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2 – 장자와 맹자

장자와 맹자 :: 난세를 대하는 두 가지 길, 
 사생취의捨生取義와 무용지용無用之用

전국戰國, 전란으로 물든 세상

전국시대는 춘추시대와 비교해서 더 참혹한 시기였다. 기존에 통용되었던 체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고, 약육강식 – 강한 나라만이 살아 남는 시대였다. 일찍이 맹자는 역사의 흐름을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 말하였다. 치세治世, 평화기와 난세亂世, 혼란기가 번갈아 나타난다는 말이다. 맹자와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유래없는 난세였다. 장자는 접여의 말을 빌려 ‘僅免刑焉’ 겨우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천하무도天下無道, 천하는 어지럽다.

앞서 장자는 양혜왕과 제선왕 시대를 살았다고 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양혜왕梁惠王은 BCE 370년에 왕위에 올라 BCE 3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제선왕齊宣王은 BCE 342년에 왕위에 올라 BCE 324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이 당시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로 상앙(商鞅, BCE 395 ~ BCE 338)이있다. 흔히 상군商君으로 불리는 그는 본래 위魏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세를 위해 고향을 등지고 서쪽 진秦나라로 향한다. 진효공秦孝公이 천하의 인재를 모아 나라를 개혁하려했기 때문이다. 상앙은 훗날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는 패업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 된다.

본래 위나라에서도 그를 등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군주였던 혜왕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혜왕이 보기에 그는 보잘 것 없는 인물에 불과했다. 《사기: 상군열전》에는 이 장면이 처음에 언급되어 있다.

상군은 위나라 왕의 여러 첩이 낳은 공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은 앙鞅이고 성은 공손公孫이며 그 조상은 성이 희姬였다. 공손앙은 젊어서부터 법가의 학문을 좋아하고 위나라 재상인 공숙좌를 섬겨 중서자가 되었다. 
공숙좌는 상앙이 현명한 줄을 알지만 위나라 왕에게 추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침 공숙좌가 병에 걸리자 위나라 혜왕이 직접 찾아와 병문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공숙의 병이 낫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라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공숙좌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 중서자로 있는 공손앙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재능이 빼어납니다. 대왕께서는 나랏일을 그에게 맡기고 다스리는 이치를 들으십시오.”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이 가려고 하자, 공숙좌는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께서 공손안을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십시오.”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공숙좌는 공손앙을 불러 이렇게 사과했다.
”오늘 왕께서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을 묻기에 나는 당신을 추천하였소만 왕의 낯빛을 보니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소. 나는 군주에게 머넞 충성을 다한 뒤에 신하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왕께서 당신을 기용하지 않으시려면 죽여야 한다고 하였소. 왕은 나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였소. 그대는 빨리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붙잡힐 것이오.”
공손앙이 말했다.
”왕께서 당신 말을 듣고도 저를 임용하지 않는데, 또 어찌 당신 말을 들어 저를 죽이겠습니까?”
그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혜왕은 돌아와서 주위 신하들에게 말했다.
”공숙좌의 병이 깊어 슬프오. 과인보고 공손앙에게 나라를 맡기고 상의하여 처리하라고 하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소!”
– 
〈상군열전〉, 《사기열전 2》, 김원중 역, 민음사 195~196쪽.

공숙좌의 전망은 틀리지 않았다. 훗날 상앙은 위나라를 크게 위협하는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상앙말고도 혜왕이 놓친 인물이 또 있었다. 바로 손빈孫矉이다. 그는 본래 혜왕 밑의 장수였다가 방연이라는 친구의 모함을 받아 불구의 몸이 된다. 그는 제나라에 등용되어 훗날 자신을 모함한 방연에게 통쾌하게 복수한다. ‘龐涓死于此樹之下: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 이 유명한 말로 손빈은 마릉 전투를 큰 승리로 이끈다. 이때 위나라는 장군 방연을 잃은데다 태자까지 빼앗긴다.

동쪽으로 제나라의 공격이 있었다면 서쪽으로는 진나라의 공세가 있었다. 상앙은 위나라 공자 앙卬에게 편지를 보내 적군의 긴장을 늦춘뒤 기습하여 그를 사로잡아 버린다. 전쟁에서 크게 패한 위나라는 도리어 서쪽 땅을 진나라에게 떼어주고 수도를 옮겨야했다. 안읍을 버리고 대량大梁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위魏는 이제 양梁으로 불린다. 맞다. 앞서 상앙과 손빈을 옆 나라에 떠나보낸 위혜왕이 바로 양혜왕인 것이다. 따라서 양혜왕이란 호칭은 이웃나라의 공격으로 수도를 옮긴 치욕스런 이름이었다.

