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공부하라 –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

1. 공부, 이 낡은 말에 대하여

‘나를 위해 공부하라’라는 제목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저 말이 좋아 강의를 듣겠다고 오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일부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리고 소수만이 ‘공부’에 관심이 있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는 오늘 ‘공부’에 그다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도리어 기존에 이야기하는 ‘공부’에 의문을 던지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실 제목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합니다. 이 말은 본디 <논어>라는 책에서 따온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말을 옮긴 것입니다. 저 먼 옛날 공자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 훌륭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공부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하는 구나.’(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오늘날도 그렇지만 ‘요즘 사람’이라는 말에는 비판의 어조가 담겨 있습니다. 공자가 생각하기에 당시의 사람은 공부의 참된 의미를 잊은 채 헛수고만 하고 있었습니다. 훗날, 이 문장에 주석을 단 사람은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남을 위해 공부하다가는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는 데 이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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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청소년이 자기를 돌아볼 겨를 없이 ‘공부’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날 텅빈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요. 정작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자기’라는 말에 담을 만한 주장이나 생각, 의견을 하나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자의 문제 의식을 옮기면, 아마도 이는 남 – 부모나 학교, 교사를 위해 ‘공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 평가 따위를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내용을 담아 <나를 위해 공부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엮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내어놓은 지 몇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여러 일이 있었고, 당연히 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도 조금은 달라졌습니다. 그 가운데는 ‘공부’라는 말을 쓰기 좀 꺼려졌다는 게 있습니다. 아마 지금 글을 쓴다면 ‘공부’라는 단어를 빼놓으려 애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를 위해 공부하라’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 말이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결국 이 말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본디 한자 단어로, ‘工夫’라고 씁니다. 이와 거의 비슷한 글자로 ‘功夫’라는 게 있습니다. 둘 모두 중국어로 읽으면 ‘gongfu, 꽁푸’가 됩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알아차렸을텐데, 이 단어는 ‘쿵푸’와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공부와 쿵푸, 전혀 다른 말 같은데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니 신기하지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합니다. 이 두 단어에 따라 붙는 장소나 대상 따위를 지워버리면, 시간을 들여 무엇인가를 오래도록 익힌다는 의미가 남습니다.

그래서 사전에서 ‘공부’를 찾아보면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네이버)이라 설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넓은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과연 어떤 기술에 ‘공부’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요? 저는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굳이 예를 찾자면, ‘바둑 공부’ 따위를 생각할 수 있을테지만, 그래도 역시 ‘공부’라는 말 앞에는 ‘수학’, ‘국어’, ‘영어’ 따위가 오는 게 더 익숙합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공부’라는 말을 이렇게 협소하게 쓰고 있습니다.

'쿵푸 팬더'가 아니라 '공부 팬더'였다면 어땠을까?

‘쿵푸 팬더’가 아니라 ‘공부 팬더’였다면 어땠을까?

말-단어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어떤 말은 시대의 조건에 따라 낡아 사라지기도 하고, 또 새로운 조건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기도 합니다. 제목에서 ‘공부’를 ‘낡은 말’이라고 한 것은 이 말이 이제 사라져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는 공부에서 ‘수학’이나 ‘영어’ 따위를 떼어 놓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부’라는 말에서 ‘시험 공부’가 떠오르나요? ‘나를 위해 공부하라’라는 말이, ‘부모, 선생의 눈치를 보지 말고, 나의 꿈을 위해 좋은 성적을 얻으라’는 말로 들린다면 이제 ‘공부’라는 말을 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2. 학學 습習 – 어린 새의 날개짓

어떤 단어를 버리자는 것은 좀 다르게 생각하려는 노력입니다. ‘공부’라는 말에 달라붙는 익숙한 생각들 대신 다른 것을 생각해보자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이와 비슷한 다른 단어를 가져와야 합니다. 이제 저는 ‘공부’대신 ‘학습’이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공부’라는 말에 담긴 부정적 의미를 버리자고 하면서 만만치 않은 단어를 들고 왔기 때문이지요. 하긴, 제가 ‘학습’이라는 말을 꺼내 놓으면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학습지’나 ‘학원’ 따위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보면 다른 말이 떠오릅니다. 바로 ‘학이시습學而時習’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논어> 맨 처음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자의 말인데 이렇습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풀이하면 ‘늘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않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앞에서 ‘공부’를 ‘배우고 익힘’이라 했지요? 이런 풀이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문장 때문입니다. 이를 간단히 줄인 말이 바로 ‘학습’입니다.

