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읽기 #7 《응제왕》 – 깨어나니 혼돈이더라

1. 꺼져라! 비루한 인간아!!

드디어 《장자:내편》의 끝이다. 장자라는 책을 하나의 지형물로 생각해보자. 장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일곱 고개를 넘어야 한다. 까마득한 바다와 드넓은 창공을 보여주는 높고도 가파른 고개를 넘어, 여러 인물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며 드디어 마지막 고개에까지 왔다. 이 일곱번째 고개를 넘는 것은 그리 어려워보이지 않는다. 앞선 고개들이 워낙 험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 고개는 초입부터 낯선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응제왕〉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인과 다스림(治)에 관한 이야기, 계함과 호자 그리고 열자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혼돈의 이야기. 아무래도 〈응제왕〉이라는 제목은 맨앞의 성인과 다스림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제왕帝王이라니! 장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 아닌가?

본디 제帝와 왕王은 함께 쓰이지 않았다. 훗날이야 지고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장자 당시만 하더라도 ‘제왕’이라는 복합어는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王은 춘추전국의 배경으로 보면 본래 주나라의 통치자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주나라의 지배자일 뿐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는 역할을 맡은, 천자天子-하늘의 대리자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주周의 왕은 친척이나 공신에게 땅을 떼어주어(封土) 나라를 세우도록 해주었다.(建國) 그러나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이들은 주나라 왕실에게 지역을 다스리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함부로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지 못했다.

주 왕실의 몰락이후, 왕은 이제 지고의 존재가 아니었다. 군사적인 힘도 없었으며 상징적인 권력도 잃어버렸다. 전국시대는 저마다 왕이라 일컫는 이들이 벌인 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 하늘의 대리자로서 왕은 하나여야 하는 법! 왕들은 천하의 패권을 두고 서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나라 영정이 나머지 육국을 무너뜨렸을 때 이 호칭은 이제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호칭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황제皇帝이다. 황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각기 글자를 취한 것으로 왕보다 높은 새로운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삼황오제는 주나라 훨씬 이전, 전설의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엿볼 수 있듯 제帝는 꽤 오래된 개념이다. 보통 은나라에서 초월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제帝였는데, 주나라가 은을 멸망시키면서 천天을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시켰다고 말한다. 즉, 은나라의 통치자는 상제上帝의 대리자로 천하를 다스렸다면 주나라는 천명天命에 따라 천하의 지배자가 되었다. 천天이 보다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법칙을 의미한다면, 제帝는 보다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를 암시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 중국어에서는 기독교의 야훼를 Shangdi-상제上帝라 부른다. 상제 관념이 그리 쉬이 사라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장자》에서는 ‘제帝’에 대한 논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편에서 총 8번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3번은 황제黃帝를 가리킨다. 혹시나하여 일러두지만 皇帝와 黃帝는 다르다. 黃帝는 삼황오제 가운데 첫번째로 중국의 전설적인 통치자를 가리킨다. 나머지 용례는 이렇다. ‘安時而處順,哀樂不能入也,古者謂是帝之縣解’ 〈양생주〉, ‘神鬼神帝,生天生地’ 〈대종사〉, 그리고 ‘南海之帝為儵,北海之帝為忽,中央之帝為渾沌’ 〈응제왕〉 여기서 제왕의 이미지를 찾기는 힘들다. 제왕이라면 현실적인 통치자를 가리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서는 그보다 훨씬 높은 지고의 존재를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혼돈의 이야기에 나오는 표현은 단순히 신神으로 바꾸어도 무방해보인다. 그렇다면 왕王은 어떨까? 이 역시 《장자》에서 그렇게 빈번하게 나오지 않는다. 약 10번 등장하는데 대부분 위왕魏王이나 오왕吳王, 왕예王倪 처럼 특정 인물을 가리켜 말하는 호칭으로 쓰인다. 치자治者를 이야기하는 부분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가장 가까운 부분은 〈응제왕〉에서 명왕明王을 논하는 부분이다. 요약하면 장자는 제왕, 통치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제왕帝王이라는 합성어가 《장자》에서 보이지 않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천도〉편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퉁치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다룬다. 확실히 여기서는 제왕론帝王論이 보인다. ‘夫帝王之德,以天地為宗,以道德為主,以無為為常。’ 그러나 이것이 과연 《장자》 전체의 주요 주제인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엇갈릴 수 있다. 외편과 잡편을 통틀어 장자가 하는 이야기는 이 외에도 한참이나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문을 좁혀보자. 제왕帝王,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장자: 내편》에서는 어떻게 다루는가? 유가儒家, 특히 《맹자》나 《대학》에서 처럼 그렇게 직접적으로 다루는가? 아니면 그 주제는 감춰있는가? 무시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소극적으로 물러나고 있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도망치고 있는가?

