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4 – 장자와 사마천

장자와 사마천 :: 장천마지莊天馬地, 
 하늘에는 장자가 땅에는 사마천이

사마천 역사-史記를 쓰다.

人固有一死, 死有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러나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있기도 하다. 그것은 추구한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 〈보임안서報任安書〉

사마천은 기구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태사령에 오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어려서부터 사관이 되기 위한 교육을 충실히 받았다. 10살이 넘자 고문을 익혔으며, 철이 들 무렵에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직접 역사적 현장을 탐방하기도 했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여러 차례 위험을 겪었다고 말한다.

수년간의 답사를 마치고 그는 낭중이라는 낮은 관직에 임명된다. 황제는 그를 남쪽 지역의 사신으로 보냈다. 아마도 여러 곳을 돌아다닌 경험 때문에 험한 곳으로 그를 보낸 것이리라. 이처럼 사마천은 동서, 남북을 가로지르며 드넓은 천하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타까운 비보가 전해진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어렵게 만난 아버지는 화병으로 몸져 누워있었다. 당시 황제는 무제였는데, 무제는 봉선의식을 치르려했다. 봉선의식이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천하를 대표한다는 상징적 의식이었다. 고대의 성왕들이 봉선의식을 치렀다고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현한 황제는 무제가 처음이었다. 첫번째 황제, 시황제가 봉선의식을 치르기를 시도하지만 결국을 실패한다. 육국을 정벌하고 천하를 통일한 공이라면 충분히 봉선의식을 치를 수 있을법 하지만 그의 제국은 그렇게 탄탄하지 못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가 봉선의식을 치르러 산에 오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제사를 치를 수 없었다고 한다.

진秦이 무너지고 한漢을 세운 고조, 유방은 봉선을 치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말 위에 내려 천하를 통치하는 황제가 되었다지만 그는 여전히 말 위에서 황제 시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반란을 일으킨, 혹은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공신들을 처치하기 위해 그는 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이어 권력을 손에 쥔 여태후의 시대엔 황제는 허수아비였다. 여태후가 물러나고 경제, 문제가 이어 제위에 오르지만 이번엔 친족들의 반란이 문제였다. 결국 무제에 이르러서야 천하가 안정케 된다.

이런 치세에 힘입어 무제는 봉선의식을 치를 준비를 한다. 태사령이었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자신이야 말로 이 역사적인 현장에 참여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태사’라는 직분을 대대로 물려온 ‘사마’씨 집안은 ‘천문을 읽는 것’이 일이었으니.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마담은 봉선의식에 동참하지 못한다.

“우리 조상은 주나라 왕실의 태사太史였다. 일찍이 아주 먼 옛날 우 임금과 하 임금에게서 공명을 드러낸 이래로 천문에 관한 일을 주관해 왔다. 후세에 내려오면서 중도에 쇠락하더니 나에게서 끊어지고 마는 것인가? 너는 다시 태사가 되어 우리 조상이 하던 일을 이어야 한다. 지금 천자께서 천 년의 대통을 이어받아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도 내가 따라가지 못한 것은 분명 천명이로다! 천명이로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라. 태사가 되거든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고 했던 바를 잊지 말아라. … 이제 한나라가 흥기하여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고, 현명한 군주와 어진 임금과 충성스런 신하와 정의를 보고 죽은 선비가 나왔다. 그러나 내가 태사가 되고도 이들을 논하여 기록하지 못해 천하의 역사 문헌을 폐기하였구나. 나는 이것이 매우 두렵다 너는 이 점을 염두해 두거라.”
사마천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소자가 영민하지는 못하나 아버님게서 순서대로 정리해두신 옛문헌을 빠짐없이 모두 논술하겠습니다.”
– 〈태사공자서〉, 《사기열전 2》, 김원중 역, 민음사. 875~876쪽.

