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읽기 #2 《제물론》 – 나를 잃어 버렸다.

1. 고목 같은 몸, 재 같은 마음

어떤 책을 읽을 때 고비가 되는 지점이 있다. 첫 시작은 나름 괜찮은데, 그 시작의 매력를 다 누리기도 전에 구렁텅이에 빠지는 듯 당혹감을 선물하는 부분이 있다. 《논어》에서는 〈팔일〉편이 그렇고, 《구약성서》에서는 〈신명기〉와 〈레위기〉가 그렇다. 십중팔구 《장자》를 일독하겠다는 마음을 꺾어버리는 데가 바로 여기 〈제물론〉이다.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리둥절하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르다고. 그만큼 풍부한 감각을 선물해 준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완전히 다르다면, 전헤 읽은 경험과 이번에 읽는 경험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어긋난다면 어떨까? 당혹스러움만 남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제물론〉을 읽는 경험이 그렇다. 읽으면서 한숨이 나오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읽고나선 아찔한 나머지 멍-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말’이란 구체화 한다는 것이고, 개념화한다는 뜻일텐데. 이 당혹스러움 속에서 무엇을 찾아 말로 엮어낼 수 있을까? 말을 잊게 만드는 글이거늘!

《장자》 내에서도 〈제물론〉은 매우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학자마다 해석하는 방법이 크게 엇갈린다. 한 단어를 두고도 정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표점을 찍는 방법도 다르며, 같은 글자를 두고도 다르게 풀이하거나, 다른 글자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제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도 벌어진다. 〈제물론齊物論〉이란 대체 무슨 뜻일까? 제목에 매이지 않고 《장자》를 읽겠다는 입장이지만, 이 차이는 〈제물론〉을 읽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을 대표하므로 소개한다. 한쪽에서는 ‘제물’론으로 이해한다. ‘만물이 서로 같다는 논의’가 바로 이 편의 중심 주제라는 것이다. 다른쪽에서는 제’물론’으로 읽는다. 이렇게 읽으면 물론物論, ‘사물들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다루는 것’이 이 편의 중심 주제가 된다.

제목에 얽힌 복잡한 논의를 접어두고 〈제물론〉으로 들어가보자. 하나의 난해한 우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두 인물, 남곽자기와 안성자유가 이야기를 나눈다.

南郭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顏成子游立侍乎前,曰:「何居乎?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

〈소요유〉가 컴컴한 저 북쪽의 바다에서 시작했다면 〈제물론〉은 남쪽성곽 바깥에 머물고 있는 한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책상에 기대에 앉아 한숨을 쉰다. 그러나 그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 제자로 보이는 안성자유가 묻는다. 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요. 몸은 마치 고목과도 같고 마음은 불꺼진 재처럼 되었습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낯설다. 대체 무엇이 이렇게 만든 것일까?

子綦曰:「偃,不亦善乎而問之也!今者吾喪我,汝知之乎?女聞人籟而未聞地籟,女聞地籟而未聞天籟夫!」

안성자유는 남곽자기의 상태를 제대로 읽었다. 정말로 남곽자기는 어제의 그가 아니었다. 지금 그는 뭔가 다른 인간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그 자신을 잃어버렸다.'(吾喪我) 자기상실!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 안에 또 다른 무엇을 발견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것’ 혹은 ‘나’라고 부를 말한 것이 망가졌거나 훼손되었다는 것일까? 남곽자기의 말은 기묘하다. 그는 인뢰人籟, 지뢰地籟, 천뢰天籟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체 이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자기상실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뢰籟’란 피리 혹은 피리소리를 가리킨다. 인뢰人籟란 사람이 불어서 내는 피리소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지뢰地籟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지에 이는 바람이 내는 소리를 말한다. 남곽자기는 바람이란 대지가 숨을 내쉬는 것이라 말한다.(夫大塊噫氣,其名為風) 그런데 이 바람이 다양한 구멍들과 만나 소리를 낸다. 산을 가까이 하면 안다. 산 속에 들어가보면 이 소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갖가지 틈으로, 구멍으로 바람이 미끄러져가며 소리를 낸다. 웅웅, 윙윙, 우우, 스스 … 바람 많은 날 산에는 누군가 있는 것만 같다. 때로는 누가 우는 듯, 웃는 듯, 고함치는 듯, 화를 내는 듯. 이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 바람 때문에 산은 단지 흙덩어리 무더기와 우거진 나무들의 조합에 머물지 않는다.

