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논어》 읽기 #4 – 〈팔일〉, 〈리인〉

1. 난세亂世에 예禮를 외치다

예禮란 무엇인가? 주희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禮者,天理之節文,人事之儀則也。즉, 천리天理라는 우주적 법칙이 형식을 갖춰 드러난 것으로 사람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이 된다. 오늘날 쉽게 떠올리는 예의禮儀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 천리 따위가 어디에 있는가.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예의 현주소이다. 당연히 권력의 비대칭 관계에서 예는 하나의 폭력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의를 운운하는 것들이야 말로 진정 예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가 있을까.

주희가 드러낸 형식으로 예禮를 이해했다면 공자는 예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보통 〈팔일〉은 〈향당〉과 더불어 예禮를 잘 이야기한 편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잘 읽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삶과 매우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하는 탓에 그렇다. 〈팔일편〉의 시작부터 삐걱댄다. 공자는 계씨를 나무라며 말한다. ‘팔일무를 집에서 추다니 대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여기서 忍을 두고 해석의 방향이 엇갈린다. 是可忍也,孰不可忍也?하나는 계씨가 ‘차마 이런 짓을 했다니 무슨 짓이든 못하겠는가?’라고 옮긴다. 다른 하나는 공자를 주어로 보고 ‘이것을 참는다면 무슨 일이든 참지 못하겠는가?’라고 옮기는 것이다. 주희는 대체로 앞의 해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분명하게 해석의 방향을 못박고 있지는 않다. 다만 공자가 이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분명하다.

‘팔일’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천자의 예禮로 본다. 그런데 계씨는 노나라의 대부였다. 주희의 주에 따르면 사일四佚이어야 하나 이를 완벽히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제후도 아니고 한 나라의 대부가 이를 저지르다니! 다르게 보면 이는 당시 사회가 얼마나 요동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겠다. 천자天子의 자리는 제후들 뿐만 아니라 대부들까지 엿볼만한 것이 되었다.

실제로 주周 왕실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통치 체제는 거의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웃 제나라의 경우에는 군주가 대부의 후처와 간통을 저지르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진晉은 대부들이 앞다투어 일어나 나라가 찢기는 상황에 이르렀다. 공자의 고향 노나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훗날 삼환三桓이라 불리는 노환공의 후예들이 나라의 권력을 독차지한 상황이었다. 혹자는 공자가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하다 고향 노나라에서 추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군주를 몰아낼 정도로 이미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혈연에 기반한 전통적인 체제, 종법제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천하는 커다란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공자의 ‘예’를 이야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례夏禮’, ‘은례殷禮’라는 표현이다. 앞서 자장이 열 왕조 뒤를 물었을 때에 공자는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따랐으며, 주나라는 이 은나라의 예를 따랐다고 말했다. 이 말들에서 볼 수 있듯 공자는 하-은-주로 이어지는 특정한 전통에 ‘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공자는 주공을 크게 존숭했는데 이는 주공이야 말로 주나라의 예를 확고하게 세운 인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공자가 중시했던 것은 주례周禮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개별적 인간들 사이의 규범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낯선 표현이다.

〈팔일〉에서 나타난 공자의 탄식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공자는 주나라의 전통이 망가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계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참僭 – 아랫사람이 윗 사람의 예식을 행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달리보면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예가 간소화 되거나 폐지되는 것도 문제였다. 희생 양을 두고 벌어지는 자공과의 대화는 이를 보여준다. 참고로 자공은 재리에 밝았던 인물이었다.

