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읽기 #3 《제물론》, 《양생주》 – 삶을 가꾸는 법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제물론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첫 시작, 남곽자기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겠다. 대체 남곽자기의 말이 어디서 끝나는지 조차 모호하다. 다만 자유의 질문에 대한 남곽자기의 대답까지는 대화가 연결되는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 마지막 대화의 의미조차 해석이 분분하다는데 있다. 별 내용이 아니라면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안성자유의 질문이 그런 방만함을 막는다. ‘대체 천뢰란 무엇입까?’

子游曰 地籟則眾竅是已 人籟則比竹是已 敢問天籟 子綦曰 夫吹萬不同 而使其自已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남곽자기는 ‘오상아吾喪我’, 자기 상실을 이야기하며 그 이류로 천뢰를 들었다고 말한다. 대체 천뢰란 무엇이기에! 그런데 남곽자기의 대답은 그 질문을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지뢰에 대해서는 그토록 한참을 이야기해놓고 천뢰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쏙 빼놓았다. 곤혹스럽다. 이런 곤혹스러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야 말로 장자를 읽는 매력 가운데 하나지만 쉽지 않다.

남곽자기의 말은 대체로 크게 두 방향으로 해석되었는데, 문제는 이 두 해석이 서로 정반대라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위진시대 곽상의 해석이 있다. 참고로 곽상은 〈장자〉의 해석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인물 가운데 하나다. 곽상의 해석에 대한 안병주의 풀이를 옮긴다.

‘咸其自取 怒者其誰邪’를 ‘怒者其誰邪 咸其自取’의 도치형문장으로 보아 “소리나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모두 스스로 취하는 것이지 소리나게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즉 이 해석은 바람 소리나는 것이 모두 자기 원인에 의해 그런 것이지 소리나게 하는 배후의 주재자가 따로 없다는 뜻이다. 곽상의 주가 이와 같은 해석의 원류인데 곽상은 “物은 그것이 生하여 나오도록 하는 원인이 따로 없이 自生한다. 이것이 天道이다.”라고 하고 또 “物은 각각 自得할 따름이다. 누가 그것을 그렇도록 소리나게 主宰하는가. 이것은 天籟를 거듭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재가 따로 없이 모두가 자기 원인에 의해 自生自化하는 것으로 보는 이 곽상 류의 주석을 따르면 하문下文에 보이는 ‘진재眞宰’도 이것을 유전변화流轉變化하는 현상계現象界의 밖에 따로 실재하는 주재자로 보지 않고 천天 즉 자연自然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게 된다. – 안병주역, 전통문화연구회. 72쪽.

만물의 독자적 존재론, 창조주나 주재자와 같은 신적인 존재 근거를 가지지 않는 것은 동양 사상의 고유한 특징인 것처럼 여겨졌다. 아마 여기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등을 기반으로 세계의 움직임을 음양오행을 통해 설명하는 방법이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고대철학에서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천天, 주재자로서의 상제上帝 관념은 흔히 서구의 것이라 부르는 유신론적 관점과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족으로 덧붙이면 여기에 주목하여 보유론補儒論, 즉 유가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유가를 한층 더 완성하겠다고 주장했던 이가 바로 마테오 리치였다.

장자에도 이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논어》 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주재자를 암시하는 듯한 표현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특히 ‘若有真宰,而特不得其眹。可行已信,而不見其形,有情而無形。’이라는 부분이 그렇다. 여기서 ‘진재真宰’란 참된 주재자로 옮길 수 있을텐데, 장자는 이것의 조짐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참된 주재자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존재가 이 세계와 무관한 단절된 존재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것의 움직임은 명확하나 그 형체를 볼 수 없단다. 실질적이는 하나 형채가 없는 것!(有情而無形) 곽상식으로 해석하면 이 문장이 진재真宰에 대한 의문으로 읽어야 한다. 혹은 주재’자’라는 식으로 인격화 혹은 존재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표현이 뒤에도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이해에 그칠 수 없어 보인다. <대종사>를 보면 이런 부분이 있다.

夫道 有情有信 無為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在太極之先而不為高 在六極之下而不為深 先天地生而不為久 長於上古而不為老

도를 이야기하는 표현, ‘有情有信 無為無形’은 진재에 대한 표현과 유사하다. 게다가 여기서 도란 천지만물을 낳고 개별적인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무엇 아닌가? 따라서 다른 한쪽에서는 초월적 대상이 무엇인가 있다고 해석한다. 그렇다고 이 해석이 곽상류의 해석이 비판하는 것처럼 단일한 주재자나 창조주의 확실한 존재를 이야기하며 나아가 이 존재가 개별 사물의 능력을 박탈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장자의 관심은 이 주재자, 혹은 도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장자는 도가 무엇이냐에 대해 다루기 보다는 도를 인식하거나 체득하는 문제에 주목한다.

