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선농인문학서당 《논어》 7강 – 공자, 그 이후

1. 백가쟁명百家爭鳴

‘춘추전국春秋戰國’이란 말은 지금까지도 일종의 혼란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본래 이 말은 《춘추》라는 책과 《전국책》이라는 두권의 책에서 이름을 따왔다. 《춘추》는 공자의 고향 노나라의 역사서이며, 《전국책》은 여러 나라들의 전쟁, 책사들의 활약을 기록한 책이다. 책의 배경에 따라 ‘춘추전국’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기에 칼로 자르듯 구분지어지지 않는다. 학자들마다 둘을 구분하는 시점이 서로 다르기도 하다.

대략적으로 ‘춘추시대’란 주周나라가 서쪽의 수도를 버리고 동쪽으로 천도하면서부터 시작하여, 진晉나라가 셋으로 나뉜 시기까지를 이야기한다. 기원전 770년 ~ 기원전 403년까지가 이 기간이다. 중국의 고대 왕조인 주周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매우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의 왕은 스스로를 천명天命을 받았은 천자天子로 주장하며 천하의 지배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넓은 땅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자신의 친족이나 공신을 내려보내 주어 다스리게 했다. 이를 ‘봉토건국封土建國’, 즉 땅을 나누어 나라를 세워주었다고 말하며 간단히 줄여 ‘봉건封建’이라 말한다.

주나라의 천자에게 땅을 떼어받아 나라를 맡은 이를 제후諸侯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호칭은 공公이었다. 이들은 주왕실에 문제가 있을 때 군대를 이끌고 천자를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노나라는 주나라를 건국한 주무왕의 조카에게 떼어준 나라였다. 공자가 그토록 존경했던 주공周公은 주무왕의 동생이었고, 노나라의 시조는 주공의 아들 백금이었다. 한편 《논어》에서 가끔 언급되는 이웃 제나라는 그 유명한 강태공에게 떼어준 나라였다. 주무왕은 은나라 주왕의 폭거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고자했는데, 그의 모사역할을 해주었던 것이 강태공 여상이었다. 그는 주나라를 건립한 이후 제나라의 초대 제후가 되었다.

이처럼 주왕실을 중심으로 엮인 관계 때문에 제후국 간에는 큰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한 핏줄, 한 집안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나라가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주나라가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것은 오랑캐의 칩입 때문이었는데, 이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당시 주나라 임금은 유왕幽王이었는데 그는 미인 포사를 후궁으로 들였다. 포사는 웃지 않는 여자여서 유왕은 그를 웃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들였다. 그 가운데는 비싼 비단을 찢기도 했는데, 비단 찢는 소리에 포사가 살짝 웃음을 짓자 유왕은 비싼 비단을 모아다 찢어가며 포사의 웃음을 즐겼다고 한다. 한번은 봉화가 잘못 올라가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모여들었다. 오랑캐의 침입으로 주나라 수도가 위태롭다고 여긴 까닭이다. 그러나 아무일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허탈해 할 수밖에. 그걸 보고 포사는 크게 웃었다 한다. 이를 반갑게 여긴 유왕은 시시때때로 봉화를 올렸고, 제후들은 군사를 이끌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 이제 봉화를 올려도 제후들이 모이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정말로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에 주왕실을 구하러 온 제후는 없었고 이에 주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렇게 되었으니 주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실적인 힘도 약해진 상황. 결국 상징적인 힘만을 갖게 된다. 이것이 춘추시대의 시작이다. 한편 진의 분할은 또다른 사건이기도 한데, 이는 주왕실의 틀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은 한韓, 조趙, 위魏 셋으로 갈리는데 본디 이 셋은 진나라 아래에 있던 대부들이었다. 이들은 세력을 키워 진나라 군주를 몰아내고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힘만이 으뜸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참고로 새로 세워진 위나라의 초대 군주, 위문후魏文侯의 손자가 위혜왕魏惠王이다. 혜왕 시기에 이르러 위나라는 사방 나라의 공격으로 국력이 크게 깎인데다 수도를 대량大梁량으로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말년에는 위나라라는 이름 대신 양梁을 나라 이름처럼 썼다.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양혜왕’! 맹자에 등장하는 양혜왕이 바로 그다.