양혜왕은 전국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군주 가운데 하나다. 양혜왕의 할아버지 위문후魏文侯는 진晉을 무너뜨리고 후侯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한편 혜왕은 즉위한 초기, 위는 주변 나라를 위협하는 강국이었다. 그러나 제의 손빈, 진의 상앙에 의해 나라의 국운이 크게 뒤흔들려 버렸다. 전국시대의 한 복판에서 인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손빈은 병법으로, 상앙은 변법으로 전국시대의 판도를 뒤 흔든 인재였다. 한편 동시대의 걸출한 인재, 합종연횡가인 장의 역시 위나라 사람이었다. 이처럼 각 나라는 부국강병을 위해 다양한 길을 모색했으며 이 가운데 인재를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전국시대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인 동시에 그만큼 걸출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한 인물들의 시대기도 했다.

양혜왕은 말년에 여러차례 전쟁에서 패하자 여러 인물들을 끌어 모아 새로운 도약을 기대했다. 이때에 불러들인 인물 가운데는 추연, 순우곤, 맹가 등이 있었다. 이중 맹가孟軻가 오늘의 주인공 맹자孟子다. 하나 덧붙이면, 양혜왕을 보좌했던 재상 가운데 혜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장자의 몇 안되는 친구 가운데 하나기도 했다. 그런면에서 양혜왕은 맹자와 장자를 이야기하는데 빠뜨려서는 결코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맹자》는 양혜왕과 맹자의 대화로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사기》에 기록된 부분을 인용하기로 한다.

惠王數被於軍旅,卑禮厚幣以招賢者。鄒衍、淳于髡、孟軻皆至梁。梁惠王曰:「寡人不佞,兵三折於外,太子虜,上將死,國以空虛,以羞先君宗廟社稷,寡人甚丑之,叟不遠千里,辱幸至獘邑之廷,將何利吾國?」 孟軻曰:「君不可以言利若是。夫君欲利則大夫欲利,大夫欲利則庶人欲利,上下爭利,國則危矣。為人君,仁義而已矣,何以利為!」
혜왕이 전쟁에서 여러 번 실패하니 겸손한 예절과 많은 예물로써 어진 자들을 초빙했다. (이때) 추연, 순우곤, 맹가가 모두 대량으로 왔다.
양혜왕이 말했다.
”과인이 재주가 없어서 군대는 세 번이나 밖에서 잃어버리고, 태자는 사로잡혔으며 상장군이 전사하였으니, 나라가 텅 비어 있어 선왕과 종묘사직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과인은 이 점을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노인장께서 천리를 멀다 않으시고 욕되게도 우리나라의 조정에까지 이르렀으니, 장차 무엇으로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겠습니까?”
맹가가 말했다.
”군왕께서 이처럼 이로움에 대해 말씀하지 마십시오. 왕께서 이로움으르 바라신다면 대부도 이로움을 바랄 것이며, 대부들이 이로움을 바란다면 백성들도 이로움을 바랄 것이니, 위 아래가 이로움을 다투면 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임금 노릇하는 자는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이지, 어찌 이로움을 추구하십니까?”
– 〈위 세가〉, 《사기 세가》, 김원중 역, 민음사. 566쪽.

두 이상주의자

비슷하지만 《맹자》의 첫 시작을 보자.

孟子見梁惠王。王曰:「叟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

맹자는 전국시대의 혼란이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두고 다투는 때문이라 보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의仁義라는 가치를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태자를 빼앗기고 장군을 잃었으며 나라 영토를 크게 잃은 양혜왕에게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맹자는 자신을 써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맹자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도 매우 짧은데 역시 사마천의 기록을 참고할 수 밖에 없다.

太史公曰:余讀孟子書,至梁惠王問「何以利吾國」,未嘗不廢書而嘆也。曰:嗟乎,利誠亂之始也!夫子罕言利者,常防其原也。故曰「放於利而行,多怨」。自天子至於庶人,好利之獘何以異哉!孟軻,騶人也。受業子思之門人。道既通,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為迂遠而闊於事情。當是之時,秦用商君,富國彊兵;楚、魏用吳起,戰勝弱敵;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일찍이 《맹자》라는 책을 읽다가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 책 읽기를 멈추고 ‘아!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자가 이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그 혼란의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다.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데서 생긴 폐해가 어찌 다르겠는가?”
맹가孟軻는 추騶나라 사람이다. 그는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맹자는 학문의 이치를 깨우친 뒤 제나라 선왕을 섬기려고 했지만, 선왕이 자신의 주장을 실행하지 않으므로 양나라로 갔다. 양나라 혜왕도 (맹가의 주장을) 입으로만 찬성하고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의 주장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 실제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진나라는 상앙을 등용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강화했으며,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하여 싸움에서 이겨 적국을 약화시켰다. 제나라 위왕과 선왕이 손빈과 전기 같은 인물을 기용해서 세력을 넓혔으므로 제후들은 동쪽으로 제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에 힘을 기울이고 남을 침략하고 정벌하는 것만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때였다. 
그런데 맹자는 요 임금과 순임금과 하, 은, 주 세 대 성왕들의 덕치만을 부르짖으므로 가는 곳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맹자는 물러나 제자 만장의 무리와 시경, 서경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공자의 사상을 서술하여 맹자 일곱 편을 썼다. 그의 뒤를 이어 추자騶子의 무리가 나타났다.
– 〈맹자순경열전〉, 《사기열전》, 김원중역, 민음사 363-364쪽.

