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선농인문학서당 《논어》 1강 – 배운다는 것

1. 《논어》 를 읽기 전

낯선 사람과 낯선 책, 낯선 공부를 만나기 전 몇 가지를 짚어두자. 단 본 강좌의 최소한의 목표는 《논어》라는 책을 읽는 것이다. 여기에는 으레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대체로 이런 질문은 십중팔구 《논어》를 펼쳐보지 않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다. 고전이니 철학이니 하는 말 때문에 《논어》가 매우 고상하며 어려운 책이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책을 펼쳐보면 알겠지만 《논어》의 문장은 평이하며, 게다가 짧은 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술술 읽을 수 있다. 마음 먹으면 한 나절에도 충분히 읽을 만한 분량이다.

조심스러운 사람은 이렇게 묻기도 한다.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성인 공자의 말씀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겠냐 생각하기에 이렇게 묻는 것일 테다. 물론 《논어》의 문장은 허공에 흩어지는 숱한 말들과는 다르다. 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이 있다면, 이천 년을 살아온 이 말의 무게는 수백 권의 책과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 말의 무게를 재어본다는 자체가 무리다. 어떤 말은 그 말의 탄생과 상관없이 제 스스로 생명을 지녀, 꿈틀거리며 스스로를 증거하는 말이 있는데 《논어》의 말이 그렇다. 다만 《논어》의 말이란 ‘이해’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기에 이 질문은 틀렸다. 나아가 말이란 본디 ‘이해’를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도대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라는 말처럼, 말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표현한다.

말-글에는 어떤 정감, 의지, 욕망, 태도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물론 ‘이해’는 말을 이 전체성에 대해 쓸 수 있을테지만, 오늘날 우리의 언어가 그렇게 풍부하지는 못하다. 도리어 우리는 어떤 말의 의미를 개념이는 단어로 압축하고 그것을 하나의 정의, 즉 무엇이라는 짧은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을 외는 것, 혹은 그에 가깝게 읊어댈 수 있는 것을 ‘이해’라고 말하지 않나? 그래서 ‘사전’에 물어보라 말한다. 사전은 똑똑하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없으니.

이렇게 질문하자. 대체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읽기’가 ‘글-말’과 관계를 맺는 어떤 행동이라고 할 때 《논어》 만큼 본질적으로 이 질문에 다가가게 하는 책이 있을까? 왜냐하면 《논어論語》는 문자 그대로 ‘말(論/語)’의 묶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가벼운 이 말을, 또 어떻게 보면 깊디 깊은 이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눈으로 문자를 훑어내리는 것을 ‘읽기’고 말하지 않는다. ‘읽기’란 ‘본다’는 행위와 일차적으로 관련이 있지만 꼭 거기에 묶여있지는 않다. ‘표정을 읽는다’는 말이 있듯, ‘읽기’란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 부분이야 말로 더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읽기. ‘행간을 읽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 읽기란 문자의 표면을 훑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이면에 은은하게 비치는 저자의 의도, 욕망, 의지 등을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이면만을 따져묻는 것은 《논어》, 특히 중국 고전을 다루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문자 위에, 혹은 뒤에 어떤 거대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중국의 문자, ‘한자漢字’란 글자 하나가 하나의 ‘글’ 이기 때문에 그 낱낱의 글자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논어》를 읽는 가장 일차적인 방법은 원문 그대로 읽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 더욱 선명하며 책의 본래 모습을 만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것이 제일第一의 방법이기는 하되, 최선最善의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유일唯一한 방법도 아니다. 어쨌든 《논어》는 오늘 우리의 말로 번역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번역본으로 책의 대강大綱, 큰 줄기를 읽은 뒤에 부분적으로 원문을 읽으며 그 세세한 부분을 다뤄볼 생각이다. 그것은 책의 표면 – ‘문자’, 책의 심연 – ‘저자’ 뿐만 아니 또 다른 읽기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책을 보는 눈 – ‘독자’를 또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책 자체를 읽는 것 뿐만 아니라, 책을 탄생시킨 세계를 읽는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 책을 읽는 방식을 통해 ‘읽기 자체’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책은 최소한 세 번 읽혀야 한다.

