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그 은밀한 권력의 기술

1. 천하통일天下統一

맹자는 중국 역사를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제대로 다스려진 평화로운 시대가 열린다면(一治) 이어서 다시 혼란스러운 시대(一亂)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역사란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교차는 현장입니다. 치세란 안정된 왕조가 등장하여 천하를 지배한 시대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난세란 천하가 이리저리 찢겨 다양한 나라가 등장해 서로 힘을 겨루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일치일란의 사이클 때문에 중국 역사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단순히 통일 왕조의 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일왕조와 통일왕조 사이의 혼란기에는 워낙 여러 나라가 등장한 바람에 이름을 다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역사를 두고 말하면 통일 신라의 몰락 이후 짧게 등장한 후삼국 시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뉜 나라가 셋이 아니라 열 몇 개가 되면 이제 외우기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이 시대를 하나로 묶어 부릅니다. 예를 들어 ‘위진남북조’라던가 ‘오호십육국’이라던가…

이 혼란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춘추전국시대도 저물 때가 되었습니다. 혼란기를 끝내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기에 춘추전국 말기에는 어떠한 형태로 통일될 것인가, 어떤 나라가 통일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역사는 서쪽에 위치한 진秦이라는 나라의 손을 들어줍니다. 서쪽에서 힘을 키우던 이 나라는 동쪽으로 전진하며 한 나라씩 지도에서 지워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천하를 통일합니다. 기원전 221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진나라의 통일에는 법가法家라는 사상가들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법가는 법法, 특히 문서화된 성문법成文法을 기준으로 강력한 통치 체제를 만들어 갑니다. 법이 현존하는 오늘날에는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법이 없던 나라도 있었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맞습니다. 법 없이도 나라는 잘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듯 ‘법 없이도 평화로운, 양심적인’ 사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법 없는’ 아직, 명문화된 법이 없는 사회였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문서화된 법조문이 없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이런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범죄나 사회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는 통치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과거 관리들은 형을 집행하는 권력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판결해주는 역할까지 떠맡았습니다. 한 사람의 판단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시스템이었던 것이지요. 한편 전통적인 관습도 중요한 원칙이었습니다. 관습에 따라 문제를 처리하는 것도 전통 사회에서는 흔한 방법이었습니다.

법가는 법으로 공과를 확실하게 평가했습니다. 공을 세운 자에게는 큰 상을 내렸으며 법을 어긴 자는 엄하게 처벌했습니다. 그 결과 국가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했으며, 공을 세우고자 하는 병사들 덕택에 전쟁에서도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법가의 도움으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던 진은 천하를 재패하고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진의 통일은 새로운 통일 왕조의 등장만을 의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라는 새로운 자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진의 통일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왕’, 혹은 ‘천자’라 불리던 통치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의 통치자는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며 지고至高의 존재를 자처했습니다. 여기서 황제는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진의 군주였던 영정嬴政은 스스로를 첫 번째 황제라는 뜻에서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진시황이 바로 그입니다. 보통 군주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후대 군주가 역사적 공과를 따져 선대의 군주를 부르는 호칭을 붙여줍니다. 이것을 시호라 부르지요. 그러나 진시황은 스스로 시호를 거부하고 그저 ‘첫 번째 황제’로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세운 제국이 자신을 시작으로 만세萬世토록 천하를 지배하리라는 기대감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그의 야망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 이세황제二世皇帝 이후 진은 멸망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 과인은 보잘것 없는 몸이지만 군대를 일으켜 포학한 반도들을 주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혼령이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섯 나라 왕이 모두 자신들의 죄를 승복하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제 (나의)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룬 공적에 걸맞지 않게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제왕의 칭호를 논의하라.”

“…신들이 삼가 박사들과 함께 의론하여 말하기를 ‘고대에는 천황天皇이 있고, 지황地皇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라고 했습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존칭을 올리나니, 황을 ‘태황’이라 하십시오. 명命을 ‘제制’라 하시고, 영令을 ‘조詔’라 하시며, 천자가 스스로를 부를 때는 ‘짐朕’이라 하십시오.”
진나라 왕이 말했다.
”‘태泰’자를 없애고 ‘황皇’자를 남겨둔 후 상고 시대의 ‘제帝’라는 호칭을 받아들여 ‘황제皇帝’라고 부를 것이다. 다른 것은 의논한 바대로 하라.”