사마천은 맹자를 두고 ‘迂遠而闊於事情’, 즉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을 살피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당시 천하는 상앙, 오기, 손빈, 전기, 소진, 장의와 같은 병법가와 법가, 합종연횡가에 의해 좌우되던 상황이었다. 이들에 비해 인의를 주장하는 맹자의 말은 당연히 무시될 수 밖에 없었다. 약육강식, 부국강병을 외치는 와중에 인의라니! 그러니 우활迂闊, 현실성 없는 이상적인 말만 늘어 놓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장자도 이상적이라는 면에서는 맹자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혜시와 장자의 대화는 장자의 독특한 면을 잘 보여준다.

惠子謂莊子曰:「魏王貽我大瓠之種,我樹之成而實五石,以盛水漿,其堅不能自舉也。剖之以為瓢,則瓠落無所容。非不呺然大也,吾為其無用而掊之。」莊子曰:「夫子固拙於用大矣。宋人有善為不龜手之藥者,世世以洴澼絖為事。客聞之,請買其方百金。聚族而謀曰:『我世世為洴澼絖,不過數金;今一朝而鬻技百金,請與之。』客得之,以說吳王。越有難,吳王使之將。冬,與越人水戰,大敗越人,裂地而封之。能不龜手一也,或以封,或不免於洴澼絖,則所用之異也。今子有五石之瓠,何不慮以為大樽而浮乎江湖,而憂其瓠落無所容?則夫子猶有蓬之心也夫!」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왕이 큰 박씨를 주길래 그것을 심었더니, 자라나 5석이나 들어갈 정도의 열매가 열렸소. 물을 담자니 무거워 들 수가 없고, 둘로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니 납작하고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소. 확실히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 부숴 버리고 말았지요.” (장자의 주장이 터무니없이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다는 풍자)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큰 것을 쓰는 방법이 매우 서툴군요. 송나라에 손 안트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소. 그는 (그 약을 손에 바르고) 대대로 솜을 물에 빠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 왔소. 한 나그네가 그 소문을 듣고 약 만드는 방법을 맥금으로 사겠다고 하자, 친척을 모아 의논하기를, ‘우리는 솜 빠는 일을 대대로 해 오고 있지만 수입은 불과 몇 푼 안 된다. 이 기술을 팔면 단박에 백금이 들어 온다. 그러니 팔도록 하자.’하였다오. 나그네는 그 약 만드는 법을 가지고 오왕을 찾아가 설득했소. 월이 오에 쳐들어오자 오왕은 이 사람을 장군으로 썼는데, 겨울에 월군과 수전을 하여 크게 그들을 무찔렀소. (월군은 물에서 손 트는 고통으로 충분히 활동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소.) (오왕은 그 공적을 치하하여) 그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소. 손을 트지 않게 하기는 마찬가지이나 한쪽은 영주가 되고, 한쪽은 솜 빠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소. 그것은 (약의) 사용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오. 지금 선생에게 5석이나 드는 박이 있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술통 (모양의) 배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타고) 즐기려 하지 않고, 납작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시오. 역시 선생은 마음이 꽉 막혀 있군요.
– 〈소요유〉, 《장자》, 안동림 역, 현암사. 41~42쪽

여기서 잠깐! 혜시가 말하는 위왕은 당연히 양혜왕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그가 언급하는 오와 월의 싸움은 아마도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왕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와신臥身하며, 복수을 칼날을 갈다 결국 월왕 구천을 사로잡았다. 고대 사회에서 이 전쟁은 매우 유명하므로 이 우화를 읽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싸움을 떠올렸을 것이다.