이를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장자》를 제대로 읽는 것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인 배치 위에서 사상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천하는 혼란스러웠고 기존의 가치, 주나라의 시스템(周禮)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나라의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려 했고(맹자), 다른 사람은 그 전통적인 색체를 지우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골몰했다.(순자) 그런가하면 새롭게 등장할 권력의 모습을 제언하는 사람도 있었고(법가 – 이사와 한비자), 이 새로운 절대 권력의 출현에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매뉴얼로 제안하는 이도 있었다.(《노자》). 그렇다면 장자는?

天根遊於殷陽,至蓼水之上,適遭無名人而問焉,曰:「請問為天下。」無名人曰:「去!汝鄙人也,何問之不豫也!…」

천하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무명인無名人은 이렇게 말한다. ‘꺼져라! 비루한 인간아!! 어찌 나에게 그런 더러운 이야기를 하는가?’ 대화가 섬뜩하다. 질문 자체를 끊어낸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이 부분을 보면 장자는 치자에 대한 논의에서 의견없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대화의 장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며 나아가 파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한참 잔소리를 들은 이후에 천근은 다시 묻는다. 여기에 무명인의 대답.

「汝遊心於淡,合氣於漠,順物自然,而無容私焉,而天下治矣。」

과연 이것은 하나의 또 다른 통치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일까? 흔히 이야기하듯 무위의 통치(無爲之治)를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장자가 제왕론에 이야기를 보태고 싶은 것이라고 본다면 그렇게 보아도 무방하다. 앞서 〈천도〉편에서 언급되었던 부분을 기억하자. 그러나 장자가 과연 제왕론에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응제왕〉이라는 제목과 천도편에 일부 나온 논의를 괄호치고 읽는다면 이것을 또 다른 통치론이라고 볼 수 있을까? 도리어 ‘너는 그딴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라’는 훈계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 장자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거리를 둔다. 어쩌면 그 거리는 붕새의 커다란 날개로도 날아가 닿을 수 없는 거리일지 모른다. 장자는 평생 진흙탕 속에서 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벼슬자리를 하지 않겠다던 그의 말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왜 그는 적극적인 탈주를 기획한 것일까? 천하는 어떻게 될 것이냐는 왕의 물음에 맹자는 통일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 전망은 결코 맹자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사상가들이 새롭게 출현할 권력에 자신의 말을 보태기에 바빴다. 그런데 장자는 왜 이 판을 깨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그것은 첫째 그렇게 벼슬자리에 오른 재주있는 자(才之美者)들이란 모두 재목材木처럼 잘려버리고 그 본연의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개별 인간의 재능을 꽃피우기 보다는 그들의 삶을 갈아내어 태워버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이 하나의 재원財源이 된 시대! 둘째는 맹자가 꿈꾸었던 일치일란一治一亂의 미래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제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안정된(平治)시대가 오리라 기대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새로운 권력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리라! 그러나 정말 그런가? 어쩌면 장자는 도래할 새 시대의 그늘을 먼저 보았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비대한 권력은 또 다시 인간을 갈아내어 움직이는 탐욕스러운 기계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더욱 큰 국가라는 괴물을!!

 

2. 열자의 삼시세끼

장자의 입장이 어쨌던 우리에게 남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주된 논의였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수 없는 게 없을까? 장자가 보여준 북쪽 바다에서 남쪽 바다로 날아가는 장대한 사유의 넓이를 보았다면 어찌해야 할까? 매미나 비둘기처럼 비웃으며 손가락질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진인처럼 세속을 초탈한 사람으로 살 수도 없는 일이다. 대체 어떻게?