더불어 중요한 하나의 포인트는, 장자가 인간을 이 주재자로부터, 이 주재자가 생성한 세계로부터 소외된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제물론에서는 특히 그것이 인식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간결하게 요약하면 소외된 인간은 이 참된 존재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세계의 참된 실상은 어떤 의문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설결과 왕예의 대화를 이해해보자.

齧缺問乎王倪曰 子知物之所同是乎 曰 吾惡乎知之 子知子之所不知邪 曰 吾惡乎知之 然則物無知邪 曰 吾惡乎知之 雖然 嘗試言之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왕예의 대답은 반복된다. ‘吾惡乎知之!, 내가 그것을 어찌 알랴?’ 이 질문은 근본적인 자기 부정에까지 이른다. 내가 모른다는 인식조차 어찌 알 수 있을까? 앎(知)이란 불안한 지반 위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늘 특정한 조건 위에서 가능한 것인데 이 조건을 제거해 버리면 앎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따라서 이어지는 왕예의 질문,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는 질문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自我觀之 仁義之端 是非之塗 樊然殽亂 吾惡能知其辯

‘나’로부터 살펴보건데 인의의 근거나 시비판단이란 소란스럽고 난잡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그것을 명확히 알 수 있으리랴. 이런 부정, 우리가 익히 알아 왔던 가치에 대한 의문이 다른 가치에 대한 존중, 나아가 모든 개별적 존재를 ‘긍정’하는 데까지 이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장자의 말이 이러한 차이와 가치화에 의문을 던지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한편 여기서 하나 짚어 보고 싶은 것은 我와 吾의 쓰임이다. 과연 장자가 이 둘을 의식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는가, 일관성있게 개념어로 썼는가는 의문이다. 다만 ‘오상아’와의 연결고리로서 생각해보자.

앞서 장자는 ‘나를 잃어버렸다’말했다. 그러나 ‘내’가 완벽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를 잃어버린’, 자기 상실의 주체, 吾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앞선 남곽자기의 이야기를 연결시키면 천뢰를 들은, 자기도 하늘의 호흡에 따라 연주되는 피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기존의 내 생각과 나의 앎이라 생각했던 것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여기서의 ‘나’ 역시 인의나 시비의 판단으로 구성된 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일시적 존재인 ‘나’로부터 보자면 사람들의 말이란 번잡하여 세계를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다. 도리어 우리에겐 또 다른 ‘나’가 필요한데, 그것은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고 질문하는 나이다.

따라서 장자의 말은 불안한 인식 기반 위에 있는 나를 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를 잃어버린 나를 아는 또 다른 ‘나’. 여기서 출발하는 앎이란 다르지 않을까? 다만 장자는 바로 여기서 ‘또 다른 앎’을 이야기하지 않고 한번 질문해보는, 말하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嘗試言之 / 且吾嘗試問乎女. 앎이 끊어진 곳에서, 말이 끊어진 곳에서도 앎과 말은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2. 꿈에서 깨어나보니 그림자더라

현대에 자기 인식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는 바로 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미 장자는 2000년 전에 이 꿈에 대해 이야기해놓았다.

夢飲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 而愚者自以為覺 竊竊然知之 君乎 牧乎 固哉 丘也 與女皆夢也 予謂女夢 亦夢也 是其言也 其名為弔詭

꿈은 욕망의 실현 공간이기도 하지만. 덧없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동양에서 꿈은 허망함을 이야기하는 소재가 된다. 왜 그런가? 꿈은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울다가고 깨어나서는 웃기도 하며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속인다는 것인데, 이 감쪽같은 속임은 속는줄도 모르게 만들곤한다. 따라서 이런 일도 가능하다. 꿈 속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일!

커다란 깨어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커다란 꿈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스스로 깨어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있단다. 그런 이들이 군주니, 남을 이끄는 목자니 이런 말을 내놓는다. 깨어 있다고 자처하는 이들, 그래서 거꾸로 남을 깨울 수 있다고, 깨워야 한다고 자처하는 이들이야 말로 장자가 비난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더욱 꿈 속으로 잠들 뿐이다. 그렇다면 커다란 깨어남이란 무엇일까? 장자는 이것이 꿈임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꿈을 꾸고 있다. 그도, 너도, 나도!

