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토끼 #1 –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

1.

‘철학’이란 무엇인가? 가장 건조한 대답은 ‘philosophy,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그러나 이때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적당히 답할 말이 없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철학’이란 똑똑해지는 학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보인다. 그러나 ‘철학’보다 ‘철학하기’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철학이란 곧 ‘철학하기’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철학하기’란 무엇인가? 그의 말을 요약하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감히 정의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기보다는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동물이라고. 따라서 상식이란 ‘생각-철학하기’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답을 따라, 생각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철학의 역사란 곧, 사유의 영토를 확장하고 개척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철학자란 한 시대의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사유의 영토를 연 인물이다. 따라서 철학하기란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모험과도 같다. 낯선 세계로의 여행. 그러나 이 여행은 쉽게 시작할 수 없다. 기존의 삶이 가진 중력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 이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기 원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절실하고도 집요한 물음이다.

15쪽: 따라서 사유란 답을 써내는 능력이라기보다는 묻는 능력, 의문에 부치는 능력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으로 답을 구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문제를 던질 수 없다면 사유는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유할 수 없는 것과 대면하여 기존의 개념으로 쉽게 타협적인 대답을 내는 것보다는, 그것을 사유할 수 없는 것으로, 물음으로 남겨 둔 채 미련스레 낯선 땅을 탐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저자는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근대 철학의 여정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를 나열하면 이렇다. 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 / 베이컨 – 로크 – 버클리 – 흄 / 칸트 – 헤겔 – 포이어바흐 – 마르크스 / 후설 -프로이트 – 니체. 사실 이렇게 많은 인물을 한 권의 책에서 세세하게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각 철학자가 가진 고유한 질문, 그들이 개척한 철학의 영토를 둘러본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 여러 철학자의 말을 따라 광활한 근대 철학의 영토를 둘러보고 어렴풋이라도 방향을 잡아보라고 권한다. 마치 아주 낯선 곳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무거운 철학자의 이름이 한결 가벼워진다. 철학자가 세운 폐쇄된 극장에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 그를 따라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이니. 물론 스스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6-7쪽: 철학사란 이런 여행의 앞선 경험자들이 만들어 놓은 지도다. 빠른 속도로 철학의 영토를 둘러보며 지형을 익히고 가야 할 곳의 방향을 어림잡으며 동행할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 그것이 대개는 철학의 문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일 듯하다. 이를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가는 ‘히치하이킹’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이 책은 ‘철학의 영토를 여행하려는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안내서’다. 손쉽게 요약정리해 주는 ‘가이드’가 아니라, 자신의 발로 철학으르 여행하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촉발해 주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썼다.

이 책의 미덕은 각 장이 저마다 다른 스타일로 쓰였다는 점이다. 1장은 영화 <블레이드러너>의 로이를, 2장은 이솝을 화자로 삼았다. 그러나 숨은 주인공은 카프카와 조사 조주이다. 3장에서는 로봇 제작자 로숨이 주인공인데, 이는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루쉰의 글이 실려 있기도 하다. 4장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고쳐 썼다.

3.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2장이었다. ‘절대적 우화’라는 주제를 카프카의 글과 조사의 선어록을 빌려 소개한다.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날카로운 질문의 흔적을 남기는 말, 명징한 철학의 말 대신 흐릿한 질문을 던지는 말. 과연 우화는 철학하기의 도구일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최근 저자가 선사禪師들에 관해 글을 쓰고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지. 철학하기를 위해 절실한 의심, 물음, 질문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는 아마 화두話頭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280쪽: 절대적 우화란 그런 분해와 분석의 칼날이 통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응 그 자체로만 남는 우화다. 절대적 우화, 그것은 이해 불가능한 우화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우화. 그래서 이해되지 않지만 들은 사람의 몸에 달라붙여 떨어지지 않는 우화다.

함께 읽은 ‘청년학당’의 친구들은 마르크스의 실천에 크게 감동했다. 인식보다는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여전히 어떤 울림을 전해 준다. 비록 그 태도가 이른바 ‘철학과’에서 그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내가 철학 전공자이면서도 철학이라는 말을 꺼린 것도 이 때문이다. ‘주체와 대상과 인식’이라는 근대 철학 고유의 문제에 영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흔한 말로, 많이 알면 뭐하나? 암 것도 못하는데.

397쪽: 철학의 본바탕이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이라면, 철학도 이런 실천 의지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철학에 요구합니다. 모든 개념에 대해 언제나 묻고 다시 사고하라고, 어떤 권위 있는 이론이나 주장도 상황과 맥락 속에서 다시 사고하고 검토하라고. 그리고 그 물음과 의심에서 결코 실천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이런 점에서 실천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물음이요 의심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런 철학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

4.

철학은 무표정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별 감정이 깃들지 못한다. 아니, 감정이란 일찍부터 내쫓아 버렸다. 철학은 창백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핏기없는 얼굴, 대체 살아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쇠약한 얼굴이다. 어떤 철학은 시체를 마주한 느낌이 든다. 때문에 소위 철학책이라 불리는 것을 읽노라면 해부과정에 참여하는 듯하다. 심장이 멎은, 아무런 맥박도 온기도 없는 신체를 잘게 쪼개고 분석하는.

호기심이 많다면 그 과정이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호기심이 별로 없다. 이것이 내가 철학과 별로 친하지 않게 된 이유(혹은 변명)이다. 그러나 그와 달리 ‘철학하기’란 적잖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철학여행’이라는 말도 뭔가 신나지 않는가. 본래 <철학의 모험>을 고쳐 쓴 책이라는데, 본래 제목도 좋다. 여행보다는 모험이야말로, 낯선 것과 대면하라는 권유야말로 이 책이 전하는 말 아닌가.

칭찬을 늘어 놓았으니 단점도 적으련다. 중간에 등장하는 저자의 드립(?!)은 양념이라기보다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효과를 주었다. 더욱 세련된 유머였으면. 한편 이 책에 숨은 철학자 이진경이라는 저자 본인이 만만치 않은 역할을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철학사를 다룬 책이지만 흔히 말하는 철학사와 다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일 테다. 마지막으로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패러디의 원류가 된 이야기를 간단히라도 소개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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