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1 – 장자와 공자

장자와 공자
 :: 무엇을 배울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알 것인가

장자와 공자에 대한 상식, 혹은 오해

흔히 중국 사상사의 특징으로 삼교일치三敎一致를 든다. 세 가지 교파가 한데 묶여 ‘중국의 사상’이라 부를만한 것이 탄생했다는 말이다. 이 때 셋으로는 유불도儒佛道를 든다. 이 말처럼 유가儒家, 불가佛家, 도가道家는 중국 사상을 대표하는 학파로 서로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왔다. 이 가운데 불가는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중국에 정착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대漢代에 전해졌으나 크게 융성한 것은 당대唐代에 이르러서였다. 반면 유가와 도가는 춘추전국시대부터 발전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유가는 특히 자기 변신을 많이 했던 까닭에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한대의 훈고학訓詁學, 송대宋代의 주자학朱子學, 명대의 양명학陽明學, 청대의 고증학考證學 따위가 그것이다. 물론 이런 호칭은 편의에 의해 붙여진 것이기는 하나,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별로 제기한 문제가 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이렇게 다양하게 갈라진 뿌리나 마찬가지인 춘추전국시대의 유가를 일컬어 공맹학孔孟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자孔子는 유가를 개창했고, 맹자孟子는 공자를 이어 이를 발전시켰다. 한편 이 공맹학이라는 말은 유가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헛된 공리공담을 일삼는 유가의 말을 ‘공자왈 맹자왈’이라 비꼬지 않았나.

이와 비슷하게 춘추전국시대의 도가를 일컬어 노장학老莊學이라 부르기도한다. 마찬가지로 노장老莊은 도가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도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자 기틀을 닦았다는 뜻이다. 이처럼 공자는 노자와 짝을 이루고, 맹자는 장자와 짝을 이룬다. 그런데 하필 여기서는 왜 공자와 장자를 짝지었을까? 그것은 노자가 허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3강에서 ‘장자와 노자’를 다루며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장자와 공자를 이야기 한다면 당연히 몇 가지 차이가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도가와 유가의 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장자는 자유를 추구했다면 공자는 세속을 추구했다. 장자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공자는 형이하학적 사유를 펼친 인물이다. 장자는 정치로부터 떠나려했다면 공자는 정치로 뛰어들려했다. 장자는 자연을 추구한 반면 공자는 문명을 추구했다. 이 이외에도 더 많은 대립항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본 강좌에서는 이런 차이로 이 둘을 나누어 보는 관점에 의문을 던지려고 한다. 도리어 흔히 이야기하는 저런 도식이 장자와 공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거추장한 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과연 이렇게 재단해버려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도 의문이 들지만 – 왜냐하면 강의 내내 이야기 하겠지만 ‘장자’라는 인물은 마치 미꾸라지와 같아서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론가 미끄러져 버린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견을 펼치면, 장자는 도리어 현실적이며 공자는 도리어 이상적이다.

과연 이것이 무슨 말일까. 여기에서는 앎(知)과 배움(學) 두 키워드로 이 둘을 비교해 보려 한다. 즉, 공자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질문했다면 장자는 무엇을 알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 둘의 차이는 곧 서로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와 신화