까다롭게도 말이 길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수업에서 세번째 읽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논어》를 어떻게 읽었는가를 따져묻는 것이 우리 수업의 첫 시작이다. 같은 글을 어떻게 다르게 보았는가? 그리고 이렇게 다르게 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유의미한 것은 오독誤讀 또한 하나의 읽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이 있는데, 설사 오독이라 하더도 그것이 ‘읽기’일수 있으려면 읽기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읽기의 대상이 되어야 읽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형용모순의 말인가?!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읽을 수 없는 글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 직접적으로 말하면 읽을 필요 없는 글이 있다. 그것은 아무련 차이, 개별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옮기는 글이 그렇다. 책을 보지 뭣하러 그 글을 본단 말인가. 미처 소화하지도 못하고 개념어를 늘어놓는 글도 그렇다. 개념이란 하나의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논어》를 으며 ‘仁’이니 ‘禮’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다음부터는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거나, 섣부르게 개념을 다루지 말자. 그보단 자신이 어떻게 《논어》 를 읽었는지를 글로 정리하도록 하자. 그런 글이 있어야 비로소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자기를 내보이는 글이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은 글에 자기를 ‘내놓기’ 보다는 뒷걸음치며 물러선다. ‘평범한 반성’, ‘가벼운 다짐’이 그렇다. 게중엔 솔직한 이야기가 없지 않겠지만, 경험을 비춰 보면 대체로 이런 반성과 다짐이란 잘못된 글쓰기의 버릇인 경우가 많다. ‘~ 겠다’로 끝나는 ‘일기 쓰기’라는 특정한 글쓰기의 폐해!! 이런 반성과 다짐은 도리어 절실한 질문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가벼움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깊이 내려가지 않겠다는 어떤 ‘게으름의 의지’일 테다.

程子曰 凡看語孟 且須熟讀玩味 須將聖人之言語切己 不可只作一場話說 人只看得此二書切己 終身儘多也
– 讀論語孟子法

자, 《논어》를 읽자. 이렇게 길게 말해 놓은 것에서 알 수 있듯 그 읽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고작 수십쪽에 달하는 글은 술술 넘어갈테지만 그렇게 쉬이 넘어가는 데 주의하라. 도리어 되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읽고 있는가? 읽는다면 대체 무엇을? 위의 정이천의 말처럼 자기에게 절실하기란(切己) 쉽지 않은 법이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 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程子曰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是此等人 讀了後又只是此等人 便是不 曾讀
程子曰 頤自十七八讀論語 當時已曉文義 讀之愈久 但覺意味深長2

 

2. 學, 배움이란 무엇까?

《논어》를 열면 이렇게 시작한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여기서 ‘자왈子曰’이란 바로 ‘공자왈孔子曰’을 말한다. 《논어》는 공자의 말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놓치게 되는 한 가지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로 옮기는 ‘자왈子曰’이란 본디 ‘선생님께서 말했다’는 뜻이라는 점이다. ‘공자孔子’, 공씨 선생님이 어째서 그저 ‘선생님’(子)이 되었을까? 참고로 공자의 시대에는 ‘자子’의 칭호를 얻은 여러 사람이 있었다. 이를 ‘제자諸子’라 한다. 맞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그 ‘제자’가 이것이다. 백가는 이들을 따르는 무리를 가리킨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공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마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다른 선생들보다 우리 선생, 공자님이 짱이라능!

