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선농인문학서당 《논어》 5강 – 공자의 제자들

1. 열 명의 제자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德行 顏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 言語 宰我 子貢 政事 冉有 季路 文學 子游 子夏

공자는 방랑길에서 몇 차례의 위험한 상황을 겪는다. 광匡에서는 양호로 오인받아 구금되기도 했으며, 사마환퇴는 공자를 죽이려했다. 여러 고난 중에서도 으뜸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겪은 일일 것이다. 발이 묶여 오가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식량마저 떨어져 버렸다. 《논어: 위령공》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자로는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 대해 불만을 쏟아낸다. 군자도 이렇게 곤궁할 때가 있느냐며. 이때 공자는 군자는 본디 곤궁하며, 소인은 곤궁할 때를 견디지 못한다고 답한다.

다른 기록들을 참고하면 이때 자로의 말은 그저 투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자와 함께있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 고난의 길을 함께 걸은 제자. 공자의 말을 참고하면 적어도 10명이 함께 있었다.

여기서 공자는 네 부류의 열명의 제자를 언급한다. 덕행 – 덕을 쌓아 인품이 훌륭한 제자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었다. 언어 – 말 재주가 좋았던 제자로는 재아와 자공이 있다. 정사 –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염유와 자로가 있었다. 문학-옛 문헌을 다루는 일에는 자유와 자하가 있었다. 이렇게 네 분야, 열명의 제자를 일컬어 ‘사과십철四科十哲’이라 부른다. 훗날 공자가 성인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들의 지위 역시 덩달아 높아졌다. 스승이 직접 손꼽아 이야기한 제자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공자의 신위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에 이들의 위패도 올라갔는데, 그 최종적인 명단은 이렇다.

공자 아래에 사배四配 – 복성複聖 안회, 종성宗聖 증삼, 술성述聖 공급(孔及-子思), 아성亞聖 맹자가 있고, 다시 그 아래에 십이철十二哲 –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아, 자공, 염유, 자로, 자유, 자하, 자장, 유약, 주희가 있다. 위의 십철이 십이철이 된 것은 안회가 사배의 자리에 올라갔고, 자장, 유악, 주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과십철은 공자의 제자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공자와 제자들의 행적을 알아볼 수 있는 기록으로 사마천의 《사기》가 있다. 그 가운데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은 마지막 수업에서 읽을 예정이다. 사마천은 훗날 공자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를 바탕으로 제자들의 명단을 정리했다. 그 가운데는 29명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었으며 48명은 이름과 같은 간단한 정보만 전해진다. 총 77명의 제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다. 한편 사마천은 공자를 거쳐간 제자가 3천 명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를 간단히 표현하면 삼천문도, 칠십제자, 사과십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10명도 다 이야기하기엔 적지 않은 숫자다. 그 가운데 누구에게 집중하는 것이 좋을까? 공자의 제자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안연일 것이다.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니. 그 뒤이어 가장 오랫동안 공자와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로가 와야 한다. 그 다음에는 자공이나 염유가 나와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인 차이점을 보여주는 염유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십철 가운데 문학에 문학에 이름을 올린 자유와 자하는 공자보다 45살 가량 어린 제자로, 한참 뒤에나 공자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공자의 말년 제자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공자와 오랜시간 함께 한 제자가 더욱 중요하기에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민자건, 염백우연 중궁은 관련 기록이 그렇게 많지 않다. 재아는 공자로부터 크게 꾸중을 들었던 제자이기도 하다. 낮잠을 잤다고 썩은 나무 취급을 당할 정도였다.

 

2. 사랑하는 제자, 안연

공자의 수제자를 꼽는다면 누가있을까? 《논어》를 잘 읽으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공자가 정확히 한 인물을 꼽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바로 안연!

哀公問 弟子孰為好學 孔子對曰 有顏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공자가 긴 유랑 생활을 마치고 고향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나눈 이야기로 추정된다. 노나라의 군주 애공은 공자에게 제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제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스승 공자처럼 배움을 사랑한 제자! 과연 누가 있을까? 공자는 안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대상에게 화를 내지 않고, 거듭 잘못하지 않았단다. 공자의 말대로만 할 수 있더라도 범인의 경지는 가뿐히 뛰어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제자가 지금 곁에 없다.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탓이다. 이 제자가 남긴 흔적이 얼마나 큰지 그 이후로 제대로 배움에 정진하는 제자를 만나보지 못했단다.

