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17-2,3

17-2,3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子曰
唯上知與下愚不移

이을호 역

선생 “인간성은 비슷비슷하고 습관은 서로가 딴 판이다.” 선생 “뚫어지게 아는 이와 깜깜한 먹보와는 서로 어쩔 수 없다.”
[평설] 공자의 性論으로서 性은 先天的인 것이요, 習은 後天的인 것이다. 그러므로 先天的인 性은 聖凡이 一如이므로 相近한 것이요, 後天的인 習은 甲乙이 各殊하므로 相遠한 것이다. / 上知는 惡人과 섞여도 물들지 않고 下愚는 善人과 섞여도 敎化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로 옮기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上知나 下愚나 비슷한 것이다.
[참조] 集註本은 두 章으로 나누었고 茶山本은 이를 한 장으로 합쳤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본성 자체는 사람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습관이 완전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놓는 것지요” / 공자가 말했다. “초절정 지혜로운 사람과 초대박 어리석은 사람만은 절대 변하질 않습니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此所謂性 兼氣質而言者也
여기서 말한 ‘성’은 기질을 겸한 말이다.

程子曰 此言氣質之性 非言性之本也 若言其本 則性即是理 理無不善
여기서는 기질지성을 말한 것이지, 성의 근본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근본을 말하자면, 성은 리이다(性即理). 리는 선하지 않음이 없다. – 이천

程子曰 人性本善 有不可移者何也 語其性則皆善也 語其才則有下愚之不移 所謂下愚有二焉 自暴自棄也
인성은 본래 선한데,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이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본성을 말하면 누구나 다 선하지만, 재질을 말하면 변화하지 않는 ‘하우下愚’가 있다. 이른바 ‘하우’는 두 종류가 있다. 자포自暴와 자기自棄이다. – 이천

或曰 此與上章當合為一 子曰二字 蓋衍文耳
이 장은 앞 장과 합쳐야 한다. ‘자왈’ 두 자는 연문이다. – 혹자

[어류] 성性이 ‘가깝다’고 했으니, 성이 두 가지 이상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성은 기질지성을 말한다.

<논어주소>

然此乃是中人耳 其性可上可下 故遇善則升 逢惡則墜也
그러나 이는 중인일 뿐이다. 중인의 성은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선인을 만나면 올라가고, 악인을 만나면 아래로 떨어진다.

<논어고금주>

性者 本心之好惡也 習者 聞見之慣熟也
성性이란 본래 마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습習이란 보고 들어서 익숙해진 것이다.

好德恥惡之性 聖凡皆同 以此之故 本相近也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본성은 성인과 평범한 사람 모두 똑같다. 이러한 까닭에 ‘성은 서로 가깝다’라고 하였다.

옹달메모

: 이을호의 풀이가 재미있다. ‘뚫어지게 아는 이와 깜깜한 먹보’라니. 대체 어디서 이런 풀이를 가져왔을까?

: 임자헌은 ‘초절정 지혜로운 사람과 초대박 어리석은 사람’이라 풀었다. 역시 재미있다.

: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주古注에서는 사람의 세 등급을 말하는 문장으로 보았다. 상지上知-중인中人-하우下愚 이렇게 셋이 있다는 말이다.

: 그렇게 보면 간단하나 性을 중요한 개념으로 사유하는 후대 사람들은 이를 그리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주희는 이때의 ‘성’이 기질지성을 말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하우’는 똑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되, 이를 실현할 의지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 본다.

: 다산의 <논어고금주>를 펼쳐 보았다. 뭔… 이야기가 이리 긴 지. 다산은 고주古注와 신주新注를 모두 비판한다. 너무 길고 세세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다만 ‘호오好惡’로 ‘성’을 풀이하는 게 흥미롭다.

: ‘성선론’이라는 맹자의 계통에서 이 문장을 접근할 때 ‘습習’은 인간의 본성을 망치는 일이 되어 버린다. 과연 그럴까? 도리어 정반대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사람은 서로 고만고만하게 태어났으나 무엇을 배우고 익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습習’이란 삶을 바꾸는 또 다른 기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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