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 불후의 문장, 불굴의 삶 2강_ 충신도 씻겨가는 세상이라

1. 서막: 삼년을 울지 않는 새

<사기열전>의 여러 편 가운데 <오자서열전>은 이야깃 거리가 풍부하다. 하나의 비극적인 이야기로도 꽤 훌륭한 작품이지만 그 인물과 얽힌 주변 인물과 사건까지 종합하면 거대서사를 이룬다. <오자서열전>은 오자서의 가계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시작한다.

伍子胥者 楚人也 名員 員父曰伍奢 員兄曰伍尚 其先曰伍舉 以直諫事楚莊王 有顯 故其後世有名於楚

초장왕은 춘추오패春秋五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패霸란 강력한 무력으로 제후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된 인물을 가리킨다. 이는 반대로 주周 왕실의 권력이 보잘것 없는 것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대 중국 역사를 보면, 주나라의 통치시기를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로 나누는데,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주나라 유왕幽王1에 얽힌 고사이다.

褒姒不好笑 幽王欲其笑萬方 故不笑 幽王為烽燧大鼓 有寇至則舉烽火 諸侯悉至 至而無寇 褒姒乃大笑 幽王說之 為數舉烽火 其後不信 諸侯益亦不至

후대의 기록에는 포사를 웃게 만드려고 애쓴 유왕의 다양한 고초가 전해진다. 이 웃지 않는 포사는 비단을 찢는 소리에 희미하게 웃곤했단다. 그 웃음을 보려고 유왕은 갖가지 방법을 쓰다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는 말씀. 미인의 웃음을 보기 위해 수시로 봉화를 올리던 유왕은 결국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죽고만다.

고대에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경국지색傾國之色, 여인으로 나라의 국운이 좌우된다는 이야기는 고대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은나라도 달기妲己의 말에 나라일을 팽개친 주왕紂王 시대에 멸망했지 않나. 그러나 주周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로 대치되지 않고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는 것으로 그친다. 흔히 이렇게 주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한 이후를 ‘춘추시대’라 부른다.

다시 말해, 춘추시대란 주왕실을 중심으로한 봉건체제가 와해된 시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가운데는 주나라의 봉건제가 과연 얼마나 실효성있는 체제였는지 의문을 가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연 공자가 그토록 칭송했던 것처럼 안정된 체제였을까?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나라의 봉건 시스템이 실제건 상징이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이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세번째 패자, 초장왕에 얽힌 이야기이다. 초장왕은 군주의 자리에 올라 삼년간 아무일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향락을 일삼았다. 그러면서 그가 공표한 것이 이것이다. ‘有敢諫者死無赦’ 감히 간언하는자는 용서하지 않고 죽이겠다! 이때 왕의 명령을 어기고 초장왕을 찾아갔던 이가 오거伍舉, 즉 이야기의 주인공 오자서의 할아버지였다. 이 둘은 수수깨끼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伍舉入諫 莊王左抱鄭姬 右抱越女 坐鐘鼓之閒 伍舉曰 願有進隱 曰 有鳥在於阜 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 莊王曰 三年不蜚 蜚將沖天 三年不鳴 鳴將驚人 舉退矣 吾知之矣

삼년간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는 새, 그 새가 날지 않았던 이유는 날아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일테다. 거꾸로 삼년이나 울지도 날지도 않았다면 그 새가 날아오를 때엔 그 새의 비상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초장왕이 자리에서 떨쳐 일어났을 때 수백명의 목을 베었고 수백명을 새로 발탁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고 한다. 수수깨끼 같은 말로 왕의 뜻을 물었던 오거가 높은 자리에 임명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참고로 이 삼년을 울지 않는 새의 고사는 위에 인용한 <초세가> 이외에 다른 부분에도 기록되어있다. <골계열전>에 실려 있는데 이번에는 주인공이 다르다. 순우곤과 제위왕이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당대에 적지 않게 전승되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이런 이야기를 수집하여 기록한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뜻,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구세력을 일소에 제거한 초장왕은 나라를 정비한 뒤 정벌에 나서 송나라를 치고 주나라에까지 이른다. <초세가>에는 초장왕과 주정왕周定王과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가 강력했다고 하나 이들의 대화를 보면 초나라도 주나라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본디 초나라는 양쯔강 주변에서 발흥한 나라로, 중원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사마천도 이들이 스스로 만이蠻夷, 오랑캐라고 일컬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我蠻夷也 不與中國之號謚’ 그래서 이들은 처음부터 왕王이라는 칭호를 썼다. 초장왕 이전의 패자, 제환공과 진문공晉文公은 모두 주周의 제후로 ‘공公’을 사용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다르게말하면 초나라의 부상은 본디 오랑캐의 나라로 여겨졌던 것이 중원의 나라로 편입되어 기술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본디 다른 문화, 문명의 영역이 주周를 중심으로한 천하天下의 한 모퉁이로 새롭게 해석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천의 <사기>야말로 ‘중국적 세계’의 밑그림을 그린 최초의 텍스트라고 할수있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중국2’이란 이처럼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순차적으로 팽장하였던 공간이었다. 하나의 단일한 공간이 아닌 다양한 것들이 유입되고 성장-팽장 하는 공간. 춘추전국 시대에 이미 초나라 지역은 중원의 세계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것은 한漢나라의 개국 공신들 가운데 대부분이 초나라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자.

