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읽기 #2 – 〈학이〉

1. 배움이란 무엇인가?

논어 첫 문장은 너무도 유명하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던 익숙한 문장이다. 그러나 과연 배움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이 질문을 누구에게 던지느냐에 따라 대답도 달라질 것이다. 공자, 편집자, 주석가는 아마 서로 다른 대답을 하리라. 개인적으로 이 문장은 공자 자신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제자들에게 해준 이야기, 나아가 훗날 제자들이 정리한 선생의 말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공자 본인의 삶이 묻어있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맨 마지막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에 공자의 심경이 가장 잘 담겨있을 것이다. 여기서 온慍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쉽지 않다. 박성규는 이를 ‘노여워함’으로 옮겼는데 이는 ‘慍含怒意’를 풀이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분노의 의미를 내포한다’라고 풀어 慍과 怒를 같이 보았다는 점에서 조금은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고주古註에서는 명확히 慍怒也라고 표기하여 慍을 怒로 풀었다. 그러나 주희는 이를 ‘含怒意’라고 풀었는데 이는 어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성백효는 ‘서운해하지 않음’으로 풀었다. ‘雖樂於及人 不見是而無悶 乃所謂君子’에서 ‘悶’을 살려 옮긴 것으로 보인다. Legge의 영역은 ‘no discomposure’ 즉 마음에 동요 없음으로, 이을호는 ‘부루퉁하지 않으면’으로 옮겼다. 첸무(錢穆)는 怫郁, 怨을 병기해 놓았다. 怫郁은 울적함으로 옮길 수 있다. 역자가 많이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는 양백준은 怨恨으로 옮겼다.

공자는 평생토록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남이 알아주는 일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제자들에게 남긴 이 말은 제자들을 향한 것인 동시에 자신을 향한 말이었을테다. 그러나 주희는 이 부분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주희는 배움을 본받음(效)으로 풀이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為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먼저 깨달은 자를 좇아가는 것. 배움을 먼저 이렇게 묘사했던 것은 순자였다. 참고로 맹자에게는 배움에 대한 별 논의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기 하나의 주요한 정의는 맹자에게 빚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人性皆善!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다! 그렇기에 배움이란 단순히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본성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復其初也.

이 말은 당대唐代 이고의 ‘복성서復性書’에서 가져온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人之所以為聖人者,性也;人之所以惑其性者,情也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是故誠者,聖人性之也;寂然不動,廣大清明,照乎天地,感而遂通天下之故,行止語默,無不處於極也。復其性者,賢人循之而不已者也,不已則能歸其源矣。

주희는 자신의 사상적 의무를 시대적으로는 한당漢唐의 유학을, 사상적으로는 불학佛學을 극복하는 것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유와 이고는 당말의 유학자로서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게 통설이다.

한편 이 부분은 불가의 불성론佛性論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이 말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과 똑같다.

주희 이전의 유가는 학문을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다. 사회적으로는 관료로 진출함을, 개인적으로는 성현의 학문을 습득함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주희는 이를 종교적 차원에까지 승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배움이란 단순한 습득이 아니라 돌아감, 회복(復)이다. 선한 본래의 그 모습으로.

 

2. 인仁과 위인為仁

과연 공자의 사상 가운에 인仁은 중요한가? 언뜻 보면 이 질문은 매우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어려서 외운 게 있지 않나? 예수는 사랑을 부처는 자비를 공자는 인을! 그러나 도식적 이해는 늘 어떤 왜곡을 낳는다. 공자의 사상에서 인仁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의 사상을 인仁으로 단정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예수의 사상을 이야기한다 해보자. (누군가는 이 표현 조차 불손하다 여기겠지만…) 예수는 사랑을 줄기차게 이야기했나? 그러나 누구는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 운동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한다. 《젤롯》의 저자는 예수를 여러 젤롯, 즉 민족적-종교적 열심에 가득 차 있는 운동의 하나로 본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사상을 풍성하게 읽을 수 있다. 예수가 성전에서 휘두른 채찍은 과연 무엇이었나? 덧붙이면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은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인仁은 매우 다루기 까다로운 개념이다. 일단 《논어》에서는 인仁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대부분 불인不仁, 인하지 않음으로 이야기될 뿐이다. 그렇다고 무엇이다는 말이 전혀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樊遲問仁。子曰:「愛人。」 (12-22) 공자가 명확히 말한다. ‘愛人’, 남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공자가 인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종합하면 이 대답은 뭔가 부족하다. 공자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인을 이야기하는데 이처럼 남을 사랑하는 실천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움’이라는 모호한 말을 즐겨 쓴다.