오늘날이야 천문天文이라는 것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과학에 불과하지만 당시엔 ‘천문’을 인간사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보았다. 결국 천문을 살핀다는 것은 하늘을 본다는 것인 동시에 이 세상의 커다란 움직임을 본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마담은 많은 자료를 모아두고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 태사령에 오른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게 된 일차적인 동기는 태사라는 직분을 담당해온 사마씨로의 사명의식과 함께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시대야 말로 역사를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는 변혁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선친께서 ‘주공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나 공자가 있고, 공자가 죽은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 500년이 되었으니 다시 밝은 세상을 이어받고 《역전》을 바로 잡고 《춘추》를 이어받고 《시》, 《서》, 《예》, 《악》의 근본을 밝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니 선친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그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 〈태사공자서〉, 같은 책. 877쪽.

500년마다 성인聖人, 곧 문화적 영웅이 등장한다. 주공이 있었고 공자가 그것을 이었다. 500년이 지난 지금 누가 그 일을 감당할 것인가? 사마천은 바로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인물이라 보았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시대적 변화에 힘입어 나온 것이기도 하다. 무제에 이르러 천하는 안정되었고 한漢은 동서남북으로 제국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렇게 천하, 다르게 말하면 세계는 새롭게 정비되었다. 이 찬란한 위업을 기록해야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한무제의 통치기는 ‘중국’ 역사의 중요한 변혁기이다. 제국이 완성되었고, 이 제국을 이끄는 사상과 제도가 마련되는 상황이었다.

“한나라가 일어난 뒤로 밝은 천자(무제)에 이르러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행하고, 정삭을 다시 정하고, 의복 색깔을 바꾸고,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은택이 끝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다 밖의 이민족으로서 여러 차례 통역을 거쳐 변경으로 찾아와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알현을 청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문무백관이 애써 성덕을 칭송하고는 있지만 그 뜻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질고 재능이 있는데도 등용되지 못한 것은 나라를 가닌 자의 부끄어움이며, 임금이 밝고 거룩한데도 그 덕이 천하에 알려지지 못하는 것은 유사(담당 관리)의 잘못입니다. 지금 나는 기록하는 벼슬인 사관이 되었으면서도 밝고 거룩한 천자의 덕을 버려둔 채 기록하지 않고 공신과 세가와 현대부의 업적을 없앤 채 기술하지 않았으니, 선친께서 남긴 말씀을 어긴 것으로 이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
– 〈태사공자서〉, 같은 책. 880~881쪽

이처럼 사마천은 가문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명과 자신이 이해한 시대적 사명 위에 《사기》라는 방대한 저술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 뿐이라면 사마천의 《사기》는 평범한 역사책, 사실을 나열한 따분한 기록에 불과했을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고전으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굴절은 개인이 경험한 치욕스런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황제 권력에 종속된 자로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운명이었다.

권력 아래 사는 법

중국의 사유는 사士 계층의 출현으로 시작한다. 본디 사士란 천자와 제후, 대부 아래 속해있는 관료 혹은 가신家臣이라 불리는 신하로서 권력에 종속된 존재였다. 그러던 것이 주周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상당히 자유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제자백가諸子百家였다. 그렇다고 해도 사士 계층은 기존 권력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존재일 수 없었다. 물론 은자隱子, 일민逸民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나와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일부일 뿐이었다. 더구나 사상이란 구체적인 갈등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이들에게서 비판의식을 읽어낼 수는 있겠지만 어떤 ‘사상’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후대의 사士 계층은 완벽하게 관료로 편입되어 버리지만 – 때문에 관료가 아닌, 정치적 자장에서 자유로운 순수한 의미의 지식인이란 ‘중국’에 존재하지 않지만 –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체제가 뒤흔들리는 시대였으므로 관직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 다녀야 했다. ‘유세遊說’라는 말은 바로 이런 사士 계층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권력을 쥔 제왕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점은 제자백가 모두의 화두였다. 한비자와 같은 인물은 제왕의 심리와 욕망에 맞춰 유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맹자와 같은 꼬장한 인물은 그런 것 따위엔 전혀 관심 없이 자신의 이상만을 줄기차게 외칠 뿐이었다. 한편 공자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이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해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邦有道, 貧且賤焉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공자가 말했다. “굳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라. 목숨을 걸고 바른 도리를 지키라.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머물지 말라. 천하에 제대로 다스려지면 모습을 드러내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숨어라.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데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데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공자 이래로 출처出處의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이는 장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마천은 그가 칠원漆園의 관리였다고 주장하는데, 젊은 시절 그 역시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장자에게도 현실적인 권력을 쥔 제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내편: 인간세〉가 공자와 안회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자의 애제자 안회는 공자에게 위衛나라로 가겠다고 말한다. 이유인즉 이렇다. 공자가 예전에 가르치기를 ‘治國去之,亂國就之,醫門多疾。’이라고 했단다. 정확히 위에 인용한 공자의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이처럼 장자는 공자를 인용하여 구세求世를 주장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참고로, 위衛는 공자가 실제로 방문했던 나라로 당시 그 나라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왕위를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3대에 걸쳐 서로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회는 이런 어지러운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위나라로 가겠다고 자청한다.

