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대생은 어떻게 멍청이가 되었나.

  • 지난 11월 30일에 인트라넷에 올린 글이다. 이 글을 쓰고 체력이 떨어져 많이 아팠다. 표현을 조금 다듬었다.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1.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학교?

강한 신앙적 결합이야말로 한동대학교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제는 버릇이 된 ‘하느님의 대학’이라는 말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이것이 특권적 언표가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대학이던 하느님의 대학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한동대만이 하느님의 대학이라면 그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이 아닌 그 이름을 빌린 어떤 우상이리라.

이것은 열정적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이 구호를 지탱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지극히 편협하다. ‘하느님의 대학’이라 썼더니 인트라넷에서 ‘하나님의 대학’을 ‘하느님의 대학’이라 부르지 말란다. ‘하느님’ 아닌 ‘하나님’이 옳다는 것이 한동대가 말하는 신앙의 현주소다. 그런가 하면 학내 문제에 대해 논하는 사람은 어느새 분열의 영이 되고, 사탄의 자식이 된다. 이제는 신천지의 앞잡이까지 되었다. 차라리 바알제붑이라 부르라!

한동대 교목을 보자. 채플에서 취업률을 운운했다는 소식은 한동대가 표방하는 신앙의 세속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느님의 명령은 성공이다. ‘취업하라. 성공하라. 고지를 정복하라.’ 이것이 명령이다. 한편 교목은 장순흥 이사가 신임 총장으로 선임된 것을 ‘기름 부음’이라 말했다. 하느님이 세운 자를 공격하지 말란다. 하느님은 권력으로 일하는 분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MB를 통해 강을 녹차라떼로 만드셨다. 할렐루야!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재학생은 지난 2001년 김영길 총장이 학교 예산을 불법으로 전용∙횡령하여 구속된 것이 학교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사랑의 능력은 대단하다. 조용기가 횡령한 것도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전병욱이 성폭행을 저지른 것도 여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오정현이 서초동에 터를 잡은 것도 교회 건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장순흥 이사가 카이스트 총장직과 장관 직을 버리고 총장으로 내려 온 것도 사랑 때문이다. 김영길이 명예 총장이 되고 싶은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은 잘못 되었다. 참을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나.

한동대가 개교 초기부터 강조했던 것은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다. 그러나 아래에 서술하겠지만 신앙도 학문도 없는 상황에서 통합이라도 말도 부끄럽다. 창조과학이라는 것을 보자. 이것은 신앙인가 과학인가. 과학적 탐구를 통해 ‘창조’를 발견했는가? ‘창조’ 없이는 신앙이 불가능한가? 창조란 그렇게 과학적 언어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장순흥은 ‘창조 과학’의 세속적 가치를 대변한다. 그는 ‘창조경제’라는 수상한 조어를 만들어 현 정부에 납품했다. 물론 이때의 ‘경제’라는 것이 ‘경세제민’, 세상을 바르게 이끌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 따위는 아닐 것이다. 이윤을 낳는, 경제적 부가 가치를 낳는 칭송하는 말이리라. 따라서 우리가 창조할 것은 ‘자본’이다. 그가 핵발전소에 목을 매는 이유도 명확하다. 투자 대비 이윤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든 간에. 환경이 어떻든 간에.

장순흥은 스스로 느혜미야란다. 느혜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쌓아 올리며 유대민족의 순혈주의를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창조 능력이 없’는 자들, 자본을 창출한 능력이 없는 자들은 성 밖으로 내쫓기리라. 모세를 자처한 김영길은 갈대상자를 통해 일하신 하느님을 보란다. 참고로 갈대상자는 이 둘의 합작품이다. 광야에서 만나가 내렸듯, 하느님은 자본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다. 19년간 한동대가 경험한 은총이란 그런 것들이다.

광야로 이끈 자, 기름 부은 자 앞에 취해야 할 것은 순종뿐이다. 판단을 내려놓으라. 하느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행하는 분이다. 인본주의를 버려라. 앎이란 믿음의 반대말이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하지 세상의 지식은 쓸모없다. 그러나 나는 심히 당혹스럽다. 한동대에서 언급되는 신앙이란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를 대변하지 않는가. 나는 신앙이 뭔지 잘 모른다. 그러나 교목과 현 총장과, 신임 총장이 말하는 신앙에 대해 묻고 싶다. 그게 신앙인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믿음이란, 신앙이란 누군가가 내놓은 가치를 그저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앙은 브랜드다. 신앙이라는 상표를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김영길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 다 ‘Made In 영길 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대학이 아니라 김영길의 대학이라는 이야기도 틀렸다. 그것은 상표와 창업자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를 먹여살릴 브랜드 김영길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장순흥의 말도 역시 틀렸다. 한동대의 최대 브랜드는 ‘하나님의 대학’이다.

