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4-8

4-8.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이을호 역

선생 “진리를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
[평설] 聞道는 聞天命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知天命과도 동의어가 아닐 수 없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아침에 내가 참답게 살 길을 깨달았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지 뭐.”

<논어주소>, 정태현 등 역

[注] 言將至死不聞世之有道
거의 죽을 때에 이르렀는데도 세상에 道가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疏] 正義曰 此章疾世無道也
正義曰: 이 장은 세상에 道가 없음을 미워하신 것이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注] 道者 事物當然之理
도는 사물이 마땅히 그래야 할 이치이다.
[혹문]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함은 불교의 설에 가깝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도는 본디 저들이 말하는 도가 아니다. 우선 성인의 뜻은 오직 도를 깨닫는(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 저들처럼 깨달음에 의지하여 죽는다는 차원과는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도는 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 사이에 마땅히 그래야 할(當然) 실질적인 이치(實理)이다. 저들이 말하는 도는 그것들을 환상으로 여기고 망령으로 여겨 멸절시킴으로써, 저들이 말하는 청정적멸淸淨寂滅의 경지를 구하는 것이다.”
[어류] “‘도가 사물이 마땅히 그래야 할 이치’라면, 제 생각에는 중대한 도라고 해도 군신, 부자, 부부, 친구 사이의 윤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서로 친애, 의리, 분별,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만약 하루라도 제대로 배우면 누가 그런 것을 알지(듣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듣고 죽어도 된다는 논리라면 그다지 쓸모없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도란 어디에 참으로 절실하고 지극히 마땅하게 그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까? 또 어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들으면 곧 죽어도 유감이 없게 만드는 것이 됩니까?” “도는 참으로 일상생활에서 늘 행하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그다지 쓸모없다’고 말한 것은, 오직 그대의 인식이 참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이른바 깨달음(들음)이란 크게는 우주, 작게는 초목, 나아가 저승의 귀신과 이승의 인간사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모르는 거싱 없는 경지 아닙니까?” “꼭 그렇게 여길 필요는 없다. 요컨대 인간다운 도리를 알면 된다.”

옹달메모

– 짧고도 굵직한 문장이다. 이을호는 ‘진리’로 풀었다. 道를 眞理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나름 중요한 풀이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다. 참고로 <집 잃은 개>에서도 ‘진리’로 풀었고(원문은 확인 못했다), 리쩌허우의 <論語今讀>에서도 그렇게 풀었다. 다만 평설의 풀이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다.
– 임자헌의 풀이는 ‘참답게 살 길’로 풀이했다. 道를 人道 혹은 仁道로 풀이한 것인데. 수긍할만한 풀이이다. 道를 길로 풀이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은데 너무 가벼워 보이기 때문일지 길로 풀이하는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다.
– 주희는 그 유명한 ‘當然之理’라는 말로 道를 옮겼다. 주희의 道는 일상의 윤리이자, 사회적 존재가 마땅히 따라야 하는 규범이 된다. 주희는 이를 불가의 깨달음과 구분하려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풀이할 때 참고하는 것은 古注이다. ‘世之有道’, 세상이 바르게 돌아간다는 이야기로 풀이하는 것이 가장 낫다 생각한다. 밋밋한 구석은 있지만 그것이 <논어>에 담긴 공자의 삶과 입장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풀이일 테다. 그는 후대의 사상가들이 골몰한 天理에 별 관심이 없었으며, 더불어 개인의 삶에 강한 윤리적 기준을 세우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를 괴롭힌 것은 無道한 세상이라는 현실이었다. 그 현실 위에 그는 둥둥 떠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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