공자와 장자는 분명 역사적 인물이다. 춘추전국이라는 역사적 공간을 무대로 실재로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신화적 내용도 다분히 가미되어 과연 어떤 것이 역사적 실체인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이들에게서 역사와 신화를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이 많이 없기 때문이고, 그에 비해 너무나 많은 신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춘추시대 제자백가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그나마 공자는 낫다. 그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그의 행적이 어떤지에 대해 그나마 많은 자료가 누적된 까닭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은 오늘날 산둥성山東省 취푸시曲阜市이다. 사마천은 그의 출생에 대해 늙은 아버지와 젊은 어머니가 야합野合해서 낳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말이 많지만 출신이 좋은 것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그의 자字는 중니仲尼로, 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현존하는 공자의 행적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말년, 약 50대 이후부터 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없다.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에서 관직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나, 곧 관직에서 쫓겨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게 된다. 그렇게 방랑하기를 약 14년, 70이 다된 노인으로 고향에 돌아야 몇 년 뒤 세상을 떠난다. 말년에 《시詩》, 《서書》를 정리하고, 《춘추春秋》를 썼으며, 《역易》에 풀이를 달았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말과 행적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논어論語》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논어》야 말로 공자의 행적을 잘 알 수 있는, 역사적 공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이외에도 사마천의 《사기》에 《공자세가孔子世家》 및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유림열전儒林列傳》 이 있지만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공자가어孔子家語》라는 책도 있지만 일부는 후대에 가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장자의 경우엔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사기》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편은, 장자를 다룬 것이 아니라 노자와 한비자를 다룬 편이다. 여기에 장자와 신불해가 끼어들어 있는 꼴이다. 때문에 내용도 매우 짧다.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莊子者,蒙人也,名周。周嘗為蒙漆園吏,與梁惠王、齊宣王同時。其學無所不闚,然其要本歸於老子之言。故其著書十餘萬言,大抵率寓言也。作漁父、盜跖、胠篋,以詆訿孔子之徒,以明老子之術。畏累虛、亢桑子之屬,皆空語無事實。然善屬書離辭,指事類情,用剽剝儒、墨,雖當世宿學不能自解免也。其言洸洋自恣以適己,故自王公大人不能器之。楚威王聞莊周賢,使使厚幣迎之,許以為相。莊周笑謂楚使者曰:「千金,重利;卿相,尊位也。子獨不見郊祭之犧牛乎?養食之數歲,衣以文繡,以入大廟。當是之時,雖欲為孤豚,豈可得乎?子亟去,無污我。我寧游戲污瀆之中自快,無為有國者所羈,終身不仕,以快吾志焉。」
장자莊子는 몽蒙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다. 그는 일찍이 몽 지방의 칠원漆園이라는 곳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했고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그는 학문이 넓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 학문의 요체는 노자의 말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학설로 돌아간다. 십여 만 자에 이르는 그의 책은 대부분 우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어부〉, 〈도척〉, 〈거협〉 편을 지어서 공자의 무리를 비판하고 노자의 가르침을 밝혔다. 외루허, 항상자 같은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라 꾸며 낸 이야기이다.
장자는 빼어난 문장으로 세상일과 인간의 마음을 살피고 이에 어울리는 비유를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했다. 당대의 학문이 무르익은 위대한 학자들도 장주의 공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의 말은 거센 물결처럼 거침이 없으므로 왕공王公이나 대인大人들에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초나라 위왕은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 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지요. 그대는 교제(郊祭, 고대 제왕이 해마다 동짓날 도성의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올린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 83~84쪽.

그나마 이것이 장자에 관해 남아 있는 역사적 기록의 전부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정보라고는 그의 고향과 그의 본명 정도 이다. 그의 이름은 장주莊周,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행적을 펼쳤는지 알 수 없다.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다만 양혜왕, 제선왕과 동시대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그의 활동 시기를 공자보다 약 150년 뒤로 추정하곤 한다. 맹자와 동시대 인물이긴 하되 그보다는 조금 늦게 태어나 활동한 것으로 본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그의 책’이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장자》와는 다르다. 일단 오늘날 《장자》보다 분량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십여 만 자라고 말하나 오늘날 남아 있는 《장자》는 그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된다. <외루허>, <항상자>은 현존하는 장자에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연구자들은 우리가 보는 《장자》는 일부가 축소되고 편집 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장자》의 편집자로 유력하게 언급되는 인물은 위진시대의 곽상(郭象: 252?~312)으로, 그는 《장자》에 주석을 달고 오늘날 보는 형태로 정리했다. 현재 《장자》는 총 33편으로 <내편>, <외편>, <잡편>으로 나뉘는데 이는 곽상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장자》에는 장자의 행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몇 가지 에피소드가 들어 있다. 호접지몽과 같은 이야기를 빼 버리면, 정작 역사적 인물인 장자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고작 몇 개의 이야기 뿐이다. 이를 종합하면 그는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고, 아내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혜시라는 친구가 있었으며 불행히도 그 역시 일찍 죽었다. 제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데 이들은 장자는 이들에게 그의 장례를 매우 소박하게 치르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당시의 제왕들 가운데는 장자를 초빙하려 한 사람도 있었고, 장자도 실제로 군주를 만나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장자는 당시 정치에 뛰어들기는 커녕 도리어 한적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위에 사마천이 기록한 초위왕의 신하에게 한 말이다. 천금과 재상의 자리를 가지고 장자를 초빙하려 하지만 장자는 단칼에 거절한다. 제사에 바쳐지는 소 꼴이 될 수는 없다면서. 사마천의 기록 이외에도 《장자》 <외편: 추수秋水>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 있다.