춘추오패란 주왕실을 중심으로한 권력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이를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이 일시적으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문명세게 바깥에 있던 세력들까지 새롭게 중원에 편입하여 중원의 세계를 두고 다투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서술하며 중국 역사에 유래없는 자유로운 사상의 시대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다양한 힘들이 교차하고 뒤섞이는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2. 제1막: 사건의 시작

<오자서 열전>으로 돌아와, 당시 초나라의 임금은 평왕으로 그는 시작부터 당대의 임금 영왕을 죽이고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이러한 일은 초나라 조정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초장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공왕共王과 손자 강왕康王이 차례로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이 장왕의 손자들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강왕은 왕위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걸렸는데, 그의 동생 위圍가 이 소식을 듣고는 갓끈으로 형을 죽이고 그의 아들, 자신의 조카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영왕靈王. 그는 요역을 일삼아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의 동생 비比가 태자, 영왕의 아들을 죽이고 잠깐 왕위에 오르나 곧 실각하고 만다. 결국 막내였던 공자 기질棄疾이 형들을 모두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평왕平王이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태자의 스승이었는데 당시 초나라 군주였던 평왕平王이 간신 비무기에 휘둘리는 바람에 목숨을 잃게 된다. 평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본래 태자의 아내로 삼으로 했던 진秦나라 여인의 미모였다. 그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태자의 아내로 삼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이 일로 평왕은 태자 건建과의 사이가 틀어진다. 이후 평왕은 태자를 폐하고 이 진나라 여인의 아들을 새로 태자로 세운다.

형제들 간에 왕위를 두고 다투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군주가 아들과 군왕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일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 경우 선왕의 견제를 받는 첫째 아들이 화를 입는 경우가 태반이다. 평왕은 실제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한다. 여기에는 태자의 세력 전체를 일소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태자 곁에서 그를 따랐던 오사가 그 척결대상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자는 달아났으나 오사는 붙잡혔다. 후환을 두려워한 비무기는 이참에 그의 두 아들도 함께 죽이자고한다. 오사에게 두 아들을 불러들이라고 하자 오사는 이렇게 말한다.

尚為人仁 呼必來 員為人剛戾忍訽 能成大事 彼見來之并禽 其勢必不來

상황을 보면 두 아들이 오는 것은 죽음을 자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형 오상은 아버지를 위해 평왕에게 가고 그의 동생 오운,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하며 도망친다. 여기서 흥미롭게 읽어야 할 것은 형 오상의 사람됨에 대한 평가이다. 오사는 오상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인하니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대체 인仁이라는 덕목과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

<초세가>에도 이 장면이 똑같이 보이는데 오사의 말이 더 자세하다.

尚之為人 廉死節慈孝而仁 聞召而免父 必至 不顧其死 胥之為人 智而好謀 勇而矜功 知來必死 必不來 然為楚國憂者必此子

<초세가>의 표현을 빌리면 ‘인’이란 청렴하며, 절개를 위해 죽을 수도 있고, 자애롭고 효성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불사하는 정신! 그는 사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초세가>에는 형 오상이 오자서에게 남기는 말이 남아 있는데 그 말은 이렇다.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데도 가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 한편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꾀(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능력을 헤아려 일을 맡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度能任事 知也) 나는 효를 따라 죽겠으니 너는 도망가 후일을 도모하라.

<초세가>에 나오는 오상은 두가지 가치를 동시에 좇는다. 아버지를 따라 죽으며 효를 추구하는 동시에, 동생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맡긴다. 이렇게 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말처럼 둘의 성품과 능력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열전>에 기록된 형의 모습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가더라도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죽음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는 오자서의 항변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다. 여기에 덧붙이는 말, ‘아버지가 살기위해 나를 부르셨는데 가지 않고 나중에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한스럽다.(然恨父召我以求生而不往 後不能雪恥 終為天下笑耳)’

<사기열전>은 의도적으로 오상의 선택을 소극적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눈앞에 보면서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그러면서 복수를 다짐했던 오자서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었을테다. 실제로 오자서에 얽힌 이야기는 <사기>이전의 기록에서도 종종 보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자서의 이야기에는 점차 살이 붙어 더 세세한 이야기의 구조를 갖는다. 예를 들어 <사기> 이후의 기록을 보면 이후에 오자서의 도망을 도와준 어부가 스스로 배를 뒤집어 목숨을 던지는 내용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상상한 내용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오자서의 이야기는 그처럼 살을 붙여가며 전해 내려온 것일까? 그것은 복수를 완성하는 그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 나아가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 당대의 사람들은 물론 후대의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은 아닐까? 한편 그런 격정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까닭에 형 오상의 선택은 덜 주목 받았을 것이다.

인仁하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효孝를 실천하겠다는 형 오상은 유가儒家를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논어>에서는 제자 재아의 말을 통해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宰我問曰 仁者雖告之曰 井有仁焉 其從之也 子曰 何爲其然也 君子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재아의 질문은 이렇다. 인仁하다는 사람은 우물에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속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속임수에 쉽게 속아넘어갈 뿐 아니라, 자칫하면 자신의 목숨도 쉽게 던지지 않겠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어떻게 그렇겠느냐며 우물 가까이 가도록할 수는 있으나 그를 우물에 빠뜨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간단히 속일 수는 있으나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재아와 공자가 주고받은 이 내용을 익히들어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간단히 인仁하다는 평가와 더불어 죽을 곳을 자처하여 가는 사람으로 오자서의 형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사마천의 시대, 한무제漢武帝의 통치기간에 유가가 얼마만큼 영향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기존에는 한무제 시기에 이르러 도가道家, 특히 황로학黃老學과의 싸움을 끝내고 유가가 본격적인 체제의 통치 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해석이 주였다.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 한무제가 제창했다는 이 말은 거꾸로 자유로운 학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다른 제자백가가 일소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점차 유가로 흡수되었고, 마찬가지로 유가가 체제의 이념으로 자리 잡는 데는 이후로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입장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에 귀기울이는 편이며, 이러한 배경위에서 사마천의 선택과 입장을 상상해 본다. 자율적인 사상의 흐름이 힘을 잃어가는 시대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그러한 시대의 흐름과는 다른 인물들을 직조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저항한 것은 아닐지.

