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읽기 #1 《소요유》 – 구만리 창천의 붕새가 되어

1. 낭만적 독해를 경계하며

《장자》에 늘 따라 붙는 말이 있다. ‘자유’. 연암서가에서 출간된 김학주의 번역본에는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안병주의 번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요유〉에 붙인 해설 일부를 인용한다.

상식을 뛰어 넘은 무한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으로 날아가는 붕새를 통해, 통쾌한 해학의 철학자 장주는 그가 주장하는 절대자유의 경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곤이나 붕도 결국 변화되는 만물의 하나이고 만물이 모두 평등하다는 만물제동의 물 가운데의 하나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상식을 초월한 곤과 붕을 통해 일단은 절대 자유의 경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요유는 곧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라는 뜻이다. 
- 안병주역, 전통문화연구회. 25쪽.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을 〈소요유〉라고 한다. 현실 세계에는 여러 가지 구별(또는 차별)이 있어 사람을 구속한다. 권력과 신분, 도덕과 권위, 삶과 죽음, 가난과 부유 등…. 장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욕利慾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비웃으며 도道의 세계, 초월적인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 〈소요유〉의 즐거움을, 무한한 허공을 힘차게 날아올라가 미지未知의 북해北海로 날아가는 대붕大鵬에 비유한다. 
- 안동림역, 현암사. 25쪽.

평등 – 만물제동은 〈제물론〉의 주요 주제로 이야기된다. 과연 그런지는 의문으로 남겨두자.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소요유〉는 자유를 노래하는 글로 이야기된다. 그것도 절대 자유! 이런 해석은 세속을 초탈한 도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의 도인이란 밥짓고 청소하며, 구차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인위人爲로 일컬어 지는 세속의 일들을 훌훌 털어버린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미있는 것인지를 묻고 싶다. 장자, 《장자》라는 텍스트와 긴밀하게 연관된 역사적 인물 장자는 과연 그렇게 초탈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순수한 정신의 자유를 꿈꾼 인물이었을까? 또한 그런 삶을 읽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 낼까? 절대자유라는 고원한 이상은 이 질척이는 현실에서 벗어날 힘을 선물해줄 수 있을까?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서술하면서 철학을 크게 셋으로 분류한다. 우주론, 인간론, 인식론. 그런데 중국 철학에는 인식에 대한 순수한 사변적 탐구가 없다.1 한편 인간이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객관적 탐구도 부족하다. 따라서 ‘중국 철학’이라 불리는 것이란 인간사와 얽힌 것들 뿐이다. 펑유란의 구분을 빌려 이야기하면 우주론과 인식론에 대해서는 텅 비어 있지만 인간론에 있어서는 꽤 주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겪는 구체적인 경험을 문제로 다룬다고 말한다. 《장자》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아마 이것은 ‘중국철학’을 담당한 사람이 훗날 문사文士라 불리는 독서인 계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을 다르게 말하면 관료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관료거나 관료였거나, 관료를 지향하는 이들은 당연히 치治, 정치적인 문제와 무관할 수 없었다.

장자가 말한 것이 절대적인 자유라면, 그것은 어떤 삶을 가리키는가? 구체적인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가? 과연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게 있는가? 나는 ‘절대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과연 어떤 삶을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삶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인식적 환기, 속이 거북할 때마다 들이키는 탄산수마냥 일종의 청량제 역할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춘추전국은 전란의 시대였고 유래없는 혼란기였다. 이 혼돈 가운데 저마다 삶의 길을 모색한 것이 제자백가 아니던가. 백가쟁명이라 불리는 치열한 싸움터에서 장자만 홀로 고고한 인물로 세상사를 관조했다는 것이 과연 옳은 해석인지 묻고 싶다. 인간 장자.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지향했는가. 그가 발딛은 현실위에서 그 삶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나. 이것을 묻고 싶다.