…
”짐이 듣건대 태고 때에는 호號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 때에는 호가 있다가 죽으면 행적에 의거해 시호를 삼았다고 한다. 이와 같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논의하는 것이나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지금부터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노라. 짐은 시황제始皇帝라 부른다. 후세부터는 수를 세어 이세二世, 삼세三世에서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하도록 하라.”
- <사기본가>, 김원중 역, 민음사. 219~220쪽

<노자>를 이야기하는데 천하통일과 진시황에 대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노자>라는 책이 천하통일로 성립한 제국의 시대를 좌우로 기록된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노자>라는 책이 완성된 것은 진한교체기를 지나 한대漢代 초기로 추정합니다. 한편 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인간형, 황제라는 통치자와 <노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에서 말하는 도道란 이 지고의 존재의 통치술을 의미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노자>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가봅시다.

 

2.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과 노자老子

<노자>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시선을 통해 노자에 대해 알아봅시다. 사마천이 말하는 노자는 생각보다 복잡한 인물입니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禮’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 데 힘썼다. 오랫동안 주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락해 가는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가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 윤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은둔하려 하시니 저를 위해 억지로라도 글을 써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노자는 《도덕경》 상, 하편을 지어 ‘도道’와 ‘덕德’의 의미를 5000여 자로 말하고 떠나갔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여생을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노래자老萊子도 초나라 사람으로 책 열다섯권을 지어 도가의 쓰임을 말하였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또는 200여 살을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노자가 오래 살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도를 닦아 양생의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 어떤 사람은 담이 바로 노자라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아는 이가 없다. 노자는 숨어 사는 군자였다.
… (이하 생략)
- <사기열전>, 민음사 81~83쪽.

과연 노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어보아도 알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이름조차 몇 개가 튀어나옵니다. 맨 처음에는 이이李耳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노래자老萊子라는 이름을 듭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노자에 대해 당시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마천은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노자가 숨어사는 군자였기 때문이랍니다. 사마천은 공자가 노자에게 배웠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존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인물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노자에 대해 알 수 있는 믿을만한 정보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노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으려 합니다. 일단 역사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증명할만한 자료도 없을뿐더러, 설령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안다고 해서 <노자>라는 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연구를 일부 소개하면 역사적 인물로서의 노자는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춘추시대의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겹쳐서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적 인격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매우 설득력있는 주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텍스트 <노자>와 역사적 인물 노자를 쉽게 연결시키지만 이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노자>는 제목이 <노자>일뿐 역사적 인물로서의 노자와 연관지을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사마천의 글에서 볼 수 있듯, <노자>는 매우 짧은 책입니다. 약 5000여 자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짧은 책은 총 8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앞부분 37장을 <도경道經>, 뒷부분 34장을 <덕경德經>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각각 도道와 덕德이라는 개념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둘, 도경과 덕경을 합쳐, <도덕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노자>의 다른 이름이 바로 <도덕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 둘을 합쳐 <노자 도덕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도덕경>이라고 하지 않고 <노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도덕경>이라고 부를 정도로 ‘경전’의 지위에 오를 만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과겨의 경전이었던 텍스트들도 오늘날에는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잃었기 때문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논어>나 <맹자> 따위를 읽을 때, 그것은 경전이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지혜를 담고 있는 위대한 고전이기 때문에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상이 담겨 있다는 의미에서, 비록 그 실체를 알 수는 없으나 전통적인 호칭을 따라 <노자>라는 이름을 쓰기로 합니다.

<노자>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책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야겠습니다. <노자>에 얽힌 흥미로운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땅은 크고 넓습니다. 그런데 깊이도 깊나봅니다. 1993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무덤이 발견된 것인데, 그 무덤 속에는 죽간 책이 무더기로 들어 있었습니다. 무려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이 무덤에서 나온 문서 묶음을 학자들은 ‘곽점초간郭店楚簡’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곽점초간 가운데 <노자> 일부가 섞여 있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은 이 문서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노자>와 유사하기는 하나 적지 않은 부분이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노자>를 보는 관점도 많이 변할 수밖에 없었지요. 한편 한대漢代에 비단에 적힌 백서帛書 <노자>도 나왔습니다. 이 역시 오늘날의 모습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오늘날처럼 인쇄소에서 인쇄기를 돌려 같은 책을 찍어내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고대의 책들은 계속 모양이 변하면서 유통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체 처음에는 어떤 모양이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곽점초간과 마왕퇴 백서라는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 궁금증이 조금은 풀릴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오늘날과 똑같은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노자>의 본래 모습, 이전 모습을 복원하려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오늘날 통용되는 <노자>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3.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노자>는 ‘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바로 ‘도가도비상도’라는 말로 시작하지요. 이것을 풀이하면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앞서 강의에서 소개한 <장자>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이 이야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자>에서도 이야기했듯 도(진리, 이치 등등)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말할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기왕 시작했으니 <노자>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나머지 부분도 함께 살펴 봅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 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21쪽