오자서라는 인물을 보면 유가의 통념과는 거리가 꽤 멀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형과 달리 그는 효를 저버린 인물이다. 그뿐인가? 그는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이웃 나라로 투항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웃나라의 군대를 끌고 자신의 조국을 친 인물이다. 충효忠孝의 윤리에서 보자면 오자서는 극단에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자서의 삶을 대체로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자서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다르게 보자면 오자서야 말로 아버지의 복수를 이룸으로 효를 실천하였으며, 자신의 나라(吳)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 아닌가?

사족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사마천은 어째서 이처럼 거대한 복수극 뒤에 <중니제자열전>을 놓았을까? 물론 공자는 앞 뒤로 언급되는 오자서와 상앙 사이에 있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이 오자서와 상앙 사이에 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의 <노자한비>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열전의 인물을 기술하되 꼭 그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다르게 배열할 수도 있었다는 말씀. 오자서를 통해 보여주는 폭풍같은 삶, 더불어 상앙을 통해 보여지는 진나라의 활발한 개혁. 그 사이에서 <중니제자열전>을 읽노라면 마치 쉼표처럼 느껴지는데, 여기에는 저자 사마천이 숨겨놓은 어떤 의도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를 두고 지나친 억측이라고 할수도 있으나, 사마천의 글, 특히 <열전>은 ‘욕망의 글쓰기’의 결과물이며 따라서 그 실체를 보려면 드러나지 않은, 혹은 언뜻 제 모습을 보이는 사마천의 욕망을 새겨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읽는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일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역사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것일테지만, 거꾸로 사마천은 그러한 글쓰기를 통해 시대의 실상, 사건의 사실을 묶은 게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음으로서의 시대의 본 모습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사기>가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는 떨어지나 시대의 모습을 엿보는 창구로서는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테다. 그것도 여전히 ‘역사’라는 이름으로. 따라서 <사기>를 읽는다는 것은 거꾸로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3. 제2막: 번뜩이는 칼날

오자서는 초나라에서 도망친 이후 여러 나라를 전전한다. 아버지 죽음의 단초가 되었던 태자 건을 모시는 몸이었으나 태자가 정鄭나라에서 반란을 도모하다 계획이 밝혀져 죽자 그는 오나라로 달아난다. 이때 강을 건너는데 어부가 그를 건네준다.

伍胥既渡 解其劍曰 此劍直百金 以與父 父曰 楚國之法 得伍胥者賜粟五萬石 爵執珪 豈徒百金劍邪 不受

옛글을 보면 강은 땅과 땅의 경계를 나누는 물리적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강은 숱한 이별을 낳는 공간이기도 하고(예: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로 상징되는 깨달음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했다.(此岸/彼岸) 그렇기에 어부는 비범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오자서를 건네준 어부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자서가 풀어주는 백금의 값이 나가는 명검을 두고도 마다한다. 오자서의 목에 걸린 오만석의 곡식과 집규의 자리도 관심이 없었거늘 고작 백금의 검에 휘둘릴 일이 있을까. 이렇게 추격에서 도망치는 이 긴박한 상황 가운데 배 위에서 나눈 짧은 대화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는 이웃 오나라로 도망치는데, 이 오나라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대 왕 가운데 수몽이라는 이가 있었다. 참고로 오나라는 앞서 이야기한 태백의 후손으로 이야기되어 주나라의 왕실과 매우 가까운 친족이라지만 시호를 쓰지는 않았다. 이것은 태백의 전설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는 본디 오랑캐의 나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수몽의 아들이 넷 있었다. 제번諸樊, 여제餘祭, 여매餘眛, 계찰季札. 이 가운데 계찰이 가장 훌륭하여 수몽은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계찰은 왕위를 마다하고 농사를 짓자 첫째인 제번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계찰은 고대의 현인으로 소개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데, <오태백세가>를 보면 그에 얽힌 다양한 일화를 읽을 수 있다. 노나라에가서 고대 음악을 들으며 이에 다양한 평가를 내놓는다던가, 진晉에 가서는 나라가 셋으로 나뉠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오태백세가>는 이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형제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한다. 제번을 이어, 여제, 여매까지. 그러나 계찰은 끝내 왕위를 물려받지 않는다. 이에 여매의 아들 요僚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오자서가 오나라에 도착했을 때엔 요가 왕위에 막 올랐던 상황이었다. 그는 공자 광光에게 몸을 의탁한다. 공자 광은 제번의 아들로 요의 자리를 호시탐탐노리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광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야 말로 수몽의 맏손자로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사촌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오나라는 당시 초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자주 전쟁을 벌였다. 오자서가 오나라에 왔을 때에는 두 나라의 여인들이 뽕나무를 두고 다투는 바람에 양국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일도 있었다. 오자서는 공자 광의 힘을 빌어 초나라를 무너뜨리고자 하나 공자 광은 오자서가 사적인 원한으로 초나라와 전쟁을 벌이려 한다며 반대한다. 이때 오자서는 공자 광의 뜻이 전쟁터에 있지 않고 다른 데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전제專諸를 추천하고 후일을 기다린다.

전제가 오왕 요를 암살하자 광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오왕 합려闔廬다. 여기서 전제가 오왕 요를 암살하는 장면은 <오자서열전>은 물론 <오태백세가>와 <자객열전>에 걸쳐 자세히 묘사된다. 상황은 이렇다. 초나라와의 계속된 분쟁상황에서 오왕 요는 동생이자 심복인 공자 개여蓋餘와 촉용燭庸을 보내 초나라를 공격한다. 그리고 삼촌인 계찰을 진晉으로 보내 제후들의 움직임을 살핀다. 왕의 주변 인물이 모두 자리를 비운 상황! 이때야 말로 반란을 일으키기에 적절한 때이다.