한편 이런 질문은 거꾸로 내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장자》를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를 꿈꾸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자유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절대적 자유란 그냥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자유가 만들어내는 주체란, 무능력한 주체에 불과하지 않나? 그 문제를 만들어내는 체제와 싸우기는 커녕 손에 무기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나에게 절대적 자유란 ‘네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만히 잊어라’라는 말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장자》가 과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면 대체 왜 읽어야 하는가? 차라리 범람하는 힐링의 소비체제 속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 내 삶을 관리하고 보살펴주는 사제의 손에 내 맡기는 것이 어떤가. ‘다잊어’라고 외치는 것보단 ‘네 문제는 말야…’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는 게 낫지 않나. 그러나 이 둘, 망각과 보살핌 모두 내가 겪는 구체적인 현실로 나를 이끌지 못한다. 도리어 나를 현재적 문제로부터 단절시키고 무색무취의 공간으로 가둬버리기 십상이다.

전복적 시각에서 《장자》를 읽어내는 길은 없는 것일까? 장자의 말은 무기가 될 수 없는 건가? 그의 말은 예리한 칼이 되어 또 다른 삶의 문을 여는 키가 될 수는 없나? 그가 열어젖혀 보이고자 했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도 이 땅을 살았던 한 명의 가련한 사람이었을 진데, 과연 그가 당면한 삶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욕망, 그의 고민, 그의 투쟁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절대적 자유’라는 실체없는 말에서 벗어나 장자를 읽어보려 한다.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읽는 게 아니라, 과연 장자의 말은 무엇에,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며 읽으려 한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장자를 돌려보려 한다. 사변적 언어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이를 위해 〈소요유〉라는 제목을 괄호치고 읽으려한다. ‘소요유’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레게는 이를 ‘Enjoyment in Untroubled Ease’로 옮겼다. 한편 제인 잉글리쉬는 ‘Happy Wandering’으로 앤거스 그레이엄은 ‘Going Trabling without a Destination’으로, 로버트 앨린슨은 ‘The Transcendental Happiness Walk’로 옯겼다. 제목이 워낙 널리 알려져있어 본문의 다양한 결을 읽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제목에 얽매여 ‘장자가 자유에 대해 무엇을 말했나?’라고 섣불리 질문하지 말고 읽어보자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장자》의 낯선 호흡과 리듬에 맞추려면 일단 우리의 익숙한 발걸음을 접고 그의 보폭과 시선에 맞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곤鯤이 붕鵬이 되는 이야기

北冥有魚,其名為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為鳥,其名為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者,天池也。2

《장자》의 시작은 너무나 거대하다. 북쪽 바다의 커다란 물고기가 붕이 되어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바다, ‘북명北冥’은 물리적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장자의 시대를 생각하면 북쪽 바다란 생각하기도 어려운 까마득한 저 멀리 어딘가를 가리키는 말 아니었을까? 우리는 세계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북해의 차가운 바다를 금방 떠올리지만 장자가, 《장자》를 읽은 고대인들이 과연 그랬을까? 도리어 그들은 하나의 상상적 공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신비한 공간. 그 무한함을 가지고 이 문장을 읽어야 한다. 고대인들에게 이 시작은 아찔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명冥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이는 아득한 세계를 묘사하는 말이다. 성현영은 이를 ‘명막무애溟漠無涯’라고 풀이했다. 끝이 없이 아득한 공간을 가리킨다. 인식 불가능한 그 어떤 세계, 거기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신기하다. ‘곤鯤’! 후대의 연구자 가운데 일부는 이것이 어떤 특정한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작은 물고기'(小魚) 혹은 ‘물고기의 알'(魚卵)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보면 《장자》는 터무니 없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물고기의 알이, 그 작은 물고기의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곤鯤이라는 물고기도 ‘상상想像’해야만 한다. 거대한 포유류 고래를 떠올리면 안 된다. 여기서 다시 필요한 것은 크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수치에 민감한 우리는 ‘대체 그럼 얼마나 큰 것이기에?’라고 쉽게 묻는다. 거듭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물고기는 깊은 심연에 사는 어떤 이형異形의 생물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녀석이 새로 변한다. 물고기가 새가 되는 이야기! 미리 강조하면 《장자》에서 변화(化)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변화란 죽음(死)을 향한다. 미래未來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뜻한다. 그래서 미래는 알 수 없기 마련이나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 모두는 죽는다. 죽음(死)이란 변화(化)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 실제로 이 두 글자는 서로 닮아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숙명적 변화, 죽음만이 있는 것일까? 장자에게 묻는다면 아마 그는 비록 그 숙명적 미래를 바꿀 수는 없으나 또 다른 변화가 있다고 말하리라. 그리고 거꾸로, 그렇게 또 다른 존재로 변화했을 때, 죽음이란 또 다른 의미를 지닌 사건이 될 것이다. 숙명적 사건을 피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를 다르게 대할 수는 있다.