이 지뢰地籟를 이야기하는 부분은 명문으로 꼽힌다. 번역문으로라도 한번 읽어보자. 안동림의 번역이다.

“말하자면 대지가 내쉬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게 일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단 일었다 하면 온갖 구멍이 다 요란하게 울린다. 너는 저 윙윙 울리는 [멀리서 불어 오는 바람] 소리를 들어 봤겠지. 산림 높은 봉우리의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옥로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지. [그게 바람이 불면 울리기 시작해.] 콸콸 거칠게 물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 나는 소리, 나직히 나무라는 듯한 소리, 흐흑 들이키는 소리, 외치는 듯한 소리, 울부짖는 듯한 소리, 웅웅 깊은 데서 울려 나는 것 같은 소리, 새가 울 듯 가냘픈 소리[등 갖가지로 울리지]. 앞의 바람이 휘휘 울리면 뒤의 바람이 윙윙 따른다. 산들바람에는 가볍게 응하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응해. 태풍이 멎으면 모든 구멍이 고요해진다. 너는 나무가 [바람 때문에] 크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볍게 흔들리기도 하는 걸 보았겠지.” – 48~49쪽.

이 세상은 이렇게 소리가 웅웅 울리는 곳이다. 그렇다면 대체 천뢰天籟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남곽자기의 대답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아리송하다.

夫吹萬不同,而使其自己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바람은 하나이지만 제각기 구멍의 고유한 모양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그것은 지뢰地籟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뢰人籟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똑같은 숨으로 불더라도 운지법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난다. 그래서 저마다 제각기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남곽자기는 묻는다. 불어대는 것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만약 불어대는 숨, 바람이 없다면 소리가 날 수 있을까? 구멍은 구멍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없다. ‘라’라는 음계를 내는 구멍이 있다고 치자. 그 소리가 그 구멍의 것일까? 맞다. 그러나 소리를 내도록 만드는 숨, 바람이 그친다고 해보자. 그때에도 그 구멍은 ‘라’라는 음계의 구멍일까? 아니, 그때의 구멍은 그저 구멍일 뿐이다. 그때에도 ‘라의 구멍’을 ‘도의 구멍’과 구별할 수 있을까? 바람과 숨이 그쳐버린 그때에도?

《장자》에서 구멍이란 단순히 사물에 뚫려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에게도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 눈, 코, 입, 귀. 이 구멍으로 사람은 외부 사물과 만나고 접촉한다. 이 감각기관은 세계를 인식하는 통로인 동시에, 감각이 발현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말이 대표적이다. 인간은 이 구멍으로 느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느낌과 표현이 개별인간의 고유한 특징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그런 개별적 감각의 총합이기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이 구멍, 입을 통해 발화되는 개별적 특징은 나를 나라고 규정하는 하나의 틀이 된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가 규정되지만, 그 고유성이란 매우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우리는 이 일곱개의 구멍을 통해 개별적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재로도 다양한 차이가 생기지만 정작 우리는 마치 피리와 같아서 그 바람이 멈춰버리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는가? 오보에는 누군가 불어서 오보에의 소리를 낼 때 오보에일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남곽자기는 고목과도 같은 신체, 식은 재와도 같은 마음으로 멍하니 있었다. 대체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인간이 하나의 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개별적 소리들, – 이 소리의 총합을 장자는 심心이라 불렀을 것이다 – 이것의 고유함이란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가?

喜怒哀樂,慮嘆變慹,姚佚啟態;樂出虛,蒸成菌。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已乎已乎!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 非彼無我,非我無所取。是亦近矣,而不知其所為使。

인간의 마음은 멈춰있지 않는다. 다양한 감정이 들끓어 넘친다. 여러 소리가 웅웅 울리는 아우성의 공간이다. 끊임없는 변화. 이는 외부의 세계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닥치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세계의 바람은 우리의 마음에 갖가지 소리를 불어넣는다. 밤낮으로 여러 가지가 생겨나지만 대체 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문제는 이 구멍들이 만들어내는 소리, 갖가지 감정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저마다 울리는 소리는 소음이 되어 내면을 진동시킨다. 인간의 내면은 늘 어떤 소음으로 가득차 있다. 세상이 시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시끄러운 게 문제다.

一受其成形,不亡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그것 뿐인가. 인간의 삶이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게 세상의 일에 치이며 살다보니 한 사람의 삶은 마치 말이 빨리 달려가버리는 것과 같다. 장자는 다른 부분에서 인간의 삶이란 좁은 틈으로 말이 달려지나 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생이란 순식간이다. 이 빠른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자기 삶의 속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죽음을 향해 달려나간다. 불행히도 그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뿐인가?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 그치는 날이 찾아오겠지만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종신토록 수고로운 것이 인간의 인생이다.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가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 피곤하고 힘든 것이 우리네 삶이다. 슬프지 않은가?