吳國內空 而公子光乃令專諸襲刺吳王僚而自立 是為吳王闔廬 闔廬既立 得志 乃召伍員以為行人 而與謀國事 <伍子胥列傳>

於是吳公子光曰 此時不可失也 告專諸曰 不索何獲 我真王嗣 當立 吾欲求之 季子雖至 不吾廢也 專諸曰 王僚可殺也 母老子弱 而兩公子將兵攻楚 楚絕其路 方今吳外困於楚 而內空無骨鯁之臣 是無柰我何 光曰 我身 子之身也 四月丙子 光伏甲士於窟室 而謁王僚飲 王僚使兵陳於道 自王宮至光之家 門階戶席 皆王僚之親也 人夾持鈹 公子光詳為足疾 入于窟室 使專諸置匕首於炙魚之中以進食 手匕首刺王僚 鈹交於匈 遂弒王僚 公子光竟代立為王 是為吳王闔廬 闔廬乃以專諸子為卿 <吳太伯世家>

於是公子光謂專諸曰 此時不可失 不求何獲 且光真王嗣 當立 季子雖來 不吾廢也 專諸曰 王僚可殺也 母老子弱 而兩弟將兵伐楚 楚絕其後 方今吳外困於楚 而內空無骨鯁之臣 是無如我何 公子光頓首曰 光之身 子之身也 四月丙子 光伏甲士於窟室中 而具酒請王僚 王僚使兵陳自宮至光之家 門戶階陛左右 皆王僚之親戚也 夾立侍 皆持長鈹 酒既酣 公子光詳為足疾 入窟室中 使專諸置匕首魚炙之腹中而進之 既至王前 專諸擘魚 因以匕首刺王僚 王僚立死 左右亦殺專諸 王人擾亂 公子光出其伏甲以攻王僚之徒 盡滅之 遂自立為王 是為闔閭 闔閭乃封專諸之子以為上卿 <刺客列傳>

이 셋을 모두 인용한 이유는 사마천이 동일한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다루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오자서열전>에서는 전제의 이야기를 매우 짧게 다루지만 <오태백세가>에서는 제법 자세히 다룬다. 그런가하면 <자객열전>, 전제와 같은 자객들의 이야기를 연이어 묶은 편에서는 전제의 더 생동감있는 묘사로  읽는이를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러한 구체적인 묘사는 당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사마천이 빼어난 글솜씨로 전해준 것이리라. 한 사람의 목숨이 다른 사람의 목숨과 바꿔치기 되는 순간. 이 찰나의 순간은 후대 사람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는지 화상석畵像石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공자 광에게 자객 전제를 소개시켜 주어서 그를 왕으로 만들었지만 오자서의 복수는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참고로 오왕 요가 죽기 바로 전 해, 오왕 12년 겨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오태백세가>에 실려 있다. “十二年冬 楚平王卒”

 

4. 제3막: 날은 저무나 갈 길이 멀다

합려는 왕위에 오른 뒤 나라를 정비하여 이웃 나라들과 전쟁을 벌인다. 특히 초나라를 쳐서 크게 이기는데 이는 오자서처럼 초나라에서 도망친 백비伯嚭와 싸움의 귀재 손무孫武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합려 9년, 오자서의 입장에서는 평왕이 세상을 떠난 뒤 10년 째 되는 해에 비로소 초나라의 수도를 정벌하는 기회를 얻는다. 당시 초나라의 임금은 소왕昭王이었는데, 그는 평왕이 태자 건의 부인으로 삼겠다고 데려왔다 빼앗은 진나라 여인의 아들이었다.

오나라 군대는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러 수도인 영郢까지 쳐들어갔다. 그러나 소왕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오자서가 초나라 수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이미 죽어 뼈만 남은 평왕의 시체였다. 그는 평왕의 무덤을 파해쳐 300번이나 매질을 한다. 이를 두고 그의 옛 친구 신포서는 복수가 지나치다며 나무라는 말을 전한다. 이때 오자서가 남긴 말이 유명하다. ‘일모도원日莫途遠’ 날은 저무나 갈 길이 멀다.

흥미롭게도 사마천은 오자서의 이 잔혹한 복수에 앞서 일찍 도망친 소왕의 행적을 남겨놓는다. 소왕은 초나라를 달아나 운鄖이라는 소국에까지 이른다. 평왕은 주변 소국에도 악명을 떨쳤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운공鄖公의 아버지도 평왕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운공의 동생 회懷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平王殺我父 我殺其子 不亦可乎

<오자서열전>이 하나의 장엄한 복수극인 동시에 통속적인 복수로 귀결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흥미롭게도 ‘아버지의 원수’를 처단하겠다는 동생 회의 성화에 운공은 소공을 데리고 나라를 도망친다. 이들은 수隨나라 땅으로 도망치는데 오나라 병사들은 수나라 사람들에게 초나라 사람의 악행을 들먹이며 소왕의 신변을 인도할 것을 요구한다. 악행이 지나쳤으니 그를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수나라 사람들은 소왕을 오나라에 넘기지 않는다. 점쳐보니 불길하다는 이유로.

隨人卜與王於吳 不吉 乃謝吳不與王

사마천이 이 장면을 굳이 집어 넣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역시 상대의 죽음으로 복수를 매듭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원수는 원수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이 당연한 법칙 앞에 복수는 종종 눈을 감는다. 복수가 허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원한은 격정을 낳고 그 격동하는 감정이 생을 추동하는 힘이되기도 하지만 대상을 죽여버리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지고만다. 복수가 거대한 몰락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후대의 루쉰魯迅은 이 사실을 알았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복수>라는 제목의 글에서 기묘한 광경을 연출한다.