알 수 없는 것을 알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마찬가지로 꿈을 꾸며 깨어 있기. 이런 모순적인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런 모호한 말은 더욱 의문을 증폭시킬 뿐이다. 장자의 말을 빌리면, 나 역시 이것이 장자의 말을 제대로 풀이한 것인지, 제대로 풀이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번 이야기해 보련다. 다만 이러한 기묘한 표현 가운데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장자가 이 꿈을 지워내는 것을, 어두컴컴하며 희뿌연 그 무엇을 완벽하게 청소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인식의 청소부가 아니었다. 도리어 인식이란 늘 왜곡과 자기 한계 속에 허우적대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이 왜곡과 허우적댐에서 멈춰 있을 수는 없다.

罔兩問景曰 曩子行 今子止 曩子坐 今子起 何其無特操與 景曰 吾有待而然者邪 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 吾待蛇蚹 蜩翼邪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옅은 그림자, 망량의 이야기는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옅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뭍는다. 너는 어째 그리 지조가 없느냐? 그러나 그림자는 억울하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반문하고 싶었으리라. 나라고 가만히 있고 싶지 않든?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림자 역시 딸린 존재인 것을. 그림자는 물체를 따라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하다. 어쩌면 ‘존재’라는 호칭조차 의문시 되는. 그렇다면 그림자를 부리는 그 신체는 ‘존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개별적 주체’인가? 아니,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림자는 묻는다. 내가 따라 움직이는 저 신체도 무엇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마치 뱀이나 매미의 껍데기와 같은 건 아닐까?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 실재를 찾는 것이 장자의 목표가 아님을 명심하자. 맹자라면 인심人心, 혹은 성性을 찾는 것이 그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런 개별적인 고유성을 지니는 출발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런 현실이야 말로 인식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망량은 망량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휘둘리는 삶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는가? 복잡하게 꼬인 세계의 흐름 속에 자유를 찾을 길은 없을까? 같은 방법으로 이야기하면 어떨까? 말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으며, 알 수 없으나 알 수 있는 것이 있듯, 자유로울 수 없으나 자유롭게 살 수는 있다고.

또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자유와 부자유 사이의 무엇. 왕예의 질문을 기억하라.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모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 아닌가?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가?

〈제물론〉 마지막의 호접지몽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昔者莊周夢為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喻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為胡蝶與 胡蝶之夢為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아니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었다. 장자의 꿈 속 나비는 자신이 스스로 장자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장자가 된 나비는 자신이 나비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 몰랐을 것이다. 깨어난 뒤에야 스스로가 장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꿈 속의 나비. 그러나 이 깨어남이야 말로 또 다른 꿈 속으로 이끈다. 깨어났다지만 이것이 꿈이 아님을 어찌 알랴. 이러한 의문과 의심, 여기에 변화의 실마리도 있다.

 

3. 또 다른 앎이 필요하다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已 已而為知者 殆而已矣 為善无近名 為惡无近刑 緣督以為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양생주〉의 시작은 흥미롭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나 그가 추구하는 앎은 무한하다. 그런데 인간은 종종 그 무한함을 좇아가려 그 무한한 삶을 다 소진하곤 한다.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언뜻 보면 장자는 여기서 무지無知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지 말라! 그러나 앞에서 한참을 보았듯 장자는 특정한 앎을 이야기한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도에 가까운 앎이 있다!

그런데 이 앎은 단순히 지각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지혜는 특정한 삶을 낳는다. 그 삶은 무엇일까? 장자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명성을 가까이 하지말며, 형벌을 가까이 하지 말라. 장자에게 명성과 형벌은 서로 가깝다. 이 둘 모두 삶의 본질적인 자리에서 벗어나 특정한 가치에 종속된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연독緣督이란 이런 종속에서 벗어난 다른 삶의 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길을 통해 삶을 가꾸고, 보살필 수 있다. 삶을 보살피는 길, ‘양생養生’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양생주〉는 다른 편과 달리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가 편 전체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한다.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던 포정의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이 포정의 이야기만 자세히 검토해보자.

庖丁為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포정과 문혜군의 만남이다. 여기서 문혜군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가상의 인물로 보이는데,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군君’이라 불렸던 것을 보면 한 나라의 통치자임에 틀림없다. 반면 이야기의 상대자는 포정庖丁, 즉 백정이다. 백정과 군왕의 만남. 이 자체로도 매우 특이한 것이다. 최고 통치자와 하층민의 만남. 뒤에서 보겠지만 여기서 지혜를 구하는 것은 문혜군이며, 소잡은 백정인 포정은 지혜자로 등장한다. 신분권력을 완벽히 전도한 이 대화는 의도된 것이 분명하다. 이를 통해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보잘것 없는 것 속에 지혜가 들어 있다!