吾聞楚有神龜,死已三千歲矣,王巾笥而藏之廟堂之上。此龜者,寧其死為留骨而貴乎,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二大夫曰:「寧生而曳尾塗中。」莊子曰:「往矣!吾將曳尾於塗中。」
“내가 듣기에 초楚나라에는 신구神龜가 있는데 죽은 지 3천 년이나 되었다더군요. 왕께선 그것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廟堂 위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지만, 이 거북은 차라리 죽어서 뼈를 남긴 채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살아서 진흙 속을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두 대부는 대답했다. “그야 오히려 살아서 진흙 속을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 테죠.”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닐 테니까!”
– 안동림 역, 현암사. 441쪽. <추수>

‘吾將曳尾於塗中’ 장자는 그저 진흙탕속에서 뒹굴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를 데리러 온 초의 대부들은 빈 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공자에게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장자에게 한 것처럼 공자는 예를 갖추어 자신을 부르러 온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도리어 제자의 화를 돋울 일이었다. 왜냐하면 공자를 부르러 온 사람이란 한 나라의 군주도 아닐 뿐더러,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公山弗擾以費畔,召,子欲往。子路不說,曰:「末之也已,何必公山氏之之也。」子曰:「夫召我者而豈徒哉?如有用我者,吾其為東周乎?」
공산불요가 비읍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초빙하자, 공자가 가려고 하였다. 자로가 화난 얼굴로 말하였다.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두시지, 하필 공산씨 같은 자에게 가신단 말씀입니까?” “나를 부른 사람이라면 어찌 공연히 그랬겠느냐? 나를 써 주는 사람만 있다면, 나는 동쪽에 주나라의 도를 부흥시킬 것이다.”
– 박성규역, 소나무. 679쪽. <양화 5>

佛肸召,子欲往。子路曰:「昔者由也聞諸夫子曰:『親於其身為不善者,君子不入也。』佛肸以中牟畔,子之往也,如之何!」子曰:「然。有是言也。不曰堅乎,磨而不磷;不曰白乎,涅而不緇。吾豈匏瓜也哉?焉能繫而不食?」
필힐이 초빙하자, 공자가 가려고 하였다. 자로가 말하였다.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몸소 앞장서서 악을 행한 자에게 군자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필힐이 중모에서 반란을 일으켰거늘, 선생님께서 가려고 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물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갈아도 닳지 않음이 견고함 아니겠는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음이 흼 아니겠는가? 내 어찌 그저 매달려만 있고 아무도 따먹지 않는 박과 같을 수 있겠는가?”
– 박성규역, 소나무. 683쪽. <양화 7>

공자는 이들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가려한다. 제대로 예를 갖추어 온 것도 아니고, 높은 지위가 보장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공자는 가려한다. 왜 그랬을까? 가까운 제자마저 대놓고 반대할 일을. 그것은 그만큼 공자의 상황히 절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어떻게서든 등용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스스로 종묘로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 소 모양이라며 손가락질 했을 것이다. 공자의 이런 삶에 대해 장자는 ‘접여’라는 인물의 말을 빌려 비판한다. 이제 이 기록을 참고해볼 차례다.