생사에 관련된 장자의 말은 나중으로 미루자. 중요한 것은 수중생물이 공중으로 도약했다는 점이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얄궂은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것은 그의 비늘과 신체가 물 없이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아가미는 물 속에서만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창공의 신선한 공기는 그에게 독이 된다. 그러나 이 기이한 존재는 그런 물고기로서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이 거대한 존재는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장자는 이 새에게 붕鵬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곤이 붕이 되는 이야기. 장자는 물고기와 붕새라는 전혀 다른 존재를 붙여놓고 이를 변화(化)라 말한다. 따라서 장자가 말하는 변화란 어떤 존재가 전혀 다른 존재로 탈바꿈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그 존재가 가진 하나의 속성, 거대함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존재는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오른다. 이 거대한 새는 세계의 저편에서 또 다른 세계의 저편으로 날아간다. 이 광대함! 북명의 심연에서 남명의 창천으로, 이 깊이와 높이 아득한 넓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크기! 이것이 장자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 아득함, 광대함, 광활함을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식의 ‘높이’가 중요하다.

인간들이 우글우글 모여사는 이 땅에서 이 곤붕鯤鵬을 본 사람이 있다고 치자. 어떻게 보았을까? 아마도 그는 이를 그저 떠 다니는 구름(浮雲)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더 가까이서 보았다고 하더라도 차이가 있었을까? 아득한 북녁 바닷가에 데려다 놓아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는 심연의 바다를 마주하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野馬也,塵埃也,生物之以息相吹也。天之蒼蒼,其正色邪?其遠而無所至極邪?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

아지랑이와 티끌이 날라다니는 세상. 이 미약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구만리 창천을 바라보면 무엇이 보일까? 그저 새파랗게 아득한 창공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저 푸른 창공이 제 빛깔일까? 중고등학교 과학시간에나 할법한 질문을 장자는 던진다. 학교에서 배우는 대답은 이렇다. 공기중에 빛이 산란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장자가 이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르겠다. 다만 아지랑이와 티끌로 우글거리는 이 땅에서는 저 창공의 제 빛깔을 알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득히 멀어서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遠而無所至極) 우리는 보이는 세계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의 참모습일 리는 없다.

‘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라는 표현은 해석이 분분하다. 아지랑이와 티끌이 붕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듯 붕새도 아지랑이와 티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일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이어지는 매추라기, 매미 등의 존재를 보건데 이는 좀 다르게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붕새에게는 아지랑이와 티끌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에게도 이 티끌의 세계가 아득히 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티끌이 날아 다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세계는 갖가지 다양한 것들이 몸을 섞어 사는 곳이다. 당연히 문제도 많다. 그런데 이 좁아터진 세계의 문제가 붕새에게도 문제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붕새가 그냥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 오른 것은 아니었다.

且夫水之積也不厚,則負大舟也無力。覆杯水於坳堂之上,則芥為之舟,置杯焉則膠,水淺而舟大也。風之積也不厚,則其負大翼也無力。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而後乃今培風;背負青天而莫之夭閼者,而後乃今將圖南。

거대한 존재가 날아오르려면 그만큼 큰 바람이 있어야 한다. 마치 커다란 물이 있어야 커다란 배를 띄울 수 있는 것처럼. 커다란 배를 띄우려면 커다란 물로 나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커다란 바람이 부는 들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 커다란 날개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여기에는 어떤 누적(積)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한편 이 조건을 맞기 위한 환경이 중요하기도 하다. 엄청나게 커다란 연을 날리려는 사람을 상상하라. 좁은 골목길에서 그 연을 날리려 한들 제대로 날릴 수 있겠는가? 넓은 들, 가로막힌 것이 없는 광활한 곳으로 나가야 한다.

