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 곽상이 말하는 ‘나(我)’

무릇 나의 삶은 내가 낳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한평생 백 년을 살며 앉으나 서나, 나아가나 멈추나, 움직이나 가만히 있거나, 얻거나 잃거나 하는 일이며, 본성과 감정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일들, 있다고 하는 것이나 없다고 하는 것, 직접 한 일이나 우연히 벌어진 일 모두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이치가 저절로 그럴 뿐이다. 그러니 멋대로 살고 여러 걱정하는 하는 것은 곧 또한 자연을 거스르며 잃어버리는 일이다.

夫我之生也,非我之所生也,則一生之內,百年之中,其坐起行止,動靜趣舍,性情知能,與凡所有者,凡所無者,凡所為者,凡所遇者,皆非我也。理自爾耳,而橫生休戚乎其中,斯又逆自然而失者也。

<장자:곽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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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장자>를 강독하고 있는데, 곽상주를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막히는 구석이 많기도 하나 그의 주석까지 읽는 것은 곽상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흔히 위진시대의 손꼽히는 사상가/철학자로 곽상과 왕필을 꼽는데, 왕필과 비교하면 곽상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이 접해보지 못했다. 곽상주를 번역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벌써 10년 전 들은 이야기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곽상의 주석을 읽으며 무릎을 치게 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장자적 자연自然’이라는 게 곽상에게서 보인다는 점이다. 섣부르게 결론을 내려보면 아마 후대에 ‘도가적 자연’ 나아가 ‘동양적 자연’의 모습에 최초의 입안자가 아닐지. 첨언하면 왕필의 <노자주>에서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읽은 기억이 없고 (오직 무! 무! 무!) <장자>나 <노자> 본문에서도 자연自然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는 않다. 곽상의 ‘자연’이 <노자> 및 <장자> 해석에 영향을 주고 오늘날까지 그토록 찬양받는 ‘자연’의 이미지를 그려내지 않았을지.

더불어 ‘리理’를 가지고 논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곽상에게 세계란 ‘당연當然’한 체계로 이루어진 ‘자연自然’이며 이는 ‘리理’의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임任, 맡겨둠’일 뿐이다. (아마도 이 가운데 일부는 송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게 분명하다.)

위의 인용문은 <덕충부>의 신도가 이야기에 달린 주석이다. <덕충부>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안명론安命論, 즉 장자식 운명론을 바탕으로 곽상은 나(我)를 해체한다. 개인적으로 이 표현, ‘비아非我: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 재미있는데 이 말은 제물론의 오상아吾喪我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담벼락에 길게 남길 말도 아니고, 나도 바빠 ;; 짧게 내 소견을 이야기하면, 장자는 <제물론>에서 인식의 한계를 들어 ‘나’를 해체하는 반면 곽상은 나, 곧 나의 삶은(我之生) 능동적 조건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나를 부정하는 데에 이른다. 그리고 나를 부정하는 조건은 곧 ‘자연’이라 불러도 무방할 테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장자 본인은 도리어 이런 척박한 삶의 조건, 운명이라 불러야 할 자리에서 ‘나’를 새롭게 구성해낸다.

나를 상실한 내가, 이 텅 빈 내가 척박한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 장자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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