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천의 《장자》 이야기가 듣고 싶다 –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아이세움의 ‘나의 고전 읽기’라는 시리즈의 청소년 서적을 발간중이다. 그 가운데 22번째 책이 나왔다. 《장자》를 다룬.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라는 제목의 책이다. 최근 《장자》를 강독하고 있는터라 서점에서 《장자》 관련 책은 눈여겨 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마구 긁어모으지는 못한다. 돈도 문제지만, 유사 자기계발서나 힐링을 주제로 한 책은 읽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책을 보고는 제목에 흥미를 가졌고, 저자 ‘김시천’의 이름에 반가웠다. 이전 저작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을 열어보고는 ‘김태권’의 일러스트라는 사실에 눈이 반짝였다. ‘엄훠! 이건 사야해!!!’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결과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는 내용이 부실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책의 기획과 맞지 않기 때문이겠다.

책을 읽는 중에도, 책을 읽은 뒤에도 몇번이나 앞 뒤를 살펴보았다. 아이세움의 ‘나의 고전 읽기’ 시리즈가 방향을 바꾸었나 하는 생각에서. 이유인즉 도무지 청소년을 위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문장이 난해하다.

《장자》에 대한 해석이 아큐주의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자》를 통해 ‘진보’를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물론’을 말하기도 했다. 관펑이 장자를 아큐정신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했다면, 르언지위는 노자와 장자가 ‘기氣’를 말했다는 점 때문에, 장자가 유물론 사상가라고 추겨세우기도 했다. 사회주의 이념을 채택한 중국 사회에서 유물론자라는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혁명을 정당화한 그들에게 혁명의 정당성은 유물론이란 철학 전통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34쪽

청소년들이 위 글을 쉽게 읽을 수 있을까? 일단 설명이 필요한 개념이 많다. ‘아큐주의’는 물론 ‘유물론’, ‘기氣’, ‘마르크스주의’ 등 낯선 개념이 많다. 아큐주의의 경우 바로 앞 페이지에서 ‘봉건적이고 퇴폐적이며, 비관적, 기회주의적’이라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이 설명으로 충분할지 모르겠다. 청소년들에게 가깝고 친절한 어휘와 방향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점은 크게 아쉬운 부분이다. 이와 같은 점은 아이세움의 청소년 고전 시리즈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다.

게다가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장자》 자체에 대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장자》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전달하고 있다. 연구자로서는 관심있는 주제이지만 《장자》를 처음 접하는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저자는 스스로 책에서 고전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길을 보여줬는지에 대해서는 책을 읽는 내내 궁금증만 더해질 뿐이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각각 역사적으로 《장자》를 어떻게 읽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잘 전달하고 있지만 정작 저자가 《장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저자는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 근대적 독해 방법을 비교하여 통상적인 《장자》의 이해, 즉 ‘노장老莊’이라는 특정한 관점에서 벗어나 《장자》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소년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장자》도 낯선 만큼이나 ‘노장’이니 ‘도교’니 하는 것도 낯설다. 그런데 여기에 루쉰과, 궈모뤄, 박세당과 함석헌의 해석까지 이어지니 과연 이 책을 청소년이 얼마나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차라리 그런 내용을 줄이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로서의 《장자》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꼽아 새롭게 《장자》를 구성했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저자는 안병주∙전호근의 《역주 장자》를 기준으로 장자 원문을 소개한다. 그러다보니 낯선 한문 단어가 그대로 번역문으로 실려 버리는 경우도 있다.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인데, 이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 지금은 제가 신을 통해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고,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시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인지라, 경락과 긍경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 167쪽

‘도道’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神’을 아무런 설명없이 그대로 ‘신을 통해’라고 옮긴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경락과 긍경이라고 풀이했는데 원문으로는 ‘技經肯綮’이 된다. 여기서 技經을 ‘경락’으로 옮겼고, 肯綮은 그대로 긍경으로 표기했다. 보통 힘줄과 근육이 엉킨 곳을 뜻하는데, 이렇게 옮기면 대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자가 겪었을 《장자》 번역의 난해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장자》의 개념어를 그대로 옮긴 부분이 적지 않기에 《장자》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이 읽기엔 매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저자가 제목에서 이야기한 ‘무하유지향’을 주제로 大, 遊, 無用과 같은 장자의 주요 개념을 설명했으면 어떨까?

위에서 쓴 소리를 많이 뱉기는 했으나 역설적으로 《장자》를 읽고 연구하겠다는 사람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책이 되고 말았다. 일단 《장자》텍스트의 성립사, 해석사를 전하고 있고 여기에 그레이엄의 해석을 주요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에 게을러서 그런지, 아니면 원전만 계속 읽어서 그런지 이렇게 연구 성과를 간결히 요약해 놓은 책을 보면 반가울 따름이다.

게다가 김시천이라는 연구자가 어떻게 《장자》를 읽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던 부분도 적지 않은 소득이다. 이전 저작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김시천은 함석헌의 해석을 높이 치는 것으로 보인다. 오강남으로 대표되는 종교적이며 내면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펑유란 식의 도식적인 도통주의적 철학사 중심의 체계를 벗어나, 보다 정치적인 해석의 길로 함석헌에 주목하는 게 아닐지. 그러나 함석헌에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 해석 역시 상당히 온건한 해석은 아닐까? 과연 함석헌이 이야기한 ‘불간섭이라는 자유'(227)이나 ‘건드리지 말라'(228)는 주장이 오늘날에 어떤 힘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도리어 다른 전복적이고 해체적인 독법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

쓸데 없이 글이 길어 졌는데 사소한 편집상(?) 잘못을 지적하련다.

64쪽에 ‘현대 중국의 《장자》연구자인 유소감劉笑敢에 따르면’이라 표기했는데 33쪽에서는 ‘류 샤오간’으로 표기했다. 64쪽의 표기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간에는 ‘무하유 마을에서 들려오는 메아리'(170쪽)라고 했는데 책 제목이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라고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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