장자는 인간의 보편적 삶의 한계를 잘 깨달았던 인물이다. 인간이란 불우한 존재이다. 장자는 죽음을 미룬다는 그런 사람들의 삶을 비웃는다. 죽음이라는 실존적 한계도 문제이지만, 육신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를 낳는다. 몸을 따라 마음도 낡는다.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슬픔이 아닌가? 삶이란 이렇게 허망하다. 이 허망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장자는 묻는다. 나 혼자만 이렇게 허망한 삶을 살고 있느냐고. 뭇 사람들의 삶이란 본디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닌가?

 

2. 도는 대체 어디있기에?

도란 만물(자연과 인간으로 이루어진 세계)을 존재∙변화시키는 근원적인 주재자인데, 그에 비해 인간은 이 도에 의해 존재∙변화되는 단순한 피주재자, 만물의 한 존재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소외되고 몰주체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런 까닭에 도가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인간소외의 극복과 주체성의 획득이었는데, 그 기초에는 ‘도—만물’의 두 세계를 도려하는 독자적 존재론(두 세계론)이 깔려 있다. 그 목적은 단순히 만물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도에 도달하고 도를 파악함으로써 도가 세계에 가지는 전능한 힘(일체의 만물을 존재∙변화시켜 주재하는 힘)을 손에 넣고 그것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고 주체성을 획득하여 스스로 위대한 주재자로 세계 속에 우뚝 서는 데 있었다. –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미조구찌 유조 외, 25쪽.

인간의 한계는 자명하다. 인간 역시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물(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개별 사물은 제각기 저마다의 한계에 갇힌 존재들이다. 인간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이 제한적 사물은 도道의 무한성과 비교할 때 그 한계가 자명하다. 인간의 지각, 언어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제물론〉에서 우리는 다양한 방면에 걸친 장자의 불신을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지각 자체를 불신한다. 개별적 판단이란 일시적으로만, 혹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為小;莫壽乎殤子,而彭祖為夭。

크다 혹은 작다고 하는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가. 장자는 이런 판단이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양한 예를 들어 증거한다. 장자는 이렇게 묻는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허리에 병이 생긴다. 그러나 미꾸라지에게도 그렇던가? 높은 나무는 어떤가? 사람에게는 아찔한 높이이지만 원숭이에게도 그렇던가? 대체 적합한 자리란 무엇을 말하는 건가? 사람은 고기를 먹는다. 사슴은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먹는다. 올빼비는 쥐를 잡아 먹는단다. 대체 이 넷가운데 무엇이 참된 맛을 알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미인도 못가에 가면 물고기를 놀래킨다. 사슴을 달아나게 하고 새를 쫓아보낸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장자는 분명 맹자와 명시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맹자는 사람들의 감각이란 비슷하여 누군가 그 감각의 척도가 될만한 인물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루의 밝은 시력이나 공수자의 뛰어난 손재주가 있어도 콤파스와 곡척을 사용하지 않으면 네모 모양과 원 모양을 만들 수 없다. 사광의 예민한 청력이 있어도 육률을 사용하지 않으면 오음을 바로 잡을 수 없다. 요순의 도가 있어도 어진 정치를 실행하지 않으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없다. … 성인은 밝은 시력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게다가 콤파스∙곡척∙수형기∙먹줄과 같은 정확한 도구에 의거했으므로, 네모난 것과 둥근 것 평평한 것 곧은 것을 만듦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예민한 청력을 남김없이 활용하고 게다가 육률과 같은 정확한 기구에 의거했으므로, 오음을 바로 잡음에 그것이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어진 마음과 생각을 남김없이 활용하고 게다가 차마 남에게 악하게 굴지 못하는 정치에 의거했으므로, 인仁이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졌다.” — 《맹자》, 박경환 역, 홍익출판사. 187~188쪽.

