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논어》 읽기 #5 – 〈공야장〉, 〈옹야〉

1. 성인의 길, 안회

춘추전국, 제자백가, 백가쟁명… 전란의 시대, 사상가들의 시대, 경서의 시대. 이 시대를 관통하는 텍스트 가운데 사마천의 《사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그는 변화무쌍한 세상사를 글로 담고는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말한다. 이 표현은 오늘날에도 쓰이지만 본래 이 말은 ‘제자백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특정한 색깔을 지닌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춘추전국시대를 육가六家의 시대로 요약하였다.

乃論六家之要指曰 易大傳 天下一致而百慮 同歸而殊涂 夫陰陽 儒 墨 名 法 道德 此務為治者也 直所從言之異路 有省不省耳

이 구분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상사/철학사를 서술한다고 할 때에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당대의 인물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했느냐의 문제가 생긴다.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은 어땠을까? 추정컨데 유/묵을 제외하고는 집단적 정체성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묵가는 거자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한 결사단체의 모습을 지닌다. 이들은 거자가 죽을 때 따라 죽기도 하였다. 유가는 사제관계로 구성된 무리였다. 《논어》는 특히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오죽하면 《사기》에 〈중니제자열전〉이라는 편이 따로 기록되었을까.

사마천에 따르면 공자를 따르는 제자를 다 합치면 약 3000명이 되었단다. 그 가운데 72명의 제자가 이름을 전한다. 그 중에는 단지 이름만 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몇몇 제자는 구체적인 행적까지 기록되어있다. 〈중니제자열전〉은 약 30명의 제자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 〈중니제자열전〉은 《논어》의 기록에 당시 전해져오는 이야기 등을 합쳐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논어》에서 볼 수 없는 기록이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공자와 제자들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논어》가 일차적이라 하겠다. 《논어》에서 가장 빛나는 제자는 단연코 안회라고 할 수 있다.

哀公問 弟子孰為好學 孔子對曰 有顏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공자가 긴 유랑 생활을 마치고 고향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나눈 이야기로 추정된다. 노나라의 군주 애공은 공자에게 제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제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배움에 대한 사랑(好學)’은 《논어》 전체를 걸쳐 이야기하는 중요한 주제 아닌가. 이를 가장 잘 실현하는 제자는 누구인가? 그런 제자가 있다면 첫번째로 손꼽아도 될 것이다.

공자는 안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不遷怒 不貳過’ 다른 대상에게 화를 내지 않고, 거듭 잘못하지 않았단다. 공자의 말대로만 할 수 있더라도 범인의 경지는 가뿐히 뛰어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제자가 지금 곁에 없다.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탓이다. 그런데 이 제자가 남긴 흔적이 얼마나 큰지 그 이후로 제대로 배움에 정진하는 제자를 만나보지 못했단다. 훗날 기록된 3000문도, 70제자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문은 이후 《논어》를 읽은 사람들에게 거듭던져졌다. 이것에 적극적으로 답한 이가 정이천이었다.

或曰 詩書六藝 七十子非不習而通也 而夫子獨稱顏子為好學 顏子之所好 果何學歟 程子曰 學以至乎聖人之道也 學之道奈何 曰 天地儲精 得五行之秀者為人 其本也真而靜 其未發也五性具焉 曰仁義禮智信 形既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其中動而七情出焉 曰喜怒哀懼愛惡欲 情既熾而益蕩 其性鑿矣 故學者約其情使合於中 正其心 養其性而已 然必先明諸心 知所往 然後力行以求至焉 若顏子之非禮勿視聽言動 不遷怒貳過者 則其好之篤而學之得其道也 然其未至於聖人者 守之也 非化之也 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今人乃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所以為學者 不過記誦文辭之間 其亦異乎顏子之學矣

이 글은 주희가 북송시대 학자들의 글을 편집하여 엮은 《근사록近思綠》에도 실려있다. 주석에 따르면 정이천이 18세에 태학에서 당시 선생이던 호원胡瑗의 질문에 답한 글이라고 한다. 글을 보면 알겠지만 이글은 단순히 안회를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존재방식으로의 학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안회가 손꼽혔던 것은 성인이 되는 학문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배웠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존재를 변화시키고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을 몸소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는 것! 이것은 인간의 존재다움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이었다.

