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집해論語集解 서문

漢中壘校尉劉向言 魯論語二十篇 皆孔子弟子記諸善言也 大子大傅夏侯勝 前將軍蕭望之 丞相韋賢及子玄成等傳之

한나라 중루교위中壘校尉 유항劉向은 이렇게 말했다. “<노나라 논어(魯論語)>는 20편으로 모두 공자 제자가 기록한 훌륭한 말이었다. 태자태전大子大傅 하후승夏侯勝, 전장군前將軍 소망지蕭望之, 승상丞相 위현韋賢과 그의 아들 현성玄成 등이 전하였다.

齊論語二十二篇 其二十篇中 章句頗多於魯論 琅邪王卿及膠東庸生 昌邑中尉王吉 皆以敎授

<제나라 논어(齊論語)>는 22편이었는데, 노나라 논어와 일치하는 20편도 내용이 훨씬 많았다. 낭야琅邪 사람 왕경王卿과 교동 사람 숙생庸生, 창읍중위昌邑中尉 왕길王吉은 모두 <제나라 논어>를 가르쳤다.”

故有魯論 有齊論

따라서 <노나라 논어>가 있었고, <제나라 논어>가 있었다.

魯共王時 嘗欲以孔子宅爲宮壞 得古文論語

魯共王노공왕 때에 공자의 집을 궁궐로 삼으려고 허물었다가 <옛 글로 된 논어(古文論語)>를 발견했다.

齊論有問王知道 多於魯論二篇 古論亦無此二篇 分堯曰下章子張問以爲一篇 有兩子張 凡二十一篇 篇次不與齊魯論同

<제나라 논어>에는 ‘문왕問王’과 ‘지도知道’가 있어서 <노나라 논어>보다 2편이 많았다. <옛 글로 된 논어>에는 이 두 편이 없었다. 대신 ‘요왈堯曰 편’의 ‘자장문子張問’ 이후를 나누어 따로 한 편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두 개의 ‘자장子張’ 편이 있어 모두 21편이었다. 편의 순서도 <제나라 논어>나 <노나라 논어>와 같지 않았다.

安昌侯張禹本受魯論 兼講齊說 善者從之 號曰張侯論 爲世所貴 包氏周氏章句出焉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는 본래 <노나라 논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제나라 논어>의 내용을 함께 익혔다. 그 가운데 훌륭한 부분을 뽑아 엮어 <장후의 논어(張侯論)>라 불렀으니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포씨包氏와 주씨周氏가 문장을 나누고 풀이를 붙였다. 1

古論唯博士孔安國爲之訓解 而世不傳 至順帝時 南郡大守馬融 亦爲之訓說

<옛 글로 된 논어>는 오직 박사博士 공안국孔安國이 풀이를 붙였으나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순제順帝 시기에 이르러 만군태수南郡大守 마융馬融이 또한 여기에 풀이를 붙였다.

漢末에 大司農鄭玄就魯論篇章 考之齊古 爲之註

한나라 말, 대사농大司農 정현鄭玄은 <노나라 논어> 구성을 따라 <제나라 논어>와 <옛 글로 된 논어>를 참고하여 주석을 붙였다.

近故 司空陳群 太常王肅 博士周生烈 皆爲義說疏

최근 사공司空 진군陳群, 태상太常 왕숙王肅, 박사博士 주생렬周生烈이 모두 <논어의설소論語義說疏>를 지었다.

前世傳授師說 雖有異同 不爲訓解 中間爲之訓解 至于今多矣 所見不同 互有得失

예전에는 스승의 뜻을 전하는데 비록 이견이 있다 하더라도 따로 풀이를 붙여 책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풀이를 붙여 책을 만들게 되어 지금에는 그 수가 많아졌다. 관점이 서로 다르지만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

今集諸家之善 記其姓名 有不安者 頗爲改易 名曰論語集解

지금 여러 학자들의 의견 가운데 훌륭한 점을 모아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잘못된 부분은 크게 고쳤다. 이 책의 이름을 <논어집해論語集解>라 지었다.

光祿大夫關內侯臣孫邕 光祿大夫臣鄭沖 散騎常侍中領軍安鄕亭侯臣曹羲 侍中臣荀顗 尙書駙馬都尉關內侯臣何晏等上

광록대부光祿大夫 관내후關內侯 손옹孫邕, 광록대부光祿大夫 정충鄭沖, 산기상시散騎常侍 중령군中領軍 안향정후安鄕亭侯 조희曹羲, 시중侍中 순의荀顗, 상서尙書 부마도위駙馬都尉關 내후內侯 하안何晏 등 신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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