‘공부’ 혹은 ‘학습’은 위에 소개한 <논어>의 첫 문장에서 태어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좀 위상이 달라졌지만 <논어>는 배우는 모든 사람이 처음 읽어야 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문장이 바로 이것이었지요. ‘배움이란 기쁜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떠오를지 궁금합니다. 적어도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코웃음을 치거나, 아니면 아무런 느낌도 없는 죽은 말로 들리겠지요.

저는 그런 반응을 십분 이해합니다. 제 스스로 공부를 업으로 삼는 사람, 연구자라 생각하면서도 이 문장을 보면 가슴이 뜨끔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공부보다 재미있는 게 어찌나 많은지요. 게다가 공부는 기쁨보다는 고통을 주는 일이 많기 때문이지요. 기쁨을 주는 일로 저는 축구를 꼽습니다. 그냥 넋놓고 축구를 보고 있으면 어찌나 좋은지요. 가끔 맥주를 곁들이면 더 좋습니다. 한편 여러분처럼 저도 게임을 좋아합니다. 저도 시간을 잊고 게임에 빠져 본 경험이 있답니다.

축구보고 맥주를 마시니 기쁘지 않은가? 만랩 찍고 부케 키우니 기쁘지 않은가? 이런 말이라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겠습니다. 그러나…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않은가?  기쁘지 않은데에!!? 제 안의 어떤 목소리가 대뜸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공자의 저 말은 거짓일까요? 아니,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성급한 대꾸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공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무언가 있으니까.

졸면서도 게임을 한 적이 있… ;;

공자의 말로 돌아와, ‘학습 – 배움과 익힘’을 좀 깊이있게 분석해봅시다. 먼저 ‘배움’이란 무엇일까요? 주희는 이를 ‘效 – 본받음’으로 풀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 배움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최초의 배움은 ‘따라하기’에서 시작합니다.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는 것. 그것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을 보고 따라하면서 시작합니다. 한편 주희는 ‘익힘’이란 ‘어린 새가 날개짓을 배우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보면 이 ‘습習’이라는 글자에는 날개를 의미하는 글자, ‘羽’가 들어있기도 합니다. 수없이 날개 짓을 해서 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학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요일 아침이면 가족과 ‘동물농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합니다. 매주 다양한 동물이 주인공이 되어 색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루는 아파트에 알을 낳은 수리부엉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본디 절벽 같은 곳에 알을 낳는 수리 부엉이가 아파트 옥상에 알을 낳아 기르는 것이 알려져 방송에 소개된 것이지요. 귀한 동물이라 주변 사람들도 내쫓지 않고 잘 지켜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수리 부엉이 새끼가 사라졌습니다. 알고보니 이소離巢, 둥지를 옮길 때가 되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이지요.

다행히 날개에 깃이 돋아난 새끼는 아직 날지는 못하지만 날개짓을 해서 땅으로 무사히 내려왔습니다. 그 다음엔? 날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요. 두 발로 뒤뚱 거리며 걸어 갈 수밖에. 자연에서도 둥지를 옮길 때, 새끼는 어미의 울음 소리를 따라 땅을 걸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나 그 모습이 낯설던지요. 새가 두 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전혀 상상도 못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 새끼도 분명 두 다리로 걷는 대신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둥지를 떠나 홀로 걸은 것처럼 저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날이 있겠지요.

그러고 보면 새란 참 신기한 동물입니다. 알이라는 신비한 물체에서 태어나, 하루 종일 둥지 속에서 지냅니다. 좁디 좁은 둥지 속에서 빽빽 거리며 목을 빼고 먹이를 받아 먹을 뿐이지요. 그런데 어느날 이 새는 둥지를 떠나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존재가 됩니다. 자기 몸을 둘러싼 알을 깨고, 안락한 둥지를 버리고 드넓은 창공을 무대 삼아 자유롭게 날기까지, 이 새에게는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까요.