맹자는 사람들 가운데 남보다 더 잘볼 수 있는 인간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직선을 더 잘 본다. 물론 그에게도 부족한 부분은 있다. 곧은 자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절대 음감을 가지고 음계를 구분한다. 그러나 육률, 다르게 말하면 음계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맹자는 이 세계의 척도가 존재하며, 이 척도에 가까운 인간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척도는 이 세계의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성인을 중시한다. 성인은 곧 척도를 체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세상은 중심을 찾을 수 있다. 맹자는 이 성인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장자는 이와 정반대이다. 도리어 그는 그렇게 규정해 놓은 척도의 한계에 주목한다. 맹자가 음에 밝은 사광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켰다면 장자는 이와 비슷한 소문昭文을 예로 든다. 그는 매우 뛰어난 연주자였지만 그가 음악을 완성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완성이야 말로 또 다른 파괴를 의미한다고 장자는 말한다.

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

장자는 말한다. 개별적인 대상으로 나누는 것(分)은 그 대상을 구체화하여 확정하는 것(成)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본질을 훼손하는 것(毁)이기도 하다. 여기서 장자가 음악, 소리를 문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소리-음악이란 유가에 있어 문명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시에서 마음을 일으키고, 예에 몸을 세우며, 음악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라. 공자가 주나라의 문물로 예악禮樂을 이야기했지만, 예식과 음악 가운데 그가 더 최종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은 음악이었다. 조화로운 예가 완벽하게 구현된 상태.

이러한 생각 가운데 유가가 음율, 오늘날로 따지면 음계 정도가 될텐데, 이것을 규정하는 데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음은 단순히 어떤 떨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지간의 우주적 기운이 응축되어 하나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며, 그것은 곧 이 우주가 정교한 윤리에 의해 구성되고 운행되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정음正音, 바른 소리를 가지고 그것들을 조화롭게 하는 것(和)이야 말로 천지간의 다양한 존재들이 어울리는 조화로운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자의 소리란 다르다. 장자에게 소리란 제 각기 다른 구멍을 통해 울려되는 소리의 총합이다. 피리로 예를 들어보면 공자는 그 소리를 구분하고 그 소리들 사이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반면 장자는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조정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도리어 그 소리라는 것 조차 불어대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 불어댐이 사라지면 그 소리도 사라진다는데 주목한다. 그것은 음을 나누고 확정하는 것은 그 불어댐이라는 본질적 힘, 운동, 흐름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음악에만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구멍, 사람의 입(口)을 통해 울려지는 말(言)을 생각하라. 말 – 언어활동은 늘 어떤 제한성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그것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입을 열어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본질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라는 말과 그것이 아니라는 말 사이를 잘 보아야 한다. 무엇인가를 지칭할 때엔 늘 어떤 덜어냄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아닌 것 – 덜어낸 것이 너무 큰 나머지 그것이라 지칭한 것을 가지고 그것이 아닌 것을 사유하기에는 턱 없이 모자란다.

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

따라서 무엇이 아닌 것, 아직 지칭하지 못한 무엇, 규정되지 않은 무엇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지각 역시 마찬가지인데, 무엇이라 포착할 수 없는 그 바깥을 장자는 주목한다. 그와 반대로 무엇이라 규정하고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의 총체란 – 이것을 성심成心이라 하자 – 장자에겐 극복해야 할 것이 된다. 이는 특정한 언어 활동을 통해 표현되고 규정된다. 말이란 세계를 분활하는 활동이며, 이를 통해 특정한 가치들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 가치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개별적 고유성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시비판단을 뛰어넘는 길은 없는가? 장자는 그것을 도道라 이름 붙였다.

道惡乎隱而有真偽?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

말은 다툼을 낳는다. 서로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두고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사람들에게 도道가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또 다른 지평, 밝은 지혜의 지평이 있다고 말한다. 대체 그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일까? 〈제물론〉 안에서 이 밝은 지혜는 다양한 형태로 설명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묘사는 회전의 중심이 되는 지도리로 묘사한 부분이다. 도는 마치 회전의 중심축과 같아서 다양한 모든 사물들에 대응하는 무한성을 갖는다. 도를 체득한다면 세상의 갖가지 일에 무수히 대응할 수 있다.

物無非彼,物無非是。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是以聖人不由,而照之于天,亦因是也。是亦彼也,彼亦是也。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果且有彼是乎哉?果且無彼是乎哉?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樞始得其環中,以應無窮。是亦一無窮,非亦一無窮也。故曰「莫若以明」。

장자에게는 두 세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하나는 물物로 이야기되는 개별 사물들의 세계라면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도道로 이야기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각기 다른 가치들이 대립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들면 무엇인가를 버릴 수 밖에 없다. 옳음과 그름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이 둘 모두를 뛰어넘는 세계란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의 세계 말고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장자가 제시하는 것은 도道의 세계이다. 바로 여기에 이 둘을 뛰어넘는 길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도道는 특정한 무엇이라고 규정지어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장자는 도道를 무엇이 아닌 것으로 설명한다. 그가 그렇게 설명을 아끼는 이유는 무엇이라 콕 집어 말할 경우 그에 반대되는 것이 자연히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엇이라 부르는 순간, 무엇이 아닌 것이 등장한다. 따라서 무엇이 아니라는 그 부정의 무한한 가능성에 도道는 숨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有有也者,有無也者,有未始有無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俄而有無矣,而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今我則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無謂乎?