공자는 주나라의 문물, 주례를 중시했지만 제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산에 제사를 지낸 문제로 나눈 염유와의 대화, 그리고 토지신을 두고 벌어진 재아와 애공의 대화, 그리고 앞선 자공과의 대화를 볼 때 제자들은 공자처럼 예를 그리 중시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염유와 재아, 자공은 공자가 따로 이름을 거론했던 열 제자에 들 정도로 공자에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이었다. 예를 갖추는 공자를 보며 아첨한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공자는 당시에도 시대착오적 인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이 파괴되는 전통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 종법제 자체를 고수하려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곰곰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공자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공자를 봉건제의 수호자로 이해한다. 이때의 봉건제란 전통의 악습을 통틀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는 주나라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체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바뀌지 않고 과거의 구습을 수호하는데 힘을 기울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공자가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주나라의 제도를 수호하려한 강성 보수주의자였는지는 의문이다. 계씨를 비롯한 당대의 실력자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과 관계를 유지했던 점, 가까운 제자들이 실제로 깊은 관곌르 맺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종법제 자체의 붕괴를 안타까워했는지 의문이 든다. 즉 상하가 확실히 구분된 사회체제가 공자의 이상이었는지 의문이라는 뜻이다. 도리어 그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물리적 힘에 예를 빌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비판하려한 것은 아닐까?

예는 글자에서 볼 수 있듯, 신성을 만나는 제사에서 나온 글자다. 공자가 주례를 이야기하며 당대를 한탄했을 때, 이는 신성의 세계가 파괴되고 나아가 이것이 하나의 도구로 쓰이는 세상을 경계한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다. 실제로 공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맹자는 예를 별로 중시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도래할 새로운 권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와 반대로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요소로 예를 중시여긴 것은 바로 순자였다. 그는 도래할 제국의 체제를 고민했던 인물로 그 형식에 ‘예’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는 상하를 구분하며, 사람 사이의 다툼을 미리 방지하는 윤리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순자는 주장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예에 초월적 근원을 부여하고 이를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공통적 규범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주희였다.

 

2. 예의 미학

유가 하면 많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제사다. 조상제사! 그러나 <논어>를 비롯한 고대 유가의 텍스트에서는 조상제사에 대한 부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종묘/사직으로 대표되는 국가 제사가 훨씬 많이 눈에 띈다. 주희는 공자가 제祭라고 한 것은 제선祭先,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라고 보았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제신祭神, 신령에게 지내는 제사다. ‘祭如在,祭神如神在。’ 이 구절을 주희는 ‘祭先主於孝,祭神主於敬。」愚謂此門人記孔子祭祀之誠意。’라고 풀어 제사를 대하는 효성스럽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풀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도올은 ‘제사를 지낼 적에는 있는 것 같이 하라 함은, 하느님을 제사 지낼 적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것 같이 하라는 뜻이다’으로 옮기며 주희가 구분한 것이 근거 없다고 주장한다. 도리어 祭如在에 대한 공자의 부연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석의 맞고 틀리고를 떠나 앞 시대보다 주희시대에 ‘조상제사’라는 주제가 중요해졌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제사에 대한 태도와는 다르다. 이는 어류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 신의 유무는 오직 이 마음이 정성을 다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 사량좌는 말하기를 자손의 정신이 곧 조상의 정신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조상 귀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실제로 어류에는 이런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자손이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조상의 기가 그에 감응하는데, 공중에 있던 조상의 기가 나의 정성에 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기는 다만 내 몸의 기입니까?” “다만 자손(내 몸)의 기일 뿐이다. 조상의 기는 곧 자손의 기와 연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상의 귀신이 실재로 존재하여 제사에 응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주희는 다만 내 몸의 기가 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제사를 받는 대상은 실재하는 게 아니다.

이는 유가의 합리적 구조 안에서 귀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가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죽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이야기 따위를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사후에 완전히 무로 돌아간다고 볼 수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음양의 일시적 결합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형태의 찌꺼기로 귀신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이는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때문인지 동양의 귀신이란 서양의 귀신에 비해 힘이 약하다. 물리적 세계에 뚜렷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따라서 제사란 죽은 자를 위한 종교적 행위라기 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예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사에서 드러나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위계적 서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적인 부분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다. 주희는 끊임없이 정감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의 예를 중시한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회사후소繪事後素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다. 주희는 이를 흰바탕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즉 인간의 흰 바탕과 같은 인간의 본래 마음에 예라는 그림이 그려진다고 보는 것이다. 흰 바탕이 있어야 그림이 돋보인다. 굳이 비교하자면 흰 바탕과 같은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 하여 형식(文)과 바탕(質)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따지고 보면 바탕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주희가 제사에서 효와 경을 이야기했을 때조차 이는 부모나 조상을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인 감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본질적인 태도라고 보았을 것이다. 제사에서 경건함이 강조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대상 없는 경건함, 본래 마음의 발현.