그러나 주희의 주석에서는 그렇게 피해갈 수 없다. 주희는 이렇게 말한다. 仁者,愛之理,心之德也。為仁,猶曰行仁。만만치 않은 개념이 나왔다. 理! 이에 관해 역자는 어류 등에서 많은 말을 옮겼다. 주희는 지금 愛와 仁을 구분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의예지신은 體, 측은•수오•사양•시비 등은 用이라 말한다. 한편 이를 뒤에서는 性과 情으로 구분한다.

이 개념적인 층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학설이 펼쳐진다. 조선유학의 제일논쟁이라는 사단칠정론, 리기설이 바로 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점을 다룬 것이다.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튼 여기서 주희가 개념적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자. 그는 사랑은 실천(行仁)혹은 작용(用)이며 그것은 또한 감정(情)이라 말한다. 이와 대비하여 더 본질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인이다. 그는 인을 하나의 씨앗으로 사랑을 그 씨앗에서 싹튼 새싹으로 풀이한다. 그렇게 나누어 풀이했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규명하고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자구 해석이 주석에 실린 것이다. 故為仁以孝弟為本。論性,則以仁為孝弟之本。為仁 – 인의 실천이라는 점에서는 효제가 근본, 다르게 말하면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본성의 차원에서 말하면 仁이 효제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대체 이게 무슨 차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제자의 다른 질문을 보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한다. 或問:「孝弟為仁之本,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 효제를 잘하기만 하면 인에 도달할 수 있는가? 왜냐면 문장을 다르게 끊어 ‘仁之本’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면, 효제로부터 인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에서는 ‘本立而道生’이라 말하지 않았나.

그러나 인을 보다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개념으로 보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한다. 非也。謂行仁自孝弟始,孝弟是仁之一事。謂之行仁之本則可,謂是仁之本則不可。蓋仁是性也,孝弟是用也,性中只有箇仁、義、禮、智四者而已,曷嘗有孝弟來。인은 도달해야 하는 어떤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 인간 본성의 토대이다. 여기에는 사상적 토대를 놓으려는 노력을 엿볼 수도 있지만, 性中只有箇仁、義、禮、智四者而已라고 하는데서 볼 수 있듯 경서의 틀안에서 개념을 규정지으려는 노력을 볼 수도 있다. 이 넷을 이야기한 것은 맹자였다.

하나 덧붙이면, 세계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인을 이야기하고 했지만 인의예지, 혹은 인의예지신과 같은 넷 혹은 다섯은 당시 세계를 설명하는 주요한 틀이 되기도 했다. 사계절이 운행하며, 오행의 조화로 천하만물이 살아간다. 효제를 인간의 본성에 넣는 것이 무슨 문제냐만 경서의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는 구체적인 실천의 언어여서 인간의 본성을 근원적으로 탐구하는데 부적절했다. 게다가 四時五行으로 짜여진 우주관에 이는 달갑지 않은 해석이었다.