도道는 하나의 의문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도를 인식하는 길은 다른 것을 아는 것과 다르다. 참고로 장자는 ‘도를 안다(知道)’고 표현하기 보다는 ‘도를 얻었다(得道)’고 표현했다. 도道란 개별적 경험의 장에서 체험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원리로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편적인 조각으로 나뉘어진 개별적인 부스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이야 말로 도의 가장 큰 특징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큰 것은, 세계의 참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무엇이라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부정의 지식, 그 불가능에 주목해야 한다. 무지에서 지혜가 나온다.

 

3. 말을 버려야 한다

동양의 여러 사상가 가운데 말의 한계를 이야기한 사람은 적지 않다. 말 – 언어는 늘 제한적인 기능만 할 뿐이다. 세계의 참 모습은 이 말 – 언어의 굴레를 훌쩍 넘어선다. 아마도 여기에는 중국 문자와 언어의 특징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문자는 단순히 기호가 아니라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림 가운데 하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욕망은 늘 실패할 뿐이다. 세계는 언어 바깥에 있다.

夫大道不稱,大辯不言,大仁不仁,大廉不嗛,大勇不忮。道昭而不道,言辯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五者园而幾向方矣。故知止其所不知,至矣。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謂天府。注焉而不滿,酌焉而不竭,而不知其所由來,此之謂葆光。

장자에게 커다랗다는 말은 세계의 본디 실상을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하나기도 하다. 참된 것은 크다. 크다는 것은 차마 말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 커다람 자체,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그 바깥의 세계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한한 변화에 대응할만한 훌륭한 지혜를 얻는 것이리라. 마르지 않는 샘, 차지 않는 독과 같다. 이것이 바로 도道의 세계일 것이다. 이 참된 세계를 인지하는 인물은 세계를 구분하며, 구획하는 지식 이전의 본디 모습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古之人,其知有所至矣。惡乎至?有以為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其次以為有物矣,而未始有封也。其次以為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

이런 면에서 그가 비판하는 인물이란 곧 이 세계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특정한 틀에 얽매여 희비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다. 세계의 총체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희노의 감정이 일어난다. 작은 일에, 어쩌면 별 것이 아닌 일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 이를 장자는 조삼모사라 불렀다.

已而不知其然,謂之道。勞神明為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曰狙公賦芧,曰:「朝三而莫四。」眾狙皆怒。曰:「然則朝四而莫三。」眾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為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세상은 끊임 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마음은 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기 쉽다. 사물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변화하지 않는 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는 무게감으로, 중후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가볍지 않다면, 튼튼한 마음을 갖춘다면 세상 일에 덜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강한 마음을 가지라!

그러나 장자의 해결책은 이와 달라 보인다. 장자는 세상의 흔들림에 기우뚱하지 않는 강한 자아를 주장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도리어 장자는 침묵하는 것, 어떤 능력으로 내면을 채우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체가 본디 능력 없었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의 침묵에서 무거운 입술을 떠올리지는 말자. 도리어 그는 말을 멍하게 잃어버린 것,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말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는 침묵을 강요하기 보다는 도리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언어의 문제에서도 이야기하지 말 것을 충고하기 보다는 말할 수 없음을, 말로 담을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그가 입을 열었을 때에 그 입에 담기는 말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의 말은 세계를 규정하고 평가하며 그려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매만지는 말에 가깝다. 장자는 나를 잃었다고 말한다. 세계의 참 모습을 봄에 있어 나(我)라는 규정적 틀이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말(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말을 버려야 한다면, 말을 하지 말라는 금언의 규율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말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좋은가. ‘말을 버려야 한다’고 벌써 말해버린 것을.

장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말이 아닌말, 언어가 아닌 언어, 내가 아닌 나로 말하면 될 것이라고.

메일 보내기

아무 내용이나 상관 없어요. 메일을 보내주세요.

보내는 중입니다..
또는

로그인하세요.

계정 내용을 잊으셨나요 ?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