 글자 그대로 풀자면, ‘현존하는 것’(present)을 ‘다시(re-) 나타낸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사과’라고 부를 때, 그 사물은 그 자체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사과’라는 말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권력이 작동할 여지가 여기서 생긴다. 실존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재현된 것이라 할 때, 즉 그 자체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대신 나타난 것이라 할 때, 이 재현 과정에 권력이 개입한다.

우리 정치 이야기를 하면 쉬울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국민의 뜻을 대신하겠다는 정치인들이 넘쳐난다.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국민의 심부름꾼, 머슴임을 자임한 사람들이다. 도대체 왜 그들은 ‘머슴’이 되고 싶어 안달일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실제로는 그들이 ‘머슴’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이렇다. ‘실존하는 것은 표상된 것’이라는 말을 뒤집으면 ‘표상되지 않으면 실존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즉 국회의원들이 대의하지 않은 국민의 뜻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이런 게 권력이다. 결국 의원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대의라는 게 되는 것이다.

6쪽 / 머릿말: 고추장의 ‘고추장’ 이야기

오늘 부시가 왔다. 뉴스를 보니 저녁 6시 30분 정도에 성남 공항에 도착했단다. 그런데 남산 순환로는 다섯시 무렵부터 통제되었다. 하얏트 호텔에 부시가 머물기 때문이라나?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경찰들은 부산을 떨었다. 2008년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은 부시를 맞이하기 위해 요란이다.

이명박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압도적인 지지율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인기투표 같은 ‘선거’나,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이명박이 하는 짓거리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 의미 있는 것은 어쨌건 스스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록 서투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