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논어》 읽기 #6 – 〈술이〉, 〈태백〉

인仁, 만물을 한몸으로 여기는 마음

공자가 인을 어떻게 규정했든 간에 주희에게 인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는 인에는 조금이라도 사욕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런 입장에서는 인은 매우 정태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천리와 합일함을 강조할 수록 인은 정감적인 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옹야편 마지막 문장의 주석에서 언급된 인에 대한 설명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희는 명도의 글을 인용하면서 인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소개하고 있다.

醫書以手足痿痹為不仁,此言最善名狀。仁者以天地萬物為一體,莫非己也。認得為己,何所不至;若不屬己,自與己不相干。如手足之不仁,氣已不貫,皆不屬己。故博施濟眾,乃聖人之功用。仁至難言,故止曰:『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能近取譬,可謂仁之方也已。』欲令如是觀仁,可以得仁之體。

명도에 주장에 따르면 인이란 어떤 감각이다. 그 감각이 천지만물에까지 이르는 것을 인이라 본다. 다르게 말하면 무감의 상태야 말로 불인不仁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렇게 보면 인이란 단순히 내면의 본성을 지켜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타자를 향해 활짝 열려 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것이 된다.

통상적으로 송명 사상사를 이야기할 때 정씨 형제 가운데 주희는 이천을 계승하였으며, 왕수인은 명도를 계승했다고 본다. 주희가 명도의 논의를 배격한 것은 아니지만 명도의 주장에서 보이는 보다 동태적이고 활발한 면모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행知行의 문제에서 보면, 주희의 주장은 확실히 인식적인 측면이 보인다. 그에게 실천이라는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적극성이 떨어진다고 해야할까?

명도는 식인편識仁篇 이라는 글을 지어 이러한 주장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를 아래에 간단히 소개한다.

學者須先識仁。仁者,渾然與物同體,義、禮、智、信皆仁也。識得此理,以誠敬存之而已,不須防檢,不須窮索。
若心懈,則有防;心苟不懈,何防之有!理有未得,故須窮索;存久自明,安待窮索!此道與物無對,「大」不足以明之。天地之用,皆我之用。孟子言「萬物皆備于我」,須「反身而誠」,乃為大樂。若反身未誠,則猶是二物有對,以己合彼,終未有之,又安得樂!《訂頑》意思,(橫渠西銘,舊名《訂頑》。)乃備言此體,以此意存之,更有何事。「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勿助長」,未嘗致纖毫之力,此其存之之道。
若存得,便合有得。蓋良知良能,元不喪失。以昔日習心未除,卻須存習此心,久則可奪舊習。此理至約,惟患不能守。既能體之而樂,亦不患不能守也。

명도와 이천, 주희 등과 비교해보았을 때 확실히 공자의 논의는 철학적인 면에서 부족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주희가 집중하는 심성心性의 문제, 명도가 이야기하는 대물待物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공자의 세계관은 후대 사상가들에 비해 소박하다. 그는 당면한 춘추전국이라는 시대를 어떻게 살아낼지를 고심하던 인간이었다. 아마도 이런 부분이 ‘인간 주희’보다 주자학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공자학’이라는 말은 괴상하기 짝이없는 조어가 아닌가. 《논어》는 인간 공자를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책임에 분명하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