겨우 형벌을 면할 수 있는 시대

의외로 《장자》에는 공자가 많이 등장한다. 이를 역사적 공자의 삶을 이해하는 자료로 삼는 것은 무리겠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일부는 정말로 공자가 경험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이해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鳳兮!鳳兮!何德之衰?往者不可諫,來者猶可追。已而,已而!今之從政者殆而!」孔子下,欲與之言。趨而辟之,不得與之言。
초나라의 광사 접여가 공자 곁을 지나가며 이렇게 노래하였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이 꼴이 되었는가? 과거는 탓할 수 없지만, 앞일은 그래도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두라! 그만두라!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위태로울 따름이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피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 박성규 역, 소나무. 713쪽 <미자 5>

《논어》 뒷 부분에 보면 일민逸民들이 등장한다. 일민이란 어지러운 속세에서 몸을 피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나오는 楚狂接輿도 마찬가지 인물이다. 접여接輿란 그의 이름인데, 그 앞에 楚狂이라는 말이 붙었다. 쉽게 옮기면 ‘초나라 미치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미치광이(狂)란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세의 가치와 전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들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또 다른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접여가 ‘今之從政者殆而’라고 하자 공자가 그를 좇아 수레에서 내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장자》에도 보인다. 다만 말이 조금 다르고, 더 자세하다.

孔子適楚,楚狂接輿遊其門曰:「鳳兮鳳兮,何如德之衰也!來世不可待,往世不可追也。天下有道,聖人成焉;天下無道,聖人生焉。方今之時,僅免刑焉。福輕乎羽,莫之知載;禍重乎地,莫之知避。已乎已乎,臨人以德!殆乎殆乎,畫地而趨!迷陽迷陽,無傷吾行!吾行卻曲,無傷吾足!」山木自寇也,膏火自煎也。桂可食,故伐之;漆可用,故割之。人皆知有用之用,而莫知無用之用也。
공자가 초楚나라에 갔을 때, 초나라의 광접여狂接輿는 그(가 머문) 집 문앞을 오가며 노래했다. “봉새여, 봉새여, 어째서 네 덕이 약해졌느냐. 앞날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날은 좇을 수가 없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룩하지만, 천하에 (올바른) 도가 없으면 성인은 (몸을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손에) 담을 줄 모르고, 재앙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만두게, 그만둬.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짓은. 위험하네, 위험해. 땅에 금 긋고 (그속에서) 허둥대는 따위 짓은. 가시(나무)여, 가시여. 내 가는 길 막지 말라. 내 가는 길은 구불구불 (위험을 피해 가니), 발에 상처를 내지 말라. 산의 나무는 (사람에게 쓸모 있어) 스스로 자기를 베게 만들고, 등불은 스스로 제 몸을 태운다. 계수나무는 (계피를) 먹을 수 있어서 베어지고, 옻나무는 (옻칠에) 쓸모 있어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모른다네.”
– 안동림 역, 현암사. 143쪽 <인간세>

비슷한 장면이지만 하는 말이 좀 다르다. 《논어》의 접여는 ‘往者不可諫,來者猶可追。’라며 지나간 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고 미래를 기약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장자》의 접여는 더 염세적이다. ‘來世不可待,往世不可追也。’라고 말한다. 앞에선 미래를 기대하자고 했던 반면 뒤에서는 미래조차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논어》에서 ‘今之從政者殆而’라고 하며 단순히 정치적 삶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였다면 《장자》의 비판은 더 날카롭다. ‘天下有道,聖人成焉;天下無道,聖人生焉。方今之時,僅免刑焉。’ 천하무도天下無道! 극심한 혼란기라는 뜻이다. 접여는 성인조차 그저 살아갈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상을 좇기는 커녕 겨우 형벌을 면할 뿐.