제자백가의 시대, 숱한 책들이 나왔다. 이를 제자서諸子書라 부르는데, 다른 것들은 모두 그들이 따르는 선생의 이름을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맹자》가 그렇고 《장자》나 《순자》, 《한비자》 따위가 그렇다. 그런데 어째서 이 책은 《공자》가 아니라 《논어》인 것일까? ‘논어’가 어떤 의미냐에 대해서는 숱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어쩌면 중요한 질문은 이 책이 왜 《공자》가 아닌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제자諸子 가운데 하나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혹은 다른 이들과 달리 유독 크게 존숭받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자왈子曰’, 선생님의 말인 이상 이 말은 가볍지 않다. 그 자체로 무엇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에는 그 구도를 정확히 보여주는데, 한쪽에 ‘자왈子曰’ 스승의 말이 있다면 다른 쪽에는 그것을 듣는 ‘제자弟子’,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있다. 이 책은 스승의 말을 누군가 옮겨 또 다른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쩌면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해 이 책은 공자의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 공문孔門 혹은 유가儒家에 들어오려는 이들을 위해 만든 일종의 교과서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 책의 실질적인 시작이 〈학이學而〉라는 점은 분명한 의도를 담고 있다.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책이 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니 크게 귀를 기울여 들어봐야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다만 여기서 짚어둘 것은 《논어》의 모든 편이 그렇듯 각 편의 제목은 모두 첫 시작에서 무작위로 따왔다는 점이다. ‘學而時習之’로 시작하기 때문에 ‘學而’라는 제목을 붙였지, 배움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學而’라고 붙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점을 기억하자. 《논어》는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엔 매우 뒤죽박죽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구 섞어 놓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으나, 통일된 일관성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편의 제목으로 내용을 묶으려고 하지 말고, 문장들 가운데 커다란 줄거리를 찾자. 《논어》의 편명이란 20개의 묶음을 구별해주는 주소에 불과하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논어》 1-1, 즉 〈학이편〉의 첫 문장은 중요하다. 책 전체의 시작이지 않나? 맨날 ‘집합’만 풀었다는 모 광고의 우스운 이야기처럼 이 문장은 《논어》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하나의 비빌을 일러두면, 많은 《논어》 강독 강좌에서도 《논어》를 완독하는 경우는 드물다. 〈학이〉만 가지고도 한 세월이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논어》의 마지막 편집자는 성공했다. 《논어》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문장을 통과해야 하니 말이다. 대체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 첫 문장은 공자의 말이라는 부분을 빼놓고 다르게 보면 일종의 강령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어떤가.

  1. 배움은 기쁘다.
  2. 함께 공부하는 벗들이 있으니 즐겁다.
  3. 군자란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세줄 요약이 가능한 이 문장을 다시 이렇게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모여서 배우는 우리를 세상은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는 즐겁고 기쁘며 당당하다.’

‘學而時習之’를 줄여 ‘학습學習’이라 했다는 낡은 이야기는 접어두자. 여기서 흥미롭게 보아야 할 것은 ‘有朋自遠方來’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붕朋’은 통상 ‘벗’으로 옮기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친구’와는 다르다. 친구란 기껏 같은 나이 또래에 친한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지 않나? 여기엔 나이도, 친분도 없다. 또래이기 때문에 혹은 친하기 때문에 모인 게 아니다. 거꾸로 모인 사람을 가리켜 말한다. 이들은 왜 모였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공자의 문하에서 무엇을 배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유가儒家라는 이들은 처음부터 무리를 지어 배우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이와 대비되는 도가道家, 법가法家 등이 임의로 사람들을 묶어 붙여준 이름이라면 유가儒家는 실제로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이었다. 《논어》에 그 흔적이 아주 강하게 드러나는데, 《논어》는 공자의 말을 다룬 책이기는 하되, 공자의 말만 넣지는 않았다. 이는 공자가 홀로 저술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곁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이며, 이후에도 뒤를 이어 여러 인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유자有子-유약有若, 증자曾子-증삼曾參은 여러 제자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손자뻘 제자, 즉 제자의 제자가 남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증삼이 아닌 ‘증자’가 이를 말해준다.