子曰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그러나 성리학자들이 보기에 안연은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준 사람이었지 성인에 이른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공자의 말처럼 그는 오랜 시간 인仁의 경지에 이르기는 했으나 늘 그곳에 머물러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사욕과 사심을 없앤 맑은 마음을 추구하는 성리학자들에게 안회의 이야기는 하나의 경계가 되기에 충분했다. 한편 그가 가난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었다.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여기서 단사표음簞食瓢飲, 누항陋巷과 같은 표현이 나왔다. 또한 이처럼 가난한 삶을 즐겼다(樂)는데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떠오르기도 한다. 안회의 태도는 경제적인 부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주석에서도 주렴계가 명도와 이천에게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점에 대해 탐구하게 했다고 하지 않는가.

程子曰 顏子之樂 非樂簞瓢陋巷也 不以貧窶累其心而改其所樂也 故夫子稱其賢 又曰 簞瓢陋巷非可樂 蓋自有其樂爾 其字當玩味 自有深意 又曰 昔受學於周茂叔 每令尋仲尼顏子樂處 所樂何事

즐거움에 대한 탐구! 이것은 학문의 방향을 크게 전환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유가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추구했다. 이러한 삶을 상징하는 두 인물이 안회와 이윤이었다. 이윤은 탕임금의 재상으로 선정을 베푼 이였다. 안회는 자기 수양을, 이윤은 정치적 실천을 각각 대표했지만 이 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이상적으로야 이 둘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었다.

주석에 실린 양시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성리학자들은 대체로 내면을 더 중시하는 입장이었다.(6-18) 따라서 이윤이 보여주는 정치적 실천보다 안연을 통해 이야기되는 개별적 수양에 보다 무게가 실렸음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적 실천, 즉 관료가 되는 일이란 늘 어떤 문제를 함께 껴안는 것이기도 했다.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시간이 쫓기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오늘날도 그렇지만 본디 시험공부란 진정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기에 기대하는 것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기도 했다. 이때 안연이 보여주는 단사표음의 삶은 어떤 위로감을 선물해주었음이 틀림없다.

 

2.우정의 힘, 자로

《논어》를 읽다보면 웃음을 품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인물의 성격, 태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렇게 되는데, 자로라는 인물은 그 단골 손님이다.

顏淵 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顏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물론 후대의 또 다른 인물들에 의해 재구성되었겠지만 그래도 《논어》에 편집자의 입김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특히 이러한 구체적인 사건, 대화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더욱 생동감을 잃지 않는다. 아마 이런 사건이 정말로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안연은 안회를 가리키며, 계로는 제자 자로를 가리킨다. 자로를 계로라고 표기했던 것은 그가 계씨 집안에 등용되어 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호칭의 차이인지, 아니면 그에 대한 어떤 평가가 담긴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튼 이 둘은 공자와 매우 가까운 제자였다. 안회는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인물이며, 자로는 누구보다 오랫동안 곁에서 스승을 모셨던 인물이다. 그래서 《논어》에서 자로가 나오는 횟수도 꽤 많다.

사건의 재구성! 안회와 자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다. 문득 공자 선생이 묻는다. 너희들 각자가 품고 있는 뜻을 말해보거라. 이야기의 첫째를 담당하는 것은 자로이다. 자로는 매우 적극적인 인물이다. 나쁘게 말하면 나서기 좋아하는. 미리 당겨 자로의 성품을 보여주는 장면을 하나 소개한다. 〈술이〉편에 기록된 내용이다.

子謂顏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공자가 안회를 칭찬하며 이야기한다. 등용되면 나랏일을 맡아 행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 너와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때 옆에 있던 제자 자로가 불쑥 끼어든다. 나라의 군사를 맡으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고.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들어 칭찬해주기를 바랐을 테다. 그러나 이 선생은 만만치 않다. 여기서 나오는 포호빙하暴虎馮河라는 사자성어를 풀이하면, 맨 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 몸으로 황하를 건넌다는 뜻이다. 무턱대고 일에 뛰어든다는 의미. 그런데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러다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 바로 자로가 그런 사람이란다.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과는 아무 일도 함께 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대답한다. 이때 자로의 표정은 어땠을까?

