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읽기 #5 《덕충부》 – 진정 잊어야 할 것은

1. 천天 – 인人

… 도가는 또한 공자에서 비롯된 천의 세속화•이법화를 더욱 밀고나가, 하늘을 사람(인위人爲)의 정반대인 무위無爲(비인위非人爲)라는 의미로 바꾸었다. 그 결과 하늘은 종교적인 신격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천명은 세계 존재•변화의 필연성을, 천도는 그 법칙을 의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도가는 공자 이래의 유가들이 하늘에 붙여두었던 도덕적•정치적인 의미, 즉 선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의미를 제거해 버렸다. 이것을 행한 것이 천인분리론天人分離論(하늘과 사람의 상관관계 부정)이다. – 《중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26쪽.

공자는 인간에만 관심을 두었던 철저한 인문주의자로서 종교적 신앙을 완전히 배제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고대 도시 국가의 귀족적 종교로부터 이성의 해방을 완전히 수행하지 못한 불완전한 인문주의자로서의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 《유가의 뿌리를 찾아서》, 155쪽.

… 혜자는 명사주의에 가려서 실질을 알지 못하고 장자는 천에 가려서 인을 알지 못하였다. 《순자: 해폐》, 한길그레이트북스. 
惠子蔽於辭而不知實。莊子蔽於天而不知人。

자연: 만물과 인간의 본질적 양태, 존재 양식, 운동 형태를 나타내는 말. 스스로 혹은 저절로(타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 속에 내재하는 활동에 의해)라는 뜻이다. … 자연은 원래 문밥상 태연泰然이라든가 막연漠然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부사로서 만물과 백성의 양태를 형용하는 말이었으며 실체로서의 자연nature을 의미하는 명사는 아니었다. … 처음에 도가의 사상적 개념으로 사용되었을 때의 자연은 ‘스스로’를 뜻했다. 이런 자연 개념은 만물이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존재하며 변화한다고 보는 새로운 사상이었다. – 《중국사상문화사전》 87쪽.

번역의 문제. <<장자>>에서 만만치 않게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천天’이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번역에서 이를 ‘자연’으로 옮긴다. <덕충부>에서만 보자면 ‘천天’이 ‘천하天下’나 ‘천지天地’, 혹은 ‘천자天子’와 같은 합성어의 일부가 아닌 부분은 아래와 같다. 번역은 안동림을 참고.

受命於天: 삶을 하늘에서 받은 것 – 150쪽

天刑之 安可解: 그는 하늘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어찌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 158쪽

四者 天鬻也 天鬻者 天食也 既受食於天 又惡用人: 네가지는 (참되게 살기 위한) 자연(天)의 양육이다. 자연의 양육이란 자연이 (만물을) 먹여 살린다는 (말인) 것이다. 자연이 먹여 살리는데 어찌 또 인위人爲가 필요하랴. – 167쪽

謷乎大哉 獨成其天: (그러나) 얼마나 큰가. 홀로 그 자연의 덕을 이룩한 것은. – 169쪽

道與之貌 天與之形 惡得不謂之人: (자연의) 도리道理가 얼굴 모습을 베풀어주고, 자연(의 작용)이 몸의 형태를 베풀어 주었는데 어찌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나? – 169쪽

天選子之形 子以堅白鳴 – 자연이 자네 형체를 가려내어 만들어 주었는데, 자네는 (그것도 모르고) 쓸데없는 변론辯論으로 떠들고 있는 걸세. – 171쪽

그것은 훗날 ‘천연天然’이 곧 자연을 의미하는데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한편 여기에는 도가-장자의 사유를 문명과 자연의 문제로 해석하려는 의도도 깔려있다. 즉, 도가가 제기한 주된 문제는 바로 인간의 문명사회 비판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우주적 법칙으로서의 자연, 혹은 문명의 반대로서의 자연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장자의 문제 의식이 그런 ‘자연’ 개념 속에 녹아들 수 있는 것이었을까? 장자는 인위적인 작용이나 노력을 멈추고 자연의 변화에 맡겨두라고 했던가? 인간 문명을 뒤로하고 자연 속으로 몸을 숨기라고 했던가?