《맹자》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위나라는 서쪽의 진秦나라, 동쪽의 제나라에게 크게 패했다. 서쪽의 진나라의 경우 상앙이라 불리는 이의 활약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상앙은 본디 위나라 출신이었는데 위혜왕이 자신을 등용하지 않자 서쪽 진나라로 가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위나라의 재상이었던 공숙좌란 인물은 위혜왕에게 상앙을 등용하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라며. 한편 등용하지 않을 경우엔 그를 죽이라 말했는데 위혜왕은 죽음을 앞둔 이가 판단히 흐려져 내뱉은 말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는 혹독했다. 한편 제나라의 군대를 이끈이는 손빈이라는 이였는데,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그는 위나라 장군이었던 방연의 미움을 사, 무릎뼈가 뽑히고 얼굴에 죄목을 새기는 형벌을 받는다. 그것도 위나라에서! 그의 이름 ‘빈’은 앉은뱅이라는 뜻이다. 그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제나라의 모사가 되어 위나라로 쳐들어온다. 그리고 자신을 그 꼴로 만든 방연을 죽이고 위나라의 태자도 사로잡았다.

한때 제법 강성한 나라였던 위나라는 이렇게 몇 차례의 전쟁으로 초라하게 망가진다. 흥미롭게도 위나라를 공격한 두 나라는 저마다 공을 세울 훌륭한 인재를 가지고 있었다. 위나라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인물! 위혜왕-양혜왕이 맹자와 같은 이들을 불러 모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맹자를 불러놓고 묻는 말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할까, 백성을 늘려 군대를 만들까 하는 생각들이 아니었겠나.

각 나라가 서로 군사력을 두고 다투는 시대에, 유리한 조건을 취하려면 인재를 많이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인물이 내놓는 책략, 제도 개혁에 따라 나라가 흥할수도 있고 망할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위혜왕이 내친 상앙은 진나라의 기틀을 닦고, 훗날 진나라는 상항이 닦은 기틀 위에서 천하를 통일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군주들이 인재를 찾은만큼 저마다 공을 세워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편 공을 세우기 보다는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두고 저마다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학설을 가진 사상가와 그 학파를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른다. 이들은 저마다의 주장을 날카롭게 내세우며 치열한 논쟁을 그치지 않았는데 이를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 맹자와 장자, 순자, 한비자, 묵자, 소진, 장의 같은 인물이다. 이들이 활약한 시대에는 당연히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 부른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공자로 돌아오면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를 살았다. 주나라의 체제가 무너지고 제후국 안에서도 슬슬 새로운 힘들이 등장할 시대! 노나라의 군주는 계손씨 등의 대부에 힘을 다 빼앗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웃 제나라의 정치도 혼란스러워 군주가 대부의 집에서 죽음을 맞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의 체제가 그나마 남아 있었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주공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꿈에서 주공을 만나볼 수 없다고 한탄하지 않았나. 주나라의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들이 꿈꾼 것은 무엇이었을까?

 

2. 공자의 후예들

《논어》를 읽어보면 여러 제자들이 등장한다. 이 제자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텐데, 자로, 안연, 자공, 염유 등 《논어》 전반부에 많이 등장하는 제자들이 하나라면, 증삼, 자유, 자하, 자장 등과 후반부에 주로 등장하는 제자도 있다. 전자는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공자를 따라다닌 제자로 추정되며, 후자는 공자가 고향 노나라에 돌아온 이후에나 공자의 제자가 된 이들로 여겨진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공자의 제자들은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그 다음 공자의 자리를 대신할 인물을 세우는데 그가 바로 유약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용모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용모야 말로 그의 덕德이 표현된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약이 스승 공자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은 거꾸로 스승과 비슷한 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는 이에 반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증삼이 그 대표 인물이었다.

어쨌든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제자들은 여러 흐름으로 나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성공한 인물은 자공이었는데, 《논어》를 보면 그가 얼마나 큰 명성을 얻었는지, 스승 공자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물론 그는 빼어난 말솜씨로 그러한 칭찬에서 빗겨나간다. 〈자장〉을 보면 자유, 자하, 자장 등이 서로 충돌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 서로 다른 학파를 구성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실재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 여겨지는 인물들은 정작 자신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이어갈 제자를 만들지 못했다. 그의 가르침은 직접 대면하여 함께 했던 인물이 아닌 다른 이들을 통해 새롭게 계승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조차 그의 가르침을 이어, 발전시킨 것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도, 반석 베드로도, 형 야고보도 아닌 예수와 일면식도 없는 바울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 후에 그를 계승한다며 큰 소리를 치고 세상에 나온 인물이 있으니, 바로 맹자이다. 그는 스스로 자사의 제자에게 배웠다고는 하나 그 계통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맹자 자신의 주장일 뿐. 어쨌건 후대에 그려지는 계보는 이렇다. 공자 – 증삼 – 자사 – 맹자.