여기에 한 인물이 활약한다. 바로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을 쓴 인물이다. 본래 이 약은 솜 빨래를 하는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기술을 사서 전혀 다른 곳에 쓴다. 바로 수전에 이용한 것이다. 그의 기지로 오나라는 월을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것이다. “能不龜手一也,或以封,或不免於洴澼絖,則所用之異也。” 똑같은 것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크게 다르다. 所用之異也! 無所容, 쓸모가 없어 보인다는 말에 대한 장자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쓸모가 당시 전국시대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화에서 언급했듯 전쟁에서 승리하는 식의 효용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지난 강의에서 본 것처럼 그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초연한 인물이었다. 그의 말을 다르게 쓴다고 병법가나 법가가 그랬던 것과 같은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바로 이어지는 혜시와 벌인 또 다른 대화, 나무를 두고 나눈 이야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惠子謂莊子曰:「吾有大樹,人謂之樗。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其小枝卷曲而不中規矩,立之塗,匠者不顧。今子之言,大而無用,眾所同去也。」莊子曰:「子獨不見狸狌乎?卑身而伏,以候敖者;東西跳梁,不避高下;中於機辟,死於罔罟。今夫斄牛,其大若垂天之雲。此能為大矣,而不能執鼠。今子有大樹,患其無用,何不樹之於無何有之鄉,廣莫之野,彷徨乎無為其側,逍遙乎寢臥其下?不夭斤斧,物無害者,無所可用,安所困苦哉!」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내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가죽나무라고 하더군요.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가 없소. 길에 서 있지만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소, 그런데 선생의 말은 (이 나무와 같아)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어 모두들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자) 장자는 말했다. “선생은 너구리나 살쾡이를 아실 테죠. 몸을 낮게 웅크리고서 놀러 나오는 닭이나 쥐를 노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결국은)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려서 죽지요. 그런데, 검은 소는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큰 일은 하지만 쥐는 잡을 수가 없소. 지금 선생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쓸모가 없어 걱정인듯 하오만,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들판에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면서,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자 보지는 못하오. 도끼에 찍히는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게요. (그런데) 쓸모가 없다고 어째서 괴로워한단 말이오.”
– 〈소요유〉, 같은 책. 43쪽

장자의 말을 들은 혜시는 어땠을까? ‘뭔소리야?’ 하면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장자를 쳐다보지 않았을까? 혜시는 장자의 말이 ‘大而無用’, 커서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데 장자는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혜시가 나무를 예로 들자 이 나무를 어딘가 심어보란다. ‘無何有之鄉,廣莫之野’ 무엇도 없는 곳, 드넓은 벌판에 심어두고 ‘彷徨乎無為其側,逍遙乎寢臥其下’ 그 옆에서 오가기도 하며 아래에서 누워 즐기기도 해보란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참고로 이 장자의 말에서 〈소요유逍遙遊〉라는 편의 제목이 나왔다. James Legge는 이를 ‘Enjoyment in Untroubled Ease’로 옮겼다. 한편 제인 잉글리쉬는 Happy Wandering으로 앤거스 그레이엄은 Going Rabling without a Destination으로, 로버트 앨린슨은 ‘The Transcendental Happiness Walk로 옯겼다. 한편 최근에 《장자》 번역을 내놓은 김학주는 ‘어슬렁어슬렁 노님’으로 옮겼다. 이처럼 흔히 혜시를 현실에 묶여 있는 제한적인 삶을 대표하는 것으로 장자를 자유와 초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읽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자유의 이미지로만 장자를 읽는 것을 경계한다. 자구에 얽매이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소요와 짝을 이루는 ‘방황彷徨’을 무시할 수 없다.

여튼 장자가 말하는 또 다른 쓰임이란 이런 것이다. 혜시가 말하는 쓸모 없는 것이란 바로 큰 것이며, 장자는 도리어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없는 또 다른 쓰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쓰임은 현실적인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경지에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자는 대지大知, 커다란 앎, 또 다른 깨우침을 지향하고 있다.

혜시가 장자를 평가하면서 말한 ‘不中繩墨’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승繩墨이란 먹줄을 의미한다. 지금도 나무를 자를 때 먹줄을 튕겨 직선을 만든다음 자른다. 한편 ‘不中規矩’이라는 표현도 비슷하다. 규規란 오늘날로 치면 컴퍼스를 의미한다. 구矩란 직각자를 가리킨다. 이 둘은 원과 사각형을 그릴 때 필요한 도구이다. 여기에 준準, 수평기를 더해 규구준승規矩準繩이라 부르며, 합리적인 법칙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이 말은 《논어》 등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이와 같은 일종의 수학적 법칙, 수평∙수직∙원 등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고 이와 함께 이를 특정한 법칙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쓰지 않았나 추측한다. 혜시의 말은 장자의 말이 기괴하여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장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맹자에서도 이 규구준승規矩準繩에 대한 표현이 등장한다.