첫번째 인용문은 도가-장자의 철학을 공자가 제기한 문제의 심화로 풀이한다. 공자는 천의 세속화와 이법화, 다르게 말하면 종교적인 색체를 지우고, 거기서 법칙을 이야기한다. 거꾸로 말하면 공자 이전의 하늘이란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은 특정한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존재였다. 종교적이고 주재적 의미의 하늘이 있었다면 이런 색깔을 지운 것이 바로 공자의 업적이란 말이다.

두번째 인용문은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소개한다. 한쪽에서는 완벽하게 인문주의적 관점을 실현했다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고대의 종교적 색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어쨌건 공자 이후로 천인관, 즉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는 변화하였다. 이전의 천인관이 하늘에 인간이 복속된 상태였다면, 공자는 인간을 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 그의 기획이 성공적이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열어준 길은 의미있었다.

다시 첫째 인용문으로 돌아오면, 하늘로부터 인간이 자유를 획득하자 이제 하늘에서 도덕적, 정치적 의미를 찾던 시도를 그만두게 되었다. 인간은 하늘에 기대지 않고도 인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가에서 주장한 배움(學)이란 바로 하늘에 기대지 않고도 인간이 독립된 존재로서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편 이전까지 하늘의 명령을 수행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통치자였다면, 이제는 덕성을 갖추어야만 통치자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유가의 합리주의는 분명 주목할만한 특징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다만 문제는 이 천인분리론, 즉 하늘과 인간을 분리한 공자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어쩌면 공자가 아니었어도 주周의 몰락과 함께 천인관계의 세속화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周를 지탱하던 천명天命관은 이제 그 의미를 점차 잃게 되었다. 세속화의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나자 이에 저항하는 이들도 등장했다. 묵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하늘의 뜻에 겸허히 따르기를 요구했다. 묵가에게서 종교적 색체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떤 배경위에 있는 것일까? 순자는 장자가 하늘에 치우친 까닭에 인간의 일을 알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장자의 천인관에서 천-하늘이 인간을 압도하였다는 비평이다. 이때의 하늘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마지막 인용문을 참고하여 유추하면, 법칙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겨 말한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흐름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춘하추동, 생장소멸의 사이클에 따라. 그러나 장자는 만물의 변화를 이야기하기는 했으나 그 변화의 법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정한 변화, 그리고 이 변화의 법칙에 대한 관심은 《주역》을 통해 심화 연구되었을 것이다. 도리어 장자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운명으로서의 하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하늘은 인간에게 형체를 주는가 하면, 형벌을 내리기도 하고, 먹여주는 존재가 아닌가?

莫之爲而爲者 天也 莫之致而至者 命也

《맹자》에 실린 문장이다.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바로 ‘하늘’이며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나 이르는 것이 ‘명’이란다. 따라서 ‘천-명’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천명이란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움직인다. 예측할 수 없이 육박해 오는 불친절한 상황. 바로 이것이 운명이다.

문명과 자연이라는 구도는 재고되어야 한다. 문명과 자연이라는 문제는 전통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였으며 더구나 장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위로 상처입은 인간들이라기 보다는, 천天-비인위非人爲,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해를 입은 사람들의 문제이다. 따라서 장자가 그려내는 인물이란 반성적 주체가 아니다.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며 질서잡힌 행동을 찾는 인물이 아니다. 반대로 그 상황에서 출발한다. 숱한 외발이들이 나오지만, 어떻게 하면 외발이가 되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화를 입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화를 입더라도, 재앙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상황을 대할지가 더 문제이다. 재앙을 피하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재앙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법이라 할까?