仲尼曰:「譆!若殆往而刑耳!夫道不欲雜,雜則多,多則擾,擾則憂,憂而不救。古之至人,先存諸己,而後存諸人。所存於己者未定,何暇至於暴人之所行!
중니는 말했다. ‘아, 너는 (그 나라에) 가 봤자 처벌을 받는 일이 고작일 게다. 저 (네가 지켜야 할) 도란 (순수하므로) 번거로움이 있으면 안 돼. 번거로움이 있으면 일이 많아지고 일이 많으면 혼란해지며, 혼란해지면 근심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면 남을 구할 수가 없어. 옛날의 지인至人은 먼저 자기부터 도를 갖추고 나서 남도 갖추게 했다. 자기가 갖추어야 할 것이 아직 불안정한데 난폭한 자의 행위 따위에 간섭할 겨를이 어디 있겠느냐.’
– 《장자》, 안동림 역. 104쪽

도道라는 절대적 경지에 대한 깨달음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장자의 세계는 개별적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구나 난폭한 자라면 더욱 조심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는 형벌의 권력(刑)을 손에 쥔, 칼을 든 제왕이 아닌가. 공자와 안회의 대화 뒤에 이어지는 인물들의 이야기 역시 이와 비슷하다. 섭공자고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고민이 많다. 제후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건만 뜻대로 되겠느냐는 거다. 일이 제대로 안 되면 형벌을 받을 테고, 일이 제대로 된다 하더라도 스트레스 때문에 고통스럽다.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仲尼曰:天下有大戒二:其一,命也;其一,義也。子之愛親,命也,不可解於心;臣之事君,義也,無適而非君也,無所逃於天地之間。是之謂大戒。… 為人臣子者,固有所不得已,行事之情而忘其身,何暇至於悅生而惡死!
중니가 대답했다. ‘세상에는 크게 경계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운명이고, 또 하나는 의리입니다.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운명이며, (자식의) 마음에서 그것을 풀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일은 의리이며, 어디를 가나 군주는 군주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이 두 가지로부터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두고 크게 경계할 일이라고 합니다. … 남의 신하로서 또는 자식으로서, 본래 어쩔 수도 없는 점이 있는 법이니, 오직 충실히 일을 하고 제 자신을 잊어야 합니다.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할 여유 따위가 어찌 있겠습니까.’
– 《장자》, 같은 책. 121쪽

이 세계는 외부가 없다. 군주 – 제왕의 권력은 그냥 주어진 현실이다. 마치 부모처럼,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의 자식임을 선택하거나 부정할 수 없듯이. 그런 면에서 장자는 숙명론적인 입장에 서 있는 듯하다. 앞서 노담의 장례에 참여한 진일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適來,夫子時也;適去,夫子順也。安時而處順,哀樂不能入也,古者謂是帝之縣解。: 마침 세상에 나왔으니 그가 때를 맞춘 것이지. 마침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순응한 것이지. 자신이 처한 때를 편안히 여기고 상황에 순응하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들어올 수 없지. 옛 사람은 이것을 제왕이 묶임에서 풀어준 것이라 일컬었지.’ 安時而處順,哀樂不能入也! 운명(命)이란 이처럼 不得已한 상황이다. 인간은 힘 없이 여기에 내던져 있다.

