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 쪽지 : 당근 한쪽

2017년 청년학당 1학기를 마치면서 짧은 글을 썼습니다.

청년학당 학습발표회 :: 어쩌다 철학 (링크)

 

 


 

0.

핑계를 대면 나에게 달콤한 스승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내게 선생이 되었던 이들은 다들 눈가가 서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도 상담차 선생을 찾아가기에 앞서 조마조마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한편 고마운 마음도 적지 않습니다. 늘 솔직한 만남이었습니다. 박카스나 과일 같이 예의 차 챙겨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선생 노릇을 하면서 나도 그런 선생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혹독하게 느껴지는 비판은 다 그렇게 배운 탓입니다. 글을 읽고 비평하는 일에 대해 흔히 ‘까인다’는 말을 쓰는데 적절치 않습니다. 종이를 꾸기거나, 글을 찢은 적은 있어도 ‘깐’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쓰지 않는데 한동안 ‘무두질’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하지요. (무두질에 대한 친절한 설명 http://kr.battle.net/wow/ko/profession/skinning) 적지 않게 아팠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압니다. 그래서 당근 한쪽을 준비했습니다.

 

1.

이른바 인문학자가 밥벌이하는 방법은 크게 셋입니다. 하나는 연구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을 세밀하게 관찰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좋은 글을 쓰는 게 있습니다. 새로운 통찰을 주는 글을 써 세상을 일깨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편 강의도 있지요. 어떤 내용을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일입니다. 셋이라 했지만 사실은 하나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잘 살펴보면 셋 가운데 더 잘하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저에겐 좋은 연구와 멋진 글 따위는 없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른바 선생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제 밥벌이 가운데 대부분이 강의입니다. 그런데 좋은 연구와 멋진 글 없이 어떻게 훌륭한 강의가 있을 수 있을까요. 가끔 전 이런 것 따위를 고민하곤 합니다. 그런데 좋은 강의, 다르게 말해 ‘잘 가르치는 일’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대체 무엇이 잘 가르치는 일인지요.

그래서 소박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책을 읽을 것. 왜냐하면 들은 지식은 금방 사라지지만 읽은 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좋은 강의를 많이 들어봐서 아는데, 강의의 감동이 사흘을 넘기기 힘듭니다. 일주일이면 모든 것을 잊고 깨끗한 정신으로 다시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망각과 기억의 반복. 그러나 적어도 책을 읽으면 책이라도 남습니다. 그러니 함께 책을 읽을 것, 홀로 읽기 힘든 책으로.

이번 청년학당에서 읽은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도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간 읽은 고전들과는 좀 색깔이 다르기는 하지만 혼자 읽으면 그렇게 풍성하게 읽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흥미를 잃어버리기 쉬웠을 것입니다. 얼마나 이해했는가는 묻지 맙시다. 이 책을 다 읽어냈다는 데 큰 의미를 둡니다. 좋은 책은 높은 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산을 오르면서 평지에서는 보지 못했던 다른 풍경들도 보았을 테고,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과 성취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난 두 달간 모르는 사이에 두 다리에 힘도 붙었겠지요. 다른 책을 읽어보면 압니다. 예전보다는 수월할 겁니다.

그간 제 말을 곱씹어 보면 ‘건강’이 화두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이 삶을 건강케 하는가? 일상의 리듬, 작은 성취들, 적당한 운동 … 여기에 독서의 경험을 더하고 싶습니다. 독서는 힘을 길러 줍니다. 사유의 힘을! 독서 – 버거운 책을 읽어내는 경험은 삶을 튼튼하게 만듭니다. 물론 독이 되는 독서도 있습니다. 골방의 독서가 그러기 쉽지요.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읽은 시간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새 근육도 붇고 체력도 늘었을 것입니다. 믿으세요. (그러니 … 어서 다음 학기 신청을… 쿨렄)

 

2.

둘째, 글을 쓸 것. 물론 글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끔 쉽게 글을 써내는 사람들을 보는데, 글재주가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실상은 ‘쓰기’에 미치지 못했기에 그렇게 쉽게 쓸 수 있었던 것이지요. 글쓰기가 괴로운 이유는 좋은 글이란 늘 어떤 한계 지점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까지는 아니더라도 글쓰기라는 자체가 한계 지점으로 나아가는 과정 자체입니다. 그러니 버거운 것이 당연합니다. 글쓰기가 쉽고 재미있다는 건 거짓부렁이 아닐지.

이런저런 사연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배운 내용을 글쓰기로 마침표를 찍자면 반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어쩌다 보니 청소년과 장년층을 두루 만나는데, 이른바 글 좀 읽었다는 어른들이 더 글쓰기를 힘들어합니다. 차라리 10대 청소년들이 더 글을 잘 써요. ‘잘 쓴다’는 말은 기꺼이 쓴다는 말이기도 하고, 내용도 훌륭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글쓰기가 나의 의지에서 시작하지 않은 글쓰기라는 것을. 쓰라니까 쓰는데 잘 따져보면 써야 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스펙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디 성적이나 경력에 들어갈 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쓰니 그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솔직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글이 갖는 미덕 가운데는 소박함과 솔직함이 있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글. 그렇기에 그 글쓰기가 다른 무엇을 낳는 훌륭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감히 단언컨대 내용도 훌륭한 경우가 많습니다. 뻔한 글이 아닌 고유한 문제를 드러내는 글을 많이 만납니다. 많이 배웠다는, 식자들의 글에는 없는 참신함이 있습니다. 자기가 본 문제를 잘근잘근 씹어가는 글이 훌륭합니다. 개념과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글을 믿지 말기를. 얼굴 없는 글, 주인 없는 글보다는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 많습니다. ‘여기가 로두스다’라는 말처럼 여러분의 글에는 과감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눈에 띄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3.

말이 길어졌는데, 지난 2달 적지 않은 성장이 있었습니다. 좋은 책을 읽었고 이제는 글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오늘 웃으며 이야기한 몇 차례의 간증(!)처럼 실제로 저와 함께 공부하면 글 실력이 늘어납니다. 제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각자의 성장을 위해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잘 곱씹고 글을 마무리하기를. 지나치게 쓰다면 뱉어도 됩니다. 다만 함께 마침표를 잘 찍어봅시다. 마침표를 잘 찍어야 다음 이야기를 잘 시작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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