 

2. 전국시대戰國時代, 칼이 번뜩인다!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의 변화로 여러 가지가 언급된다. 주周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체제가 무너졌고, 군웅들이 할거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역적 소규모 무력 시위 정도였던 것이 영토전쟁으로 확대 되었다. 이 이유 가운데 하나로 철기 문화의 보급을 이야기한다.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고, 이는 대규모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한편 철제 무기도 보급되면서 대규모의 사상자를 낳는살육 전쟁이 펼쳐지게 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백기의 장평대전이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의 장수 백기는 조나라의 장평으로 쳐들어가 크게 승리한다. 이때 백기를 상대했던 조나라의 장수가 그 유명한 조괄이었다. 장수의 실책으로 조나라는 전쟁에서 크개 패했을 뿐만 아니라, 약 30만에 달하는 장정들이 포로로 잡힌다. 그런데 문제는 백기가 이들을 모두 생매장했다는 점이다. 과연 역사적 사실로 이런 대학살이 실재로 있었는가는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전국시대 이후의 전쟁을 묘사하면서 이런 대규모 학살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제 전쟁의 규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런 엄혹한 시대를 두고 장자는 ‘겨우 형벌을 면할 수 있는 시대’라고 말했다. 장자가 바라보는 세계란 이처럼 참혹하다. 그곳은 칼날과 도끼날이 번뜩이는 곳이다. 역설적으로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 칼날이 우리를 베어버릴 지 모른다. 때문에 장자는 형벌로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소개한다.

중국 고대의 형벌刑罰이란 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칼(刀)로 신체의 일부를 베어버리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얼굴에 죄목을 문신으로 새기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을 베는 월형(刖刑) 등이 있다. 〈덕충부〉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대부분은 월형을 받아 절뚝거리는 이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앞서 보았던 〈양생주〉의 지혜를 가지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저렇게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여기서는 앞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신도가와 정자산의 이야기를 보자. 이둘은 모두 백혼무인의 제자였다. 그런데 정자산은 발이 잘린 신도가를 대놓고 무시한다.

申徒嘉,兀者也,而與鄭子產同師於伯昏無人。子產謂申徒嘉曰:「我先出,則子止;子先出,則我止。」其明日,又與合堂同席而坐。子產謂申徒嘉曰:「我先出,則子止;子先出,則我止。今我將出,子可以止乎,其未邪?且子見執政而不違,子齊執政乎?」申徒嘉曰:「先生之門,固有執政焉如此哉?子而說子之執政而後人者也!」

정자산은 형벌을 받은 이와 자리를 함께 한다는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는 어떻게든 그와 엮이고 싶지 않다. 게다가 정자산 자신은 이름난 정치인 아닌가. 형벌의 흔적을 몸에 지닌 신도가 따위와 함께 있는 것은 커다란 수치이다. 형벌을 받았다는 것, 이것은 곧 국가 권력에 대항했다는 뜻이며, 다르게 말해 불온한 인물이라는 뜻 아니겠나. 그런데 신도가의 대답은 이렇다.

申徒嘉曰:「先生之門,固有執政焉如此哉?子而說子之執政而後人者也! … 知不可奈何而安之若命,惟有德者能之。

그대는 자신의 권력을 자랑으로 삼아 남을 깔보고 있다. 그러나 정말 선생님의 문하에서 배우는 것이 그런 것이란 말인가? 도리어 그것은 앞서 사당 나무가 벗어나려 했던 사회적 가치 척도를 정확히 따르는 게 아닌가? 장자가 여기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둘이다. 하나는 앞서 〈인간세〉의 논의 구조를 들어 형벌을 받은 이들을 비판하려는 독자들. 그들은 형벌을 받지 않는 것, 칼날이나 도끼에 베이지 않는 것이 최선인줄만 알고 형벌을 받은 이들을 손가락질하기에 바쁘다. 장자는 자신의 주장이 남을 비난하는 하나의 근거로 작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사회적 가치 체계 위에서 형벌받은 이들을 비난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곧 죄인이라는 증거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이 둘은 서로 크게 닮아 있다. 사람의 외형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점에서.