대체 무엇을 믿는가. 믿는다고 말할수나 있는가? 단순히 동조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기독교 대학이라지만 기독교인들이 많이 진학한다는 것 이상 더 설명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여기엔 기독교도 없고, 신앙도 없다. 하나님이 있으나 그 내용은 없다. 신앙이 언급되나 그 내용은 없다. 따라서 믿음에 대해 묻는 것은 실례다. 묻지 마라 이것이 한동의 에티켓이다!

2. 자유전공이 아니라 무전공

무전공입학은 한동대의 자랑이다. 전공에 국한되어 공부하지 않는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 묻고 싶다. 한 전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 활동을 하는가. 아니면 그냥 되는 대로 이것저것 배우는 것인가. 나의 대답은 후자다. 누군가는 이것을 교육벤처로서의 실험이 성공했다고 보지만 반대로 실패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무엇을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빼앗는 것은 아닐까. 자유전공이라지만 사실은 아무런 전공이 없게 만드는 무전공의 시스템이 아닐까.

이를 지탱하는 말이 ‘자율’이다. 알아서 전공을 선택하라. 분명 한동대는 이런 점에서 선도적이다. 이해찬 세대의 모토가 바로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아니었나. 문제는 그렇게 선택한 전공이라는 게 ‘전공’이라 부르기에 상당히 부족한 것이었다는 데 있다. 물론 여기에는 복수전공이 기본이었다는 점도 큰 이유다. 1년은 교양수업을, 나머지 3년을 전공수업으로 채우지만 그마저도 복수전공이다. 그러니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전공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 약점이다. 전공이란 취업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통로를 의미한다. 어떤 주제를 오랫동안 공부하면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힘이 길러진다. 그러나 한동대는 그런 힘을 기르는 것을 애초에 포기했다. 세계란 이해하고 탐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순응하고 적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동대는 오래전부터 높은 취업률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한 능력을 갖춘 전문 인력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적당히 순응하고 적응할만한 ‘인재(?)’를 길러냈다는 뜻이다. 한동대에서 졸업생이 나오는 2000년 이후 한국 사회는 이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미 평생직장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노동의 유연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전문적 지식이란 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런 노동시장의 변화가 한동대의 성공에 큰 보탬이 되었다.

한동대에서 아직도 노동운동이나 시위 등이 단순히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지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순응에 반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회 구조나 체제에 대한 성찰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할 힘이 없는 것은 물론, 그것을 반성하거나 성찰할 능력까지도 기르지 못한다.

학내 문제가 저열한 수준에서 다뤄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동대가 이야기하는 자유란 선택할 자유를 의미할 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자유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런 능력에 대해 애초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세상’이란 문제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학내에 만연되었던 세상을 바꾸자는, ‘Why Not Change The World’란 번드르르한 구호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어떻게 바꿔야 한다는 문제 자체가 설정되지 않는다. 변화의 구호만 있을 뿐 그 방향도, 내용도 고민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아니, 묻는 것 자체를 터부시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는 세상의 맞춰 어떻게 자신을 바꿀까 하는 게 더 중요한 생존 전략이 되었다. 당연히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질문은 생략된다. 도리어 이미 실현되고 있는 정의에 어떻게 동참할지가 중요하다.

한동대의 우경화도 마찬가지로 같은 틀에서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바꾼다는 것, 진보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현재를 유지하는 힘을 허물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어떤 질문을 끊임없이 만들기 때문이다. 질문이란 낯선 것이다. 습득해야 할 지식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질문(問)이란 귀찮은 소음에 불과하다. 학문學問은 사라지고 취득해야 할 지식만 남는다.

이런 귀찮음은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하나는 소음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대자보를 찢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상대의 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기보다는 상대의 말에 귀를 닫아 버리는 것. 소통은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하찮은 주장에 동조하는 것. 보잘 것 없는 내용에도 마구 좋아요를 누른다. 그것은 깊이나 날카로움과 상관없다. 정말로 좋기 때문이다. 나와 의견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따라서 히즈넷에 올라온 어떤 동문의 글에 대한 열렬한 찬사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지점을 짚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듣고 싶었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이 그것이라는 말. 그러나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법을 배우지도 못했고, 배울 의지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다. 더 불행한 것은 그런 내용 없는 글을 쓴 사람이 시간강사란 점이다. 도리어 난 그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를 묻고 싶었다.