붕새는 붕새이기 때문에 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구만리 창천을 날아 올랐기에 붕새가 된 것은 아닐까? 대체 곤에게는 언제 날개가 솟아났을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곤은 구만리 창천을 날아가는 날개를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앞서 붕새의 크기는 단순히 물리적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구만리 창천을 날아 오르는 그의 날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날개는 구만리를 날아오르지 않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이 거대한 날개를 펴보지 못한, 작은 새들의 비웃음이 섬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결코 멀리 날아보려하지 않았다. 장자의 말이 허망하게 보인다면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3. 큰 지혜와 작은 지혜

蜩與學鳩笑之曰:「我決起而飛,槍榆、枋,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奚以之九萬里而南為?」適莽蒼者三湌而反,腹猶果然;適百里者宿舂糧;適千里者三月聚糧。之二蟲又何知!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奚以知其然也?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此小年也。楚之南有冥靈者,以五百歲為春,五百歲為秋;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為春,八千歲為秋。而彭祖乃今以久特聞,眾人匹之,不亦悲乎!

뒷부분 혜시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당시에도 장자의 말은 터무니 없을 뿐만 아니라 쓸데도 없다고 손가락질 받았다. 여기 나오는 매미나 비둘기는 정확히 장자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편협한 시선을 말한다. 이들의 말은 이렇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가끔은 실패해서 땅에 곤두박질 칠 때도 있는데 구만리는 뭔 소리며, 남쪽 저 끝으로 날아간다는 이야기는 대체 무슨 말이냐?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거대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니, 똑같이 이 거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장자의 비유에 주목하자. 교외로 잠깐 나가는 사람은 가벼운 도시락을 싸면 그만이다. 그러나 천리길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지금이야 화폐를 들고 다니면 어디서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지만 고대 사회에도 그랬겠는가? 3개월간 식량을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장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철학적 모험이다. 그것도 아주 멀리 떠나는… 먼 길을 가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르다. 之二蟲又何知!! 따라서 장자는 자신의 말이 소수에게만 필요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진저!

붕새와 매미 혹은 메추라기 등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큰 지혜와 작은 지혜의 차이이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작은 세계에 갖혀있는 존재는 커다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는 세계의 본질이란 그렇게 막막하며 커다란 진실로 육박해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저 유명한 〈추수秋水〉편의 고사를 인용해야겠다.

가을의 홍수가 한꺼번에 넘쳐 숱한 강물이 황하로 흘러들었다. 물의 흐름이 [질펀하게] 멀리까지 퍼져서 양쪽 강가며 모래톱 둘레를 보아도 소와 말을 분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이 기뻐서 좋아하며 온 천하의 훌륭함이 모두 자기에게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북해에 이르러 동쪽[의 해상]을 보니 [어찌나 넓은지] 물의 끝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백은 비로소 그 얼굴을 돌려 [북해의 신인] 약若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속담에 백쯤되는 도리를 들으면 저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바로 나를 [두고] 말한 것이오. – 안동림역. 417쪽

뷱해약이 말했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 없는 것은 [그 개구리]가 살고 있는 [좁은] 곳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별 수 없는 것은 [그 벌레가] 살고 있는 철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오. 한 가지 재주뿐인 사람에게 도에 대해 말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그가 받은] 교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요. – 안동림역. 418쪽.

장자는 이처럼 작은 지혜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깝다고 말한다. 자기의 좁은 식견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을 보고 드는 자연스런 감정이리라. 흥미로운 점은 이 큰 지혜와 작은 지혜의 구분이 큰 삶과 작은 삶의 구분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대년大年’이란 표현은 분명 장수하는 존재를 가리켜 말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삶을 연장하는 것은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때로 죽음을 긍정하며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뒤에 보겠지만 〈대종사〉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따라서 장자의 ‘대년’이란 전설상의 신선처럼 죽음을 뛰어넘어 사는 삶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도리어 장자는 오래살았다는 팽조와 같은 인물에 견주어 장수를 꿈꾸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이것보다 큰 삶이 있다.