신도가는 시대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을까?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기에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다. 다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장석의 이야기를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삶, 즉 유용함을 좇다가 베어지는 그런 삶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그는 이것이 마치 운명(命)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운명처럼 편안하게 여기는 삶. 이것이 중요하다고.

흥미롭게도 이와 정확히 같은 내용이 앞서 〈인간세〉에서 나왔다. 제나라의 사신으로 가려는 섭공 자고가 공자를 만나러와 자신의 신세를 늘어놓는다. 사신으로 가려는데 영 마음이 불안하다. 실해하면 화를 입을 테고,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이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성치 못하겠다. 대체 어찌해야 할까?

自事其心者,哀樂不易施乎前,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德之至也。為人臣子者,固有所不得已,行事之情而忘其身,何暇至於悅生而惡死!夫子其行可矣!

여기서 나오는 것이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을 제대로 가꾸면 뭇 감정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감정이란 얼마나 삶을 해치는 것이던가. 삶이 흔들리는 이유는 이 마음이 다양한 정감으로 들끓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 때문인가? 섭공자고의 절절한 상담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내놓는 대답은 영 시원치 않다. 가라! 사신으로 가는 것은 신하된 자의 본분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어쩔 수 없음, 不得已. 이것이 장자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가 보는 세상이란 그렇게 출구가 많지 않다. 별 대안이 없다. 처음부터 신하의 자리에 앉지 않았으면 모르겠으나 신하의 자리에 처한 이상 선택지는 별로 없다. 군주의 명을 무시하는 것?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장자의 시선은 비관적이다. 도리어 그 명령에 따르되 자기 자신을 버리라! 지키고자 하는 것을 버릴 때 비로소 제대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다.

여기서 버리라는 자신이란 무엇인가 의욕하는 주체를 말한다. 그것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 운명이란 얄궂은 대상을 만날 때 말이다. 그는 安之若命, 운명을 편안히 대하라고 말한다. 정말 운명이란 그렇게 편안하게 여길정도로 친절한 것일까? 아니, 여기서 우리는 운명의 불친절함을 읽어야 한다. 얼마나 불편하면, 불친절하면 그것을 편안히 대하라고 말하겠는가? 사실 우리가 ‘운명’이라는 말을 쓰는 쓰임이 그렇다.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운명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라 말하고, 때로는 필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유없이 발생하는 고통, 갑자기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대부분 불친절하게 주어진 사건을 뜻한다.

遊於羿之彀中,中央者,中地也,然而不中者,命也。

장자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우리는 명사수 앞에 놓인 삶이라고 말한다. 백발백중의 명사수에게 맞지 않는 것. 그것 또한 운명이다. 정자산이 화를 피하고 재상이 된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일까? 아니다. 도리어 그 역시 운명의 손에 놓여 언제 화를 입을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잘난척 하다니!

다시 말하지만 장자가 보는 세계란 시퍼렇게 선 칼날과도 같다. 겨우 형벌을 면하기도 힘든 세상. 이 세상에서 재능을 펼쳐보겠다고 스스로를 재물로 바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한편 어쩌다 화를 입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엄혹한 세상에 살면서 몸에 상처 하나 남지 않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그가 칼날을 손에 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칼날 위를 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칼날을 제 손에 쥐고 싶어 안달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러다 스스로를 벨 수 있다고 경고한다. 칼날의 횡포에 휘둘려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다.이때 필요한 것은 잘려진 발이 아닌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다. 그는 남이 볼 수 없는 것, 또 다른 삶의 형태를 이야기한다.

 

3. 진정 잊어야 할 것

위나라의 추남 애태타. 그는 어찌나 잘 생겼는지, 아니 어찌나 매력적인지 천하의 남녀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한다. 노나라 애공도 그를 만나보고는 처음에는 그의 생김새에 깜짝 놀랐지만 곧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대체 그는 누구인가?