공자의 제자들은 멀리서부터 모여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참고로 이들은 ‘산너머 남촌’에서 가뿐히 건너온 사람이 아니다. ‘自遠方來’, 말 그대로 먼 곳에서 이국異國 땅에서 찾아온 이들이 많았다. 공자는 노魯나라 출신이었는데 제자들 가운데는 다른 나라 출신이 적지 않다.

어째서 모여들었을까? 공자가 잘 생겨서? 아니면 무엇인가 좋은 게 있어서? 가장 설득력있는 대답은 공자가 당시에 이미 제자를 잘 키워내는 인물로 이름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어지러운 세상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훌륭한 교사, 요즘 식으로 말하면 쪽집게 과외 선생식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 시대에 공자만 유명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당대에 이름을 날린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공자에게는 미안하지만, 공자는 당대에 듣보잡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들이 모인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가리켜 말했다는 것이다. 이합집산離合集散,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멀리서부터 모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배움과 연관지어 말하면서.

어쩌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배움이란 ‘함께 함’이라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활동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거꾸로 이렇게 물어보자. ‘혼자서 배우는 것이 가능한가?’ 배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립된 상태와는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닐까? 왜냐하면 배운다는 것에는 본질적으로 어떤 변화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배움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다. 지식은 습득할 수 있으나 배움은 특정한 행동을 낳게 만든다. 아니, 그것이 어떤 행동 – 변화된 신체로서 증거되지 않는다면 배움이란 이뤄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희朱熹, 훗날 주자朱子라 불리는 사람은 습習에 대해 이렇게 주석을 달아 놓았다.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습習’이란 날개짓을 연습하는 것이다. 실제로 글자에도 날개를 뜻하는 한자(羽)가 들어 있지 않나. 날개짓을 연습하는 새가 푸른 창공을 높이 날아 오를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학습, 배움이다. 둥지 안에 있던 조그만 새가 하늘을 나는 존재가 되었을 때, 이 둘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좁은 둥지에서는 날개가 그저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했다면, 하늘을 나는 새에게는 도리어 두 다리가 불필하지 않을까? 이렇듯 배움에는 다른 존재를 향한 의지가 숨어있다.

한편, 이것은 내가 체험적으로 얻어낸 결과인데 혼자 배우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어느 정도의 혼잣말은 내면을 깊게 만들지만 지나치면 나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혼자만의 고립된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병들게 만들곤 한다. 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이 고집불통 되는 것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승없이 배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배움이 어떤 변화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특정한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희는 주석에서 배움, 학學을 이렇게 풀었다.

學之為言效也

배움이란 본받는 것이다. 마치 어린 새가 어미 새의 날개짓을 따라 하듯. 오늘날이야 ‘자율학습’이니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흥미로운 조어를 통해 개별성을 강조하지만 전통적으로 유가에서는 그런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단 배움이란 개별적 경험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르게 말해 ‘내가 나로서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게 바로 배움이기 때문이다. 순자의 말을 빌리면 멀리보겠다고 까치발을 들어 고개를 빼는 사람은 조금 밖에 보지 못한다. 담장 위로 올라가거나 높은 산에 올라서면 훨씬 먼 곳을 볼 수 있지 않나? 스승이란 담장과도 같고 높은 산과도 같다. 그 위에 올라서는 것이 바로 배움이다.

모든 말은 똑같은 무게를 지니며, 모든 삶은 동등한 값을 지녔을까? 사마천은 말한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고,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있다.(人固有一死 或重於太山 或輕於鴻毛)’고. 말도 마찬가지이다. 천년을 살아낸 말이 있고, 하루도 못 버티는 말이 있다. 천년을 살아온 말이 고전이다. 이 말을 익히는 것이 어찌 다른 말을 익히는 것과 같을까. 마찬가지로 역사에는 거인들이 있다. 이 거인이 보는 것이 어찌 필부匹夫가 볼 수 있는 것과 같을까. 구만리 창천을 날아오른 붕새를 매추라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小知不及大知!

