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6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11-2

11-2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이을호 역

선생 “나를 따라서, 진•채 지방까지 왔던 애들이 모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평설]
: 魯哀公 6년에 공자가 楚昭王의 초청을 받고 가던 도중 陳•蔡 지방에서 방해를 받고 衛로 돌아왔는데, 그 때 성문까지 제자들이 당도하지 못했던 일을 회상한 말이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내가 곤경을 당했을 대 따랐던 자들 중 지금 내 문하생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 공자의 만년의 풍경. 쓸쓸하기 그지없다. …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머물고 있을 때 강대국인 초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공자를 자기 나라로 모셔가려 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나라와 채나라는 자기들의 행동이 공자의 평소 주장과 맞지 않는데 공자가 강대국 초나라의 책사가 되기라도 하면 분명 초나라가 자기들을 치러 오게 될 것이라며 공자가 초나라에 갈 수 없도록 공자를 포위해버렸다. 그래서 공자 무리는 오도 가도 못한 채 식량까지 떨어지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논어주소> 정태현 역

[疏]正義曰 此章孔子閔弟子之失所 言弟子從我而厄於陳蔡者 皆不及仕進之門 而失其所也
正義曰: 이 장은 孔子께서 弟子들이 당연히 얻어야 할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을 가엾게 여기신 것이다. 당신을 따르면서 陳나라와 蔡나라에서 困厄을 당한 제자들이 모두 仕進의 門에 미치지 못하여 당연히 얻어야 할 자리를 얻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孔子嘗厄於陳蔡之間 弟子多從之者 此時皆不在門 故孔子思之 蓋不忘其相從於患難之中也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재앙을 당했을 때에는 많은 제자가 따랐는데 지금은 모두 문하에 없기에, 공자가 그들을 회상하였다. 환난 속에서 상종했던 일을 잊지 못한 때문이리라.

<집 잃은 개>, 리링, 김갑수 역

이 말은 분명히 공자 만년에 한 것으로 보이며, 역시 회고적 성격을 띠고 있다. 감상적인 내용의 말이다.
… 유보남은 또 “군자께서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재앙을 만난 것은 위아래의 교섭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구절은 공자에게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관리를 지낸 제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청탁을 넣을 만한 채널을 찾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스승의 문하에 이르지 못했다. 즉 이들 충성심이 불타오르던 제자들은 아무도 공자 근처에 없고 모두 스승의 문하를 떠났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집주>) 나는 뒤쪽의 주장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공자의 서글픈 탄식으로서 기원전 484년, 즉 공자가 68세 되던 해에 한 말이거나, 심지어는 안회와 자로가 죽은 공자 최후의 2년, 즉 기원전 480년 혹은 기원전 479년에 한 말일 것으로 추측된다. (589-590)

<수사고신록>, 이재하 외 역

당시 채나라는 오나라를 섬겼고, 진나라는 초나라를 섬기던 참이었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포위하자 진나라는 초나라를 지원했으며, 진나라가 채나라를 포위하자 오나라는 진나라를 공격했다. 이처럼 진나라와 채나라는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331)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인정으로 비추어보아도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세상의 선비란 사람들이 거의 믿고 있으니, 이 또한 이상스러울 따름이다! (332)

<장자> 안병주 외 역.

[天運] 圍於陳 蔡之間 七日不火食 死生相與鄰 是非其眯邪
陳나라와 蔡나라의 국경에서는 포위당해 7일간이나 불로 요리한 음식을 먹지 못해서 죽음과 삶이 서로 이웃이 될 정도로 죽도록 고생했으니 이것이 바로 가위눌려 고통을 당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2권, 320)
[讓王] 孔子窮於陳蔡之間 七日不火食 藜羹不糝 顏色甚憊 而弦歌於室
孔子가 陳나라와 蔡나라 사이에서 궁지에 빠져 7일간 불로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고 명아주 국에 쌀을 섞어 넣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안색이 몹시 고달팠는데도 방안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옹달메모

: 이 방대한 내용을 누가 읽는가 싶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정리.
: 이을호는 이 문장이 초나라로 가던 도중에 제자들과 떨어졌을 때 남긴 말이라고 본다. 과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남긴 말이 전해졌을까?
: 임자헌 역시 사마천 등의 주장을 참고하여 초나라로 가던 도중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공자의 생애를 참고하면 그가 초나라에 초청에 응했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우며, 그가 초나라에서 자리를 얻는 것을 이웃 나라가 견제했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공자와 같은 몽상가가 관직을 얻은 들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주나라 중심에서 볼 때 초나라는 오랑캐 지역으로 여겨졌을 것인데 주례를 중시하는 공자가 과연 초나라에 가려했을까 의문이다. 아니, 다른 걸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멀리 가기엔 힘들지 않았을지. (이 부분은 더 고민해야 할 부분) 설사 그가 초나라로 가려했다 하더라도 역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책사’는 결코 되지 못했을 거다. 공자, 혹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과연 당시의 치열한 정세에 무슨 커다란 위협이 되었을까.
: <주소>에서는 제자들이 자리를 얻디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는 뜻으로 풀었다. 이는 이어지는 11-3 문장과 이어 풀었기 때문이다.
: 주희는 주변의 제자가 남아 있지 않았음을 탄식한 것이라 보았다. 리링의 풀이가 인상 깊다. 말년 공자의 곁에는 누가 있었을까?
: 최술은 이 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는다. 첫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지 않으며, 둘째, <장자>에서 자주 언급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첫째 부분은 따로 찾아보아야 하는 상황이나 둘째 이유는 과연 어떨지 고민된다.
: 최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장자>와 <공자가어>에는 이때 상황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장자>에는 천운, 산목, 양왕, 도척, 어부 등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 개인적으로 <장자>가 그리는 공자의 모습이 <논어> 등에서 그리는 공자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고 본다. 물론 전통적인 입장처럼 유가를 비판하기 위해 공자의 모습을 왜곡한 부분도 있겠지만 <장자>에서 그려내는 공자의 모습은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거꾸로 <사기>에서 정리된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신뢰하기 힘들다. 누구의 해석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전쟁에 휘말려 중간에 고립되었다는 게 더 적당한 접근이다. 고생의 이유보다는 고생의 상황이 더 중요하다는 것.
: 당시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공자 학단의 방향이나 색깔을 정하는 데 커다란 지표가 되지 않았을까? 15-2 문장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민이 그 경험과 함께 닥쳤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 리링의 지적처럼 과거 자신과 함께 산전수전을 겪은 제자들은 모두 곁에 없다. 특히 늘 곁을 지켰던 자로, 끔찍이 사랑했던 안회 모두 곁에 없다. 물론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만난 제자가 있었겠지만 옛날 동고동락했던 제자들과 비할 수 있었을까. 깊은 쓸쓸함, 적잖은 안타까움, 인간 공자의 면모를 만나는 게 <논어>의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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