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읽기 #1 – 〈독논어맹자법〉, 〈논어서설〉

1. 《논어》읽기의 당혹스러움

論語易曉,孟子有難曉處。語孟中庸大學是熟飯,看其它經,是打禾為飯(어류 19-6)

《논어》는 쉽게 이해된단다. 그런데 《맹자》는 그렇지 않다? 정말 그런가?

看孟子,與論語不同,論語要冷看,孟子要熟讀。論語逐文逐意各是一義,故用子細靜觀。孟子成大段,首尾通貫,熟讀文義自見,不可逐一句一字上理會也。(어류 19-28)

맹자는 ‘熟讀文義自見’이라지 않나. 게다가 주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맹자》는 맹자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일관성을 가지고 완성되어 있지만 《논어》는 여러 제자가 편집하여 복잡하다.

《논어》를 읽을 때마다 당혹스러운 것은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골몰하기 때문이다. 《논어》에는 적어도 세 층위가 존재한다. 첫째,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 공자의 말. 《논어》에 의심할 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논어》에 실린 공자의 말은 역사적 인물 공자의 말인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는 공자 제자들의 기록. 《논어》가 말들의 묶음인 것은 확실하나 녹취한 것도 아니고, 공자가 따로 글을 남겨 전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후세에 전하고자 기록하여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누가 언제 《논어》의 문장을 정리했는가하는 점이다. 《논어》의 기록자에 대해 수 많은 말이 있었다. 공자의 가까운 제자였던 자공이 참여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제법 후대 제자인 증삼이나 유약이 관여했으리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 두 사람에 그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논어》 내부의 불일치성, 그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들이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훨씬 후대의 인물로 보이는 《논어》의 편집자가 있다. 《논어》에는 단지 공자의 말과 그 기록만 있는 건 아니다. 공자 제자들의 기록도 존재한다.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아닌, 공자의 제자와 그들의 제자가 남긴 부분도 보인다. 증삼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남기는 말이나, 자하와 자장이 가르치는 방법을 두고 간접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부분이 그렇다. 이런 부분은 공자의 말과 그 제자들의 기록과 다른 또 다른 후대의 기록 첨가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 기록자와 편집자가 다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이부분은 괄호치자.

이처럼 《논어》에는 발화자와 기록자, 편집자의 목소리가 공존한다. 이들 사이의 역사적 틈도 꽤 넓어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수백년 정도로 추정된다. 개인적으로는 수백년에 무게를 두는 편인데, 그 이유로는 공자의 후예를 주장하는 맹자나 순자의 기록에서 《논어》와 일관되기는 커녕 상반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논어》라는 텍스트는 물론, 그 재료가 되는 기록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하되는 부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전국시대 중기까지도 《논어》라는 책은 물론, 일관된 기록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맹자와 순자는 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어떤 목적에 의해서 공자의 말은 기록되고 편집되었다. 그러나 아직 《논어》가 되기에는 멀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논어》엔 몇가지 퇴적층이 더 있다. 하나는 《논어》의 주석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논어》는 후한 말기에 하안이 정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논어서설〉에 실려있는 하안의 말에 따르면 《논어》는 본래 세 판본이 있었다. 노나라의 것, 제나라의 것, 그리고 공자 집의 벽에서 나온 것. 이 셋을 각기 《魯論》, 《齊論》, 《古論》이라 부른다. 이 셋이 한대漢代의 장우와 정현을 거쳐 오늘날 보는 20편 체제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안은 이렇게 정리된 《논어》 20편에 주석을 달았다. 이것이 바로 《논어집해 論語集解》이다. 《논어》의 역사에서 하안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논어》의 형태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주석을 통해 한대漢代 연구자들이 어떻게 《논어》를 읽었는지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하안 뿐만 아니라 후대의 주석가들은 일부의 편집과 해석을 담당하였다. 하안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편장체제에 있어서 조금 이견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글자를 두고 잘못 표기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주석의 해석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뤄지는데, 하나는 글자의 뜻을 풀이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 맥락을 풀이하는 것이다. 보통은 고주古註 – 주희 이전의 주석은 전자를, 신주新註 – 주희의 주석은 후자를 강조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주희 역시 글자의 의미를 풀이하며, 그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까지 주석에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또 하나의 퇴적층 – 주석에도 결마다 쪼개지는 층위가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누적되어 하나의 특정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인데, 상술했듯 하안의 것이 가장 크며 그 아래에 보면 한대漢代 경학가들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 위에 역시 수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커다란 획을 그은 것은 주희였다. 주희는 《논어》에 주석을 달면서 그의 철학적인 논의를 그 속에 넣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성인의 말을 기록한 경서經書를 철학적•사상적 깊이가 있는 텍스트로 탈바꿈했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의 주석은 《논어집주論語集注》라고 하는데, 제목처럼 그는 자신의 말을 명백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선대 학자들의 해석을 선택, 배열함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었다. 주희는 편집을 통해 해석을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주희의 주석은 너무 커서 그것은 지층이라기 보다는 단층에 가까운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전의 해석 전통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야 말로 성인의 계보(道統)를 잇는 인물이라고 자임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상은 과거를 발 아래 딛고 건립되기 마련이지만 그는 자신의 사상이야 말로 모든 것의 새로운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이란 이름은 그 견고하고도 비옥한 토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위에 무수히 많은 것이 놓여졌지만 주희의 것만큼 전복적이지는 않았다. 그 이후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의 저술이 제국의 공식 교과서 역할을 할 때까지, 즉 근대 사회로 편입하기 이전까지는 모두 그의 그늘 아래 있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아시아의 근대가 외부의 영향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된 바, 이 주희의 그늘을 안에서 벗어나고자 한 사람들에 주목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래서 이 주석가들 가운데 최상층에는 근대 직전의 인물들이 있다. 청의 유보남은 《논어정의》를, 조선의 정약용은 《논어고금주》를 일본의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는 《논어고의》와 《논어징》을 남겼다.

