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종교와 낡은 종교 

잔인한 4월이다. 무엇이라도 주절거려야 할 것 같아 썼다. 이런 걸 쓰면 역시 모교에 투척!

지난 3월 26일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이승만 탄신 140주년 예배가 열렸다. 건국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예배라니! 십자가 밑에 커다랗게 놓인 이승만의 사진은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증거한다. 이 신흥 종교를 ‘대한민국교’라 부르자. Koreanity!! 이들의 복음서는 이렇게 기록되어야 한다.

데모크라시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거하시매 그를 일러 ‘이승만 박사’라 하더라. 그러나 아직 흑암에 있는 백성들은 이 아름다운 빛을 알지 못하였다. 미국식 민주주의로 혁명을 기도하였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여 그를 한성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고난을 받으셨으나 그 속에서 기쁨을 체현하셨으니 그로 인하여 대한민국이 세워졌고 축복을 받았도다.

기념예배에서 김영호 배제대 총장은 마태복음 16장 24절을 봉독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어서 이호 목사라는 자가 ‘십자가의 건국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대체 건국과 십자가가 무슨 상관이기에? 그는 말한다. 이승만이 고난을 겪었던 한성감옥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랐던 골고다 언덕과 같다고. 이어 말한다. 이승만은 놀랍게도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곧 축복이 되었다. 그의 체험, 고난을 축복으로 받아들인 것은, 대한민국의 원형적 체험이다. 대한민국, 이 나라, 이 성전은 곧 그의 몸이로다.

이제 교회에는 예수가 필요하지 않다.  낡은 예언자는 그의 집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는 새 예언자가 대신한다. 그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는 말은 간단히 이렇게 바뀐다. 애국愛國! 낡은 종교는 말한다. 예수의 삶을 따르라. 새로운 종교는 말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라. 낡은 종교의 덕목은 고난이었다. 고통을 겪는 자와 함께하라. 그러나 새로운 종교의 덕복은 축복이다. 선진 한국이라는 약속된 땅으로!!

따라서 십자가를 이야기하나, 저 개종자들에게는 고난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일단 저들의 삶과 고난이 무관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도무지 고통을 모르는 이들이다. 옛 종교는 피 흘림을 말했다. 그러나 새 종교에는 피 흘림이 없다. 저들의 가죽은 두껍고 매끈하여 가시에 찔리더라도 핏방울은 커녕 기름이 줄줄 흘러내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쓴 맛을 뱉어버리기에 그렇다. 저들은 축복이라는 단맛에 젖은 나머지 고난이라는 쓴맛을 씹을 줄을 모른다. 자신의 고통도 축복의 단맛으로 가리거늘 이웃의 고난을 어찌 돌아보랴. 기름진 자들의 교회, 단맛에 취한 예배엔 짊어질 십자가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독히도 현세적 축복, 곧 화폐의 증식 뿐이다.

저 신흥 종교의 신자들은 같은 날 광화문 광장에 모여 그 자리에 이승만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날 그 앞에는 여전히 노란 리본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심장이라 부르는 그곳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머리를 깎았다. 하소연이 허공에 흩어졌기 때문이다. 길에서 비를 맞으며 잠을 잤다. 물러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 신흥 종교에서 말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이렇다. ‘고통에서 기쁨을’이라고 말하나, 저들의 조급함은 이처럼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급한 축복은 고통을 지워야 한다. 아마도 저들은 아름다운 동상을 세우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이 불만 많은 이들을 치워버리고 싶었으리라.

얼마 전 고난주간이 지났다. 예수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은 그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난 없는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못자국을 남긴 예수의 몸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저들은 고난 없는, 고통과 무관한 부활만을 이야기한다. 기뻐하고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 고난을 겪지 않는 교회, 고통을 사유하지 못하는 신자, 축복만을 되뇌는 목사, 십자가 끝에 걸린 태극기가 여기에 있다.

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시엔키에비치는 그의 소설에서 로마 권력에 탄압받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가는 예수의 모습을 그렸다. 오늘날 낡은 종교의 신자들이 던져야 하는 질문도 이렇다. 그것은 단지 억눌린 이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그의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풍찬노숙하는 예수는 부활의 기쁨을 누렸을까?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올해 부활절은 4월 5일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생생한 이 고통은 부활의 그날이 여전히 ‘아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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