공자가 말한 ‘기쁨’이란 바로 여기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둥지에서 벗어난 새는 이제 전혀 다른 시선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찔한 경험. 바로 이것을 ‘기쁨’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둥지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짜릿한 그 느낌을 이 새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새는 아무리 드넓은 하늘이 위험하더라도 둥지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늘을 경험한 새는 결코 둥지로 돌아가지 않지요.

사실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기어다닐 수 있게 되고, 벽을 버팀목 삼아 서고, 나중에는 걷고 뛰게 되지요. 그러면서 점차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다른 높이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 경험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도 걷기를 포기하고 기어다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결코 다시 아기가 되고 싶어하지 않지요.

鵬! 드높은 하늘에서 보는 세상은 어떨까?

鵬! 드높은 하늘에서 보는 세상은 어떨까?

이렇게 ‘학습-배우고 익힘’이란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선물해줍니다.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지요. 더불어 이는 보는 것만 달라진 데 그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를 바꾸는 힘이 배움에는 있습니다. 둥지의 어린 새와 하늘을 나는 새는 결코 같은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다른 세계와 다른 나를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배움의 놀라운 힘입니다. 공자는 이를 ‘기쁨’이라 불렀습니다.

 

3. 나를 만나는 길

‘나를 위해 공부하라’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라는 말을 오독하곤 합니다. 자칫 이기적으로 공부하라는 말로 오해하곤 하지요. 그러나 공자가 ‘나를 위해 공부하라’고 했을 때, 그 ‘나’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사적인 개인’이 아닙니다. 사실 이 ‘개인’, ‘따로 떨어져 있는 독립적 주체’라는 말도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보통 ‘개인’이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대신 ‘누구의 누구’, 혹은 ‘어디의 누구’라는 생각으로 사람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이야기를 보면, ‘누구의 아들 누구’라든지 ‘어디 사람 누구’라고 자신을 소개하곤 하지요.

유머로 쓰이는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와 같은 말이 옛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알아야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지금 보면 꽤 낡은 생각이지만, 적어도 한 사람을 여러 그물망에 얽힌 풍부한 존재로 이해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개인이 중요하다지만 지금도 우리는 특정한 연결망 속에 존재하는 ‘무엇의 무엇’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계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 공부하라’는 말이 ‘나만을 위해 공부하라’라고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유 있는(?) 질문

이유 있는(?) 질문

그런데 저는 이 말에서 더 나아가 ‘나를 만나기 위해 공부하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란 앞에서 언급했듯,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과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과정과 경험이 있어야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나’라는 존재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데!!?

앞서 말과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본래 ‘나’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 몸의 일부이기도 했지요. 비록 탯줄이 끊어졌지만 아기는 여전히 한동안 어머니를 자기로 인지하고 있답니다. 그러다 점차 차이를 깨닫게 되지요. 자신의 감정과 어머니의 감정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지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하고 … 이런 과정 속에 ‘나’라는 것이 점차 형성됩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여전히 형성되어 가는 과정중에 있습니다. 비록 아이가 어머니와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면 여전히 ‘나’를 만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란 또 다른 성장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부모와의 갈등이란 이런 과정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란 성장 혹은 성숙의 다른 말입니다.

저는 오늘날 청소년들이 과연 이런 성장과 성숙의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대신 성공과 성적에 목을 매고 있지는 않은지요. 저는 ‘공부-학습’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자기 성장의 경험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진화의 선물(?)로 누구나 제법 자연스럽게 말하고 걷게 되었지만, 자기의 고유한 생각을 갖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식의 성장이 필요한 때가 되었는데, 이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로 홀로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배움이 필수적이지요.