그러나 장자의 길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순응의 길과는 다르다. 〈인간세〉 중간에 등장하는 것이 앞에서 소개했던 장석이 쓸모 없다고 말했던 상수리나무의 이야기이다. 나무는 도끼에 힘없이 내던져진 존재다. 달아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자는 그 현실에 완벽하게 몸을 맡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거스르며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는 비스듬히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세번째 이야기 안합은 위나라 영공의 태자를 보좌하러 가야 하는데 거백옥이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참고로 위령공은 공자가 만났던 위나라 군주였고 거백옥은 공자를 돌봐주었던 위 대부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면에서 장자는 공자로 대표되는 먼저 움직이는 적극적 행동을 비판하고 있다.

거백옥은 대답했다. ‘… 그를 따르더라도 아주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와) 조화되더라도 겉으로 나타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따르다가 아주 (마음속까지 동화되어) 하나가 되어 버리면 (이윽고는) 뒤집하고 파멸되고 무너지며 엎어집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조화시키다가 (그만) 겉으로 나타나면 (이윽고는) 소문이 나고 야릇한 화를 입게 됩니다. 그가 갓난 애가 되면 역시 그와 함께 갓난 애가 되십시오. 그가 절도 없이 굴면 또한 함께 절도 없이 구십시오. 그가 턱없이 방종하면 함께 방종하십시오. (그가 하는 대로 따르면서) 그를 인도하여 결점이 없는 경지로 이끌어 들여야 합니다. 당신은 저 사마귀를 알 테죠. 그는 팔뚝을 휘둘러 수레에 맞섭니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모릅니다. (이런 것을) 자기 재능의 훌륭함을 자랑한다고 하지요. 경계하고 삼가야 합니다.’
– 《장자》, 같은 책. 129~130쪽

장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마천이야 말로 당랑거철螳螂拒轍, 아무것도 모르고 수레에 대든 사마귀 꼴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황제의 분노를 사사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스런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가 형벌을 받은 것은 위에 언급했던 포부를 밝힌 7년 뒤 벌어졌다. 이릉이라는 장수를 변호해주었는데 그것이 황제를 기망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릉은 사마천이 존경했던 이광이라는 장수의 손자로 한무제 당시에 활발하게 벌어진 흉노 정벌에 참여했다가 전멸당하다시피 전쟁에서 패한 인물이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그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불과 얼마전까지 이릉이 승전보를 전할 때에는 다 같이 기뻐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하는 일도, 포로가 되는 일도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일가족을 몰살하라는 명령은 지나친 게 아니냐는 게 사마천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태의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것. 그는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결국 사마천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사형을 피하는 방법은 두가지, 50만냥의 속죄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일이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택하기로 한다.

“저는 이릉과 함게 궁에서 일한 적이 있지만, 평소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서로 가는 길이 달라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친밀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눈 적도 없습니다. …
그러나 제 생각을 다 밝히시도 전에 주상게서는 제 뜻을 이해하지 않으시고 제가 이사장군을 비방하고 이릉을 위해 유세한다고 여기시고 저를 옥리에게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심어린 충정은 끝내 드러나지 못하고 황제를 속였다는 죄로 마침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죄를 면할 속죄금도 마련할 수 없었고 도와주는 친구도 없었으며 황제 주위의 측근들 역시 저를 위해 한마디 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판결대로 사형을 당한다면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 하나 빠지는 정도인데 땅강아지와 개미 같은 미물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세상 사람들은 절개를 위해서 죽었다고 생각지도 않을 것이고 단지 지혜가 다하고 면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고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 제가 해놓은 것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게 마련이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터럭만큼이나 가볍기도 한데 그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 보임안서, 《사마천평전》, 지전화이, 글항아리. 127~130쪽.

사마천의 죽음의 목전에서 삶을 선택한다. 어떻게 보면 구차한. 그것은 그가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약 이릉이 사마천과 각별한 관계라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이릉과 사마천은 별 관계도 없었다. 게다가 사마천은 어떤 대의를 걸고 황제에게 당당하게 이릉을 변호한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삶을 부여잡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런 면에서 사마천의 길은 장자의 길과 정 반대에 놓여있다. 장자가 생사의 문제를 뛰어넘어 애락哀樂, 슬픔도 즐거움도 끼어들지 말아야 함을 주장했다면, 사마천은 도리어 생을 부여잡고 격정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가 경험한 운명, 황제 권력의 무서움은 그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바로 울분鬱憤의 글쓰기!

