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 쪽지 : 머글의 공부론

어른이 된다는 것은 거짓말을 가려낼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순진하게 믿어왔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세계는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배신감에 치를 떨기 보다는 비정한 현실에 씁쓸히 웃어버릴 수밖에.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도 그렇다. 누군가 그러더라 사람은 각기 다르지만 저마다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이 있다고, 그 장단점을 합쳐보면 차이가 없다고. 그러나 정말 그렇던가.

‘존잘’, 즉 ‘존나 잘난 인간’을 보면 단점을 찾아내고 싶다. 그렇지만 ‘존잘’은 ‘존잘’이다. 엄친아가 괜히 있겠는가. 성적이 좋다던 엄마 친구 아들은 운동도 잘 한다. 그러면 성격이라도 나빠야 할 텐데 성격도 좋다. 얼굴이 못생겼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얼굴도 잘 생긴데다 키마저 크다. 여기에 집안까지 좋으면 K.O. 흠을 찾아보겠다는 내 좁은 소견이 부끄러울 뿐이다.

소설 《해리포터》에서 나온 말로 ‘머글Muggle’이라는 게 있다. 본래는 주인공 해리포터 같은 마법사가 아닌, 일반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어느 새 ‘좀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놀랍게도 옥스퍼드 사전에까지 등제된 단어다. 바야흐로 머글의 시대, 평범한 못난이들의 시대라고 하겠다. 평범함이란 더 이상 사랑할 것이 못된다.

그렇다고 우월한 인종을 바라보며 한숨만 쉴 수는 없는 일이다.《중용》의 저자는 인간의 차이에 주목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야 알며, 어떤 사람은 애써야 안다.

새겨듣자. 성현의 말이다. 그래, 본래 사람이란 이렇게 다르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마저도 힘들다. 배운 것을 까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대부분의 사람은 애써야 비로소 무엇이라도 안다. 여기서 ‘곤지困知’라는 말이 나왔다. 《논어》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거기선 ‘곤이학지困而學之’, 고생하면서 배운다고 했다. 배움이란, 무엇을 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생지生知’는 말할 것도 없고, ‘학지學知’만 되더라도 훌륭한 인물이다. 그런데 ‘곤지困知’라도 꽤 괜찮은 인물 아닌가. 어찌되었건 안다는 데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밑에 한 등급이 더 있다. 《논어》에서는 이를 ‘곤이불학困而不學’이라 일컫는다. 여기서 ‘곤困’은 ‘곤지困知’의 ‘곤困’과는 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곤지’를 ‘애써서 안다’라고 했다면, ‘곤이불학’이란 고생하면서도 배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뭘 모르면 삶이 고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요지부동인 사람. 이를 공자는 ‘곤이불학’이라 불렀다.

따라서 앎(知)을 추구한다고 했을 때, ‘생지’나 ‘학지’가 아닌 우리들은 ‘곤이불학’이 되지 말고 ‘곤이학지’, ‘곤지’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곤이불학’은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후대의 주석가들은 《맹자》의 말을 빌려 《논어》의 곤이불학’을 ‘자포자기自暴自棄’, 자신을 해치고 내버리는 사람이라 했다. 잘나지 못했다고 더 못나서야 되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용》의 저자가 이 셋, 학지, 생지, 곤지를 말하곤 이런 희망찬 말을 덧붙여 놓았다는 점이다. ‘앎에 이르렀다는 데는 똑같다.(及其知之一也)’ 브라보! 비록 출발은 다르나 똑같은 데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기막힌 반전이 있을까? 출발점은 똑같지만 그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오늘날과 정반대라니!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強而行之 及其成功一也
어떤 사람은 편하게 실천하고, 어떤 사람은 이롭기 때문에 실천하며, 어떤 사람은 힘껏 노력해서 실천한다. 그러나 이루어 낸다는 점은 똑같다.

배움은 수고롭다. 그것은 남과 경쟁하여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이 그렇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성인군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마찬가지로 실천에 있어서도 세 단계의 인간이 있다. ‘안행安行’과 ‘리행利行’, ‘면행免行’이 이것이다. 평범한 머글의 윤리란 ‘면행’! 꾸준히 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때 꾸준히 노력하라는 말에는 ‘남보다’라는 전제가 빠져있다. 남보다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또 다른 내가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여기에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순자筍子이다. 《순자》 〈권학勸學〉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일을 이루는 것은 쉬지 않는데 있다.(功在不舍)’ 꾸준함이야말로 한계 지어진 조건 속에 사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길이다. 순자는 이 꾸준함을 ‘적積’, 쌓아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옛말에도 그러지 않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아마도 이 말은 순자에게서 나온 말일테다.

不積蹞步 無以致千里 不積小流 無以成江海
한 걸음씩 쌓아가지 않으면 천리에 이를 수 없고, 작은 물줄기를 쌓지 않으면 강이나 바다를 이룰 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조금씩이라도 쌓아 가면 천리를 갈 수 있고, 강이나 바다처럼 넓고 큰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태산을 오르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이 쌓아감이 하루아침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래서 순자는 ‘적미積微’, 작은 일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일은 그 하나만으로 보면 작지만 쌓아두면 다르다. 날마다 꾸준히 쌓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크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일상의 노력이 만들어내는 변화는 생각보다 크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能積微者速成
작은 일을 쌓을 수 있는 자는 빨리 이룬다.

지렁이라는 미물微物이 있다. 이 미물이 가진 재주란 그저 밟으면 꿈틀거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강한 입을 가지고 있다. 그 입은 다른 것과는 달라서 강한 턱이나 날카로운 이빨은 보이지않는다. 튼튼한 근육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입으로 저 깊은 땅 속을 헤집고 다닌다는 점을. 순자는 말한다. 그것은 마음을 하나에 쓰기 때문이라고(用心一也). 반대로 게를 보라. 그는 날카로운 집개와 딱딱한 껍질을 가졌다. 게다가 발이 여덟 개나 된다. 그러나 그는 산만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다.

是故無冥冥之志者 無昭昭之明 無惛惛之事者 無赫赫之功
따라서 깊은 뜻이 없으면 빛나는 지혜를 가질 수 없고, 눈에 띄지 않는 노력이 없으면 드러나는 업적이 없다.

가끔 내 저주받은 몸뚱이를 생각할 때가 있다. 몸뚱이란 단지 키 작은 이 신체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선천적 능력들, 조건들, 상황들까지 포괄하는 그 무엇. 저주받은 몸뚱이 반대편엔 우월한 기럭지가 있다. 나는 머글이고 또 호빗이다. 그러나 비교는 좌절을 낳는다. 이 우울함과 싸우는 힘, 《중용》은 이를 용맹(勇)이라 부른다.

용맹이란 무엇인가. 치켜든 눈, 사나운 얼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도전 따위를 말하는 건 아니다. 불굴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남이 한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을 하겠다.(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배우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배워라. 잘하지 한다고 내버려 두지 말아라.(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중용의 저자도, 순자도 불굴의 머글이었나 보다. 그러니 그 시대를 뚫고, 세상을 찢어 오늘날에 이르렀겠지. 백 번, 천 번의 용맹은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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