이 계보는 후대에 교과서적인 공식 흐름이 된다. 이를 매우 중시여긴 인물이 바로 주희였다. 그는 네 권의 책에 주석을 달고 이를 경전으로 높였는데, 바로 사서四書 - 《論語》,《孟子》,《大學》,《中庸》이 이것이다. 우리가 흔이 알고 있는 사서삼경은 여기에 《시경》, 《서경》, 《역경》을 더한 것이며 사서오경이란 여기에 다시 《예기》와 《춘추》를 합한 것이다. 그러나 주희의 이런 해석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흐름을 배척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바로 순자의 것이 그렇다.
순자는 맹자의 후배격인 인물이었는데 그는 맹자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였다. 그가 맹자를 비판한 이유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이상한 주장을 덧붙였다는 것이다. 그는 증삼과 맹자를 한데 묶어 비판한다. 한편 다른 공자의 제자들도 그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말은 무덤덤하며, 우 임금의 걸음에 순 임금의 달리기를 흉내내는 자들은 자장씨 부류의 천한 유생이다. 의관을 바로 하고, 표정을 엄숙하게 하며, 겸손한 듯 하루 종일 아무 말이 없는 자들은 자하씨 부류의 천한 유생이다. 고생을 꺼려 일을 무서워하고, 염치가 없어 먹고 마시는 것만 좋아하면서, 군자는 힘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유씨 부류의 천한 유생이다.” – 《순자》, 책세상, 장형근 옮김. 31-32쪽

그의 비판을 떠나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은 간단하다. 자신이야 말로 공자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를 보면 그는 이단으로 치부되었고 맹자야 말로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다른 시각의 연구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맹자를 과연 공자의 후예로 넣을 수 있는가 의문이다. 맹자는 스스로 공자의 가르침을 이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맹자가 이야기하는 공자의 모습과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모습이 적지 않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공자의 학문은 맹자와 순자라는 서로 다른 흐름으로 계승되었다고 본다. 이 두 흐름 가운데 실제로 살아남은 흐름은 순자의 흐름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순자의 제자로 이름을 떨친 것은 한비자와 이사였다. 둘 가운데 이사는 진시황을 보좌하여 진의 천하통일을 도운 인물로 유명하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휴대의 유학자들이 순자를 그토록 미워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자 새로운 체제를 만들고자 한다. 일단 기존의 천자를 왕이라 불렀지만 새로운 칭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황제’라는 칭호다. 진시황이란 ‘진나라의 첫번째 황제’라는 뜻으로 그가 스스로 만들어 붙이니 호칭이다. 한편 그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를 세웠으며, 언어도 통일시켰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저 큰 중국이 커다란 몸집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의 업적 때문이라 말하는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이러한 진시황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다. 옛 제도를 운운하며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결국 이들을 땅에 파묻고 이들의 말을 기록한 책을 불태우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다. 일종의 사상 탄압이 일어난 것인데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여튼 통상적인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공자의 말도, 그의 후예를 자처하는 지식인들도 싸그리 사라졌다.

진시황의 통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고작 20년 정도를 통치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매우 비참했는데, 지방을 순회하던 길에 죽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죽을 경우 수도로 빨리 돌아가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환관 조고와 이사는 꾀를 내어 일을 꾸민다. 첫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어린 호해라는 이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어린 황제는 아무 일도 스스로 못했는데, 한번은 조고가 사슴을 데리고 왔다. 황제가 이를 사슴이라 하자 조고가 이를 말이라 우겼는데 신하들도 모두 조고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러니 나라가 무너지는 것도 한 순간이다. 두번째 황제가 나라를 다스린 것은 고작 2-3년 밖에 되지 않는다. 천하는 다시 어지러워지고 이때 크게 일어난 인물이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였다. 이 둘의 싸움은 오늘도 장기판 위에서 반복된다. 결과는 한나라의 승! 결국 천하의 새로운 지배자는 유방이 된다. 유방은 본디 비천한 출신으로 산적떼의 우두머리였다. 역사에는 그의 거침없는 행동이 많이 담겨 있다. 그에게는 여러 인물이 모여들었는데, 유학자를 자처하는 이를 만날 때면 갓을 벗게 하고 그 갓에 오줌을 누었다한다.

그런 그였지만 역생이라는 유학자의 말을 듣고는 달라진다. 그가 했던 말은 유명하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리를 수는 없습니다.’ 즉 전쟁으로 천하를 일시적으로 지배할 수는 있지만, 안정적으로 다스리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 활약한 인물이 바로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관직을 어떻게 정하며, 임금과 신하의 복식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했다.