孟子曰:「離婁之明,公輸子之巧,不以規矩,不能成方員:師曠之聰,不以六律,不能正五音;堯舜之道,不以仁政,不能平治天下。今有仁心仁聞而民不被其澤,不可法於後世者,不行先王之道也。
맹자가 말했다. 
”이루의 밝은 시력이나 공수자의 뛰어난 손재주가 있어도 콤파스(規)와 곡척(矩)을 사용하지 않으면 네모 모양과 원 모양을 만들 수 없다. 사광의 예민한 청력이 있어도 육률을 사용하지 않으면 오음을 바로 잡을 수 없다. 요순의 도가 있어도 어진 정치(仁政)을 실행하지 않으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없다.
– 〈이루 상〉, 《맹자》, 박경환 역, 홍익출판사. 187~188쪽

孟子曰:「規矩,方員之至也;聖人,人倫之至也。
맹자가 말했다.
”콤파스와 곡척은 네모 모양과 둥근 모양의 표준이고, 성인은 인륜의 표준이다.
– <이루 상>, 같은 책. 190쪽

맹자는 여기서 규구를 인정仁政에 대비시킨다. 한편 규구는 원과 사각형을 그리는 표준이 되듯, 성인은 인륜의 표준이 된다. 즉, 맹자에게 규구준승이란 인정仁政을 가능케 하는 법칙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이상을 체화한 인물은 바로 요순으로 대표되는 성인이다. 맹자는 특정한 가치, 인의仁義를 추구하며 이것이야 말로 규구준승, 시대가 변하거나 상황이 달라지더라도 바뀌지 않는 불변의 원칙이라고 보았다.

양혜왕과 혜시로 대표되는, 위魏가 대변하는 춘추전국의 현실로부터 보자면 맹자와 장자모두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만나지 않는다. 그것은 규구준승規矩準繩으로 대표되는 합리적 법칙, 윤리적 준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장자는 스스로를 검은소(斄牛)에 비유했다. 장자에게 검다는 것은 곧 지각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장자》가 북명北冥이라는 상상의 공간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때 명冥에는 어둡다는 의미도 함께 들어 있다. 도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를 현玄이라 일컬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검은 소 역시 마찬가지이다. 其大若垂天之雲, 그 소가 커서 마치 구름이 드리운 것과 같다는 말은 《장자》 시작에 나왔던 붕새를 떠올리게 한다. 붕새는 커서 크기를 알 수 없었다. 이 검은 소도 마찬가지이고, 혜시가 비웃는 커다란 나무 역시 마찬가지이다. 장자는 끊임없이 알 수 없음에 대해 말한다. 그는 특정한 가치, 특히 윤리적 법칙을 이야기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에 비해 맹자의 이상은 분명하다. 그는 요순을 거론하며 성인의 시대를 보여준다. 이는 변하지 않는 법칙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를 지키고 이에 따른다면 치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맹자의 말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당대의 선각자로의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천하의 문제를 온 몸으로 고민한 실천적 사상가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어떻게 살 것인가?

장자와 맹자는 동시대를 살았다는 점에서 적어도 동일한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라는 난세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이 두 사상가에게 던져진 질문이었다. 장자는 접여의 말을 통해 당대를 가시밭길로 이야기한다. 겨우 형벌을 면하며 살아가야할 시대라는 말이다. 맹자의 말을 통해 보는 당시의 상황은 더 참혹하다.

「庖有肥肉,廐有肥馬,民有飢色,野有餓莩,此率獸而食人也。獸相食,且人惡之。為民父母,行政不免於率獸而食人。惡在其為民父母也?仲尼曰:『始作俑者,其無後乎!』為其象人而用之也。如之何其使斯民飢而死也?」
지금 왕의 주방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있으니, 이것은 짐승을 몰아서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그런데 백성의 부모인 왕으로서 정치를 하면서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면 백성의 부모다움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공자께서는 ‘처음으로 장례식에서 순장에 쓰는 인형을 만든 자는 후손이 끊길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본따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백성들을 굶어 죽게 할 수 있습니까?”
– 〈양혜왕 상〉, 같은 책. 40쪽

맹자는 들에 굶어죽은 시체가 나뒹구는 시대라고 진단한다. 그것은 탐욕스런 군주 때문이다. 백성들의 식량을 수탈하는 군주 때문이다. 그는 率獸而食人,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 먹게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짐승이 백성의 식량을 먹어치워 백성이 굶어죽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살찐 고기를 먹는 군주는 무엇인가? 직접 죽이지 않았을 뿐, 군주는 그 백성을 잡아먹는 것과 다름 없다. 누군가의 탐욕 때문에 누군가는 굶어죽는 상황. 맹자가 본 시대의 참혹함은 바로 이것이었다.

