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탓이다 (욥기 4-5)

곰곰이 생각해보게. 죄없이 망한 이가 어디 있으며 마음을 바로 쓰고 비명에 죽은 이가 어디 있는가? (욥기 4:7)

욥의 불행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세 친구가 찾아온다. 데만 사람 엘리바즈, 수아 사람 발닷, 나아마 사람 소바르. 이들은 본래 ‘위로’하러 욥을 찾았으나 욥의 모습을 보고는 위로조차 건낼 수 없었다. 그 참혹함에 말을 잃을 수 밖에. 그러나 욥의 불평어린 말,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는 말을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중에 엘리바즈가 먼저 나서서 말을 건낸다. 《욥기》는 이런 친구들의 말과 그에 대한 욥의 대답으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일종의 변론 과정과 유사한데, 친구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욥을 비난하고 있으며, 욥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하기 때문이다.

엘리바즈의 말은 그렇게까지 토로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일단 욥이 겪은 사건,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까닭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크다. 욥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나 엘리바즈는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혹시 아는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죄가 있는지. 엘리바즈가 보는 세계는 인과론이 작동하는 세계이다. 죄를 지은 자가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욥의 고통에는 필시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다.

엘리바즈와 같은 생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죄고백을 강요하는 교회를 보라.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찾도록 만든다. 회개란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찾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죄에서 벗어나도록 만들기 보다는, 죄의 사슬을 몇 겹으로 칭칭 감아치며 도저히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네가 어떤 일을 겪었든 그것의 원인은 너에게 있다. 바로 네 탓이다. 이것이 죄고백, 회개를 강요하는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다. 동의하지 못한다면? 여기에 답하는 것은 간단하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니까. 죄인이니까 너에게 죄를 묻는 것은 정당하다.

죽을 인생이 어떻게 하느님 앞에서 올바를 수 있으랴? 그 누가 자기를 지으신 이 앞에서 깨끗할 수 있으랴? 그의 종들 가운데도 믿을 만한 자 없고 그의 심복들 가운데도 허물없는 자 없는데 하물며 땅 위에 터를 잡은 토담에 사는 사람들이랴! (4: 17-19)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부조리를 보지 못한다. 세계는 매끄럽다. 죄 지은 자가 죄 값을 치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세계의 부조리를 해결할 의지도 없다. 도리어 이들은 고통을 긍정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여보게, 하느님께 매를 맞는 일이야 즐거운 일 아닌가!'( 5:17) 왜냐하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원죄에 묶인 인간으로서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다면 고통을 만들라.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영혼이 이렇게 탄생한다. 그러나 이 채찍질은 아프지 않다. 왜냐하면 죄인으로서 인간의 존재를 자각하게 해줄뿐만 아니라 이 고통은 또 다른 것으로 보상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고통의 원인이 있는가? 고통의 성과가 있는가? 고통은 합당하며 나아가 즐거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욥기》는 이런 합리적 세계, 인과론이 작동하는 세계를 거부한다. 《욥기》의 출발을 기억하라. 욥이 고통을 받은 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나아가 이것은 욥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겪는 고통, 진정한 고통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고통의 원인과 결과를 찾는 가운데 고통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따라서 엘리바즈의 말 가운데 숨어 있는 이와 같은 이야기에도 의문을 던져야 한다.

그가 그들의 입에서 고아를 빼내시고 그 손아귀에서 가난한 자들을 건져주시니, 천대받는 자가 다시 희망하게 되고 불의한 자는 스스로 입을 막지 않을 수 없네. (5:16)

과연 야훼는 고통에 있는 자들을 건져내주는 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편에 있는가? 야훼는 천대받는 자들의 희망일 수 있는가? 불의한 자들이 두려워할만한 존재인가? 아니, 도리어 고통받는 자들에게 침묵하는 존재가 아닌가? 돈에는 돈을! 십일조의 축복으로 현현하는 그 신은 압제자, 가진 자들의 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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