치세와 난세, 위의 표현으로 바꾸면 유도有道와 무도無道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오래전부터 다루어온 문제였다. 여기서 구세求世와 둔세遁世라는 삶의 형태를 적절히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子曰:「篤信好學,守死善道。危邦不入,亂邦不居。天下有道則見,無道則隱。邦有道,貧且賤焉,恥也;邦無道,富且貴焉,恥也。」
공자가 말하였다. “독실한 믿음으로 학문을 사랑하고, 죽음으로 지켜 도를 찬미하라.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말고, 혼란한 나라에 살지 말라.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고, 도가 없으면 은둔한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 가난하고 천하면 수치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유하고 귀하면 수치이다.”
– 박성규 역, 소나무. 325쪽. <태백 13>

공자도 어지러운 세상은 피해 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은둔하는 삶이 공자가 지향한 삶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도리어 이 차이는 달라진 시대상에서 발견해야 한다. 흔히 우리가 춘추전국이라 부르는 시대는 실제로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함께 묶어 부르는 것이다. 이 둘이 본래 《춘추》라는 책과 《전국책》이라는 책 이름에서 따온 것이기에 특정한 기점으로 깔끔하게 나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를 춘추시대, 어디부터를 전국시대라고 부르는지는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대략적으로 진晉이 조趙, 위魏, 한韓 세 집안에 의해 망하고 이 세 집안이 따로 제후국으로 등장하는 시기 쯤으로 본다.

춘추시대까지 주周 왕실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가 그나마 작동했다면,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체제 자체가 뒤 흔들려 버렸다. 당연히 혼란도 그 만큼 가중될 수 밖에. 장자는 이를 僅免刑焉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이제는 마치 가시나무 길을 걷듯 조심조심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까지 통용되었던 가치는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불우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일신의 안녕을 꾀해야 하는 시대가 바로 장자가 마주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엄혹한 시대의 현실은 기존의 가치를 되묻게 만든다. 이전까지 전해져온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따져 묻게 만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장자가 마주한 현실은 특정한 삶의 방식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에도 통용되었던 가치를 계속해서 붙잡고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桓公讀書於堂上,輪扁斲輪於堂下,釋椎鑿而上,問桓公曰:「敢問公之所讀者何言邪?」公曰:「聖人之言也。」曰:「聖人在乎?」公曰:「已死矣。」曰:「然則君之所讀者,古人之糟魄已夫!」桓公曰:「寡人讀書,輪人安得議乎!有說則可,無說則死。」輪扁曰:「臣也,以臣之事觀之。斲輪,徐則甘而不固,疾則苦而不入。不徐不疾,得之於手而應於心,口不能言,有數存焉於其間。臣不能以喻臣之子,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古之人與其不可傳也死矣,然則君之所讀者,古人之糟魄已夫。」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어느 날)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퀴를 깍(아 만들)고 있다가, 총치와 끌을 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한마디)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지.”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벌컥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만드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괜찮되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 일(의 경험으)로 보건대, 수레를 만들 때 너무 깎으면 (깎은 구명에 바퀴살을 꽂기에)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 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는 겁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겁니다. 옛사람도 그 전해 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 안동림 역, 현암사. 355~365쪽 <천도>

여기서 그 유명한 《장자》의 명제가 도출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 아는 자는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때 장자가 말하는 앎(知)이란 일종의 깨달음과 같은 것이어서 특정한 경험 위에서 개별적으로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표현되지 못하는 것,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수 없는 것에 비밀이 있다. 장자가 말하는 앎(知)이란 이처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실에서 출발하되, 이 현실을 비스듬히 빗나가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영웅, 성인聖人이란 장자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무슨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학습이 아닌 대지의 세계로

잘 알려져있듯 학습學習이라는 단어는 《논어》의 첫 문장에서 나왔다.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늘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 박성규 역, 소나무. 25쪽 <학이 1>