天之生斯民也,使先知覺後知,使先覺覺後覺。予,天民之先覺者也;予將以此道覺此民也。《맹자》에서는 이것이 이윤의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맹자 자신의 포부를 밝힌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선각자로 시대의 혼란을 바로잡은 사람이고자 했다. 백성을 깨우치는 것이 그가 짊어진 시대의 사명이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이윤처럼 재상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관직에 참여하지 않는 야인野人이고자 했다. 왕의 스승(王師)이 되고자 하는 더 큰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자》에는 이러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현실적인 한계에 주목한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한계에 골몰한 사람이었다. 장자가 고민한 한계를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언어의 한계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늘 참된 것을 다 알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시대적 한계이다. 그는 난세를 살았고 이는 합리적인 보상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마지막으로 필멸의 존재로서의 한계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다.

一受其成形,不亡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일단 사람으로서의 형태를 받은 이상, 목숨을 해치는 일 없이 그대로 (자연히) 죽기를 기다리자. 주위의 사물에 거역해서 서로 해치고 다툰다면 일생은 말 달리듯 지나가 버려 막을 도리가 없다. 슬픈 일이 아닌가. 평생 속 썩이고 수고해도 그만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지쳐서 늘어져도 돌아갈 데가 없다. 가엾지 않는가. 세상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몸이 늙고 마음도 따라 시들어 버린다. 큰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있는가. 사람의 생애란 본래 이렇듯 어리석은 것일까? (아니면) 자기만이 어리석고 사람들 중에는 어리석지 않은 자가 있는 것일까?
– 〈제물론〉, 같은 책. 55쪽.

인생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與物相刃相靡 其行盡如馳, 왜냐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어느새 휙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말이 달리듯. 그런가하면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평생토록 수고롭게 일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없고 피곤하고 지친 몸이 어디로 갈지 알 수도 없다. 인간은 덧없이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동시대를 살아도 골몰하는 문제는 다르다. 맹자가 시대의 아픔에 공명하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장자는 시대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필멸의 존재로서 한계를 보았다.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사상가였다. 때문에 맹자가 인의를 부르짖으며 이 땅, 천하의 문제를 말한 반면, 장자는 그러한 이상을 무너뜨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유한 인물이었다.

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麗之姬,艾封人之子也。晉國之始得之也,涕泣沾襟;及其至於王所,與王同筐床,食芻豢,而後悔其泣也。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
삶을 기뻐한다는 것이 미혹이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소? 죽음을 싫어 한다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난 채 돌아갈 길을 잃은 자가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소? 여희는 애라는 곳의 국경지기 딸인데, 진나라가 처음 그를 가졌을 때(즉 진나라로 처음 이끌려 갈 때)는 너무 슬프게 울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실 정도였으나, 왕의 궁전에 이르러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소∙돼지 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자 처음 울고 불고 한 짓을 후회했다 하오. (이와 마찬가지로) 저 이미 죽은 사람들도 처음에 (살았을 때에) 삶을 바랐던 일을 (지금) 후회하지 않는지를 내 어찌 알겠소?
– 〈제물론〉, 같은 책, 80~81쪽

생사의 절대적 경계에 이르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던 가치들이 재점검 된다. 이 절대적 도전 앞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축소되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음이란 영원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세계에도 이땅의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가 통용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죽음을 싫어한다고들 말하지만 정말 그런가? 죽어보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찌 알 수 있는가. 죽어버린 사람들도 죽은 것을 안타까워할까? 도리어 살아있는 자들이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죽은 자들은 살아있을 때를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지락〉편에 나온 장자와 해골의 대화는 매우 흥미롭다. 장자는 해골에게 다시 살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해골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 즐거움을 버리고 어째서 또 다른 괴로움을 겪으라는 말이냐고 되묻는다. 여기서 그는 죽음의 즐거움과 삶의 고통을 대립시킨다. 장자의 사상이 죽음을 긍정한다고 장자의 사상이 죽음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장자는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죽음을 미화(?)한 장자는 자살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본래 삶과 죽음은, 생사生死는 서로 맞닿아 포개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는 죽음이 따를 수 밖에 없고, 죽음은 삶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관념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온전히 지각할 수 있느냐는 별개로, 장자는 삶과 죽음이 하나의 쌍을 이루는 것인 동시에 이 둘의 경계가 모호함을 말한다. 그 유명한 꿈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삶이 꿈일까? 죽음이 꿈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히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동시에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장자는 생사의 문제를 논할 때 조차도 어떤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장자가 골몰하는 것은 질문이며, 이때의 질문이라는 것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바라는 대답과 거리가 있다. 도리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명한 답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이지를 묻고 있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죽음이 좋은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삶이 즐겁고 죽음이 슬프다는 이 보편적인 생각에 장자는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장자》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따라서 장자에게 어떤 대답을 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별로 좋은 독법은 아니다.