공자가 술이부작을 이야기한 이래로, 창작創作은 이야기하기 힘든 주제가 되고 말았다. 사실 공자에게 있어 술이부작이란 뒤에 이어지는 신이호고信而好古와 짝을 이루는 면이 있다.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는 입장에서 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논어》에서 ‘술述’은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상가들은 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독립적인 저술을 남기기보다는 경서에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방법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주희는 주석에서 술과 작의 나누어 작은 성인의 일로, 술을 현인의 일로 규정하였다. 게다가 성인인 공자가 스스로 부작不作을 이야기했으니 다른 사람이야 이야기해서 무엇하랴. 그러나 술이편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 공자가 경계한 것은 ‘不知而作’, 즉 지각없이 멋대로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무릇 새로운 것은 합리적인 근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공자는 호학好學을 말하는 동시에 호고好古를 이야기하는 인물이었다. 즉, 그가 배움이 대상으로 삼은 것은 옛것, 즉 선현들의 발자취였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옛것을 따르고 지키기만 하는 인물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의 제자들은 당대에 출현한 새로운 인간형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도 주왕실의 몰락이후 새로운 길을 찾는 사士 계층이 출현했다. 공자도 이런 인물 가운데 하나였고, 그의 제자들 역시 그러했다. 떠돌아다닌다는 뜻에서 이들을 유세객遊說客이라 불렀다. 공자는 여느 유세객과는 좀 달랐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이들에 비해 그는 주왕실의 전통적 가치를 중시여겼다. 그리고 실리보다는 군자君子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면에서 《논어를 읽다》에서 양자오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제자들은 주왕실의 옛 체제로 회귀하는 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창조하는 이들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공자에게 ‘개혁가’라는 칭호를 붙여줄 수는 없으나 그에게 개혁적 면모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주희는 전통적인 관점에 따라 이렇게 말한다. 孔子刪詩書,定禮樂,贊周易,脩春秋,皆傳先王之舊,而未嘗有所作也。《시》, 《서》, 《예》, 《악》, 《주역》, 《춘추》는 육경六經이라 불리는 고대의 문헌으로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전통적으로 육경의 편집과 편찬이 공자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후대의 많은 학자들의 의문을 샀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공자가 말년에 옛 문헌을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면 어째서 《논어》에는 이와 관련된 부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간단히 결론을 내면 공자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는 술이부작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을 부정했기 때문은 아니다. 도리어 그의 시대에는 개인이 글을 남기는 일이 없었다. 《논어》보다 앞서는 텍스트인 6경은 전부 주왕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자는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언행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했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 글은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렇게 보면 《논어》란 최초의 민간에 의해 쓰여진 문헌 기록이라 하겠다.

다만 한대漢代 이후 유가가 관학이 되면서 공자의 지위도 덩달아 올라갔다. 국가 통치를 위해 유가의 지식이 다시 쓰이게 되면서 전통 문헌에 대한 연구도 함께 활발히 일어났다. 본격적으로 경서를 연구하게 되었을 때엔, 공자는 이미 성인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육경이 모두 공자의 손을 거친 것으로 여겨졌다. 공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스승을 경전의 전문가로 치켜세운 것의 목표는 뻔하다. 자신들이 고대 문헌의 해석을 독점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대 경서와 공자가 꽤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공자를 고대문헌의 정리자로 보았기 때문에 《논어》의 문장을 오독하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공자가 《주역》을 연구했다고 하는 부분에 대한 풀이가 그렇다. 논어 원문은 이렇다.

子曰:「加我數年,五十以學易,可以無大過矣。」

그런데 주희는 이대로 풀이하지 않는다. ‘「加」作假,「五十」作卒。’이라는 주장을 빌어 ‘만약 내가 몇 년만 더 살아 마침내 역을 배우면’으로 풀이한다. 이렇게 크게 바뀐 이유는 공자의 생애에 비춰보았을 때 이 말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공자는 70이 넘게 살았다. 그런데 원문처럼 ‘나에게 몇 년이 더 있어서 오십이 넘어서도…’로 풀이하면 공자의 생애와 어긋나지 않은가.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공자가 《논어》에서 50을 지천명의 나이로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이미 천명을 알았던 공자가 또 역을 배울 짬이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게다가 주희는 공자를 성인으로 타고난 사람이라 보지 않았나. 그래서 주희는 이 50을 卒이 잘못 쓰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이를 나이 일흔이 다 되어 말한, 말년의 이야기로 본다.

《논어》를 읽을 때 모든 문장이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자. 실제 인간 공자의 삶이 어떻든 간에 모든 문장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논어》는 한 사람이 단일한 관점에서 쓴 책이 아니다. 따라서 공자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늘 염두 해 두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를 어떻게 해석하든 크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자와 《주역》의 관련성을 이야기하는 데 이 문장은 꽤 중요하므로 끊임없는 논란을 낳았다. 참고로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易’이라 쓰인 글자가 어떤 판본에서는 ‘亦’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나에게 몇 년이 더 있어서 오십이 되어서도 더 배우면 큰 잘못은 없겠지.’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어찌보면 김 빠지는 해석이 아닐 수 없으나, 이렇게 보는 것이 평생토록 배움을 사랑했던 공자의 모습과 가까워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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