좀 길지만 응제왕에 나온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이야기인즉 이렇다. 정나라에 계함이라는 신묘한 무당이 있었다. 그는 사람의 생사와 화복을 귀신같이 맞추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찌나 신묘했던지 사람들이 무서워 그를 피했더란다. 사람들은 진실을 그렇게 반기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계함이 아니다. 호자의 제자 열자, 이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는 이 신묘한 계함이라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 선생 앞에서 계함을 자랑하는 짓(?)을 하고 만다. 결국 열받은 호자는 계함을 불러 계함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지를 보여준다.

鄭有神巫曰季咸,知人之生死存亡,禍福壽夭,期以歲月旬日,若神。鄭人見之,皆棄而走。列子見之而心醉,歸以告壺子,曰:「始吾以夫子之道為至矣,則又有至焉者矣。」壺子曰:「吾與汝既其文,未既其實,而固得道與?」眾雌而無雄,而又奚卵焉!而以道與世亢必信,夫故使人得而相女。嘗試與來,以予示之。」明日,列子與之見壺子。出而謂列子曰:「嘻!子之先生死矣,弗活矣,不以旬數矣!吾見怪焉,見溼灰焉。」列子入,泣涕沾襟,以告壺子。壺子曰:「鄉吾示之以地文,萌乎不震不正。是殆見吾杜德機也。嘗又與來。」明日,又與之見壺子。出而謂列子曰:「幸矣!子之先生遇我也。有瘳矣,全然有生矣。吾見其杜權矣。」列子入,以告壺子。壺子曰:「鄉吾示之以天壤,名實不入,而機發於踵。是殆見吾善者機也。嘗又與來。」明日,又與之見壺子。出而謂列子曰:「子之先生不齊,吾無得而相焉。試齊,且復相之。」列子入,以告壺子。壺子曰:「吾鄉示之以太沖莫勝。是殆見吾衡氣機也。鯢桓之審為淵,止水之審為淵,流水之審為淵。淵有九名,此處三焉。嘗又與來。」明日,又與之見壺子。立未定,自失而走。壺子曰:「追之!」列子追之不及,反以報壺子,曰:「已滅矣,已失矣,吾弗及也。」壺子曰:「鄉吾示之以未始出吾宗。吾與之虛而委蛇,不知其誰何,因以為弟靡,因以為波流,故逃也。」

계함은 사물의 변화와 그 흐름을 정확히 개관적으로 짚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세상의 심오함에 대해 다 알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세상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서 신묘막측하며 이루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백이 늘 존재한다. 그런면에서 거듭 강조되는 것은 구체적이고 분명함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다. 장자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을 싫어했다. 아마 오늘날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도 장자는 시큰둥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삶은 다 설명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다. 좋다. 그런데 그 이후에 보여주는 열자의 삶이 재미있다. 《장자》 안에서 보기 드물게 그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다. 그는 계함을 동경했으나 호자가 보여주는 또 다른 깊이 있는 삶을 보았다. 그런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이 열자의 모습에 《장자》를 읽은 우리를 대입해 보아도 될 일 아닐까? 계함처럼 명징한 지식을 이야기하는 인물에서 벗어나 《장자》의 심오함을 맛보았다. 물론 이 경험은 그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지켜본 열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야기는 그저 도망간 계함의 이야기로 끝맺어도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열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然後列子自以為未始學而歸,三年不出。為其妻爨,食豕如食人。於事無與親,彫琢復朴,塊然獨以其形立。紛而封哉,一以是終。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열자가 돌아간 곳은 그 집이었다. 집에 돌아가 그는 아내를 위해 밥하고, 돼지에게 먹이를 주며 살았다. 소박한 삶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섬기던 호자의 진면목을 본 그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마 밥 짓고 청소하며 살았을 것이다.