사람의 살갗 두께가 반 푼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빨갛고 뜨거운 피가 그 밑, 담벼락 가득 겹겹으로 기어오르는 회화나무 자벌레 떼보다 더 빼곡한 핏줄들을 따라 달리면서, 다스한 열기를 흩는다. 그래, 저마다 이 다스한 열기에 현혹되고 선동되고 이끌리고, 죽자 사사 기댈 곳을 희구하면서, 입을 맞추고, 보듬는다. 그럼으로써, 생명의 무겁고 달콤한 큰 환희(大歡喜)를 얻는다.
그런데, 날 선 칼이 한번 치면, 복사꽃빛 얇은 살갗을 뚫고 빨갛고 뜨거운 피가 화살처럼, 모든 열기를, 살육자에게 쏟아부을 것이다. 그런 뒤, 얼음장 같은 숨결, 핏기 없는 입술로 넋을 흔들어, 살육자로 하여금, 생명 고양 극치의 큰 환희를 얻게 할 것이며, 스스로는, 생명 고양 극치의 크낙한 환희 속에, 영원히 잠길 것이다.
이리하여, 그러하기에, 그 두 사람은 온몸을 발가벗은 채 비수를 들고 광박한 광야에 마주 섰다.
그 둘은 보듬을 것이고, 죽일 것이다…….
– <들풀>, 루쉰 전집 3. 37쪽.

이 두 사람의 복수극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피의 생생한 맛’을 예감하면서. 그러나 복수자 둘은 광막한 광야에 그저 마주 서 있을 뿐이다. 비수를 든 채로. 루쉰은 이 둘이 노려보고 있는 생생한 장면을 ‘피가 없는 대살육’이라 칭하며 여기에서 ‘생명 고양 극치의 큰 환희에 한없이 잠겨든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절정의 순간, 날선 그 상태야 말로 삶의 본 모습이 가장 날카롭게 번뜩이는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신포서에게 남긴 오자서의 말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다.

申包胥亡於山中 使人謂子胥曰 子之報讎 其以甚乎 吾聞之 人眾者勝天 天定亦能破人 今子故平王之臣 親北面而事之 今至於僇死人 此豈其無天道之極乎 伍子胥曰 為我謝申包胥曰 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과연 이때에 오자서는 자신의 복수를 마무리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어떤 미진함이 남은 채로 여전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을까. 아마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역시 평왕이 눈 앞에  살아 있거나 소왕을 붙잡았다면 서슴치 않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을까? 그러나 평왕은 이미 죽었고 소왕은 달아났다. 말 못하는 시체를 매질하며 그는 깊은 허망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일모도원日莫途遠’이란 십 수년 만에 복수를 거의 매듭지었으나(日莫) 그것으로 자신의 삶이 그치지 않겠다(途遠)는 의지의 표현은 아니었을지. 한편 그렇기에 그가 이토록 참혹한 짓, 도행역시倒行逆施에도 불구하고 깨끗이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이제 복수에 그치지 않고, 과거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실제로 그는 복수의 칼에 제가 다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오자서열전>은 오자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와 중간에 헤어졌던 태자 건의 아들 승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공자 승은 이후 오나라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초나라로 돌아간다. 초나라 변경에 살면서 정나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군대를 일으켜 정나라를 치려 하였으나 영윤令尹 자서子西가 강화를 맺고 돌아오자 복수를 할 길이 사라지고 만다. 결국 승은 자서를 죽이고 나아가 왕을 시해하려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 충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승의 복수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불러오고 말았다. 사마천은 오자서의 이야기 끝에 승의 복수를 끼워 넣음으로 단순한 복수의 충동이 낳는 허망한 결말을 이야기한다. 거꾸로 오자서야 말로 원한의 치열함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만하다. 사마천이 보기에 그는 불꽃같은 사람(烈丈夫)이었다. 그가 덧붙이는 ‘悲夫’라는 표현은 그 역시 오자서의 이야기를 기술하면서 남의 이야기로 흘려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우일모九牛一毛가 되지 않겠다고, 허망한 삶으로 끝내지 않겠다며 치욕에도 불구하고 붓을 들었던 그가 아닌가.

怨毒之於人甚矣哉 王者尚不能行之於臣下 況同列乎 向令伍子胥從奢俱死 何異螻蟻 棄小義 雪大恥 名垂於後世 悲夫 方子胥窘於江上 道乞食 志豈嘗須臾忘郢邪 故隱忍就功名 非烈丈夫孰能致此哉 白公如不自立為君者 其功謀亦不可勝道者哉

隱忍! 드러나지 않는 숨은 뜻에 사마천은 주목한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며, 쉽게 닳아 없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표현이기도 하다. 집요함의 결과. 이제 또 다른 집요함을 만나야 할 때다.

 

5. 종장: 죽어도 내 눈을 거두지 않겠다

오왕 합려는 춘추 오패의 반열에 오를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켰으며 그외에도 수많은 전쟁에서 여러 공을 세웠다. 바야흐로 남쪽의 최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작은 상처 하나로 목숨을 잃는다. 월나라와의 싸움이었는데 전쟁이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나라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들의 치열한 싸움에 대해 <오태백세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越使死士挑戰 三行造吳師 呼 自剄

이른바 자살 부대. 이들의 모습에 놀란틈에 월나라 군대가 오나라 군대를 쳐서 패퇴시키고 합려의 손가락에 상처를 입힌다. 패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도 손가락의 상처가 도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때 아들 부차를 왕으로 세우며 이렇게 말을 전한다.