대체 이 큰 삶은 무엇을 의미할까? 커다란 지혜가 낳는 커다란 삶이란? 이 커다란 지혜는 어떤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만리 창천으로 날아올랐던 붕새를 기억하라.

故夫知效一官,行比一鄉,德合一君而徵一國者,其自視也亦若此矣。

〈소요유〉에서 붕새의 이야기는 크게 세번 반복된다. 곤이 변해 붕이 된 이야기. 〈제해〉라는 책, 혹은 사람이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 그리고 은나라의 탕왕이 들은 신비한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는 메추라기가 붕새를 비웃는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 탕왕에 주목하자. 탕왕은 은나라의 창시자이자 유가儒家의 성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메추라기의 좁은 식견을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식견이 좁은 이런 사람이 있다. 한 관직이나 한 나라에 적합한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들이 보는 세계란 바로 이렇다. 메추라기의 시선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일관一官, 일향一鄉, 일군一君, 일국一國이란 바로 통치의 세계를 의미한다. 관직에 올라 고을을 다스리고, 군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식견이란 메추라기와 같다. 장자가 탕 임금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명백하게 비꼬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계, 천하天下를 다스린다는 자들의 좁은 식견이다. 그러고 보면 북명北冥이나 남명南冥이란 이런 통치와 무관한 세계가 아닌가. 장자의 시선은 사해지내四海之內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이형의 존재들은 저 바깥에서 날아와 또 다른 저편으로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그의 출발점도 그의 목적지도 이 세계 바깥에 있다. 통치의 세계 바깥. 따라서 그의 세계는 불온한 구석이 있다. 이 매끈한 세계, 하나의 언어, 하나의 윤리, 하나의 통치, 하나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遊無窮者,彼且惡乎待哉! 故曰:至人無己,神人無功,聖人無名。

흔히 노님으로 번역되는 ‘유遊’가 나왔다. 이 ‘유遊’란 이 통치세계, 아지랑이와 티끌이 날리는 지저분한 세계에 발을 붙이지 않는 삶이라는 점에서 자유로운 삶의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 ‘유遊’의 삶이 세계 바깥에 또 다른 삶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말자. 그는 탈주의 철학자이며 은둔의 철학자이기는 했으나 도피의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이 단단한 세계에 구멍을 뚫어대는 사람이었으리라.

장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형태는 통상적인 세계의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의 인물이다. 여기서 무기無己를 자신의 사욕을 없앤 인간으로 이해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이해하지는 말자.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보다는 공명功名이 추동하는 욕망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다르게 말하면 여기서 자기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 업적(功)과 사회적 명성(名)으로 구성된 자기를 가리킨다.

그런 면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성인聖人을 이야기한 것은 흥미롭다. 통상적으로 성인이란 문화적 영웅인 동시에 뛰어난 정치적 업적을 이룬 인물이다. 바로 공명功名의 화신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반대로 성인에게는 공명이 없어야 한다. 그는 텅 비어 있는 존재여야 한다. 이어지는 요임금과 허유의 대화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장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子治天下,天下既已治也。而我猶代子,吾將為名乎?名者,實之賓也,吾將為賓乎?鷦鷯巢於深林,不過一枝;偃鼠飲河,不過滿腹。歸休乎君!予無所用天下為。

장자가 그려내는 인물이란 천하의 일과 무관한 존재이다. 천하가 다스려지는 방식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자신의 개별적 삶에 주목할 뿐이다. 나뭇가지 하나에 만족하고, 개천물에 목을 적시는. 이를 두고 한편으로는 소박하다하겠지만, 구세救世를 꿈꾸는 유가나 묵가의 편에서 보자면 일신의 안녕에만 몰두하는 소인의 삶이라고 하겠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아마도 〈양생주〉나 〈인간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리 당겨 말하자면 장자가 보는 세계란 이미 소수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혼란으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천하를 다스린다는 이들은 많으나 그들은 결국 천하의 쓰임이 되어 결국엔 어느 순간 버려질 뿐이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천하를 추동하는 욕망은 수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놓고 있었다. 맹자는 역사를 두고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 보았다. 장자는 한 시대가 저물고 또 다른 한 시대가 창조되는, 새로운 체제의 새벽을 살았다. 역설적이게도 해가 떠오르기 전이 가장 춥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루자.

