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이야기 #2 – 서향, 글의 냄새

부모들은 궁금해합니다. 아이들이 《논어》라는 어려운 책을 잘 이해할지. 그러나 이 질문은 그리 좋은 질문이 아니에요. 《논어》는 심오한 철리哲理 대신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것도 일상의 언어로. 그래서 《논어》를 읽기에 앞서 뭔가 굉장한 것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곤 하지요. 생각보다 뻔한 이야기가 많거든요.

이렇게 답하더라도 질문은 남습니다. 삶을 이야기한다면, 경험이 많은 어른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계가 좁은 어린 학생은 이해의 폭도 좁을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말입니다. 공자도 견문見聞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널리 보고 배우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논어》 같은 책을 잘 읽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경험이 필요할까요? 쉽게 대답하기 힘들지요.

서당에서는 가능한 설명을 줄이려 노력합니다. 공자가 누구인지,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잘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해요. 최소한의 정보만 알려줘요. 우리가 읽는 책이 《논어》라는 것, 이 말이 공자 혹은 제자의 말이라는 것 정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불친절해 보이기도 해요. 그런데 일부러 이렇게 하려고 노력까지 한답니다. 그건 설명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글과 책을 만나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고전 책이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수의 뛰어난 사람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고전을 읽는다고 하면 대단히 학식 있거나 똑똑해 보이기까지 한답니다. 그런데 고전 음악은 왜 그렇지 않을까요? 어린 학생이 《논어》를 읽을 수 있을지 질문하는 사람도 그 학생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지를 묻지는 않을 거예요. 도리어 아직 채 태어나지 않은, 태 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이 옛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 하지요.

음악은 그냥 들을 수 있는데, 책은 왜 그냥 읽을 수 없는 걸까요? 늘 어떤 경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거기에는 지능의 위계를 나누는 생각이 있을 거예요. 책은 똑똑해야만 읽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 음악은 단계를 나누지 않지만 책은 너무 쉽게 단계를 나누어버립니다.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책과 어른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나누는 것은 물론 아주 세세한 단계를 나누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친절한 공부법은 이렇게 말할 거예요. 쉬운 책에서 어려운 책으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당의 공부는 매우 어리석은 방법이에요. 쉬운 책을 읽어야 할 어린 학생들에게 《논어》 같은 어려운 책을 권하니 말이에요. 한편 대단해 보이기도 합니다. 수 십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리니까요. 그러나 그런 단계가, 단지 상상의 계단에 불과하다면 어떨까요? 어린 학생이 《논어》를 읽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거예요. 있다면, 좋은 책을 읽는다는 정도.

책에는 단계가 없어요. 독서는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계단은 차례로 올라가야 하지만 독서는 결코 그렇지 않답니다. 먼저 읽어야 하는 책, 먼저 알아야 하는 지식 따위는 없어요. 독서는 마치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과 비슷해요. 필요한 게 있다면 간단한 가이드와 지도 정도일 거예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이드와 지도 조차도 필요하지 않답니다. 모험을 즐기는 사람, 낯선 경험을 반기는 사람은 일부러 가이드나 지도 없는 여행을 선호하기도 하지요.

서당의 공부는 최소한의 가이드와 지도를 쥐어주고 《논어》의 세계를 직접 경험해보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구구절절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여행도 있지만 체험을 더 중시하는 여행도 있는 것처럼 저는 서당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논어》를 ‘직접’ 만났으면 좋겠어요. 낯선 공기와 분위기, 체취를 느끼는 여행처럼 《논어》라는 낯선 글의 향기를 잘 느꼈으면 해요. 잘 읽는다는 것은 글의 내용을 잘 이해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답니다. 글이 가진 고유한 냄새, 색깔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아니, 후자 – 책의 냄새를 맡는 것이 더 중요하답니다.

사람이 얼굴을 갖는 것처럼 글에도 표정이 있어요. 사람의 말을 귀로만 들을 때보다 표정을 보며 들을 때 더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글도 그 표정을 읽을 때 글을 더 잘 읽을 수 있어요. 글의 표정, 이것을 서향書香 – 글의 냄새 혹은 글이 갖는 고유의 향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읽기는 이런 책의 표정을 읽고, 책의 향기를 맡는 법을 배제하고 있어요. 아마 그건 우리네 공부가 갖는 편협함 때문일 거예요. 시험을 위해, 혹은 스펙을 위해, 지적 우위를 위해 읽는 독서는 글의 향기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지요.

서점에 가보면 늘 놀라는 것이 두 가지 있답니다. 하나는 늘 책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책이 나오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또 하나, 책만큼 사람도 많다는 거예요. 서점에는 늘 사람이 가득 차 있어요. 어찌나 읽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지. 좋은 책도 많고 읽기를 사랑하는 사람도 많은데 ‘문해력’이 문제랍니다. 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읽기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요. 글을 안 읽어서가 아니라 글을 잘못 읽어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지요. 몇 권 안 되는 책을 등불에 의지해서 더듬더듬 읽어내었던 옛사람을 생각할 때, 우리네 독서는 너무 편협하고 편리해요. 그래서 저는 이북을 싫어해요. 글-文을 읽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정보 습득을 위해 개발된 도구이기 때문이에요. 《논어》를 이북으로 읽는다면 과연 그 책의 표정을, 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따라서 질문이 바뀌어야 해요. 《논어》는 물론 어떤 책을 읽을 때에도 ‘이해’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책의 냄새, 책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물어보아야 해요. 물론 부정적인 대답도 있을 거예요. 지루해요, 딱딱해요, 뻔한 이야기예요 등등. 저는 《논어》가 어렵기보다는 낯선 책이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이런 냄새, 맛을 지닌 텍스트는 경험할 기회가 없었을 거예요. 갖가지 향신료와 자극적인 맛이 범람하는 시대에 《논어》 같은 책은 참 멋도 맛도 없는 책일 거예요. 그러나 거꾸로 이는 이렇게 담담淡淡한 글을 읽는 법을, 미세한 후각을 잃어버린 증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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