이 문장은 수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지만 과연 여기서 말하는 학습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많다. 과연 공자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배우라고 한 것일까? 그저 배움의 보편적 특성을 이야기한 걸까? 이에 대한 설득력있는 풀이로는 바로 예禮를 배우는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여기서 ‘예’란 단순히 예식, 예절 따위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문화적, 문명적 총체로서의 예禮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때의 ‘예’란 역사적으로 축적된 것일 수 밖에 없다.
이에 공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子曰:「溫故而知新,可以為師矣。」
공자가 말했다. “옛것을 탐구하여 새것을 알아야 스승이 될 수 있다.”
– 박상규 역, 소나무. 79쪽 <위정 11>

子曰:「述而不作,信而好古,竊比於我老彭。」
공자가 말했다. “계술하였지 창작하지 않았다. 신념을 가지고 옛것을 좋아하였다. 우리 노팽에 견주어 본다.”
– 박성규 역, 소나무. 261쪽 <술이 1>

옛것에 대한 강조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가는 옛 성인의 말과 행적을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무리로, 학습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체득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상술했듯 장자에게는 그런 관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과거란 배워야 할 표본이 아니다. 述而不作이라고 할만큼 절대적인 가치가 거기에는 없다. 도리어 옛것이란 현재에 통용되지 않는 낡은 구닥다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학습, 배움이 필요하지 않다. 도리어 어떤 앎이 요청된다.

이런 점에서 《장자》가 곤이 변하여 붕새가 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것은 어떤 우화, 상식으로 이해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배치 자체가 알 수 없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도록 괴이하게 짜여있다.

北冥有魚,其名為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為鳥,其名為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者,天池也。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 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그것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天池를 말한다.
– 안동림 역, 현암사. 27쪽 <소요유>

곤이나 붕이나 모두 통상적인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크기를 지니고 있다. 不知其幾千里也. 아니, 그 크기 이전에 북명北冥이나 남명南冥이라는 추상적 공간 자체가 지각할 수 없는 배치에 있다. 한편 물고기가 변하여서 새가 된다는 말은 어떤가. 모두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 이야기에 이어서 뒤에는 이 알 수 없는 존재를 비웃는 것이 나온다. 바로 매미와 비둘기. 그러나 장자가 보기엔 이는 당연한 판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작은 소견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奚以知其然也?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此小年也。楚之南有冥靈者,以五百歲為春,五百歲為秋;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為春,八千歲為秋。而彭祖乃今以久特聞,眾人匹之,不亦悲乎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조균朝菌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씽씽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이 짧은 수명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다. 5백년 동안은 (잎 피고 자라는) 봄이고 또 5백 년 동안은 (잎 지는) 가을이다. 아득한 옛날 대춘大椿이란 나무가 있었다. 8천 년 동안은 봄이고 다시 8천 년 동안은 가을이었다. 그런데 지금 (불과 7백 년 산) 팽조는 장수한 사람으로 아주 유명하여 세상 사람들이 이에 견주려 한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 안동림 역, 현암사. 31뽁 <소요유>

장자가 우화라는 형식을 쓴 것에 주목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을 끌어다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언어의 경계를 뛰어 넘어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말, 언어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 한계에 주목한다. 참된 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한계를 인식할 때만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 장자는 이것을 대지大知, 커다란 앎으로 풀이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진지眞知, 참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가 말을 불신했기에, 인간의 통상적인 지각을 불신했기에 또 다른 세계로 눈을 향할 수 있었다면, 공자는 말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공자는 역사와 문명에 대한 믿음 위에서 자신을 하나의 계승자로 위치지울 수 있었다. 따라서 장자의 시선은 날카롭고 냉철하다. 한계지어진 유한한 존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장자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 그는 또 다른 앎을 추구한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라’라는 역설이 그에게 있다. 그에 비해 공자는 낭만적 관점을 견지한다. 역사적으로 성립된 표본을 따르는 것, 그 삶의 태도와 지향을 자신의 것이 되기까지 오랜시간 습득하는 과정(時習)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희는 배움(學)을 본받음(效)이라 풀이할 수 있었다.