그로부터 칠 년 뒤에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입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시경》과 《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가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세상에 《여람》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과 <고분> 두 편을 남겼다. 《시》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 〈태사공자서〉, 같은 책. 881~882쪽

원문을 보면 여기서 두 마음의 격정이 나온다. 하나는 발분發憤, 말 그대로 분이 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접할 때 들끓어 오르는 마음. 다른 하나는 울결鬱結, 마음에 맺혀 있는 감정을 가리킨다. 응어리져 있는 마음의 상태. 사마천은 글쓰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것은 그가 보기에 이전의 성현들이 쓴 글이라는 게 모두 그런 좌절 속에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글을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천에게 역사란 지나간 과거의 인물들과 공명하는 읽기의 장이며, 동시에 잊혀질지 모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쓰기의 장이 된다. 그는 《사기열전》에서 운명에 휘둘리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흥미롭게도 그들 가운데 많은 수는 어떤 울분 속에 격정을 토로하는 인물들이다. 사마천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삶, 운명과 권력에 포획되지 않는 다른 삶들을 그려낸다.

자유의 두 가지 길

‘자유自由’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근대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철학적, 정치적으로 이 말을 명쾌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사용하도록 하자. 운명에 대항하는 존재가 자기 고유의 삶을, 자기 고유의 능력을 발현하는 하나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마천은 역사의 분기점을 살았다. 그는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는 시점을 살았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고, 황제 제도를 만들었다. 한漢은 그것을 계승했고, 한무제는 그것을 완성한 인물이다. 이렇게 통일된 세계와 절대권력은 ‘중국’의 변하지 않는 토대가 되었다. 그것은 권력의 언저리에서 자유롭게 사유를 펼쳤던 시대가 저문다는 의미기도 하다. 실제로 한무제 이후 제자백가와 같은 활발한 사유의 시대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이제는 모두 체제 속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학술은 완벽하게 관학官學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사마천은 이 체제에 갈등한 과도기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태사령이라는 직위에 올랐지만 치인治人, 통치의 기능을 하는 관료는 아이었다. 그러나 한漢의 신하로서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황제의 수족이 될 수 없었다. 사마천이 주목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권력의 아래에서 희비를 겪은 인물들이다. 한때 재상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하루 아침에 몰락한 인물로부터, 패왕을 황제를 만든 모사들까지. 그러나 이들은 결코 역사의 주인공일 수 없었다.

그는 《본기本紀》에서 역사의 커다란 흐름을 보여준다. 총 12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왕조∙황제의 역사를 담고 있다. 순서는 이렇다. 오제 본기(五帝本紀) – 하 본기(夏本紀) – 은 본기(殷本紀) – 주 본기(周本紀) – 진 본기(秦本紀)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 – 항우 본기(項羽本紀) – 고조 본기(高祖本紀) – 여 태후 본기(呂太后本紀) – 효문 본기(孝文本紀) – 효경 본기(孝景本紀) – 효무 본기(孝武本紀)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항우와 여태후가 본기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먼저 여태후부터. 그는 고조 유방의 부인으로 고조 사후에 실권을 잡았다. 혜제와 소제 둘은 아무런 권력을 쥐지 못했다. 그는 여씨 성을 가진 자신의 친족들을 왕으로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동시에 여씨 천하는 막을 내린다. 세명의 황제 대신 여태후를 넣은 것은 실제적인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든 의도였다. 권력은 실재하는 것이다.

한편 항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진시황과 고조 사이에 진시황의 막내 아들 호혜는 이세황제에 오른다. 한편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초나라를 중심으로 뭉치고 의제를 옹립한다. 이 둘의 제왕 대신 사마천은 항우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다. 항우는 유방과 천하를 다투었던 인물이다. 유방의 라이벌이었던 동시에 천하를 호령한 기세 당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작 ‘서초패왕’이라는 이름만 얻었을 뿐이다. 참고로 제후諸侯와 제왕諸王의 기록은 《세가》에 기록되었다.