천하를 다스린다는 이들은 많으나 그들은 결국 천하의 쓰임이 되어 결국엔 어느 순간 버려질 뿐이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천하를 추동하는 욕망은 수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놓고 있었다. 맹자는 역사를 두고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 보았다. 장자는 한 시대가 저물고 또 다른 한 시대가 창조되는, 새로운 체제의 새벽을 살았다. 역설적이게도 해가 떠오르기 전이 가장 춥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루자.

 

4. 방황彷徨과 소요逍遙

〈소요유〉는 장자와 혜시의 대화로 끝난다. 이 두 대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커다란 나무이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하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장자가 칠원漆園의 관리였다는 점이다. 가까운 데서 나무를 보고 관찰했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장자》 내편에서는 나무가 여럿 등장한다. 한편 나무의 속성을 떠올릴 수 있다. ‘재목材木’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무는 잘리고 깎여 다듬어지는 대상을 의미한다. 그것도 특정한 쓰임에 따라. 맹자는 인간의 본성(性)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고자告子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고자는 인간을 교육시키는 것이 마치 나무를 휘어 그릇으로 짜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마치 나무처럼 인간은 특정한 가치와 윤리에 따라 깎이고 다듬어지는 존재다.

非不呺然大也,吾為其無用而掊之。

그러나 혜시의 말에 따르면 장자의 말은, 장자의 사유는 마치 커다란 박과 같아서 도무지 쓸모가 없다. 이 커다란 것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혜시는 이 커다란 박을 낳은 씨앗을 위왕에게 얻었다고 했다. 하나의 추측이지만 혹시 위왕의 소개로 장자와 혜시가 만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해시의 눈에 보기에 커다란 박이 쓸모 없는 것처럼 장자의 말도 그렇다. 쓸모 없으니 버리자! 이것이 혜시의 생각이다. 혜시는 장자의 말을 폐기해 버리려 한다. 그런데 장자는 화살을 도리어 혜시에게 돌린다. 문제는 크기가 아니다. 도무지 쓸 줄을 모른다는 점에 있다. 큰 것을 쓰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夫子固拙於用大矣。宋人有善為不龜手之藥者,世世以洴澼絖為事。客聞之,請買其方百金。聚族而謀曰:『我世世為洴澼絖,不過數金;今一朝而鬻技百金,請與之。』客得之,以說吳王。越有難,吳王使之將。冬,與越人水戰,大敗越人,裂地而封之。能不龜手一也,或以封,或不免於洴澼絖,則所用之異也。

여기서 장자가 소개하는 고사는 흥미롭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치열한 전쟁 가운데 엉뚱한 기술(?) 하나가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여기에는 또 다른 풍자가 숨어있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전쟁 기계들은 전쟁에서 이길 다양한 전법과 계책을 만들어 내는데 몰두한다. 혜시도 이와 무관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명가名家로 분류되는데, 명징한 논리적 체계에 몰두했던 인물이었다. 치밀한 논리를 따졌던 만큼 나랏일에 있어서도 많은 힘을 기울이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커다란 전쟁이란 의외의 지점에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찾아올 수 있다.

則夫子猶有蓬之心也夫!장자가 혜시의 마음 상태를 꼬집는 말이다. 당신은 어째 그리 마음이 꽉 막혀 있는가? 한편 여기서 꽉막힌 마음을 가리키는 ‘봉蓬’이란 글자는 앞서 메추라기의 비상을 이야기하며 나온 적이 있다. 彼且奚適也?我騰躍而上,不過數仞而下,翱翔蓬蒿之間,此亦飛之至也。而彼且奚適也?오석들이 박씨를 크다며 부숴버렸다는 혜시나 수풀속에서 허덕이며 붕새를 비웃는 메추라기나 장자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들의 마음에는 여백이 없다. 공백이 없다. 커다란 날개를 펼 공간이 없다.