그런데도 김영길은 ‘학부 중심의 교육 대학’이라는 표어를 팔고 있다.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ACE)’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확실히 김영길의 한동대는 선도적이긴 하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학부 교육을 실천하고 있으니. 그러나 그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대학의 지성인을 길러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거기에는 대학생을 아이로 호출하는 얄궂은 시선이 숨어 있다.

3. 인성을 교육한다고?

인성교육이 대학 교육의 큰 요소 가운데 하나일까? 과연 인성이란 교육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일차적인 질문을 참아보자. 왜 대학이 인성을 교육해야 하는가?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인성까지 교육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라는 뜻 아닌가? 다른 대학생들은 어떻다는 말인가. 그들은 인성이 부족한 엉망진창 인간들일 뿐인가? 아니, 반대로 나는 졸업 후 인성이 뛰어난 사람을 여럿 만났다.

사실상 한동대의 인성교육이란 착하게 만들기 이상이 아니다. 적당히 문제 되지 않을 만큼의 행동을 하는 법을 익히게 하는 것. 순수하고 착한 학생을 길러내는 것이 한동대가 말하는 인성교육이다. 더구나 이때의 가치 기준은 이웃과 사회에 있지 않고 기업에 달려 있다. 취업시키기에 부족함 없는 적당히 착한 학생. 게다가 세상 물정이라 쓰고 사회문제라 읽는 것을 모르는 순수함까지 있으면 더욱 좋다.

한동대는 교양에서 인성까지 교육하려든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교양부터 인성까지 부족한 어린아이로 대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동대에 만연한 ‘아버지’라는 말은 이러한 비대칭성을 잘 보여주는 표상이다. 교수가 아버지가 되는가 하면, 총장이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여전히 아이로 있고 싶어하는 어리숙함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신앙의 모델이자, 교수, 아버지인 삼위일체는 이제 학생들의 모든 행동을 감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영성과 지성과 인성까지 모두 책임지는 것은 물론 지도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한동대의 총장은 물론 교수들이 객관적 대상이 아닌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 이상이다. 스승은 더욱 아니다. 어린 양때를 보살피는 목자이며 삶의 길을 인도해야하는 선지자가 된다. 그 꼭대기엔 당연히 김영길 총장이 있다.

한동대가 유사 가족으로 회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교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과 같은 공동체. 여기서 한동대 학생들은 자녀의 역할로 스스로를 제한한다. 그러다보니 졸업하고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세상이란 여전히 낯선 공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물론, 스스로 세상의 일에 부딪혀보지 못했다. 포근한 동산에서 쉬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문제는 이런 독립적이지 못한 주체들이 결국은 사고하고 사유할 기회마저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순한 양이다.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바른 길이다. 그것이 인성의 바람직한 태도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불의에 분노하는 것 따위를 찾을 수는 없다. 당연히 상처받은 이들에게 나아가는 것 따위도 발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상처받은 이들을 만나기는커녕 자신의 상처를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슬퍼 무릎을 꿇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이 사건이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이런 자체, 시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아빠와 엄마의 사소한 말다툼에도 얼어버리는 어린 아이의 마음이 여기에 있다. 소란이 싫다. 이것은 슬픔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여린 마음이 한동대의 인성 교육이 낳는 산물이다.

착하고 여린 영혼은 자신의 말을 내놓는 것들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대립이란 곧 악이다. 소란이란 곧 커다란 죄악이다. 그러나 이들은 문제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다. 스스로 문제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온함이다. 편안함이다. 조용함이다. 그들의 침묵이, 소음을 지워버리기 바라는 마음이 어떤 폭력을 내놓는지 모른채.

성숙한 성품은 스스로를 반성할 줄 아는 힘에서 출발한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한동이 지향하는 인성은 이런 것이 어디에도 없다. 사건을 문제화하지 못하기에 반성할 수도 없다. 우리들의 이야기만 있지 타자의 이야기는 없기에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 넘치는 것은 신앙 고백뿐이다. 평안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라.

4. 영성도 지성도 인성도 없다.

하느님의 대학이라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 당연히 영성도 없다. 학부중심의 교육은 전공 공부를 배척했다. 무엇인가를 습득할 뿐 배우지 않는다. 지성이란 먼 나라 이야기다. 교수와 총장의 말 잘 듣는 것이 미덕이다. 인성이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동대엔 영성도 지성도 인성도 없다. 반대로 자본과 무지와 순종의 삼위일체가 자리잡았다.

