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 기픈옹달의 논어읽기 1-1

1-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이을호 역
선생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벗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부루퉁하지 않는다면 참된 인간이 아닐까!”
* 學: 배움에는 ‘지식’과 ‘사람구실’의 두 면이 있다. 공자는 후자를 더 강조한다.
* 說: 기쁘고(悅) 유쾌하다(快)

[평설]
‘배우는 족족’은 내 자신을 위하는 길이요, ‘벗들이 먼 데서’는 남과 함께 하는 일이다. 자신을 위하는 일과 남과 함께하는 일에 충실한 사람이 ‘군자’인 것이다.

임자헌 역
공자가 말했다. “배운 걸 자꾸 복습해서 내 것으로 만들면 정말 기분 좋지 않나요? 먼 데서 뜻 맞는 친구가 찾아오면 너무나 즐겁죠! 남이 나를 몰라줘도 열받지 않으면 진짜 제대로 배운 사람 아니겠어요?”
* 출발선에 선, 꿈꾸는 자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배운다는 것, 그 자체의 즐거움. 함께 해주는 벗에 대한 고마움. 출세가 아닌 성숙을 향한 기대. 우리는 이 세가지로 신발끈을 묶고 새 여정을 떠날 것이다. 출발!

<논어주소>, 정태현 등 역
* 包曰: 同門을 朋이라 한다.
* <白虎通>에 “學은 覺(깨달음)이니,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음이다.”라고 하였다.

<논어집주> 박성규 역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늘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 說、悅同。學之為言效也。人性皆善,而覺有先後,後覺者必效先覺之所為,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열說은 열悅(기쁨)과 같다. 학學의 의미는 본받음(效)이다. 사람의 본성은 다 선하지만 사람의 행위를 본받아야만 선을 깨우쳐(明善) (완전하게 타고난) 본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 習,鳥數飛也。學之不已,如鳥數飛也。說,喜意也。既學而又時時習之,則所學者熟,而中心喜說,其進自不能已矣。
습習은 새 새끼가 날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니, 본받기(學)를 그치지 않음이 마치 새 새끼가 날개 짓을 반복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다. 열說(悅)은 기쁘다는 뜻이다. 이미 배운 다음 시시때때로 익히면 배운 내용이 익숙해지고, 내면에 희열이 생기면 계속 진보하여 자연히 그만둘 수 없다.
* 程子曰:「雖樂於及人,不見是而無悶,乃所謂君子。」
남에게 알려지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의기소침하지 않는 것이 이른바 군자이다. – 이천

[혹문]
“… 따라서 배우되 반드시 늘 익혀야만 그 마음이 이치와 서로 혼연일체가 되어, 내면으로 얻은 내용이 더욱 깊어져 몸이 일에 더 평안함을 느끼고, 할 수 있는 바가 더욱 공고해져 조용히 아침저녁으로 성찰하면서도 배워서 알고 또 능해진 모든 것이 반드시 다 마음으로 자득할 수 있게 되어, 남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가 된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뿌듯한 희열을 맛보니, 최고로 맛있는 음식으로도 그 맛을 비유할 수 없다. 이것이 학문의 시작(學之始)이다.”
“도리와 의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옳다고 여기는 것이니 나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물론 나 혼자 그것을 터득한 것만으로도 기쁨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내가 터득한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해 주었을 때 아무도 믿지 않고, 또 그것으로써 다른 사람을 인도하려고 해도 아무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 도리에 나 홀로 도취하였을 뿐 온 세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갇혀 있어, 사람이면 누구나 (날 때부터 내면에) 가지고 있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열 명이 함께 음식을 먹을 때 한 명은 이미 배부르지만 아홉은 아직 음식을 삼키지도 못한 경우처럼, 아무리 나의 기쁨이 깊은 것이더라도 어떻게 밖으로 전달(선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만약 내가 터득한 나의 학문이 족히 남에게 영향을 미쳐 사람들이 믿고 따름이 그렇게 (멀리서 찾아올 만큼) 많아진다면, 장차 모든 사람이 인간의 보편적 진리를 나눠 가질 수 있으니, 내가 터득한 바는 한 개인의 소유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선善이 남에게 미칠 수 있고, 또 그 사람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깨닫는 바가 있어, 내가 깨달은 것을 그 또한 알게 되고, 내가 가능한 것을 그 또한 가능해지면, 그때의 기쁨과 환희는 서로 교통하면서 선양되고 발산되어, 아무리 훌륭한 음악의 선율이라도 그 즐거움을 묘사하기에 부족하다. 이것이 학문의 중간(學之中)이다.”
“배움이란 어떤 것을 본받아 내가 완성함을 뜻한다.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본받아 그것을 알려고 하며, 자기가 못하기 때문에 할 줄 아는 사람을 본받아 자기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모두 배움의 일이다.”

[어류]
도를 배우는 일(學道)에만 기쁨이 있음은 아니다. 붓글씨를 배울 때 처음에는 잘 쓰지 못하다가 나중에 일단 잘 쓰면 어찌 기쁘지 않은가? 활쏘기를 연습할 때 처음에는 적중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적중시키면 어찌 기쁘지 않은가? 배움(학문)이 기쁨의 경지에 이르면 이미 진일보한 것이다.

옹달메모
– 이을호 역에서 ‘학습’을 ‘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이라 언급한 것이 흥미롭다. 학습이란 ‘내 것으로 만드는 것’ 배움의 내용과 나 사이에 거리를 없애는 것일 테다. 慍을 ‘부루퉁하지 않는다’라고 풀이한 부분도 재미있다. 이을호의 풀이는 더 살가운 맛이 있다. ‘군자’를 ‘참된 인간’이라 풀었는데 매끄럽다.
– 임자헌 역의 설명이 좋다. <논어>라는 책을 읽는 이를 위한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말, 출발점에 선 사람들을 위한 강조점이라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 박성규 역에서는 정자의 ‘無悶’을 ‘의기소침하지 않음’이라 풀었다. ‘노여워함’보다는 더 마음이 가는 표현이다. 실제로 인정받지 못하는 지식인에게 깃들기 쉬운 마음은 ‘의기소침’아닐까. [혹문]에서 학문을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비유한 말이 재미있다. 맛난 음식을 끊임없이 먹듯, 여러 사람과 나누어 먹듯 학문에는 그렇게 즐거움의 장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 곱씹고 곱씹는 글이지만 여전히 많은 생각을 낳는 글이다.
2017.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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