따라서 학습의 기쁨(說/悅)이란 이 장쾌한 시선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야 말로 배움의 소득 아니겠는가?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면 우리는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변화된 신체’란 다른 게 아니다. 새로운 눈, 새로운 입, 새로운 귀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역설이 있는데, 이 새로운 신체는 한 시대와 살갑게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상가에게는 두 가지 초상이 있다. 시대의 불꽃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대의 불꽃이 되지 못하고 불씨를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하는 불우한 사람도 있다. 굳이 비교하면 이것은 맹자와 공자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맹자》는 첫 시작부터 왕과 독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맹자는 먼 곳에서 왕을 찾아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눈다. 아마도 왕이 먼저 맹자를 불렀으리라. 그렇기에 맹자의 목소리는 날카롭다. 그는 천하를 다스릴 자의 태도와 성품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공자는 어떤가? 미리 이야기하지만 공자는 당대를 대표하는 실력자들을 만나지 못했다. 제후들을 만나기는 했으나 이들과의 만남은 매우 단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맹자는 뒤따르는 수레가 여럿이고, 그를 불러주는 사람도 여럿 있었지만 공자는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반란을 일으킨 사람에게 찾아가 의탁하려 했을까?

그러나 이렇기 때문에 ‘人不知而不慍’이라는 태도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 사실 이 말은 매우 서글프게 들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세상과 끝내 어울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앞당겨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자’라는 말을 듣는가 하면, 헛수고는 그만하라는 충고를 듣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며 뚜벅뚜벅 걸어간 인물이었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유가에게 적어도 그것은 개인의 변화를 낳는 동시에 시대의 변화를 낳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있기란 쉽지 않다. 말은 군자君子라지만, 군자가 ‘군君’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공자는 그토록 천하에 나가 뜻을 펼쳐보이고 싶었지만 결국 별 지위를 얻지 못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그가 실질적인 실력을 갖추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공자는 당대의 이름난 재상이나 책사들처럼 활약할 수 있었을까? 관중은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고, 장의는 혓바닥으로 천하를 뒤집었다. 그런데 공자는 무력으로 천하를 이끄는 것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아첨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시대 – 전쟁을 꿈꾸고 지배를 꿈꾸는 시대에 공자는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었다. 변설辯舌, 말재주로 천하를 뒤집는 시대에 그는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자가 재상이 되었다 한들, 아마도 크게 두드러지는 인물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한편 공자는 스스로 그런 자리를 마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 공자를 들어 써 준다 한들 공자는 과연 기꺼이 갔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를 사람을 피해 도망다니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스스로가 자청한 길은 아닐까? 〈학이편〉 첫 시작에서 ‘우리는 남과 다른 것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읽어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이었다면, 공자가 말하는 《논어》가 이야기 하는 배움이 그런 것이었다면 애초에 저렇게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쉽지 않다. 다만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공자가 말하는 앎이란, 배움이란 자기 만족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쨌건 거기에는 어떤 갈등이 놓여 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자기 만족에 그치는 것이었다면 알아주지 않음으로 끝날 것이다. 그것을 입에 올려 다룰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공자는 쿨하지 못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냐고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마치 채 삼키지 못한 무엇이 목구멍에 걸린듯 답답하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한다. 그러지 말라고. 어찌나 여러번 이야기했던지 이 이야기는 〈학이편〉 끝에도 나온다.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배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낯선 것을 향하는 의지이다. 그렇기에 나로 머물지 못하고, 먼 곳으로 나아가게 하며 멀리서 누군가를 불러 오기도 한다. 그렇게 낯선 것을 만난 존재가 되었을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것이 있다. 하나는 또 다른 것을 볼 수있기에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이 쾌감을 널리 나누지 못해 갑갑한 답답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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