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이야기 #1 – <논어>, 그 뻔한 책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서당에서 한결같이 <논어>를 공부한다는 점입니다.

10년을 운운하는 이유는 토요서당이 벌써 10년을 넘었기 때문에 그래요. 옛 수유너머가 원남동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사정에 따라 장소가 바뀌기는 했지만 ‘토요서당’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모이고 있어요. 10년이나 되었으니 토요서당을 거친 친구들도 많이 나이를 먹었답니다. 초등학교 때 만난 친구가 훌쩍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되어있기도 해요. 형제를 만나는 일도 있고…

이런 많은 변화 속에서도 <논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논어>가 가장 풍성한 고전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마법천자문>이라는 책이 유행하는 바람에 다시 <천자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 같아요. 하긴 옛날 한문 공부라고 하면 누구나 <천자문>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하늘 천 따지’ 하면 누구나 그 뒤를 이어 ‘검을 현 누르 황’하고 외칠 정도지요. 어찌나 널리 알려졌는지 한자를 잘 알지 못하는 예닐곱 살 친구들도 <천자문> 앞 부분은 알더라구요. 그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음을 붙여서.

이렇게 유명한 책이지만 그 뒤를 혹시 아시는지요? <천자문>은 천 글자로 된 책인데, 아마 1%를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 거예요. 명성에도 불구하고 채 열 글자를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 이유는 <천자문>이 어려운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글자로 만든 책인데 철학적 내용부터 신화적, 역사적 내용까지 담으려 하다 보니 내용이 너무 많아졌어요. 게다가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글자들도 많답니다. 한문을 일상에서 익혔던 조선 문인들도 그 어려움을 잘 알았나 봐요. 정약용의 경우에는 새로 다른 <천자문>을 제안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자’가 앞선다는 점이 큰 단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른바 한문 세대, 학교 과목 가운데 한문이 있었던 세대 중에는 한자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암기과목’이었던 바람에 외우기는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글자로 보면 한자가 쉽지 않습니다. 쓰기도 복잡하고 글자마다 음과 뜻을 따로 익혀야 하니 어려운 게 당연하지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게다가 재미도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글자는 글을 위해 필요한 거랍니다. 누군가는 글자를 모르고 어떻게 글을 읽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사실 누구도 글보다 글자를 먼저 익힌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자를 익혀 글을 읽는 것보다, 글을 통해 글자를 익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이런 면에서 생각하면 <천자문>은 물론 ‘文-글’이기는 하지만 ‘字-글자’의 모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공부할 때에도 마치 단어장을 익히듯 그렇게 익히곤 하지요.

따라서 옛날 초학자를 위한 교재로 알려진 <천자문> 대신 <논어>를 읽는 것은 ‘글’을 읽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짧은 대화로 구성되어 있어서 짧은 호흡으로 한문을 공부하기 참 좋은 책입니다. 예를 들어 <맹자>의 경우에는 한 주제의 대화가 무척이나 길어요. 어른들도 <맹자>를 강독할 때면 한 대화가 몇 시간 동안 이어지기도 한답니다. 지금 토요서당식으로 공부하면 어떤 대화는 몇 달이 걸릴지 몰라요.

<논어>를 좋아하는 선호하는 다른 이유로는 윤리적인 내용이 덜한 점도 있습니다. <사자소학>이라는 책이 있어요. <천자문>처럼 네 글자로 끊어진 이 책은, 어린 학생들이 지켜야 하는 다양한 행동 지침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내용이 많아요. 부모님께 인사를 잘해라, 나가고 들어올 때는 꼭 말씀을 드려라, 밥 먹을 때엔 말하지 말라 등등.

그래서 이른바 예절 교육 차원에서 <사자소학>을 읽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데 저는 고개를 갸우뚱하곤 합니다. ‘예의범절’이라는 것은 시대마다 바뀌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이미 기성세대도 <사자소학>의 예의를 몸에 익히지 않고 있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면 그건 공염불일 겁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일이에요.

<논어>를 읽어보면 그렇게 규범적인 내용이 많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라는 명령이 별로 없어요. 당위와 명령으로 가득 찬 <사자소학>을 읽다 <논어>를 읽으면 뭔가 느슨한 맛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전 <논어>의 참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뭘 하라는 이야기 대신, 공자라는 인물과 함께한 제자들의 소박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예요.

얼마 전 한 친구가 <논어>를 읽다 웃었다며 저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내용인즉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하는 말이에요. 보내준 번역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사는 똑똑한가보구나? 나는 (내 공부도 벅차서) 그럴 겨를이 없다.” ‘단목사’라는 이름의 제자, 자공에게 공자가 한 말이예요. 자공이 사람들과 저 자신을 비교하며 다니는 모습을 보고 공자가 한 말입니다. 그 모습이 얄밉게 보였나 봐요.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논어>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잘 읽으면 때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합니다.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한 사건들이 많거든요. 언제든 우리 주변에 일어날 것 같은 일. 그러고 보면 <논어>라는 책이 그리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뻔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니까요. 엄청난 진리나 고귀한 말이 담겨 있을 거로 생각하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뻔하다는 것이 시시하다는 것은 아닐 거예요. 우리에게 익숙한 새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이지, 그게 별것 아닌 이야기라는 건 아닙니다. 도리어 뻔한 가르침이야말로 삶에 큰 도움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누구나 경험하는, 경험할 일상적인 가르침이 <논어>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토요서당에서 10년 동안 읽을 수 있었어요. 앞으로 10년도 읽을 수 있을 테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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