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의 편?

* 제목은 임의로 붙였다. 페북 총동문회 게시판에 올린 글. 여기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렸다.

“당신의 쓰레기 같은 글들은 당신 담벼락에나 쓰세요 한동대 페이지에 올리지 말라고. 당신 글 읽고 싶은 사람 별로 없으니까 많이 아는 척 깝쭉거리는 글들 올리지 말라고.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개소리만 해대는지.. 제발 깝추지 마세요”

처음부터 이렇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썼으면 덜 까였을거라고, 결국 싸가지없게 글써서 뜨거운 반응 받았던 거라고 결론.

지금 다시 보아도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쩝… ;;;

1. 편과 곁

사회학자 엄기호는 <단속사회>에서 ‘편’과 ‘곁’을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편가르기만 있을 뿐 누구의 이야기를 ‘곁’에서 듣는 귀는 없다는 것이지요. 한편 조한혜정 선생(인가??)는 자신이 누구 편인지를 이야기하지 않는 공허한 소리만 있다고 했습니다. 두 문제 제기가 다 유효하기에 누구 곁에 있을 것인가, 누구의 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하나 고르라면 저는 누구의 편에 속하는 길을 택하겠어요.

그것은 ‘공정함’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거짓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마치 두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처럼 공정한 저울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거든요. 사회경제적 배치가 그 저울에 슬그머니 적지않은 무게를 올려놓고 있지요. 예, 제가 편향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무게추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에요.

모 교수의 사건을 보면 이것을 어느 쪽과 어느 쪽의 사건으로 봐야하는지 이야기가 엇갈리죠. 1) 남성과 여성, 2) 한국인과 미국 FBI, 3) 개인과 언론. 크게 이 셋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이네요. 모 교수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2)와 3)을 주장합니다. 폭력적인 사법 당국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는 동시에, 선정적인 언론에 난도질 당했다구요. 물론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유색인종이라서, 외국인이라서 차별적으로 심문당했을 수 있지요. 그래도 3)이 더 적절한데, 그것은 초반에 실명과 사진등 개인 정보가 빠르게 퍼졌다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1)입니다. 성범죄라는 거죠. 성범죄(=성폭력*)는 사실 어떻게 보면 공정하지 않은 개념이예요. 다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른 일을 말하니까요. 그러니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것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으로 배치된 한쪽 추, 즉 여성에게 주어진 차별적 상황을 빼놓고 말하는 것이에요.

이 차별적 배치에 여성은 성적 대상이 되기에 쉽지요. 대상이 되는 것을 넘어 폭력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은 성별이 가진 위계 차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일부 여성들이 주장하듯, 성폭력은 여성이 야한옷을 입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남성이 가진 사회적 위계가 폭력적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폭력은 개인적 차원에만 해석되지 않아요.

저는 그렇기에 이 사건에서 모 교수 편에 서는 것을 저어하게 됩니다. 어쨌건 사건에서 그는 가해자이니까요. 피해자의 편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배웠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한편 그가 코넬대에서 연구교수를 할 정도라는 사실도 이유 가운데 하나에요. 그가 미국사회에서 혹은 국제적으로 소수자라고 보기에는 힘들거든요. 도리어 그의 편이 되어줄 것이 적지 않겠지요.

따라서 그를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세월호 유가족과 등치시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성폭력의 가해자로 보도된 사람을 국가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과 함께 보는 것은 적절한 판단이 아니지요. 아니, 도리어 문제를 대충 희석시켜 버리는 것에 불과해요. 그런 시각은 반대로 세월호 유가족이 대체 무슨 폭력에 희생당했는지를 까먹게 만들죠. 거기에 남는 것은 동정심 밖에 없어요.

물론 일부는 보도된 정보 자체를 거짓이라고 믿고 있을 거예요. 반드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거기에는 그와 맺은 관계들이 있지요. 그런나 거꾸로 그런 입장은 여전히 하나의 벽을 만들죠. ‘내가 그를 아는데’라는 말은 도리어 그를 모르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이 아닌 사람으로 배제하는 결과를 낳아요. 그러니 저는 도무지 그 편이 될 수 없어요.

2. 권력과 언어

유가를 전공하는 사람으로 개인이 맺은 관계가 그 사람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고 먼저 그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에요. 그러나 저는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일부의 생각이 그 정도를 넘어 섰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단지 ‘어쩌면 이런 일이!’에서 ‘절대 그럴 수는 없어’를 넘어 이제는 소설을 쓰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에요.