주희의 주석에서 감정적인 색체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예를 감정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보았으나 이때의 감정이란 구체적인 대상과의 관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 대한 효 조차도 부모를 대면하여 일어나는 다양한 정감의 총체, 혹은 그 가운데서 추린 선한 것을 일컫는다기보다는, 부모라는 대상에 대해 발현될 수 있게 예비된 특정한 마음을 일컫는 것처럼보인다. 그가 말하는 예가 규범적이고 형식적으로 느껴진다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도올은 주희의 ‘회사후소’해석이 문구 해석부터 잘못되었다고 본다. 좀 길지만 그의 해석을 인용한다.

…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후대의 수묵 산수화를 모델로 하여 회사를 생각하고 ‘소素’를 아무것도 물들여지지 않은 흰 천이나 흰 종이로 간주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용납키 어려운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수묵산수는 불교의 인식론을 거치면서 성당盛唐 이후에나 생겨나는 아주 특이한 회화장르로서 당나라 이전의 중국회화와는 무관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회사는 순수하게 고구려벽화나 한대벽화에서 볼 수 있는 물감을 사용하여 덧칠을 해나가는 채색화인 것이다. … 주자의 주도 채색화를 모델로 하고는 있으나, 그는 ‘고공기考工記’의 기사를 들어 흰 물감으로 먼저 바탕색을 바르고 그 위에 오채五彩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역시 송대의 회화적 관습에서 유추된 것으로 보여진다. 나는 고주古注를 따르는 것이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회사후소’를 회사(그림 그리는 일)는 ‘소’에 뒤따른다’는 해석은 문법적으로 억지가 있다. 그냥 회사는 소를 뒤로 한다로 읽어 ‘후後’를 소素를 목적으로 가지는 타동사로 읽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 ‘회사후소’를 주자식으로 해석하면 회사가 예가 되고 소는 그 예를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의 천성적 바탕이 된다. 그러나 고주에 따르면 소야 말로 예가 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회사후소’란 이러하다. 그림을 그리는데 먼저 색색의 물감으로 모든 형체를 구현하고 제일 나중에 흰 물감으로 그 형체를 명료하게 드러내어 광채나게 만드는 파이날 텃치(final touch)를 하는 것과도 같이, 인간의 예라는 것은 온갖 갖가지 삶의 경험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최종적으로 그 인격의 완성을 파이널 터치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예는 인성의 완성이다.

과한 면이 없지 않으나 그의 해석에 귀기울일 필요는 있어 보인다. 주희에게 규범적인 부분이 더욱 강조되어 보이는 것은 인간의 천성을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보고 이를 또한 하나의 틀로 담아내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의 정감에 대한 공자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이를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관저’ 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조금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이 시를 빼어나다 칭찬하며 즐겁지만 지나치지 않고, 슬프지만 상하지 않게 한다고 말한다. 不淫과 不傷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도 감정의 순수한 발현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규범적 성격이 훨씬 덜해 보인다. 본질과 형식의 조화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3. 증삼은 누구인가?