공자는 꽤 장수한 인물이다. 그 옛날 73세까지 살았으니. 그러다보니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을 보아야 했던 아픔도 있다. 공자의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논어》에 등장하는 제자 가운데 적어도 3명이 먼저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가운데 공자가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제자는 딱 한 명 뿐이다. 바로 안연이다. 안연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공자는 매우 상심했던 모양이다. 하늘이 자신을 버린다고 좌절하는가 하면, 크게 애통하며 울기에 제자들마저 당황할 정도였다. 몇 문장이 이어 기록된 것을 보면 안연의 죽음은 꽤 큰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안연이야 말로 공자가 기대한 사람 다움의 경지 – 인仁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의 말을 참고해 보아도 그는 공자가 기대한 인격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子曰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게다가 안회는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매 끼니를 간단한 밥과 물 정도로 때워야 했다. 게다가 그가 사는 곳은 매우 궁벽한 곳이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었단다. 가난한 삶도 흔들지 못한 무엇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단사표음簞食瓢飲, 누항陋巷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편 이런 안연의 삶을 두고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논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공자는 결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선생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차별’하는 못된 선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공자는 똑같은 인격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차별하는 선생이었다기 보다는 차이에 주목하는 선생이었다. 사람이 서로 다른만큼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게 중요한 원칙이었다. 그러다보니 제자들 마다 배운 내용이 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훗날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顏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為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為仁由己 而由人乎哉 顏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顏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안연의 이 질문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나왔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한데, 전통적으로 자신의 개별적인 욕망을 이겨서 공동체의 예를 회복함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극기’라고 하면 이를 악물고 도전하는 것 따위를 이야기하는데 본디 《논어》에는 그런 의미는 전혀 없다. 공자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대단히 갑갑한 가르침이다. 이를 따라 후대 유학자들에게는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 이것저것 제한하는 다양한 가르침이 만들어졌다. 예의 바른 몸가짐이라고 할 때 연상되는 무엇은 바로 이 문장에서 시작된 것이 많다. 그러나 이 문장은 안연과 나눈 이야기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하자. 게다가 안연 역시 이 가르침을 열심히 실천해보겠다고 말하지 않나?

 

3. 우정의 힘, 자로

《논어》를 읽다보면 웃음을 품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인물의 성격, 태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렇게 되는데, 자로라는 인물은 그 단골 손님이다.

顏淵 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顏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안연과 자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다. 문득 공자 선생이 묻는다. 너희들 각자가 품고 있는 뜻을 말해보거라. 먼저 대답을 꺼내는 것은 자로이다. 자로는 매우 적극적인 인물이다. 나쁘게 말하면 나서기 좋아하는. 이런 자로의 성품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子謂顏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며 이야기한다. 등용되면 나랏일을 맡아 행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 너와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때 옆에 있던 제자 자로가 불쑥 끼어든다. 나라의 군사를 맡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고.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들어 칭찬해주기를 바랐을 테다. 그러나 이 선생은 만만치 않다. 여기서 나오는 포호빙하暴虎馮河라는 사자성어를 풀이하면, 맨 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 몸으로 황하를 건넌다는 뜻이다. 무턱대고 일에 뛰어든다는 의미. 그런데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러다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 바로 자로가 그런 사람이란다.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과는 아무 일도 함께 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대답한다. 이때 자로의 표정은 어땠을까?

맨 처음 소개한 문장도 비슷하다. 선생의 질문에 자로가 먼저 대답한다. 수레나 가죽 옷을 친구와 나눠쓸 수 있는 통큰 사람이고 싶다고. 게다가 친구가 잘못하여 상하더라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겠다고. 자로는 꽤 시원시원한 성격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모범생 안회의 대답. 잘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수고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너무 교과서 같은 대답이다. 자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멋진 대답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안타까웠을까? 자기보다 까마득한 후배가 바른말을 골라 하는 모습에 못마땅했을까? 여튼 자로는 빨리 화제를 돌린다. 선생님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자로는 《논어》 안에서 늘 꾸중을 듣는 인물이다. 그는 좀처럼 칭찬을 듣지 못한다. 혹시나 뭔가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싶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는 순간 스승의 날카로운 말이 날아온다.

子曰 道不行 乘桴浮于海 從我者其由與 子路聞之喜 子曰 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어지러운 세상! 이 세상에서 뜻을 펼칠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니 차라리 뗏목이나 타고 바다로 나가볼까? 그런 우울한 생각이 드는 순간에도 제자들 가운데 홀로 자신을 뒤따라 올 사람은 자로 뿐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그는 충심으로 스승을 따르는 인물이었다. 계산하지 않는 과감함, 이것이 자로의 미덕이었다. 이 칭찬을 듣고 자로는 우쭐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스승이 알아줬다는 생각에 아마도 크게 자랑하며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를 보고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로는 용기를 좋아함이 나를 능가하지만, 분별력이 없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자로는 협객 출신이었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공자의 호위 무사 역할을 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여튼 자로는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제자다. 그 때문인지 자로는 여러 제자 가운데 공자에게 싫은 소리를 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위령공의 부인 남자南子를 만나고 돌아왔다. 이것을 두고 수근대는 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자의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와의 개별적 면담에 어떤 스캔들이 퍼졌는지도 모른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이 둘의 만남에 있어 어떤 여백을 남겨두고 있다. 혹자는 이 서술을 들어 사마천이 공자를 이야기하는데 남자와의 만남을 악의적으로 편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공자의 생애 가운데 오점으로 남을만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자로는 여러 제자의 침묵을 깨고 홀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이 외에도 자로는 공자에게 여러번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때마다 공자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기에 바쁘다. 이 부분에서 나는 ‘사제’라는 관계의 또 다른 국면을 발견한다. 자로만이 그렇게 감정을 표출했다는 것, 그리고 공자가 그 자체를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둘 간의 긴밀한 유대를 말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 문장도 가볍게 웃어 넘길 수도 있어 보인다.