사마천은 《세가》에 기록되어야 할 인물을 《본기》로 끌어 올렸다. 그것도 한漢의 정적을. 어떤 사람들은 항우를 언급함을 통해 그를 꺾은 유방의 능력을 부각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항우본기〉와 〈고조본기〉를 이어 읽어보면 알겠지만 항우는 개인의 능력으로 천하를 호령한 인물인 반면에 유방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적으로도 항우가 활약한 시기는 매우 짧다. 고작 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31살이었다.

그것은 사마천이 역사를 대하면서 발견한 특정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꿈틀거리는 욕망은 역사 속에서 주도적으로 살아갔던, 찬란하게 빛나는 삶들을 놓치지 않는다. 운명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삶 속에서, 꿈틀거리는 자유의 몸짓을 그는 유려한 문체로 옮겨낸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이 포위된 상황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항우의 이야기는 훗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적셨다.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夜聞漢軍四面皆楚歌,項王乃大驚曰:「漢皆已得楚乎?是何楚人之多也!」項王則夜起,飲帳中。有美人名虞,常幸從;駿馬名騅,常騎之。於是項王乃悲歌慨,自為詩曰:「力拔山兮氣蓋世,時不利兮騅不逝。騅不逝兮可柰何,虞兮虞兮柰若何!」歌數闋,美人和之。項王泣數行下,左右皆泣,莫能仰視。
항우는 해하에 진지를 구축하고는 주둔했는데, 군사는 적고 군량은 다 떨어진 데다 한나라의 군대와 제후들의 군대가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밤에 한나라 군대가 사방에서 모두 초나라 노래를 부르니 항우가 크게 놀라서 말했다.
’한나라 군대가 이미 초나라를 얻었단 말인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이다지도 많은가?’
항우는 밤에 일어나 막사 안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는 이름이 우虞라는 미인이 있었는데, 총애하여 늘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추騅라는 이름의 준마가 있었는데 늘 타고 다녔다. 이에 항우는 비분강개하여 직접 시를 지어 노래로 읊었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 때가 불리하여 추가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
여러 번 노래 부르니 우 미인도 따라 불렀다. 항우가 울어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며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못했다.
– 〈항우본기〉, 《사기본기》, 김원중 역, 민음사. 323~324쪽

항우는 그날 마지막 싸움을 치르고 여러 차례 포위망을 뚫는다. 결국 강나루에 이르지만 그는 나룻배를 타는 것을 거부한다. 훗날을 도모하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다. ‘天之亡我,我何渡為’ 그는 뱃사공에게 자신이 아끼던 말을 건내주고, 결국 자신의 수급은 옛 부하에게 건내준다. 비록 그의 수급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옛부하 것이 되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한 것이나 다름 없다.

知死必勇 非死者難也 處死者難
죽음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용맹스럽게 된다. 그것은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 〈염파∙인상여 열전〉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삶의 문제를 함께 동반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다르게 말하면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항우의 죽음에서 우리는 항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볼 수 있다. 그는 죽음을 향해 스스로 걸어간 인물이었다. 한편 그렇지 않은 죽음, 사마천이 억울하게 직면했던 그런 죽음은 피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삶도 죽음도 말해주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

장자에게 죽음이란 무엇일까. 〈대종사〉에서 장자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대종사〉의 끝부터 보자. 마지막은 자여子輿와 자상子桑이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여와 자상은 벗이었다. 그런데 장마가 열흘이나 계속되었다. 자여는 ‘자상은 (가난하므로) 아마 굶주려 괴로워하고 있을거다.’하고 밥을 싸 가지고 가서 먹이려 했다. 자상의 (집) 문앞에 이르자 (안에서 자상이) 노래하는 듯하고, 우는 듯하기도 한 목소리로 거문고를 뜯으며 ‘아버지일까, 어머니일까. 하늘일까, 사람일까.’하고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소리내기도 힘에 겨운 듯, 가사를 (곡조도 맞지 않게) 서둘러 읊조린다. 자여는 들어가 물었다. ‘자네의 노래는 어째 그런가?’ (자상이) 대답하기를, ‘난 나를 이런 막바지에 몰아 넣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만, 전혀 알 수가 없네. 부모가 어찌 내가 가난하길 바라겠나. 하늘은 공평하게 만물을 뒤덮고, 땅은 공평하게 만물을 실어준다. (그러니) 하늘과 땅이 나만을 가난하게 하겠나. 나를 가난하게 만든 게 무언가 하고 (애써) 생각해 보지만, 전혀 알 수가 없어. 그런데도 이런 막바지에 몰리다니 운명일 테지.’
– 《장자》, 같은 책. 217쪽

자상의 삶은 고달프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고달픈 삶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求其為之者而不得也。然而至此極者,命也夫!’그래서 이것이 명命, 운명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장자의 이런 논의가 숙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순응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일종의 질문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나를 이런 막바지에 몰아 넣은 게 무엇’인지 자상은 묻는다. 대체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나올 뿐이지만 그는 질문을 던진다.