주희는 인仁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며 이를 자신의 사상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삼고자 했다. 따라서 여기에는 구체적인 실천의 역동성이 결여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실천이란 실천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부터 출발했느냐를 따져 물어야 하는 게 되었다. 따라서 후대에 실천을 강조한 인물들은 주희의 이러한 해석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다산의 주석은 이렇다. 事親孝爲仁父與子二人也事兄悌爲仁兄與弟二人也事君忠爲仁君與臣二人也牧民慈爲仁牧與民二人也以至夫婦朋友凡二人之間盡其道者皆仁也然孝弟爲之根 … 今之儒者認之爲仁義禮智四顆在人腹中如五臟然而四端皆從此出此則誤矣 … 故有子謂諸仁之中孝弟爲之本而程子謂行仁自孝弟始未嘗不通但程子曰孝弟謂之行仁之本則可謂是仁之本則不可此與有子語不合仁與爲仁不必猛下分別也

누구에게는 번잡함일테지만 이렇게 옮겨둔 데는 다 그런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 구별은 꽤 중요한 지점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3. 화和, 자연스러움의 추구

예禮란 무엇인가?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주희는 이렇게 정의내린다. 禮者,天理之節文,人事之儀則也。그렇기에 이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和者,從容不迫之意。주희는 구체적인 행동 이전의 사상적 토대를 닦고자 한다. 그렇기에 예란 어떤 행위들을 묶어 말하는 게 아니다. 다산의 주석을 참고하여 우리 입말로 논어를 번역한 것으로 유명한 이을호의 번역을 한번 보자. 다산은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禮之用謂禮之所施行

유선생 “예법을 차리는 데도 부드러운 게 좋지. 옛 어른들의 예법은 그렇기에 아름다웠고, 아래를 통틀어 그렇게 했느니라. 그러나 하지 않는 대목이 있었으니, 부드럽게 할 줄만 알았지 예법으로 매듭을 못 맺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거든.”

주희에게 예란 천리라는 우주적 법칙이 하나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람은 마땅히 이것을 따라야 하며, 나아가 이것을 따르는 것이란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박성규가 ‘和’를 화평으로 옮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和를 조화, 즉 사람들 사이의 조화로 옮기는데 주희는 예가 실행되는 것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한다. 물론 간단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 간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지는 않으나 어류 등의 표현을 빌리면 이 부분이 예의 수행자에 대한 부분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이 편안하다. 이와 같지 않으면 편안하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하면 ‘화’가 아니다.’ ‘안배(강제 조정)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 곧 ‘화’이다.’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행하면 예에 부합하고 이치에 맞아 자연히 화평한다.’ ‘만약 화평에 근본을 두지 않고, 오로지 강제로 겉치레만 치중하면 그것은 헛된 예이고 화평은 없다.’

이러한 것은 앞에서도 보았듯 체용론體用論, 즉 본체와 작용을 나누어 사고하기 때문이다. 凡禮之體主於敬,而其用則以和為貴。주희는 예라는 근본적인 본체의 작용이 화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세계를 둘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은 주희 사상의 특징적인 부분이다. 이는 사변적인 모습을 갖기도 했으나 한편 세계에 존재하는 두 이질적인 부분을 함께 언급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愚謂嚴而泰,和而節,此理之自然,禮之全體也。

보통 공맹과 주희를 비교할 때에 이러한 사변적인 부분을 많이 이야기한다. 실제로 주자학이란 불가와 도가의 철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난 유가라고 보아도 좋다. 한편 여기에는 이 세계를 의미하는 자연, 혹은 당연이라는 개념이 미끄려져 들어가기도 한다. 凡言道者,皆謂事物當然之理,人之所共由者也。

따라서 이는 단순히 세계를 분석하는 틀을 제공하는 데에서 머물지 않고 세계를 하나로 묶는 데까지 이른다. 세계는 유가의 이론, 유가가 제시하는 것에 따라 새롭게 재편되어야 한다. 주희는 강력한 사상적 투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러한 주희의 의도에서 새롭게 재해석되는 《논어》의 인물이 바로 증삼이다. 그는 증삼만이 공자의 적통을 이은 제자라고 주장한다. 물론 《논어》 안에 공인된 애제자 안연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죽어버렸으니 어쩌겠는가. 《논어》에서는 공자의 학맥이 어떻게 이어졌는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여러 제자를 두루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지만, 주희가 공을 들여 증자를 높인 것은 그만큼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줄 전통적 기반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커다란 건물에는 커다란 토대가 필요한 법. 주희가 쌓아올린 사유의 건물이란 생각보다 거대하며 치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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