爾而忘句踐殺汝父乎 對曰 不敢 三年 乃報越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덧붙이면 이때 부차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왕부차모吳王夫差矛’라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1983년에 출토된 이 유물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吳王夫差 自乍用矛’ 그런가하면 합려를 죽음으로 몰고간 구천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검이 발견되기도 했다. ‘월왕구천검越王句踐劍’이라 불리는 이 유물은 부차의 창보다 앞서 1965년에 발견되었다. 문자를 넘어 실재 물건으로 고대의 역사 인물들이 말을 걸다니! 인터넷에 이 유물의 사진을 구할 수 있으니 한번 찾아보도록 하자.

오왕 부차는 삼년 만에 아버지의 복수를 이룬다. 복수의 시간이 짧았기 때문일까? 그는 월왕 구천이 스스로 치욕을 감내하며 신하의 자리에 있기를 청하자 이를 받아준다. 이때 오자서는 강렬하게 반대한다. 구천이야 말로 치욕을 능히 견디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후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복수의 칼을 품었던 사람이 볼 수 있는 혜안이라고 할까? 그는 구천이 결코 가벼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끊임없이 구천을 칠 것을 간한다.

그러나 부차는 이미 다른 대신 백비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는 상황이었고, 오자서의 간언은 듣지도 앟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백비의 모함으로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한다. 촉루라는 검을 선물로 주면서.

乃使使賜伍子胥屬鏤之劍 曰 子以此死 伍子胥仰天嘆曰 嗟乎 讒臣嚭為亂矣 王乃反誅我 我令若父霸 自若未立時 諸公子爭立 我以死爭之於先王 幾不得立 若既得立 欲分吳國予我 我顧不敢望也 然今若聽諛臣言以殺長者 乃告其舍人曰 必樹吾墓上以梓 令可以為器 而抉吾眼縣吳東門之上 以觀越寇之入滅吳也 乃自剄死 吳王聞之大怒 乃取子胥尸盛以鴟夷革 浮之江中 吳人憐之 為立祠於江上 因命曰胥山

오자서는 간신 백비의 꾀임에 놀아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왕을 원망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그러나 그 스스로 ‘장자長者’라 일컬었듯 그는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죽음 뒤에도 똑똑히 지켜보겠다고 말한다. 내 눈을 파내어 동쪽 성문에 걸어놓으라. 내가 월나라 놈들이 쳐들어와 오나라가 망하는 꼴을 두눈으로 보고야 말겠다. 그의 이 말은 읽는 이의 전율을 돋게 한다. 게다자 자신의 무덤 위에 자라는 나무를 베어 왕의 관으로 쓰라니! 끝까지 그의 삶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의 말을 들은 부차가 그의 시체를 가죽에 싸서 강에 내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기려 그가 죽은 근처의 산에 오자서의 이름을 따 서산胥山이라 불렀다한다.

사마천은 <열전>에서 커다란 기개를 갖고 있는 사람을 ‘장자長者’라 칭하였다. 이는 단순히 사회적 업적으로 평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을 세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한 신념과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훗날 고조 유방, 초패왕 항우와 천하를 셋으로 갈라 가질 수 있었던 회음후 한신은 장자長者가 아니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알아보도록 하자.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오자서에 대해 <장자>에서는 충신忠臣이라 평가한다. 더불어 그의 명성은 꽤나 널리 알려져 은나라의 주왕에게 간언했던 비간比干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름을 올린다. 비록 <잡편>인 <도척盜跖>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지만 그가 유가에서 크게 존중받았던 비간과 더불어 언급된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世之所謂忠臣者 莫若王子比干 伍子胥 子胥沈江 比干剖心 此二子者 世謂忠臣也 然卒為天下笑 自上觀之 至於子胥 比干 皆不足貴也 … 比干剖心 子胥抉眼 忠之禍也

유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오자서의 삶을 결코 충신의 삶이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아버지와 조국을 버린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충신을 훗날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존재로 여기는 것은 편협한 이해가 아닐까? 후대에 그리는 충신이란 군주의 그늘에 갇혀서 모든 욕망을 그를 통해서만 실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나아가 군주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그러나 오자서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선택했고, 오나라를 위해 진심을 다했다. 복수를 위해 초나라와의 전쟁을 벌였다는 것도 사실이며, 오나라를 위해 최전선에 섰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대의만 주장하는 것도 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일 것이며, 한 개인의 욕망에만 천착하는 것도 올바른 이해는 아닐 것이다. 이 둘은 서로 교차하며 그 모습을 계속 바꾸곤한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그렇게 뒤섞이는 와중에 그 개인의 욕망이 가진 날카로움이 무뎌지는가 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오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날카롭다. 사마천의 평어를 빌리면 ‘志豈嘗須臾忘’ 그자 잠시도 잊지 않았기에 이런 거대한 사건들 속에서도 그를 또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예언처럼 월나라의 군대는 오나라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때 오나라 왕은 이전에 구천이 했던 것처럼 강화를 맺고자 한다.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 할 수는 없는 법. 구천의 곁에 있던 범려는 오왕 부차에게 작은 땅을 내어 줄테니 그곳에 가 살라고 한다. 오왕은 나이가 들어 월왕을 섬길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죽었다.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遂自殺 乃蔽其面 曰 吾無面以見子胥也

<오자서열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복수에 복수로 화답한, 구천 역시 오자서에 견줄만한 인물이다. 오자서가 일찍이 그의 뜻을 알아차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句踐之困會稽也 喟然嘆曰 吾終於此乎 種曰 湯系夏臺 文王囚羑里 晉重耳奔翟 齊小白奔莒 其卒王霸 由是觀之 何遽不為福乎 吳既赦越 越王句踐反國 乃苦身焦思 置膽於坐 坐臥即仰膽 飲食亦嘗膽也 曰 女忘會稽之恥邪

구천은 쓸개를 핥으며 자신의 치욕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보면 망각이란 매우 두려운 것이다. 아무리 거대한 꿈을 품고, 강렬한 감정을 느꼈더라도 망각의 힘 앞에서는 그 예리함이 금방 사그라들고만다. 시간의 힘은 커서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무디게 만들어 버리곤한다. 그 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글쓰기가 시간에 저항하는 것이라면 때로는 쓸개를 핥듯 글을 써야하는 것은 아닐지.