장자의 사상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는 대답을 거부하고 질문을 사랑하는 사상가다. 물론 그 질문은 어떤 한계 상황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질문이란 답할 수 없음, 해답을 찾을 수 없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

〈대종사〉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위에 소개된 자여다. 그는 죽을 몸이 되었다. 몸이 오그라들고 비틀어진다. 친구인 자사子祀가 그에게 묻는다.

자사가 말했다. ‘자넨 그게 싫은가?’ (자여는) 대답하기를 ‘아니, 내가 어찌 싫어하겠나. (조물자가) 내 왼팔을 차름 바꾸어서 닭을 만들면, 난 그것이 새벽을 알리기를 바라겠네. 내 오른팔을 차름 바꾸어서 활을 만들면, 난 그것으로 구어 먹을 새를 찾겠네. 내 꽁무니를 차름 바꾸어서 수레바퀴를 만들고, 마음을 말로 바꾸면 난 그것을 타겠네. 딴 마차가 뭐 필요하겠나. 대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그런 때를 만났음이며, 삶을 잃는다는 건 (죽음의) 도리를 따름이다. 태어난 때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도리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여들 수 없다네. 이것이 옛날에 말하던 현해縣解라는 걸세’
– 《장자》, 같은 책. 199쪽

자여는 자신의 죽음이 어떤 변화 속에 있음을 말한다. 죽음이란 하나의 변화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나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는 죽음이란 단지 끝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장자에게 죽음이란 자연스런 변화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나 하는 것이다. 자여는 자신이 그 변화를 온 몸으로 받아 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풀려남縣解’이다. 죽음이 하나의 변화임을 인지할 때, 그는 더이상 묶인 존재가 아니다. 이때 보로소 그를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들의 친구인 자래子來가 병이 났을 때를 보자. 그 역시 죽음을 앞두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때 친구인 자려子犁는 도리어 괴상한 질문을 던진다.

갑자기 (이번에는) 자래가 병이 났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곧 죽을 것 같았다. 그 아내와 자식들이 둘러싸고 울고 있었다. 자려가 문병을 가서 (그 꼴을 보고) 말했다. ‘쉬이, 저리들 가요. 죽는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아요.’ (가족을 물리치자 그는) 문가에 기대 서서 자래에게 말했다. ‘위대하구나 조화造化의 힘은 또 자네를 무엇으로 만들고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나, (아니면)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려는가.’
– 《장자》, 같은 책. 200쪽

자려의 말은 물리적인 사고에 기초하면 이해가 쉽다. 인간의 연속성을, 고유성을 설명하는 영혼 따위를 버려두고 인간의 몸뚱이만 두고 말하자. 그렇게 보면 인간의 육체는 썩어져서 언젠가는 다른 무엇의 일부가 된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자신 조차도 깃들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는 게 된다. 그렇다면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는 데 어디에 ‘자유’라는 게 있는가. 이렇게 보면 사마천은 죽음에 맞서 삶을 드러낸, 결과적으로 인간을 선명하게 조망한 사람이라면 장자는 죽음에 질문을 던진, 그 결과 인간이라는 존재를 흐릿하게 만든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장자에게는 사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다고 말한다. 장자가 던지는 질문을 간단히 옮기면 이렇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과연 ‘나’인가. 아니, 도리어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꿈속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던 자가 아침이 되면 불행한 현실에 슬피 울고, 꿈속에서 울던 자가 아침이 되면 즐겁게 사냥을 떠나오.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줄 모르고 꿈속에서 또한 그 꿈을 점치기도 하다가 깨어나서야 꿈이었음을 아오. (인생도 마찬가지요.) 참된 깨어남이 있고 나서라야 이 인생이 커다란 한 바탕의 꿈인 줄을 아는 거요.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깨어 있다고 자만하여 아는 체를 하며 군주라고 우러러 받들고, 소치는 목동이라고 천대하는 따위 차별을 하오. (정말) 옹졸한 짓이오. 공자도 당신도 모두 꿈을 꾸고 있소.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모두 꿈이오. 이런 말을 매우 괴이한 이야기라고 하오.
– 《장자》, 같은 책. 82쪽