한나라 초기는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한무제에 이르면 크게 안정되어 국력이 매우 탄탄해진다. 이때 이르러 유가, 유학자의 학문은 한나라를 통치하는 지배 이념이 된다. 이제 공자는 제자백가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유일한 스승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3. 《논어》와 그의 해석자들

분서갱유의 결과 고대의 문헌이 많이 사라졌다. 분서갱유 자체의 신빙성에 의문을 던지는 연구자들은 고대 문헌이 많이 사라진 것은 오랜 전쟁의 결과이며, 설사 사상 탄압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부에 그쳤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적 사실이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옛 문헌이 정리 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논어》의 경우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공자의 고향 노나라에 전해지는 논어가 있고, 이웃 제나라에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한다. 한편 분서갱유를 피해 공자의 집 벽 속에 숨겨둔 논어가 후대에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한나라 시대에 유가가 지배 이념이 되면서 《논어》도 정리해야 했는데, 초기 학자들은 이 셋을 묶어 하나의 책으로 정리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보는 20편의 《논어》가 완성되었다. 다만 오늘날 한나라 시대에 정리되었다는 그 《논어》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대의 글이 모두 썩거나 불태워진 까닭이다.

오늘날에도 《논어》 문장만을 가지고는 아리송하듯 옛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설이 붙어야 했는데, 옛날의 방법은 각 문장에 주석을 붙이는 식이었다. 여러 주석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주석은 한나라 말기에 하안이 정리한 《논어집해》이다. 그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논어》에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하안 이후 가장 중요한 사람은 송나라의 《주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른바 ‘주자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는 앞서 이야기했듯 《논어》를 비롯한 여러 책에 주석을 붙였는데 원나라 이후 그의 주석은 교과서의 지위를 얻는다. 과거 시험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주희의 주석을 기준으로 답안을 제출해야 했다. 우리가 아는 유학자 대부분, 그러니까 조선의 선비들은 주희의 주석을 달달 읽고 외웠다고 보면 된다.

그의 주석에 대해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의 경우 후기에 이르면 그의 주석과 다른 해석을 내놓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논어고금주》라는 책을 내놓는데, 여기에 주희의 주장과는 다른 여러 해석을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번역되는 《논어》는 다산의 해석을 참고한 경우가 많다.

20세기에 이르러 서구와의 접촉은 적지않은 충격을 선물했다. 이른바 근대의 흐름에서 《논어》와 공자는 이전과는 다른 지위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공자의 지위는 점점 높아져 나중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사상계의 천자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충격에 대해서는 공자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중국에서는 전통의 낡은 구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운동을 벌이자는 흐름이 생겨났는데 그때의 구호가 ‘타도공가점’, 공자의 무리를 쳐부수자 였다. 이제 공자는 성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낡은 전통과 쓸모없는 허례허식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 한정하녀 말하면, 공자의 지위는 최근들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자신의 문화와 문명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새로운 위상을 체득했다. 《논어》를 읽는 흐름이 새롭게 생긴 것도 이러한 흐름의 결과이다. 중국의 일부 학교에서는 어려서 《논어》를 읽고 암송시키기도 한다고 한다.

모든 고전은 시대의 조건에 따라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 해석의 여지가 사라진다면, 다 소전되어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껍데기 뿐이라면, 고전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논어》의 자리는 견고해 보인다. 단순히 《논어》를 읽는 사람이 많고, 끊임없는 번역본이 나오고 있다는 뜻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지난 2000년의 변화 가운데서도 어쨌든 인간 공자의 삶을 증거하며,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유일한 책이 바로 《논어》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의 경우 오래되었다는 자체로 새로운 힘을 얻는 경우가 있다. 손 때 묻은 책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선물한다. 《논어》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그 숱한 전란에도, 혼란에도, 불타고, 파묻히는 위기에도 이 책은 살아남았다. 단순히 콘크리트 속에 묻혀, 방부제 틈 속에서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추어 끊임없이 해석되었고, 새로운 의미들을 낳았다. 누군가 시간의 흐름은, 역사는 강력한 이빨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날카로운 이빨은 여러 가지를 물어 뜯는다. 그래서 흔적조차 찾지 못하도록 없애버린다. 《논어》는, 공자는 그 매서운 시대의 이빨에도 살아남았다.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대의 이빨의 힘에 저항한다는 뜻이며, 거꾸로 시대에 집어 삼키지 않고 반대로 시대를 짓이기고 새로운 길을 내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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