일부는 개인 페이지에서 그 피해자가 미모의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잠결에 화장실에 가다 실수로 건드린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야기하기도 하죠. 사실 성폭력에서 이런 식의 태도는 낯선 것이 아니에요.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상투적인 말이지요. 실수로, 어쩌다, 모르고로 시작하는 말은 만졌다가 아니라 건드렸다, 스쳤다, 살짝 닿았다로 전개되곤 합니다. 더 나아가면 잠결에, 술김에라는 말까지 붙어요.

그러나 이런 식의 표현은 가해자에 있는 남성의 언어에 불과하죠. 피해자에 있는 여성의 언어는 아니에요. 설사 모든 것이 인정되더라도 피해자가 강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것은 성폭력이며, 성범죄로 처벌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저런 말은 그 속에 담긴 권력의 편향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지요.

학교 밖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대단히 전형적인 일이에요. 한동대학교라는 특수한 상황은 재학생과 졸업생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요소로 보이지만 밖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죠. 성폭력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 가운데 하나가 학교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성폭행이 위계적 불평등에서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에요. 목사와 교수는 물리적 권력보다 더 강력한 상징적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다 쉽게 폭력을 저지를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더 쉽게 성폭행자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기대되는 사회적인 기대치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쉽게 위의 언어를 체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많이 언급되는 것이 ‘격려차원에서’와 같은 식의 변명이에요. 실상은 자신이 배려하는 마음에서 였다고. 격려 차원에서 어깨를 만졌다. 격려 차원에서 사무실로 불렀다 등등.

그를 ‘교수”님”‘으로 호칭하는 한 과연 이런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에요. 거기에는 강한 믿음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끊임없이 그에게 상징 권력을 부여하면서 면죄부를 주거든요. 그러나 거꾸로 보면 그 강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위계와 그에게 투영한 상징 권력이야말로 성폭력을 가능케 하는 주요한 원인이지요. 따라서 저는 그런 식으로 모교수의 무고함을 주장할 수록 그를 의심할 수 밖에 없어요.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 여성이 제 3자였다는 것이지요. 학교 안의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사회적 지위는 모든 상황에서 유효한 것이기도 해요.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 교수의 혐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지요. 거듭 말하지만 제가 문제 삼는 것은 그 교수의 혐의가 아니에요. 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문제라는 거예요.

사회적 위계가, 권력이 폭력을 낳아요. 그래서 성추행도 성폭력의 하나입니다. 이 핵심을 놓고 그저 단순한 믿음과 감정으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또 다른 식의 폭력을 낳는 기재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은 개인의 인성이나 윤리적 태도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요. 윤리적 인성은 주로 자신과 동등한 인격에게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악마적 본성은 본디 약자에게 쉽게 표출되는 것이지요.

3. 예의와 싸움

마지막으로 예의 드립 등에 대해 간단히 말하죠. 저의 글이, 표현이, 생각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편하게 만들고 싶은 글은 절대 아니죠. 그러나 그것이 예의 없다는 지적질을 당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에요. 늘 묻는 것은 대체 누구에게 예의가 없느냐는 거죠.

‘예’를 다양하게 정의하거나 분석할 수는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게 사회적 위계를 가르는 지표가 된다는 거예요. ‘예’는 나와 너가 동등한 인격임을 전제하지 않고 발현되곤 합니다. 물론 평등한 위계의 ‘예’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예’란 위계적 차등이 더 중요해요. 그런면에서 예의 운운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니가 뭔데?’라는 식의 시선을 그 말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차라리 싸우는 게 나아요. 왜냐하면 싸움이란 적어도 그와 내가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싸움이 되러면 적절한 무기가 있어야 하지요. 전략도 필요하구요. 논쟁으로 돌리면 명확한 주장이 있어야 싸움이 됩니다. 그러니 차라리 싸우는 게 나아요.

싸움 거리가 안 되는 건 그냥 비아냥 대거나 무시하는 게 상책이죠.

주: 성범죄를 ‘성폭력’으로 바꿨어요. ‘범죄’라는 법률적 용어보다는 ‘폭력’이라는 일반적 표현이 더 낫다는 생각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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