사마천은 구천의 이 사건에 깊이 감명했는지 월의 세가世家에 <월왕구천세가>라는 이름을 붙였다. 월의 기록이 매우 부족하여 구천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구천과 그를 옆에서 보좌했던 ‘범려’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분량이 크게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구천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구천의 이름을 제목에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사기에 나오는 또 다른 자유로운 인간형의 대명사인 범려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이 있으니 시간이 되면 <월왕구천세가>를 읽어보도록하자.

월왕구천은 춘추시대 오패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제 패자의 시대는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전국戰國, 본격적인 약육 강식의 시대. 각 나라가 천하를 두고 다투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구천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월은 초나라에 의해 망하고 만다.

 

6. 진秦, 새로운 강자의 등장

진秦은 서쪽 변경에 속한 나라로, 초나라처럼 초기에는 주나라를 중심으로한 문명 세계 안에 속하지 못했다. <진본기>에 따르면 진양공秦襄公이 주나라 유왕이 서쪽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죽었을 때 주周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때 유왕을 이어 왕이 된 평왕平王은 양공을 기산 서쪽의 제후로 삼았다. 이처럼 진나라는 한참 뒤에나 주나라의 제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진나라가 본격적으로 천하에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은 효공에 이르러서였다. <진본기>에 따르면 효공 시대를 이렇게 서술한다. ‘황하와 효산 동쪽으로 강대국 여섯이 있었다. 효공은 이들 제나라 위왕, 초나라 선왕, 위나라 혜왕, 연나라 도후, 한나라 애후, 조나라 성후와 어깨를 나란히했다.’ 진나라와 동쪽의 육국, 흔히 이야기하는 전국칠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국시대 일곱개의 나라의 특징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루자. 이 강국들의 이름 가운데 주왕실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제 주왕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주나라가 근근이 유지하고 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효공시대에 진은 나라 전체를 개혁하여 크게 강성하게 된다. 여기에는 공손앙公孫鞅, 혹은 위앙衛鞅 훗날 상앙商鞅이라 불리는 이의 역할이 크가. <사기열전>에서는 그를 상군商君으로 소개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훗날 상商 땅을 봉지封地로 받기 때문이다.

商君者 衛之諸庶孽公子也 名鞅 姓公孫氏 其祖本姬姓也

위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위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주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는 위나라 재상 공숙좌의 중서자로 있었는데 공숙좌가 세상을 떠나며 상앙을 천거했다.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만한 인재일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쓰지 않을 경우에는 죽여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말해놓고도 상앙에게 미안했는지 임금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빨리 도망치라고 말한다. 이때 상앙의 대답.

鞅曰 彼王不能用君之言任臣 又安能用君之言殺臣乎 卒不去 惠王既去 而謂左右曰 公叔病甚 悲乎 欲令寡人以國聽公孫鞅也 豈不悖哉

들어 쓰라는 말을 듣지 않았는데 어찌 죽이라는 말을 또 듣겠는가? 실제로 혜왕惠王은 자리를 뜨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숙좌가 심히 병들었다. 어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지. 그러나 그의 이 선택이 재앙의 씨앗이 될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상앙은 위나라에서 아무런 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진나라로 떠난다. 진나라는 변경에 있었던 탓에 나라 밖의 인재들을 널리 불러모았다. 상앙 역시 기회의 땅 서쪽 진나라로 떠난다. 상앙은 패왕의 이야기로 효공의 환심을 샀다. 어찌나 상앙의 이야기가 효공의 관심을 끌었는지 무릎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상앙의 말이 효공의 마음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한비자는 <세난說難>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凡說之難 非吾知之有以說之難也 又非吾辯之難能明吾意之難也 又非吾敢橫失能盡之難也 凡說之難 在知所說之心 可以吾說當之

상앙은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효공의 의중을 파악했으며 결국엔 그의 마음을 사서 그의 심복이 될 수 있었다. 상앙은 변법變法, 나라 전체의 법을 바꾸어 진나라의 부강을 이끌어낸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동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위나라였다. 이미 위나라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해 태자 신이 사로잡히고 장군 방연을 잃은 상황이었다. 상앙은 위나라 공자와 맹약을 맺는 척 하며 그를 구금하고는 위나라를 쳐 무너뜨린다. 결국 위나라는 크게 땅을 잃고 수도를 대량大梁으로 옮기기에 이른다. 그 공적 덕분에 상앙은 상군商君이라 불린다.

여기서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를 들어 쓰기를 거부했던 위혜왕은 수도를 대량으로 옮긴 뒤 양혜왕이라 불렸다는 점이다. 맹자의 첫 머리에 등장하는 양혜왕이 바로 그다. <사기열전>에는 맹자를 맞아들인 이후 이렇게 양혜왕이 하소연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寡人不佞 兵三折於外 太子虜 上將死 國以空虛 以羞先君宗廟社稷 寡人甚丑之 叟不遠千里 辱幸至獘邑之廷 將何利吾國 孟軻曰 君不可以言利若是 夫君欲利則大夫欲利 大夫欲利則庶人欲利 上下爭利 國則危矣 為人君 仁義而已矣 何以利為

혜왕 입장에서는 맹자와 같은 인재를 불러들여 새로 나라를 일으켜 보려 하였으나 맹자는 이로움을 추구하는 일이라며 선을 긋는다. <맹자>의 말을 빌리면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오직 인의만 이야기하자는 맹자의 말을 양혜왕은 어떻게 들었을까?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당대에는 다양한 인재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진나라에는 상앙이 있었고 초나라에서는 오기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한편 제나라에는 방연을 죽인 손빈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의를 외치는 맹자의 말은 지나치게 허망한 것이 아니었을까?