우리의 삶은 커다란 꿈일지 모른다. 일장춘몽. 우리가 깨어나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있는지 어찌 아는가. 꿈은 깨어나야 꿈인 것을 알 뿐이니. 사마천은 이처럼 나라는 절대적 존재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의 질문은 집요하다. 우리 모두는 꿈꾸고 있다. 그런데 이 꿈 이야기를 하는 조차도 꿈이다. 이 괴이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하는 걸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마저 빼앗아버리는 저 과감함. 그러나 그것이 모두 제거된 고유한 무엇이란 건 또 없다.

망량(罔兩: 옅은 그림자)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얼마 전에는 걷더니 지금은 멎고, 아까는 앉아 있더니 지금은 서 있소. 어째서 일정한 절도가 없는 거요?’ 그림자가 대답했다. ‘나는 (내 뜻으로 그러는 게 아니고) 기대고 있는 것(사람의 몸)을 따라서 그러는 걸까요? 그러면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은 또 달리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을 따라 그럴 테죠.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 따위에 기대고 있는 셈일까요? (그러나) 어째서 그런지를 알 수 없고, 또 어째서 그렇지 않은지도 알 수가 없소.’
– 《장자》, 같은 책. 85~86쪽

망량은 그림자에 기대어 있다.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덩달아 움직일 수 밖에 없는 묶인 존재다. 그렇다고 그림자가 자유로운 존재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는 또 다른 신체에 묶여 있다. 그리고 그 신체는 또 다른 무엇에 묶여 있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따져 물을 수 없다. ‘惡識所以然?惡識所以不然?’ 아니, 따져 묻는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묻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 존재는 자유롭게 되었을 테니까. 절대적 자유는 없다. 묶여 있는 근본을 풀 수 없으므로, 그 근본을 알 수 없으므로.

위에 언급한 꿈과 그림자의 이야기는 〈제물론〉에 실려 있다. 이 편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로 끝난다. 《장자》에서 가장 유명한 우화인 동시에 많은 이야기를 낳은 우화기도 하다.

昔者莊周夢為胡蝶,栩栩然胡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俄然覺,則蘧蘧然周也。不知周之夢為胡蝶與,胡蝶之夢為周與?周與胡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언제인가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을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나비에는 (겉보기에) 반드시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변화는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물화物化라고 한다.
– 《장자》, 같은 책. 87쪽

호접지몽의 이야기. 대상이 누구인지 주체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호함. 사실 꿈의 속성이 그렇지 않나.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비현실도 아닌. 장주와 나비가 포개어 있는 지점, 마치 꿈꾸는 것과 같은 지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느 순간엔가 체득되는 지점이다. 그곳은 내가 ‘나’이지 않은 곳이라는 면에서 하나의 틈이다. 분절과 동일함의 모호함이 교차되는 그곳에서 우리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사마천의 분명함과 장자의 모호함. 이것은 이 둘이 경험한 운명적 사건의 차이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도 있다. 사마천에게 운명-권력의 폭력이란 실재적인 것이었다. 더 외부가 없는 하나의 거대한 체제였다. 장자는 아직 그것이 실재적으로 구축되기 이전을 살았다. 그렇기에 사마천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았을까. 장자는 우화를 만들었고. 사마천에게는 땅 위에 벌어지는 구체적 사건들 속에 운명을 다루어야 했던 것이라면 장자는 하늘과 같은 추상적 공간에서 운명을 다루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장천마지莊天馬地, 하늘에는 장자가 땅에는 사마천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 둘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누가 위고 누가 아래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 것이다. 땅 위를 살아가는 사람과 하늘을 꿈꾸는 사람. 과연 어떤 자유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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