삼시 세끼를 지어먹고 소박하게 삶을 가꾸는 모습. 바로 이 삶이 장자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삶의 오습이 아닐까?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했을 때 그 앎은 늘 어떤 실천을 낳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보여주는 지혜로운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 여기 열자의 삶이 바로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따져보면 일상이란 먹고사는 보편적인 사람의 일들 이어서 별로 굉장한 일은 못 된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삶, 삶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 아닐까?

밥 짓고 청소하면 자신의 삶의 무게와 현 주소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사회적 명성이나 화폐로 계량화 되는 것과는 다른 삶의 정확한 본질적 무게가 여기에 있다. 거꾸로 여기서 출발하는 삶이야 말로 정직하고 성실한 삶이 아닐까? 허망한 무게들에 짓눌리지 않는, 그것들에게 물들지 않는 진솔한 삶의 힘이 여기에 있다. 누가 열자의 삶을 탓할 수 있으랴.

無為名尸,無為謀府,無為事任,無為知主。體盡無窮,而遊無朕,盡其所受於天,而無見得,亦虛而已。至人之用心若鏡,不將不迎,應而不藏,故能勝物而不傷。

삶의 본래 자리로. 일상으로의 귀속이 장자의 중요한 충고라면 그것은 우리를 일상에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힘들을 경계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삶에 덕지덕지 다양한 치상을 붙여가며 무겁게 만들지 말라. 그렇게 하다가는 무거운 삶의 무게가 삶 자체를 질식사시켜버릴 수 있다.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삶을 대하자. 그렇게 맑고 안정된 마음이야 말로 상처입지 않는 삶 아니겠는가?

 

3. 혼돈의 선물

南海之帝為儵,北海之帝為忽,中央之帝為渾沌。儵與忽時相與遇於渾沌之地,渾沌待之甚善。儵與忽謀報渾沌之德,曰:「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此獨無有,嘗試鑿之。」日鑿一竅,七日而渾沌死。

《장자:내편》의 끝. 마지막 이야기가 남해南海에서 시작하는 것은 흥미롭다. 아마도 이것은 내편의 편집자가 의도한 게 아니었을까? 북쪽 바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이제 남쪽바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끝나야 한다.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이 먼길을 돌아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장자는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는 고정된 틀과 형식에 갇혀있을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다’는 서술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북해와 남해의 신을 이야기하는 ‘숙儵과 홀忽’은 각기 ‘갑자기’를 뜻하는 말이다. 장자가 초대했던 북쪽과 남쪽의 아득한 세계에서 갑자기 문득 어떤 깨우침이 들어온다. 반짝하는 어떤 깨달음의 순간! 그런데 중앙,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계는 여전히 혼돈이다. 혼돈이란 무엇인가? 눈코귀 등이 없어서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 답답함이 싫다. 그래서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런데 그만 혼돈이 죽어버렸다.

이 우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혼돈은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사라지면 안 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 혼돈의 죽음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혼돈을 죽인 것은 잘못이 아닐까? 도리어 죽어버린 혼돈이야 말로 중요한 게 아니었나?

장자가 마지막으로 선물해주는 것이 ‘혼돈’이다. 어지러움. 그는 강하게 강조한다. 다 알았다고 착각하지 말 것. 다만 이 어지러움과 현기증을 간직할 것. 왜 그래야 하느냐면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세계를 감각하고 그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은 늘 어떤 한계를 함께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소중하지 않다. 들리는 것은 지혜로운 말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참 된 것이 아니다. 물론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 속에 얼마간의 거짓이 있음을 잊지 말 것!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하지 못한 것에 주목할 것.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덧붙이면 일부 연구자는 여기서 일곱개의 구멍과 일곱 날이 《장자: 내편》을 가리킨다고 본다. 일곱개의 고개를 넘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서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며 입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 새로운 경험. 이제 세계가 새롭게 보인다! 그러나 그런 잠깐의 깨달음(儵忽)이야 말로 진정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흐리멍텅한 세계의 본질에서 벗어나 얕은 지식으로 세계를 다 알았다며 뻐기는 것은 아닐까?

장자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자기 부정의 철학. 자기 상실의 발견! 말을 남겼으나 그 말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발견해야 할 것은 이 세계의 컴컴한 본래 모습이다. 먹먹한 세계. 이것이 장자의 마지막 선물이다.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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