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읽기에 대해…

나는 <장자>를 사랑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라는 식으로 <장자>를 독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존재를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좋아 보이나, 거꾸로 기울어진 세계에서 그것은 지독하게 무력한 순응일 뿐이다.

그렇다고 <장자>에서 어떤 ‘저항정신’ 따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도리어 그에게는 세상을 비뚤게 보고 싶어하는 기괴함이 넘치며, 한편으로는 구만리 창공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웅대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

자연속에 내버려둠, ‘자임自任’과 같은 표현은 곽상주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인데 주석을 꼼꼼하게 읽으면 그 한계가 자명하게 나타난다. 곽상이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란 현상태의 구조적 모순, 혹은 권력관계의 비대칭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것이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세심한 작동을 주저하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그 결과는 같지 않은 것을 같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군왕과 민초의 삶이 어찌 같단 말인가!? 만물제동이란 참 부질없는 말이다.

———-

리쩌허우 <중국고대사상사론>, 394쪽:

곽상 스스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가 전체적으로 장자를 다시 새롭게 해석한 목표는 바로 ‘내성외왕의 도를 밝히는 것’에 있다. 그리고 내성(이상적 인격)과 외왕(사회정치적 통치질서)을 통일하려는 것으로, 곽상은 정치상에서 군주가 있으면 비록 해로움이 있을지 모르나 군주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사회 질서에서 곽상은 ‘존비유별’을 인정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것이 군주이고 신하인지, 높은 사람이고 낮은 사람인지, 그리고 어느 것이 손이고 발인지, 안인지 바깥인지 아는데, 이것이 바로 천리자연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전통유가의 윤리규범이 바로 장자의 자연지도自然之道라는 것이다. 특히 이상적 인격에 대해 그가 해석한 <소요유>가 가장 전형적이다. 곽상은 장자가 말한 대붕과 작은 새의 우언에서는 매우 높고 멀리 날아가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지 않는다. 정반대로 장자가 말하는 대붕과 작은 새가 나는 것이 달라서 멀리 날 수도 있고 가까이 날 수도 있지만 똑같이 소요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우열을 나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작은 것과 큰 것은 비록 다르지만 스스로 얻는 상태에 이르면, 사물은 그 본성에 맡겨두고 하는 일을 그 능력에 맡게 하여 각각 주어진 바를 밭게하면 소요라는 것은 같은 것이다. 어찌 그 사이에 우월함과 열등함의 차이가 있음을 용납하겠는가?’

장자 철학이 본래 가지고 있던 ‘때를 따라서 세상에 대응하는’, ‘꼬리를 진흙 속에서 끌다’, ‘재목과 재목이 되지 못하는 것 사이에 처하다’는 것과 연결해 보면 이른바 이상적 인격이라는 것은 다만 세속에 복종하고 환경에 순응하는 것일 뿐이다.

메일 보내기

아무 내용이나 상관 없어요. 메일을 보내주세요.

보내는 중입니다..
또는

로그인하세요.

계정 내용을 잊으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