맹자가 인의仁義, 구체적으로는 상하 관계가 명확한 주나라 시대의 봉건체제를 언급하며 양혜왕을 두고 이로움만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매도했다면, 상앙에 반대하는 이들도 그와 비슷했다. 상앙 역시 개혁에 앞서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힌다. 감룡은 백성의 풍속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두지는 옛날의 법을 바꿀 필요다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앙은 옛날의 법도에 따라서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상앙은 효공의 강력한 후원 아래 나라 전체를 개혁하는 데 박차를 가한다.

그는 크게 두 차례의 개혁을 벌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번째 개혁에서 그는 열 집 혹은 다섯 집으로 백성을 묶고 서로 감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경우 이들을 함께 벌주도록 했다. 한편 형벌을 매우 가혹하게 집행하도록 하였으며, 성인 남성이 한 집에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하부로부터 생산 조직을 체계적으로 갖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몇 가구를 묶어 그 단위에 부역을 부과하는 것은 후대에도 볼 수 있는 일이다. 한편 가구를 나눈 것은 농지 확대와 세수 확대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당시에는 가구당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이를 장정에 따라 나누었다. 게다가 당시만하더라도 미개척지가 많았으므로 이들 분리된 세대는 또다른 경작지를 개간하여 국가 생산량을 늘일 수 있었다.

부국강병! 나라의 생산을 늘렸으면 군대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 가운데 여럿이 있겠지만 그는 군공에 따라 벼슬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나아가 귀족이라 하더라도 전쟁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면 그 자리를 빼앗기도 했다. 그리고 공과에 따라 철저하게 차등을 두었다. 다르게 보면 상앙은 매우 일찍부터 공과에 바탕을 둔 시스템을 구축해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군공에 따라. 나라 전체를 병영화 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앙이 세운 시스템의 효과는 분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엄벌을 통해 반대 여론을 제거했으며, 예외없이 법령이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백성의 기대를 모았다. 두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거리에 버려둔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 막대한 상금을 내린 사건이다.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법령에 따라 행할 경우 상벌을 명확히 할 것을 알린 것이다. 한편 태자가 법을 어기자 태자를 벌하려 하기도 했다. 비록 후대의 임금이 될 태자이기에 대신 태부를 처벌했지만 이는 법령에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개혁에 백성들이 환호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되었건 법령에 따라 군공을 세우기만 하면 귀족의 자리에 오를 길이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존 귀족들에게도 예외없이 집행된다는 점이 얼마나 큰 매력이었겠는가. 그렇기에 진나라 군대는 다른 나라의 군대보다 훨씬 용맹스러웠다고 한다.

두번째 개혁은 수도를 함양으로 옮기는 것,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 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로 삼았다. 한편 읍邑과 현縣으로 나라를 나누었다. 이와 더불어 부세를 공평하게 하였고 도량형을 통일했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실효성있는 개혁이었는지는 궁금하다. 중앙 집권의 관료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인 세금 체계는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훗날 진시황의 통일 이후에 군현제와 도량형, 문자의 통일 등이 다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기초적인 수준에서 나라의 체제가 재편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고대 국가는 점과 점으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국國’이라는 글자는 사방이 성으로 둘러쌓인 영역(域)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국경國境 바깥이란 다른 곳이 아니라 성문 바깥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성 바깥이 영토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또한 그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려야 할 방책도 함께  필요하게 되었다.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의 전환.

다르게 말하면 진의 부상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앞서 이 변신을 이루어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상앙의 공적이 있다. 그래서 김용옥은 오늘날 중국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상앙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China란 ‘秦qin’에서 따온 이름이 아니던가.

<상군열전>을 통해 중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영토 국가에 필수적인 두 가지, 전쟁시에는 백성을 병사로 동원하며 평소에는 생산하도록 만드는 체제가 만들어졌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예외없는 공과제도와 체계적인 행정 구획이었다.

그러나 상앙의 끝은 결코 좋지 않았다. 상앙은 공자 건이 법령을 어기자 그의 코를 베는 형벌을 내릴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노리던 자들은 반란을 모의한다며 상군을 잡아들이려 하였다. 상군은 달아나다 함곡관 부근에 이르러 어느 집에 묵고자 하나 받아주지 않았다. 상군의 법에 여행증이 없는 사람을 묵게 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는 이유에서. 이 말을 듣고 상군은 이렇게 한탄한다.

嗟乎 為法之敝一至此哉

결국 상군은 사지가 찢겨, 거열車裂형으로 죽는다. 그가 저잣거리에서 그를 찢어 죽이며 진혜왕이 남긴 말은 이렇다. 莫如商鞅反者 상군이 정말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지는 모른다. 비록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에 대항하나 구석에 내몰린 결과가 아니었을까? 여튼 진나라에서 상앙은 반란을 꾸미다 죽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상앙은 시대의 변곡점에 매우 중요한 일을 했지만 결국 그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논어의 말을 빌리면 ‘滔滔者天下皆是也’ 천하가 크게 일렁이며 흘러가는 때였다. 상앙은 비록 엄청난 일을 세웠으나 결국엔 그 흐름에 씻겨가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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