장자만 생사의 문제를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맹자 역시 생사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맹자의 이야기는 장자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孟子曰:「魚,我所欲也;熊掌,亦我所欲也,二者不可得兼,舍魚而取熊掌者也。生,亦我所欲也;義,亦我所欲也,二者不可得兼,舍生而取義者也。生亦我所欲,所欲有甚於生者,故不為苟得也;死亦我所惡,所惡有甚於死者,故患有所不辟也。
맹자가 말했다.
”생선요리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고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먹을 수 없다면 나는 생선요리를 버리고 곰 발바닥 요리를 택할 것이다. 삶(生)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도의(義)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도의를 택할 것이다.
삶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삶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기에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죽음 역시 내가 싫어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에 환란을 피하지 않고 죽는 경우가 있다.”
– 〈고자 상>, 같은 책. 316~317쪽

여기서 유명한 舍生取義,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삶의 윤리가 나온다. 맹자에게 인의仁義란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삶과 의로움을 모두 구할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문제는 때때로 그러지 못할 상황이 닥친다는 것이다. 명백한 불의를 보고 어떻게 할 것인가. 맹자는 사생취의, 삶을 버리더라도 의를 추구하는 것을 택한다.

도올은 《맹자 사람의 길》 이라는 책에서 ‘조선왕조는 맹자로 건설되었고 맹자로 유지되었다’고 말한다. 권력에 맞서 대항하는 선비가 《맹자》를 통해 가능했다는 말이다. 같은 유가라 하더라도 《논어》에는 이러한 사생취의의 정신이 없다. 도리어 공자는 불의한 시대와 어울리지 못한채 이리저리 방랑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맹자의 길은 확고하다. 그 불화는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조선의 선비들이 추앙했던 사육신 등은 《맹자》 없이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남산 도서관 옆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 여기에는 그가 뤼순감옥에서 썼다는 글들이 한쪽 벽에 새겨져 있다. 많은 것들이 유가 문헌에서 나온 것인데, 여기서 벌써 그의 강인한 절개를 볼 수 있다. 글의 힘은 커서 그가 쓰고 말하는 것이 삶을 이끄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안중근을 보고 ‘사생취의 살신성인’이라 평가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맹자는 이처럼 의사義士, 지사志士를 낳는 글이 된다.

그러나 《장자》는 어떨까? 《장자》를 읽으면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사생취의 대신 무용지용

맹자와 장자는 동시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끊임없이 회자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서로를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하다못해 전해져오는 이야기라도 있을법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철저히 다른 두 사람의 삶의 방향 때문이었으리라.

장자는 접여의 말을 통해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 없음의 쓸모를 이야기한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유용지용有用之用, 쓸모 있음의 쓸모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커다란 나무의 우화이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도록 하자.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에 이르러 (그곳 토지신을 모신) 상수리나무 사당의 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이며, (굵기는) 재어 보니 백 아름이나 되고,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이며, 여든 자 쯤 되는 데서 가지가 나와 있었다. 그 가지도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것이 수십개나 되었다. (그 둘레에는) 구경꾼이 장터처럼 모여 있으나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끝내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제자가 한동안 지그시 그 나무를 지켜 보다가 장석에게 달려와 물었다. ‘저는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라다니게 된 뒤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리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장석이 대답했다. ‘그만, 그런 소리 말게, (그건) 쓸모 없는 나무야,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곧 썩으며, 기물을 만들면 곧 망가지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긴다. (그러니) 저건 재목이 못 되는 나무야.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저처럼 오래 살 수 있었지.
장석이 (집에) 돌아오자, 상수리나무 사당의 나무가 꿈에 나타났다. ‘너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하려느냐, 너는 나를 쓸모 있는 나무에 비교하려는 거냐. 대체 아가위, 배, 귤, 유자 따위 열매 종류는 (그) 열매가 익으면 잡아 뜯기고, 뜯기면 (가지가) 부러진다. 큰 가지는 걲이고 작은 가지는 잡아 당겨(찢겨)진다. 이는 그 (초목이 맛있는 열매를 맺는) 능력 때문에 제 삶이 괴롭혀지는 셈이다. 그래서 그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게 된다. (즉) 스스로 세속의 타격을 받는 자이다. (세상의) 사물이란 다 이와 같다.
또한 나는 쓸모 있는 데가 없기를 오랫동안 바라 왔다. (지금까지 여러 번) 죽을 뻔했으나 오늘 (자네가 쓸모 없다고 했기 때문에) 비로소 뜻을 이루어 (그 쓸모 없음을) 내 큰 쓸모로 삼게 되었다. 가령 내가 쓸모 있었다면 어찌 내가 이토록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너도 나도 다 같은 하찮은 것이다. 어찌 서로를 하찮다고 헐뜯겠는가. (너같이) 저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쓸모 없는 인간이 어찌 산목(散木)을 알겠는가.’
– 〈인간세〉, 같은 책. 133~136쪽