포정에게 문혜군이 주목했던 것은 그의 화려한 기술 때문이었다. 그의 칼솜씨가 어찌나 유려한지 몸 놀림 하나하나가 연주되는 음악에 맞춰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 그는 기술만으로도 문혜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포정이 말하는 것은 기술의 측면이 아니다. 뛰어난 기술로 가능한 경지가 아니다. 그는 도를 체득한 인물이었다.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郤 導大窾 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도의 체득이란 단순히 찰나의 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어쨌든 특정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포정에게는 19년이 걸렸다. 경험의 축적으로만 환원되지 않지만 그래도 경험이 중요하다. 무수한 반복적인 경험은 우리에게 특정한 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해준다. 고로 반복은 위대하다.

그렇다고 19년의 시간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19년의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소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이제 소 전체를 보지 않는다. 소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무수한 조각들이 얽혀 구성된 집합체이다. 그 조각들 사이에는 틈이 존재한다. 포정은 이 틈을 보는 눈을 지녔다. 그러나 이 눈은 ‘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의 작용이 그친 이후에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눈으로 보지 않을 때 또 다른 눈이 열린다. 장자는 이를 ‘신神’이라 표현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인간이 지닌 또 다른 능력 가운데 하나라고만 해두자. 거꾸로 말하면 인간에게는 기존의 감각기관 이외에 또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세계의 참 모습을 파악하는 진정한 능력이리라.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間 而刀刃者无厚 以无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為 怵然為戒 視為止 行為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土委地 提刀而立 為之四顧 為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소를 보는 눈이 달라지자 포정의 칼놀림 역시 달라졌다. 기존의 백정은 살을 베고 뼈를 잘랐다. 그러다보니 칼이 쉽게 상하곤했다. 이렇게 무뎌진 칼을 버리고 새 칼을 잡는다. 그러나 포정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칼이 19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칼은 이가 빠지지 않았다. 마치 숫돌에 방금 간 듯 날카롭다. 그렇다고 이 칼이 그저 칼집 속에 고이 모셔졌던 것은 아니다. 포정은 이 칼로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다고 말한다.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포정은 그 비밀을 틈에서 찾는다. 그의 칼날은 뼈와 근육을 가로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틈을 노닐며(遊) 근육과 뼈, 근육과 근육을 서로 분리해냈다. 포정은 소가 지닌 특정한 결, 그것이 구성된 복잡한 체계를 꿰뚫어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칼놀림은 자르고 베는 것이 아니라 떼어내는 것이었다. 포정의 위대함이란 단순히 화려한 칼질에 있던게 아니었다. 칼날을 상하지 않는 세밀한 기술 바로 여기에 포정의 비밀이 있다.

그런데 문혜군의 말이 흥미롭다. 포정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삶을 가꾸는 방법’을 알았다고 말한다. 대체 무엇이 그에게 그런 가르침을 전해주었을까? 이런 문혜군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요리사와 칼과 소가 양생이라는 주제 아래서 각각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각각 사람, 생명, 그리고 사회를 대표한다. … 소 잡는 우화를 통해 장자가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만 우리가 그 속에 몸을 둘 수 있고, 또 상해를 입지 않을 수 있으며, 나아가 유유자적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 《장자를 읽다》, 왕보, 바다출판사. 144~145쪽.

포정의 눈앞에는 소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상이 놓여 있었다. 포정은 칼을 들고 이 거대한 소를 해체해야 한다. 대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 어려움은 어려움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 어려움은 결국 그 손에 쥔 칼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포정의 기술에 따라 칼의 수명이 달라진다. 똑같은 칼날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채 1년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10년 넘게 쓰는 경우도 있다.

앞서 〈양생주〉의 시작에 주목하라. 어떤 앎은 삶을 해친다고 말한다. 그것에서 벗어나 삶을 가꾸는 지혜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자신의 유한한 삶을 가꾸고, 생명을 보살피는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장자는 그것이 틈을 노니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물에는 고유의 결이 있으며, 흐름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따르면 해를 입지 않는다. 그것을 거스르면 삶이 망가질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장자의 소극적 태도이다. 〈양생주〉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결국 상하지 않는 것, 다르게 말하면 다치지 않는 삶이다. 이 위협을 최소화 하는 길, 나아가 삶의 고유한 생명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장자가 추구했던 삶의 모습이었다. 이는 반대로 그가 담당했던 삶의 현실이 얼마나 고달픈 것이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칼날이 번뜩이는 인간들의 삶 속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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