<노자>역시 언어의 한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된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은 그 본래의 것에서 많은 부분을 덜어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말로 옮겼을 때의 실망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큼, 느낌만큼 표현하지 못하는 말이 원망스럽지 않던가요? 지금 <노자>역시 그 답답함의 여백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노자>에서 말하는 도란 이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도와 이름 이후에 등장하는 무(없음)과 유(있음)에 대해 주목해봅시다. 무는 세계 시작을. 유는 모든 만물을 아울러 부르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계는 무에서 유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그러나 이렇게 쉽게 말하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무’란 아무 것도 없는 ‘절대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유-있음’과 상대적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냥 ‘없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무엇이 없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빅뱅이전, 물질적인 우주가 구축되기 이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도리어 세계는 무에서 어느 순간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 있어왔던 것이며, 여기서 ‘무’란 늘 있는 그것의 근거가 되는, 시작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작’이라는 말이 직선적인 시간을 떠오르게 만들기에 문제가 된다면 ‘기틀’이나 ‘근본’, ‘바탕’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입니다. 결론만 말하면 이 세계에는 이 무와 유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개념적으로 보자면 이 무와 유, 없음과 있음을 아우르는 더 큰 개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노자>는 이 무와 유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을 일러 ‘현묘玄妙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현묘’는 원문으로 보면 ‘현玄’입니다. <장자>에서 설명했던 혼돈을 떠올리면 쉬울 것입니다. 본래 어둡다는 뜻의 이 ‘현’이란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과 생각이 닿지 않는 저 깊은, 혹은 멀리 있는 무엇. 그래서 그 모습을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없으며 단지 현묘하다, 아득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현묘함, 도道야 말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도’를 철학적인 의미로 풀이합니다. 진리에 대한 <노자>의 설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노자>의 ‘도’를 철학이 아닌 정치적인 의미에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이 ‘도’가 권력의 속성을, 앞서 이야기한 황제라는 지고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계는 다양한 이질적인 존재들이 모여 사는 공간입니다. 이 세계를 과거 사람들의 용어로 옮기면 ‘천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천하는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천하 밖의 세계도 있습니다. 천자의 지배가 닿지 않는 미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요. 과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일컬어 동이족東夷族, 동쪽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천자는 이 미개한 오랑캐들에 대해서도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직 다스림이 미치지 못했을 뿐, 그들도 천자의 통치권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존재들을 다 포괄하고 책임지는 천자-황제는 마치 ‘도’와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존재, 유有를 다스리는 것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무無까지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도’의 속성인 동시에 황제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백성은 언제나 황제의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명확하게 인식된다면 도가 아니듯, 황제 역시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이해될 수 없어야 합니다. 진시황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 ‘짐’이 ‘조짐兆朕’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태가 완벽하게 드러나기 이전을 뜻하는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권력을 가리키고자 했습니다.

황제, 절대권력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백성들, 국민들에게 통치자의 행동이 속속들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언제나 쉽게 알 수 없도록 감춰져야 합니다. 쉽게 알려지면 그것은 누구든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 황제는 백성들의 삶을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많이 알아야만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역사상 절대 권력을 지향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손쉽게 정보를 모으고자했습니다. 그것도 은밀하게.

 

3.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다

不出戶知天下 不闚牖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為而成

문 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문을 통하지 않고도 천도를 본다. 나간 것이 점점 멀어질수록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든다. 이런 이치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명철해지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65쪽.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보았는지요. 거기서는 절대 권력에 의해 통제된 세상을 보여줍니다. 안을 볼 수 없는 검고 커다란 차량이 있습니다. 빙빙 돌아가는 원형 접시를 탑재한 이 차량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대화를 검열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벽을 뚫고 이불 밑을 뚫고 엿듣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의 대화를 수집해야 누가 반동을 꾀하는지, 사람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TV나 매체를 통해서는 언제나 정부를 통해 통제된 정보만 전해질 뿐입니다. 권력이 어떻게 정보를 독점하며, 반대로 어떻게 정보를 조작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지요.

이런 것은 단지 상상 속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영화 ‘타인의 삶’은 공산정권이었던 동독의 한 비밀경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동독에서는 10만 명의 직원과 20만 명의 정보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 주인공인 비밀경찰은 집에 감청장치를 설치하고 이들의 삶을 일거수일투족까지 세세하게 기록합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요.