두번째 이야기는 기괴한 나무를 소재로 삼는다. 이 커다랗고 기괴한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 이유는 울퉁불퉁한데다 이리저리 꼬여 있어서 도무지 아무 것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不中繩墨 먹줄을 그을 수 없다. 그래서 목수들이 그저 두고 지나치는 버려진 나무이다. 여기서 ‘繩墨’이란 특정한 가치 척도를 비유하는 도구이다. 나무를 자를 때 먹줄을 긋는 것처럼 어떤 가치는 세계를 설명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세계는 나뉘고 움직인다. 그러나 가끔 여기에 맞지 않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설명할 수 없는, 손에 자를 쥐고도 도무지 잴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기괴한 이들을 만나는 일이 있다. 한 시대의 가치 척도로 잴 수 없는 존재. 장자는 아마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잴 수 없었다고 말하리라. 먹줄을 댈 수 없는 나무는 재목으로 삼을 수 없다. 가치 척도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에게는 사회의 일원으로 특정한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子獨不見狸狌乎?卑身而伏,以候敖者;東西跳梁,不避高下;中於機辟,死於罔罟。今夫斄牛,其大若垂天之雲。此能為大矣,而不能執鼠。

그렇다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 커다란 존재에게 기대할 것은 다른 것이어야 한다. 하늘처럼 커다란 소에게 쥐 잡는 일을 시키는 것은 무리다. 재빠르고 약삭빠른 살쾡이같은 놈들은 쥐를 잘 잡는다. 쥐 뿐인가. 그 날칼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작은 생물을 낚아채 잡아 먹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 제 세상인 양 이리저리 오가는 존재들. 이 약삭빠른 존재란 아마도 혜시를 의미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이들은 화를 입을 수 있다. 제멋대로 돌아다니지만 언젠가 덫에 걸리는 날이 오면 그 삶도 허망하게 끝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일에 얽힌 사람들에 대해 장자는 늘 비판적이다.

今子有大樹,患其無用,何不樹之於無何有之鄉,廣莫之野,彷徨乎無為其側,逍遙乎寢臥其下?不夭斤斧,物無害者,無所可用,安所困苦哉!」

이제 그 유명한 ‘소요’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 커다란 나무를 저 멀리 어딘가에 심어두라. 그러나 이 수수깨끼 같은 말은 대체 그곳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無何有之鄉 廣莫之野 아무것도 없는 고을, 넓고 막막한 들. 거기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구체적으로 있기는 한 것일까? 이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실제적인 공간이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북명과 남명이 하나의 상상적인 공간이었던 것처럼 구체적 공간이라기 보다는 상상을 통해, 가치의 전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아닐까?

여기에 나무를 심어두자. 그 커다란 나무의 자리는 바로 여기이다. 여기에 심어둔 만큼 나무의 쓰임도 다르다. 그 나무 아래에서 쉬거나 그 주변을 정처 없이 오가기도 하자. 장자는 방황 – 정처 없이 거닐고, 소요 – 그 곁에 누워 자겠단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소요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그 바로 앞에 짝을 이루는 말이 있으니 바로 ‘방황彷徨’이라는 두 글자이다. 그 커다란 나무의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황하는 것.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

오늘날 방황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과연 장자는 어떤 의미로 쓴 것일까? 그가 혹은 당대의 사람들이 이 단어를 어떻게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기에는 특정한 목표가 끼어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리저리 오가는 걸음. 참고로 김시천은 유遊를 ‘거리 둠’이라 풀이하기도 했다. 거리를 두고 오가는 걸음걸이. 여기에는 도끼질도 고단한 일도 없다. 이렇게 보면 無何有之鄉, 廣莫之野는 어딘가 별 세계에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어쩌면 이 세계를 벗기면 나타나는 또 다른 결이 있는지도.

+2017.03.06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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