 입시 경쟁은 자기 성장의 기회를 갉아 먹는다

입시 경쟁은 자기 성장의 기회를 갉아 먹는다

공자는 훗날 성인聖人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출신은 매우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의 출신이 보잘 것 없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공자를 신성시했던 과거에는 옛 고대 왕조의 핏줄을 이었다고 여겼지만 오늘날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공자의 출신에 얽힌 최초의 기록에는 공자의 부모가 ‘야합野合’,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만난 게 아니랍니다. 게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자가 태어났을 때 공자의 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고, 어머니는 고작 십대 후반이었다고 합니다. 무려 50살이 넘는 나이차!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상관 없다지만 이건 그렇게 받아들일 정도를 뛰어넘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조금 더 설명하면, 공자의 자字에 그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공자의 이름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중仲’은 둘째가 쓰는 글자입니다. 공자에게 형이 있었다는 뜻이지요. 공자의 형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안타깝게도 공자 형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상상한 이야기들이 있지요.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공자의 형이 불구였기 때문에 공자의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보고자 공자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 명의 연구자로서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첫째,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늙은 나이에 둘째를 낳을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공자가 그 집안의 맏이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셋째, 공자 아버지의 이름에 담긴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보통 공자의 아버지는 ‘숙량흘’이라고 하는데, 보통 이는 자와 이름을 붙여 부르는 호칭입니다. 성과 이름을 붙이면 공흘이 되는데 고대의 기록에는 ‘공흘’이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훗날 공자가 유명해진 뒤에 공자 고향의 유명한 인물을 공자의 아버지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튼 공자 스스로도 말했든 그는 별볼일 없는 출신이었습니다. 게다가 조금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서자였음에 틀림이 없구요. 그런 그가 어떻게 성인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논어>에서 공자는 자신의 삶을 간단히 압축하여 제자들에게 들려줍니다. ‘나는 열 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홀로 섰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의심이 사라졌고,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았고, 예순에는 귀가 순하여졌으며,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대로 행동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훗날 사람들은 각 나이 때를 가리키는 한자 단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서른은 ‘이립而立’, 마흔은 ‘불혹不惑’, 쉰은 ‘지천명知天命’, 예순은 ‘이순耳順’, 일흔은 ‘종심從心’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아니 거의 없지요.

한 만화가의 인터뷰가 제 눈을 끌었습니다. 그는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그렸는데, 이유인즉 사십대를 불혹이라 하는데, 그 말이 싫어서 그렇답니다. 의심이 사라지거나 유혹받지 않는다는 뜻인데, 마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유혹받기도 하고 그렇다면서요. 사실 말이 불혹이지, 마흔이 되어 불혹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워낙 많이 쓰인 탓에 이 단어가 열등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이가 서른인데, 아직 ‘이립’ – 홀로 독립하지도 못하고…’

그러나 저는 각 나이 때의 표현보다는 그 시작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공자라는 인물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인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우학志于學’, 즉 배움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배움이 끊임없이 자신을 또 다른 세계로 이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배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에 매진한 것이지요. 그래서 일까요?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연이라는 이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답니다. ‘선생님은 도무지 따라 잡을 수 없다. 늘 저 앞에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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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공자의 말, <논어>에서 배울 수 있는 귀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이 끊임없는 성장, 즉 배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나보다 앞서 규정된 어떤 틀에 갖혀 ‘나’를 규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틀이 곧 나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나보다 앞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서 나에게 덧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 틀을 부수고 나서는 것이 바로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새의 비유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모든 새는 알에서 태어납니다만, 우리는 그 누구도 알을 보고 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알은 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둥지에 갖혀 어미새를 기다리는 어린 새를 ‘새’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새의 모습은 갖추었지만 새의 능력을 아직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홀로 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때 비로소 ‘새’가 됩니다. 새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알)과 무수한 날개짓을 통해 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로 우뚝 서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알을 깨고 나와 둥지에 머무는 어린새일 수 있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가운데는 이미 깃털이 돋아난 튼튼한 날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새의 날개를 가졌든, 아니면 아직 솜털로 뒤덮인 연약한 날개를 가졌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누구나 날개짓을 하지 않으면 홀로 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배워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내가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남의 말이나 생각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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