<노자>에서는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안다’고 말합니다. 과연 누가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 절대 권력을 손에 쥔 황제가 그럴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황제는 가만히 앉아서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편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멀리 나갈수록 아는 것이 점점 줄어듭니다. 여기서 멀리 나간다는 말은 황제의 자리에서 멀리 떠나 간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질수록 아는 것, 정보를 통제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은 점점 줄어든답니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아야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단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따로 무엇을 하지 않고서도 일을 이룰 수 있다(不為而成)고 합니다. 이 말에 주목해봅시다. 무엇을 하지 않고서도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 어떻게 행동 없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손에 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권력이란 한 사람의 능력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힘들을 모두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지요. 황제가 무서운 것은 그가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람을 찢어 죽일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편 매우 영리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만한 말재주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며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가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존재들, 그의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는 말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道常無為而無不為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통치자가 만일 그 이치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299쪽.

‘도 는 항상 무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를 원문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도상무위이무불위道常無爲而無不爲’ 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것도 없다. 이 역설에 주목해야 합니다. 도는 이 세상의 움직이는 근본 원인입니다. 그것은 모든 움직임의 중간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도 없이는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도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늘 ‘하지 않는 모양’(無爲)으로 우리에게 보입니다. 그렇다고 도에게 아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도리어 이 도란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앞에서 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진은 법을 사회 통치의 중요한 개념으로 삼은 뒤, 구체적인 법령으로 사회를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황제’입니다. 법 위에 있는 존재, 법 바깥에 있는 존재기 때문에 그는 역설적으로 법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법이 있기에 황제는 일일이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고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법에 얽매여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 법을 바꾸거나, 혹은 법의 예외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이 법을 두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려 하다가는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의 저편에 있으면서 만물이 스스로 돌아가도록(自化) 두어야 합니다.

 

4. 뺏고 싶으면 먼저 주라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強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強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不可以示人

장차 접고 싶으면 먼저 펴 주어야 한다. 장차 약화시키고 싶으면 먼저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장차 폐지하고 싶으면 먼저 잘 되게 해 주어야 한다. 장차 뺏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명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고기는 물을 떠나면 안 되고,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들을 교화하려 하면 안 된다.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293쪽.

<노자>는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번에 인용한 문장 역시 역설입니다.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해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답니다. 빼앗고 싶다면 먼저 줘야 한답니다. 그런가하면 무엇인가를 없애고 싶다면 먼저 잘 되게 해줘야 한답니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한편 그러면서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나중에 <주역>에서도 볼 수 있는, 모든 일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흐름의 중요한 특징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늘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너무 한쪽으로 힘을 강하게 주는 것은 도리어 반대 방향으로 힘을 강하게 주는 것과 같게 됩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배운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떠올리면 됩니다. 물리학에서도 하나의 힘이 한쪽으로 작동하면 그 반대로 그와 같은 크기의 힘이 작동합니다. 사람 사이의 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끔 하고자 한다면 그 반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지 않고 빼앗으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빼앗으려고만 한다면? 일단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아니면 위협이 될 만한 무엇이 필요하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빼앗았다고 합시다. 문제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문제가 될 소지가 많습니다.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한번은 괜찮을지 모르나 계속적으로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를 나랏일에 비유 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걷고 싶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걷기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무력이 강할수록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저항도 만만치 않게 강력하겠지요. 너무 폭력을 사용하면 자칫하다가는 군주의 자리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폭력으로, 강압으로 이루어놓은 평화는 오래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일단 주고 은근히 빼앗아야 합니다. <노자>에서는 이를 두고 미명微明, 미묘한 지혜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微, 드러나지 않도록,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빼앗을 수 있으며, 계속해서 빼앗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와 비슷한 예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 거대 통신사들이 등장했습니다. SK나 KT 등등. 그러나 이 통신사들이 이처럼 거대하게 성장한데는 기술의 발전이나 소비자들의 수요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핸드폰이 싸게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기계를 싸게 주고 그 동안 그 수십 배의 통신료를 오랫동안 천천히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꺼내가는 것이지요. 빼앗으려면 주라는 교훈을 잘 실현한 것입니다.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들은 ‘일단 주라’는 명령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작은 사은품에 혹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이 소비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일단 작은 것을 주어야 더 많이 소비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질문해야 합니다. 미명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엇인가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빼앗기는 것은 아닌지. 자본주의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은 ‘교환의 법칙’으로 돌아간다는 점입니다. 주는 것은 빼앗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교환은 결코 등가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주는 것만큼 빼앗는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기 위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권력이란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노자>가 말하는 은밀한 지혜, 즉 도道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자>식의 도를 우리 삶의 지혜로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천하를 지배했던 절대 권력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떠오릅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실질적인 정 치적 수장인 대통령이라던가, 아니면 입법부의 국회의원들. 한편 정말로 보이지 않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대기업 총수들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을 크게 지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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