커다란 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어찌나 큰지 상상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다. 이 나무는 앞서 혜시가 말했던 커서 쓸모 없는 나무를 떠올린다. 목수 장석은 이 나무를 보고 그냥 떠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쓸모 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커졌을 것이라는 거다. 만약 쓸모 있었다면 나무가 이처럼 클 수 있었을까? 아니, 진작에 베어졌을 것이다.

언젠가 다큐멘터리로 금강소나무 숲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었다. 소나무 가운데 가장 귀한 이 소나무는 조선시대부터 나라에서 관리했단다. 왕의 관을 짜는데 쓰일만큼 값비싼 나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소나무 가운데 500년 넘은 나무를 보기 힘들단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느 정도 자라면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귀하기 때문에 쓸모 있는 이 나무는 늘 그렇게 베어졌다. 다행히 그 가운데 몇 백년 먹은 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 나무는 휘어져 재목으로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베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목상木商은 ‘쓸모 없는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속담을 말해줬다.

장자가 보기에 그의 시대는 거스를 수 없는 폭력이 가득한 시대이다. 그 유명한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우화를 떠올려 보자. 이 우화 역시 《장자》에 나온다. 수레 바퀴 앞에서 앞발을 치켜든 사마귀. 그는 자신의 온 몸으로 수레바퀴에 대항한다는 면에서 용감하다 하겠으나 그 결과는 뻔한 것이다. 바퀴에 짓눌려 죽을 뿐. 장자가 보기에 인의 따위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란 당랑거철과 같았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한들 그것이 어찌 먹히기나 하겠는가.

한편 여기에는 당시 가득했던 유세객들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군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저마다 다양한 방책을 가지고 관직을 얻어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영화란 한 때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상앙이었다. 그는 상군으로 불릴 정도로 높은 지위를 얻었지만 결국 왕이 바뀌자 대번 목숨을 잃고 만다. 그것도 자신이 내놓은 변법책에 걸려.

시대의 혼란은 한 개인이 바꾸기에는 너무도 크고, 설사 조금 영향을 끼친다 해도 유한한 생명으로 그 영화를 누리기란 불가능하다. 도리어 재목이 베어지듯 더 쉽게 화를 당할 뿐이다. 그러니 쓸모없는 존재가 되자.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수리 나무 역시 쓸모없기를 오랫동안 바라왔지 않던가. 그것은 또 다른 길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支離疏者,頤隱於臍,肩高於頂,會撮指天,五管在上,兩髀為脅。挫鍼治繲,足以餬口;鼓筴播精,足以食十人。上徵武士,則支離攘臂而遊於其間;上有大役,則支離以有常疾不受功;上與病者粟,則受三鐘與十束薪。夫支離其形者,猶足以養其身,終其天年,又況支離其德者乎!
지리소라는 사나이는 턱이 배꼽에 가려지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으며, 상투는 하늘을 가리키고 내장이 (머리) 위로 올라갔으며, 두 넓적다리가 옆구리에 닿아 있다. (이처럼 심한 꼽추지만) 옷을 깁거나 빨래를 하면 충분히 먹고 살아갈 수 있고, 키질을 해서 쌀을 고르면 열 식구는 먹여 살릴 수 있다. 위(국가)에서 군인을 징집하면 지리(支離)는 (못난이이라 병역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두 팔을 걷어붙인 채 (유유히) 다닐 수 있고, 위에서 큰 역사(役事)가 있을 때 (인부를 징집하면) 지리는 언제나 병이 있다고 하여 일이 내려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병자(病者)에게 곡식을 내릴 때는 3종(鐘)의 곡식과 열 다발의 장작을 받는다. 저 (지리소처럼) 육체가 온전하지 못한 자도 (세상의 피해를 입지 않고) 그 몸을 보양(保養)하여 천명을 다할 수가 있는데, 하물며 그 마음의 덕이 온전하지 못한 자야 더 (자유롭게 유유자적)할 것이 아니겠는가.
– 〈인간세〉, 같은 책. 141쪽

《장자》를 읽어보면 괴상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광언狂言, 알 수 없는 말과 광인狂人 해괴한 인물들이 《장자》를 채우고 있다. 이는 통상적인 가치를 넘어 또 다른 삶의 윤리를 이야기하기 위해 장자가 이용하는 장치이다. 또 다른 윤리가 필요하다. 아니 그 윤리를 발견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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