魯哀公問於仲尼曰:「衛有惡人焉,曰哀駘它。丈夫與之處者,思而不能去也。婦人見之,請於父母曰『與為人妻,寧為夫子妾』者,十數而未止也。未嘗有聞其唱者也,常和而已矣。無君人之位以濟乎人之死,無聚祿以望人之腹。又以惡駭天下,和而不唱,知不出乎四域,且而雌雄合乎前。是必有異乎人者也。寡人召而觀之,果以惡駭天下。與寡人處,不至以月數,而寡人有意乎其為人也;不至乎期年,而寡人信之。國無宰,寡人傳國焉。悶然而後應,氾而若辭。寡人醜乎,卒授之國。無幾何也,去寡人而行,寡人卹焉若有亡也,若無與樂是國也。是何人者也?」

그의 겉모습은 엄청나게 못생긴 모습이었나 보다. 천하를 깜짝 놀래킬정도의 외모였다니! 그러나 그는 매력있다. 그 때문에 노애공은 그에게 나라를 맡기기까지 했다. 잘생긴 외모도, 뛰어난 지식도, 엄청난 재물도 없다. 대체 그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사람이었던 걸까? 공자는 그가 덕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何謂德不形?」曰:「平者,水停之盛也。其可以為法也,內保之而外不蕩也。德者,成和之修也。德不形者,物不能離也。」

그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그가 마치 물처럼 잔잔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요한 마음,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능력을 갖고 있다. 흐린물은 사물을 왜곡하여 받아들이지만 맑은 물은 그렇지 않다. 고요하게 맑은 물은 사태의 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참된 진실이란 늘 숨어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때 장자가 말하는 고요한 거울과 같은 물은 결국엔 그 마음 속을 내보이는 그런 거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거울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았던 세상의 모습과 다른 것을 비춰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왜곡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고요한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낯설다면 거꾸로 우리가 보았던 기존의 시선이 얼마나 구부러진 것인지를 반증해주기 때문이다. 실상은 왜곡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진짜를 대하면 왜곡된 모습으로 인지할 수 밖에.

闉跂支離無脤說衛靈公,靈公說之,而視全人,其脰肩肩。甕盎大癭說齊桓公,桓公說之,而視全人,其脰肩肩。故德有所長,而形有所忘,人不忘其所忘,而忘其所不忘,此謂誠忘。

위령공과 제환공은 모두 천하에 이름난 군주였다. 그들은 천하를 이끌어갈 비전이 있다고 스스로 자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또 다른 새로운 인간, 기괴한 신체와 고요한 마음을 동시에 지닌 이런 인물을 만나고는 세계를 보는 눈이 전혀 다르게 바뀌었다. 온전한 사람(全人)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얼마나 괴상한 이들이었는가?

따라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잊어야 한다. 장자는 그것이 형체(形)라고 말한다. 형체를 잊어야 덕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을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있다. 이런 사람은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잊어버린 사람이다.

이런 면에서 장자는 명백히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에게 외형이란 사물들과 더불어 변화하여 결국엔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겉 껍데기에 많은 공력을 기울인다. 정작 자신의 생명의 근원은 무시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들은 잘 살려고 할 수록 삶이 엉망이 되고 만다. 장자는 반대로 억지로 잘 살 것을 추구하지 말라고 말한다.

惠子曰:「既謂之人,惡得無情?」莊子曰:「是非吾所謂情也。吾所謂無情者,言人之不以好惡內傷其身,常因自然而不益生也。」

혜시와 장자는 인간과 감정을 두고 서로 설전을 벌인다. 혜시는 유정有情을 장자는 무정無情을 주장한다. 혜시는 인간에게 감정이 없다면 어찌 인간일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장자는 이야기하는 초점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감정이 없음이란, 어떤 가치 척도로 스스로를 상하게 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좋음과 싫음, 결국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애쓰고, 싫은 것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추구한다고 하여 그런 삶을 살수 있는가 하면 그건 다른 문제다. 하나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것이 좋은 게 아닌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진정 우리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한편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은 좋은 것 보다는 나쁜 것에 관대하다. 그렇기에 좋다 것을 추구하다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좋다 나쁘다는 기준에 매여 스스로를 해치지 말 것.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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