당연히 삶의 관계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공자는 수 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통틀어 약 3천 명의 제자가 그를 거쳐갔다고 한다. 공자의 삼천문도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가르침과 배움, 스승과 제자의 고리로 면면이 이어져왔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이런 연속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강학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물론 그에게 제자가 몇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제자를 가르쳤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어볼 수가 없다. 제자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은 공자와 제자들이 모였던 것과는 다른 식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두 죽음 – 기억과 망각

《장자》에는 흥미롭게도 장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론 이것은 장자 자신의 기록일 수 없고, 후대 사람들이 써넣은 것이다. 과연 어떤 의도로 이것을 써넣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겠지만 적어도 장자라는 인물이 추구했던 삶의 태도를 엿볼 수는 있다.

莊子將死,弟子欲厚葬之。莊子曰:「吾以天地為棺槨,以日月為連璧,星辰為珠璣,萬物為齎送。吾葬具豈不備邪?何以加此!」弟子曰:「吾恐烏鳶之食夫子也。」莊子曰:「在上為烏鳶食,在下為螻蟻食,奪彼與此,何其偏也!」以不平平,其平也不平;以不徵徵,其徵也不徵。明者唯為之使,神者徵之。夫明之不勝神也久矣,而愚者恃其所見入於人,其功外也,不亦悲乎!
장자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이 후하게 장사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나는 천지를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쌍의 옥으로 알며, 볕을 구슬로 삼고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내 장례식을 위한 도구는 갖추어지지 않은 게 없는데 무엇을 덧붙인단 말이냐?” 제자가 “(아무렇게나 매장하면) 까마귀나 소리개가 선생님을 파먹을 일이 염려됩니다.”라고 하자 장자는 대답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소리개의 밥이 되고 땅 밑에 있으면 땅강아지나 개미의 밥이 된다. 그것을 한 쪽에서 빼앗아 다른 쪽에 주다니 어찌 편견이 아니겠느냐!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척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는 이상 그 공평은 결코 참된 공평이 아니다. 자연스런 감응에 의하지 않고 인지의 마음으로 사물에 응하는 이상 그 감응은 참된 감응이 아니다. 명지(明知)를 지닌 사람은 외물에 사역되는 자에 지나지 않고 신지(神知)를 지닌 사람이야말로 사물에 감응할 수 있다. 대체 명지가 신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정해져 온 일인데도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견해를 믿고 인간사에 빠져 있다. 그 공적은 다만 외물에만 있(고 자기의 본성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느냐!”
– 안동림 역, 현암사. 773쪽 <열어구>

혹자는 장자를 두고 실존주의자적인 면모가 있다고 보는데, 이런 면에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장자는 삶 자체에 주목한 사람이지 또 다른 사후 세계를 생각하거나 고려한 인물은 아니다. 도리어 그는 현세적인 삶 자체에 골몰했던 인물이다. 죽음이란 현세적인 삶의 끝이지만, 더 이상 삶이 아니므로 현세적 인간이 고민하거나 관여할 일이 아니다. 장자가 아내의 죽음에 대해 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죽음이란 현세적 삶이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자연스런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아쉬움도, 슬픔도 남을 이유가 없다.

현세적 삶에 주목했다는 점은 공자도 마찬가지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자로가 물었던 이 질문은 공자의 이런 입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季路問事鬼神。子曰:「未能事人,焉能事鬼?」敢問死。曰:「未知生,焉知死?」
자로가 공자께 물었다. “귀신은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사람도 섬길 줄 모르면서, 어찌 귀신을 섬기랴?” “감히 여쭙건대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삶도 잘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랴?”
– 박성규 역, 소나무. 427쪽 <선진 12>

공자가 ‘괴력난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삶을 넘어선 질문에 대해서 공자는 대답을 피한다. 두 발이 딛고선 현세의 삶이 그의 관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현재적 삶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던 인물이다. 과거에 대한 신뢰와 마찬가지로.