한동대생은 어떻게 멍청이가 되었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대학’이라는 상품을 성스러운 낙인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질문을 그치고 적당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만족했기 때문이다. 착한 영혼이 되어 판단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믿음도, 배움도, 성숙도 없다. 하느님의 대학이란 공허하며, 전공이란 거추장스럽고, 비판이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냥 믿을 뿐이고, 익힐 뿐이고, 따를 뿐이다.

지난 약 20년간 한동대는 성공했는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뱉은 말들을 배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영성을 팔았고, 지성을 팔았고, 인성을 팔았다. 미안하게도 불량품은 어디나 있는 법. 당신은 어떤가.

나는 의문을 배웠고, 스승을 만났으며 우정을 얻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울릴 수가 없다.

  • 지나갑니다

    이루긴 어렵고 비판은 쉽죠

    • 누추한 이곳에 달아준 댓글에 답글을 올려드려야죠.

      글쓰긴 어렵고 댓글은 쉽죠.

  • 정말우연히봄

    ㅋㅋ 글쓰신 분 한동대에 관심 겁나 많네 ㅋㅋ
    삼수했는데 떨궛나.

    • 지나갑니다

      이루긴 어렵고 비판은 쉽죠

      • 누추한 이곳에 달아준 댓글에 답글을 올려드려야죠.

        글쓰긴 어렵고 댓글은 쉽죠.

  • 김영렬

    어 형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i7에서 ㅋㅋㅋ 형님 글을 보고 감동받아서요…
    잘지내시죠?

    • 맞아요! … 아.. 근데, 제가 기억이 잘… 엉엉.
      어떻게 연이 닿았는지 알려주면 감사하겠습니다.

  • 김영렬

    피터윤 교수님이랑 같이 밥먹고 형님이 쏘시고 그랬는 기억이 나네요,, ㅋㅋ

    • 아앜. 제가 멍청이가 되었군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새까맣게 까먹어 정말 미안하네요.

  • Gaeun Ginny Choi

    공감합니다 잘 읽었어요!! ㅎㅎㅎ

    • zziraci

      이런 쓸쓸한 곳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 이런 쓸쓸한 곳에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 John Kim

    무전공으로 입학한다고 전문성이 없다고 말하기는 비약이 있네요. 미국 대학교는 대부분의 학교가 무전공으로 입학해 2학년에 전공을 선정합니다. 미국 대학교 시스템을 따르는거 같은데… 미국 대학교 학생들이 그럼 한국 대학교 학생들보다 전문성이 없을까요? 전혀 아니거든요. 처음부터 무엇을 확실히 공부하고 싶었던 학생들은 전공이 있는 양 1학년부터 그 학문을 파고 들고 아직 자신이 하고 싶은걸 알아가고 싶은 학생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 몇개를 탐색한 후 신중히 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무전공 입학입니다. 1학년 때 무전공이라고 음악듣고 수학듣고 물리 듣고 문학 듣고 뒤죽박죽 전문성 없이 듣는 사람도 많이 없고요. 벤처 시험이 아니라 미국에서는 쭉 있었던 시스템이고 미국 대학들이 세계 대학 랭킹에서 최상위를 차지하고 학생들도 여러 분야에 포진하여 명성을 날리는 이유입니다. 한동대를 안다녀봐서 다른건 어떤지 모르겠는데 자유 전공 입학 자체는 전문성을 줄이는거 전혀 아닙니다. 미국 학생들 한국 학생들보다 전문성이 적다고 느낀 적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전공을 언제 정하든 간에 졸업하기 전에 정해진 전공 시수는 어떻게든 끝내야 하고요. 그래서 아주 간혹 2년 3년간 탐색하며 공부하던 학생들은 대학을 5년 다니는 경우도 있죠. 그런데 그런 학생들은 한국 학생처럼 고등학교 수준의 공부만 하고 진로를 바로 정한것보다 자신의 전공과 진로에 대한 만족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대학교 수준의 수업을 들으며 진지하게 고심해볼 시간을 가졌으니깐요. 자유전공 입학에 대한 비판은 너무 근거 없는거라고 보네요. 다른거는 제가 말했듯이 한동대에 관심 없어서 제가 알바는 아니고요

    • 저도 미국 대학은 관심 없어 알바 아니구요.

메일 보내기

아무 내용이나 상관 없어요. 메일을 보내주세요.

보내는 중입니다..

로그인하세요.

계정 내용을 잊으셨나요 ?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