이렇게 장황하게 《논어》 바깥의 주석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는 《논어》가, 물론 다른 동양 고전 역시 마찬가지이겠지만 주석의 해석을 벗어나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이 읽었던 책의 모양이 그렇다. 지금이야 번역과 원문을 따로 구분하며, 게다가 주석이라는 방법으로 아래나 끝에 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넣고는 한다. 그러나 옛날 책은 원문을 쪼개어 그 속에 주석을 넣는 방법으로 쓰였다. 그것도 주석을 1~2종을 섞어서. 그러다보니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읽는 책과는 다른 식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

공자의 말, 기록자와 편집자, 주석가… 거기에 이 책을 번역한 사람까지. 사실 오늘날 우리 손에 쥐어진 《논어》에는 갖가지 무늬가 가득하다. 문제는 이 무늬가 조화롭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보이기 힘들다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점이 다채롭기 보다는 부산하고, 혼란스러우며, 시끄럽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목소리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밀려드는 다양한 목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이 점이 문제다.

 

2. 왜 다시 주희인가?

실상 근대 사회에서 주희는 찬밥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통’이라는 이름 안에서 주희를 여전히 주자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나, 보통 주희는 어떻게든 넘어서야 하는 걸림돌로 인식되었다. 유가, 혹은 유교라고 하면 낡은 냄새가 나는 것을 지울 수 없지 않은가? 수천년 전 공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를 하나의 체계, 이론, 사상으로 완성한 주희를 곱게 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실제로 오늘날 《논어》 번역에서 주희는 많이 소외되는 게 사실이다. 오늘날 유통되는 책들을 보면 주희의 주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 상황에서 많이 호출되는 것이 바로 정약용의 해석이다. 기존의 주희 해석이 지나치게 딱딱하며, 사변적이라면 다산의 것은 보다 부드럽고 실재적이라는 명목하에.

실학實學이라는 용어가 바로 그렇다. 실학이란 거꾸로 앞의 학문을 허학虛學이라 지칭하는 말이며, 바로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쓸모 있는 것이라는 선언이 숨어 있다. 그러나 거꾸로 이 ‘실학’이라는 말을 쓰며 스스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 주희를 비롯한 송대 도학자道學者들이었다는 점은 자주 간과된다. 그들이 새 시대를 열어보겠다는 비전 아래 자신들의 학문을 어떻게 칭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것이 근대 사회를 가로막았다는 비판에서 매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라는 이상에서 벗어나 보면 과연 이런 독법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들 수 밖에 없다. 근대화에 실패한 것은, 중국이 서구 열강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주자학 혹은 성리학이라 불리는 전통학문의 낡은 구습 때문인가? 물론 성리학적 체계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성리학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며 단순히 처분해 버리는 태도에 불과하다.

《논어》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논어》는 읽기에 대해 끊임없이 묻게 만드는 책이다. 그 여러가지 말들의 아우성가운데, 과연 어떤 소리를 듣는가 하는점은 읽는 사람의 몫에 달려있다. 그런데 우리는 주희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적어도 그건 주희가 아닌 주자라는 성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성인이 이야기한 성인, 주자가 이야기한 공자. 얼마나 낡고 무딘 말인가?

그러나 낡고 무딘, 녹슨 그 유물에도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는 흔적이 있다면 열심히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순자는 말한다. 학문이란 높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고. 멀리 보는 자는 높은 산에 오른다. 무엇인가를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누군가의 어깨 위에 올랐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물론 발꿈치를 들어 고개를 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주희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가 닦아 놓은 길이 《논어》를 읽는 여러 개의 길 가운데 주요한 길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아가 그 길이 어쩌면 또 다른 길을 보여주는 데 적합한 길은 아닐까?

주희의 말은 낡은 구석이 분명 많다. 그러나 그가 가진 풍부한 가능성을 낡음이라는 말 하나로 버리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게 아닐 것이다. 주희는 많은 말을 남겼다. 주석 뿐만 아니라 《혹문》이라는 책과 《어류》라는 방대한 말까지도. 그 말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 또 하나의 길을 만드는 것, 발견하는 것, 찾는 것이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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