〈리인〉편에서 주희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바로 증삼과 공자의 대화일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물론 이보다는 ‘오도吾道’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도道가 유가를 비롯한 여러 학파에서 매우 중요한 술어였다는 점은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주희를 비롯한 송대 유학자들은 스스로 도학자道學者라 자처했다. 그만큼 도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보통 성리학性理學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인간은 성性, 우주는 리理를 통해 설명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도道였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도’란 마치 마법의 주머니와도 같은 것이어서 이 개념의 쓰임을 가지고 다양한 논의가 벌어졌다. 유가는 물론 도가, 법가, 불가에서 각기 다르게 ‘도’를 이야기했으며, 덕분에 각 학파는 경계를 넘나들며 논쟁을 벌일 수도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사상적 배치 위에서 ‘도’라는 글자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것이었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이라 했을 때, 이를 주목해서 해석해야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주희는 이 문장의 주석에 이렇게 말한다. 道者,事物當然之理。그러나 공자 입장에서 보면 과연 도를 이렇게 크게 이해하는 것이 과연적절한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도를 순리順理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나, 과연 그것이 만물의 당연한 이치를 포괄하는 그런 거대한 개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도리어 邦有道, 邦無道와 같은 표현에서 보이는 것처럼 ‘도’는 방邦, 즉 나라라는 정치 공간을 이야기하는 술어로 사용되었다. 이때의 ‘도’란 다르게 말하면 ‘치治’, 더 부드럽게 옮기면 평안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朝聞道란 난세를 직면한 공자의 한탄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주희에게 그렇게 읽을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는 ‘도’를 보다 깊이있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當然之理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특별한 이치를 포괄하는 표현으로 ‘도’를 사용한다. 참고로 덧붙이면 치리治理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본래 ‘리’에는 ‘다스림’이라는 뜻이 들어있기도 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를 사용할 때엔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形而上者 謂之道也 形而下者 謂之器也

초월적 의미로서의 ‘도’! 이를 통해 주희는 도가와 불가의 개념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증삼과의 대화는 특히 불가의 스타일을 흡수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염화미소拈華微笑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붓다의 깨달음은 말로 전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붓다의 미소는 마하가섭에게만 이해되었다. 미소를 통한 도의 전수!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논어>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주희에게 큰 행운이었다. 공자의 가르침도 무엇인가 비밀스럽게 전해졌다. 그것도 오직 증삼에게!

공자에서 증삼에게, 그리고 자사와 맹자로 이어지는 흐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는 각각 <논어>, <대학>, <중용>, <맹자>라는 사서를 경전의 지위에 올려놓기 위한 방안이었으며, 또한 주희 자신이 이를 이은 유일한 적통임을 주장하고자 하는 목적도 담겨있었다. 이를 ‘도통道統’이라 하는데 주희는 요순 이래로 이 도의 전승이 하나의 흐름으로 전수되었고, 공자의 수 많은 제자 가운데는 오직 증삼에게 전달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류에서 밝히고 있듯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증삼은 고작 20대 중반에 불과했다. 젊은 연령이라는 점은 비밀스런 전수과정에 있어 큰 장점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후대 학자들을 모두 설득하기에는 부족했다. 적어도 그는 공자의 생애를 설명하는 데 주요하게 언급되는 주유천하周遊天下에 참여하지 않은 제자가 아닌가. 자로와 안연, 자공과 염유와 같은 선배 제자들 보다 그가 나은 부분이 무엇이 있기에.

주희는 그가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했으며, 증삼의 제자들이 <논어>를 정리했다고 주장한다. 증삼이라는 이름이 아닌 ‘증자’라고 표기된다는 점, 그가 제자들에게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여럿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에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증삼의 제자가 편집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반대로 그의 스승을 우상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子曰:「賜也,女以予為多學而識之者與?」 對曰:「然,非與?」 曰:「非也,予一以貫之。」
子貢問曰:「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

위 두 문장은 이런 의심이 근거가 없는 게 아님을 증명한다. 게다가 충忠은 <논어> 전체에서 개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충신忠信으로 함께 언급되는 것이 보통이다. 즉, 개별적인 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신뢰를 다루는 개념인데 증삼은 이를 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마음의 상태로 바꿔버렸다. 이러한 부분은 성省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짐작 가능하며, 심성心性을 주로 이야기한 맹자가 증삼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리性理를 이야기하는 주희 같은 이들에게 이는 매우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일이관지一以貫之. 증삼과의 대화에서는 단순히 이것이 충서忠恕라는 본래 마음의 실현/발현에 그치는 것이겠지만 여기에는 더 큰 복안이 숨어있었다. 심성心性과 천리天理를 잇는, 만물과 천하를 관통하는 그런 체계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주희의 표현을 빌리면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전체로, 전체는 하나로 관통하는 세계. 따라서 증삼에 대한 주희의 이해는 어떻게 보면 심각한 오독인 동시에 자의적 해석이지만, 또 다르게 보면 아주 새롭게 창조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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