子疾病,子路使門人為臣。病閒,曰:「久矣哉!由之行詐也,無臣而為有臣。吾誰欺?欺天乎?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且予縱不得大葬,予死於道路乎?」
공자가 병이 나자, 자로가 문인을 가신으로 삼았다. 병이 좀 낫자, 공자가 말하였다. “오래구나! 자로의 거짓 꾸밈이. 가신이 없어야 하는데 가신을 두었으니! 내가 누구를 속이랴? 하늘을 속이랴? 또 내가 가신의 손에 죽을 바에야, 차라리 너희 손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 내가 성대한 장례는 못할지언정, 길에서 죽기야 하겠느냐?
– 박성규역, 소나무. 355쪽 <자한 12>

구체적인 행적이 많이 남아있는 공자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예기》에 그의 죽음에 관련된 기록이 짧게 남아있기는 하나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죽음 조차도 현재적인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공자의 위패를 볼 기회가 없지만 과거 유가 사회에서는 지방 향교마다 공자의 위패가 있었다. 그는 죽었으나 하나의 상징으로, 성인의 표본으로 여전히 또 다른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죽음을 앞두고 작은 소망을 밝힌다. 바로 제자들 곁에서 죽음을 마지하고 싶다는 것. 실제로 공자의 제자들은 그의 죽음에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본래 삼년상은 부모의 죽음에 치르는 것이었기에 이를 심상心喪이라 부른다. 제자들이 삼년간 스승의 죽음을 기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렇게 스승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제례를 통해 공자는 끊임없이 기억된다.

그러나 장자가 선택한 길은 망각이었다. 봉분 따위를 만들지 말고 자신을 내버려두라는 말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고 추모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잊혀지는 길을 택했고, 실제로 그의 행적은 남지 않았다. 거꾸로 말하면 그는 자신의 삶이 기억되고 따라야할 어떤 표본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공자는 《춘추》를 썼다고 전해진다.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썼기 때문에 난신적자가 두려워 떨게 되엇다고 한다. 역사라는 어떤 이상에 근거해서 윤리적 판단이 가능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현재적 삶이 엄혹한 현실에 부정당하더라도 역사는 바르게 평가해주리라는 믿음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거꾸로 역사를 통해 전해져온 전통이란 의미있는 것이라는 믿음도 함께 들어 있다. 전통을 계승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공자의 인간은 역사라는 이상 위에, 문명이라는 가치 위에,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 위에 있다. 유토피아를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 다르게 말하면 참된 인간의 표본을 이야기하며 그런 인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유가는 이상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장자는 어떤 글을 썼다고 전해지지 않는다. 《장자》 조차도 그가 썼는지 신뢰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그 자체가 의미 없는 질문일지 모른다. 장자는 장자라는 역사적 인간의 입을 빌려 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숱한 우화 가운데 장자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즉, 장자의 이야기 조차도 하나의 우화일 수 있다. 마치 장자가 공자의 이야기를 가져다 쓴 것처럼. 그가 우화라는 형식을 사용한 것은 그가 살아간 시대가 체제와 가치가 무너지는 극심한 혼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기존에 통용되던 가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대. 한편 장자는 인간의 지각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인물이다. 인간은 알 수 있는 것보다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아니, 안다는 것 보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더 분명하다. 이 한계적 조건이 장자가 딛고 선 지반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그는 매우 현실적인 조건 위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장자에게는 학습이 없는 대신, 어떤 앎(知) – 깨달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알려주고 배운다는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이 아닌 이야기. 전하는 것이 아닌 들려주기. 바로 여기에 장자의 매력이 있다.[/vc_column_text][/vc_column][/vc_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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