〈공야장〉에 기록된 부분도 비슷하지 않을까? 선생의 질문에 자로가 먼저 대답한다. 수레나 가죽 옷을 친구와 나눠쓸 수 있는 통큰 사람이고 싶다고. 게다가 친구가 잘못하여 상하더라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겠다고. 자로는 꽤 시원시원한 성격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모범생 안회의 대답. 잘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수고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너무 교과서 같은 대답이다. 자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멋진 대답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안타까웠을까? 자기보다 까마득한 후배가 바른말을 골라 하는 모습에 못마땅했을까? 여튼 자로는 빨리 화제를 돌린다. 선생님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자로는 《논어》 안에서 늘 꾸중을 듣는 인물이다. 그는 좀처럼 칭찬을 듣지 못한다. 혹시나 뭔가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싶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는 순간 스승의 날카로운 말이 날아온다.

子曰 道不行 乘桴浮于海 從我者其由與 子路聞之喜 子曰 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어지러운 세상! 이 세상에서 뜻을 펼칠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니 차라리 뗏목이나 타고 바다로 나가볼까? 그런 우울한 생각이 드는 순간에도 제자들 가운데 홀로 자신을 뒤따라 올 사람은 자로 뿐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그는 충심으로 스승을 따르는 인물이었다. 계산하지 않는 과감함, 이것이 자로의 미덕이었다. 이 칭찬을 듣고 자로는 우쭐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스승이 알아줬다는 생각에 아마도 크게 자랑하며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를 보고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로는 용기를 좋아함이 나를 능가하지만, 분별력이 없다.’

박성규는 ‘無所取材’를 분별력이 없다라고 풀었다. 이는 ‘材’를 ‘裁度’으로 풀었던 주희의 주석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안회가 호학好學의 인물이라면 자로는 호용好勇의 인물이다. 자로의 면모는 아무래도 공자의 제자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공자가어》를 보면 협객이었던 자로가 공자의 제자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다. 그는 장검을 잘 썼었으며, 주먹질로 꽤 이름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자로가 공자의 호위무사 역할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짐작해보기도 한다.

자로는 공자를 통해 세상에 나온 士(文士)라는 새로운 인간형보다는, 전통적인 武士/俠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면에서 그의 용맹함은 논어를 읽는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그가 공자와 매우 밀접했던 인물이기에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를 두고 생각이 엇갈리기도 했다. 이 문장에서 ‘無所取材’를 풀이하는 방식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材’를 글자 그대로 재목으로 보아 ‘땟목을 만들 나무도 구하지 못했는데’ 식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공자가 자로의 성급함을 웃어 넘겼다는 풀이다. 한편 이 ‘材’를 ‘哉’와 같은 종결사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때 ‘그 용맹을 쓸 곳이 없구나!’로 옮길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주희의 주석보다는 평가의 수위가 좀 낮은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이 문장을 해석하던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설사 공자가 자로의 용맹함을 크게 꾸짖었다하더라도 말이다. 흥미롭게도 자로는 여러 제자 가운데 공자에게 싫은 소리를 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재아처럼 선생을 골려먹을 생각으로 괴상한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재아의 경우엔 공자가 거의 두 손을 든 제자라 보아도 무방하다. 대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거듭 등장하니.

공자가 위나라에서 위령공의 부인 남자南子를 만나고 돌아왔다. 이것을 두고 수근대는 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자의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와의 개별적 면담에 어떤 스캔들이 퍼졌는지도 모른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이 둘의 만남에 있어 어떤 여백을 남겨두고 있다. 혹자는 이 서술을 들어 사마천이 공자를 이야기하는데 남자와의 만남을 악의적으로 편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공자의 생애 가운데 오점으로 남을만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주희는 ‘그 나라에서 벼슬을 하려면 그 나라의 부인을 접견하는 예가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다른 문헌들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반대로 ‘남자가 만나기를 청하였다’고 보더라도 이를 자리를 청탁하기 위한 만남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공자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이 경우 역시 별로 좋은 이야기를 들을 사건은 아니다.

물론 ‘사건’이라 할만한 것이 하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로는 여러 제자의 침묵을 깨고 홀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논어》에서 자로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공자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기에 바쁘다. 이 부분에서 나는 ‘사제’라는 관계의 또 다른 국면을 발견한다. 자로만이 그렇게 감정을 표출했다는 것, 그리고 공자가 그 자체를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둘 간의 긴밀한 유대를 말하는 게 아닐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자로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로가 죽어 소금절임이 되었다는 소식에 공자는 이후 젓갈을 상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메일 보내기

아무 내용이나 상관 없어요. 메일을 보내주세요.

보내는 중입니다..
또는

로그인하세요.

계정 내용을 잊으셨나요 ?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