子路使子羔為費宰 子曰 賊夫人之子 子路曰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 然後為學 子曰 是故惡夫佞者

《논어》 전체에서 자로는 그렇게 말을 잘하는 인물로 언급되지 않는다. 저 말을 한 공자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체념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말이었을까? 개인적으로 공자와 자로가 부딪히는 부분에서 공자가 자로에게 갖는 애틋함의 흔적을 발견한다. 아마 저 말도 날카로운 가시가 돋힌 그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명대의 사상가 이탁오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우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공자와 자로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4. 힘이 부족하여, 염유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예나 지금이나 끝까지 가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인지 염유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처럼 생생하다. ‘선생님의 강의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없어서…’, ‘책은 좋은데 읽기가 힘들어서…’ 그러나 공자는 그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한다. 끝까지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멈추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보통은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스스로 한계를 긋는(畫)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한 제자. 염유가 바로 그렇다.

염유의 이런 면모는 공자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염유는 여러 제자 가운데 제법 성공한 경우였는데, 노나라의 실권자인 대부 계씨 집안의 가신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한계를 긋는 행동은 권력과의 관계에서 날카로움이 무뎌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女弗能救與 對曰 不能

계씨가 자신의 지위에는 걸맞지 않게 태산에 제사를 지냈다. 공자는 이를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제자 염유를 불러 묻는다. 네가 막을 수는 없었느냐? 염유의 대답은 단호하다. ‘없었습니다.’ 그의 짤막한 대답은 거꾸로 그의 일관된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송곳》의 고구신이 그렇게 말했다지 않나. 싸워봐야 상대와 나의 선을 확인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제야 그 선을 넘느냐 마느냐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선을 긋는다면? 그 선은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선이 되고 만다. 산을 쌓듯 요원해 보이는 일이라도 하겠다고 했던, 대부의 전횡을 비판하며 예악이 무너짐을 안타까웠던. 이런 모습을 생각할 때 공자와 염유의 갈등은 당연한 결과였다.

季康子問 仲由可使從政也與 子曰 由也果 於從政乎何有 曰 賜也 可使從政也與 曰 賜也達 於從政乎何有 曰 求也 可使從政也與 曰 求也藝 於從政乎何有

계강자는 공자의 숱한 제자 가운데 자로와 자공, 염유를 콕 집어 물어본다. 아마도 이 셋은 당대에도 유능한 인물로 이름을 널리 떨쳤으리라. 그 가운데 염유에 대해 공자는 ‘藝’ 재주가 많다는 뜻이다. 사과십철의 구분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나랏일에 있어 유능했다. 그래서 같은 분야에 이름을 올린 자로와 주로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둘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자로는 과감하여 성큼성큼 일을 처리하는 식이었다면 염구는 반대로 소극적이어서 꼼꼼하게 일을 처리했던 인물이었다. 이 둘의 차이 때문에 공자는 똑같은 질문에 다르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公西華曰 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이 둘의 차이는 자공의 질문, 자장과 자하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하느냐는 질문을 떠오르게 만든다. 여기서 공자가 한 말이 그 유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 본래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는 뜻이지만 ‘猶’에 ‘도리어’라는 뜻이 있는 바람에 ‘지나치는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논어》의 맥락에서 보자면 과연 그것이 맞는가 의문이 든다. 모자르기 보다는 차라리 넘치는 것이 낫지 않는가?

공자와의 갈등은 세금 징수에서 폭발한다.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為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

혹자는 공자의 이 말 ‘비오도야非吾徒也’라는 표현에서 염유가 공자의 문하에서 파문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과연 그랬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자 말년에 염유는 노나라의 실력자 측근에 있는 훌륭한 자원이었다. 공자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과연 그 말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먹혔는지도 문제다. 안연의 죽음을 두고도 제자들이 스승의 말에 상관없이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았나.

참고로 이 문장의 표현 때문에 옛 성균관에서는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붙여두고는 북을 두드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고 한다. 이를 ‘명고鳴鼓’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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