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히스토리쿠스 강좌 후기

  • 연구실에서 오항녕 선생의 ‘호모 히스토리쿠스’ 강의를 들었다. 6주간의 강의인데, 반장으로 여러 일을 하기는 했지만 과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후기나 짧게 남기는 것으로 대체.

 

0.
사실 돌아보면 학창시절 재미를 느낀 과목 가운데 하나가 역사였습니다. 중학교 역사 선생님이 아직도 기억에 나는데, 칠판에 연표를 그려가며 장대한 역사를 술술 풀어내곤 하셨지요. 중간중간 크게 웃을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곁들여 주셨습니다. 한편 저 역시 청소년기에 역사책을 읽으며 두 손을 불끈 쥐곤 했답니다. 이 고난 많은 민족사를 보며 홀로 눈물을 훔치곤 했지요.

그러나 철들고 나서는 역사를 그렇게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재미있는 이야기 + 감동적인 민족 정기’ 정도가 제가 생각한 ‘역사’가 아니었나 합니다. 다른 재미있는 게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감동을 일부러 꺼려한 까닭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이른바 ‘역사’를 제목에 단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좀 읽다 내버린 기억이 납니다. 다 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다만 무엇인가 불편함이 남았던 게 분명합니다.

1.
오항녕 선생님의 강의는 이전에도 몇 차례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역사’를 다룬 강의는 처음이 아니었나 싶네요. 역시나 어린 시절 생각했던 ‘재미있고 감동스런 역사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재미와 감동’이라면 요즘 장안에 화제인 설민석이 더 적합한 인물이겠지요. 요즘처럼 자극적인 세상에서 ‘재미와 감동’에는 억지와 과장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전 몇 주간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 게 없는 담담함이 좋았습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진지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역사가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는 선생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역사만큼 너도나도 한 소리 할 수 있는 분야는 별로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사가라는 이름이 너무 가벼워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사를 너무 쉽게 소비하기 때문이 아닐지요. 인터넷에서 만날 수 있는 소위 ‘덕후’들 가운데 ‘역사덕후’, ‘역덕’이 많은 것은 그 반증이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저마다 역사에 대해서는 얼마나 잘 떠드는지요.

그러나 거기에 ‘역사’ 자체에 대한 고민, 자신도 ‘역사적 삶’ 위에 있다는 성찰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역사란 국사, 더 좁게는 ‘국사책’에서 다루는 것이라는 편협한 사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역사공부가 내 삶을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구나’라는 말은 아무런 울림없는 허망한 소리이겠지요.

저는 강의를 들으며 선생님의 역사 – 간단한 일기를 엿보는 게 참 좋았습니다. ‘역사가’가 단순히 역사 사실을 잘 아는 전문가를 넘어 ‘역사적 삶’을 살아가는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일기-기록이 삶을 건강한 삶을 위한 좋은 도구라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몇년 전 사두었던 10년 일기장을 꺼내어 다시 몇자를 적었답니다. 10년 동안 매년 똑같은 날을 한 장에 기록해두는 일기장인데, 아주 드문드문 적어둔 옛 이야기를 들춰보는 기회가 되었어요. 앞으로도 꾸준히 적어보려구요.

2.

‘2017년 vs 정유년’의 주제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역사의 진보에 대해 어렴풋이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이를 더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같은 이른바 ‘수난사’에 질린 이유도 그걸 거예요. 거기에는 늘 어떤 열등감이 서려있거든요. 강의 시간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서양 선교사들의 그 시선을 내면화하여 과거를 보는 것이지요. 근대에 도달하지 못했던 까닭, 그 좌절의 이야기를 ‘역사’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매우 익숙합니다.

근대 혹은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조바심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식의 이야기는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거 같아요. 이덕일 류의 다양한 음모론을 비롯하여, 강의 시간에 나온 실학 논쟁은 물론이고, 정치적 이슈가 된 건국절 논쟁 등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지요. 근대를 실패한 서사로서의 역사를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또 다른 진보, 다른식의 발전론을 이야기하겠지만 저는 60갑자로 돌아가는 옛 사람들의 사고가 더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변화 없는 순환이라며 손가락질 하겠지만, 저는 그것이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리듬’일 거라는 선생님의 글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게다가 이 ‘리듬’은 ‘진보’라는 거대 담론이 폐기되고 실제 삶에서도 의미를 잃고 반대로 몰락과 파국, 리셋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더 필요한 주제가 아닌가 싶어요. 발전이 아닌, 리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떨까 궁금했는데 잘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시간의 도구를 바꾸면서 새로 감을 살려야 하는게 아닐까요. 제 기억이 맞으면 선생님의 일기에는 년도 대신 60갑자가 쓰인 것 같던데,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지 짐작해 봅니다.

3.

‘구조, 의지, 우연’ 이것이 단지 과거의 사실을 이해하는 기준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을 이해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문득 제 개인이 겪은 사건들을 나누어 보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습니다. 각잡고 책상머리에 앉아 끙끙대며 고민하지는 않았지만 길을 오가며 한번 생각해 보았어요.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는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구조와 우연이.

둘 모두 자신의 손을 떠나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겠지요.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조는 다양한 틀로 설명 가능하다면 우연은 그 반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시대에 우연으로 여겨지던 것이 누군가의 연구, 분석을 통해 ‘구조’로 발견될 수도 있겠지요. 프로이트 이전의 다양한 정신증이 그랬을 거예요.

저는 요즘 언어의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실의 변화에 말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실의 기묘한 사건들을 풀어낼 말들이 별로 없어요. (한편으로는 반대로 지나치게 말들이 앞서 간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래서 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구조보다는 우연에 관심이 더 많이 갑니다. 마치 우연처럼 보이는 게 많아서.

다만 우연과 구조를 헷갈리면 안 된다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다가는 상대주의자 혹은 운명론자가 되겠어요. 구조와 우연 그리고 의지의 문제는 강의가 끝난 뒤에도 화두삼아 곰곰이 따져보렵니다. 문득 이게,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아닐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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