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넌 대체 누구냐?!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 데 힘썼다. 오랫동안 주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락해 가는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가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 윤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은둔하려 하시니 저를 위해 억지로라도 글을 써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노자는 [도덕경] 상, 하편을 지어 ‘도道’와 ‘덕德’의 의미를 5000여 자로 말하고 떠나갔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여생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노래자老萊子도 초나라 사람으로 책 열다섯 권을 지어 도가의 쓰임을 말하였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또는 200여 살을 살았다고 한다. 그가 도를 닦아 양생의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담이 바로 노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아는 이가 없다. 노자는 숨어 사는 군자였다.

– 노자.한비 열전, [사기열전] 김원중 옮김, 민음사

질문 하나. 노자는 과연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가. 공자 영화를 보면 늙은 공자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어떤 늙은 노인을 기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바로 노자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공자가 젊은 시절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대해 물었다는 부분을 들어 삽입한 것이다. 공자조차 가르침을 청했던 인물. 그렇게 노자는 성현 중의 최고로 숭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노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고 있는 ‘노자.한비 열전’을 보면 노자가 어떤 인물인지 도통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주나라의 사관이었던 이이李耳 혹은 노담老聃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하다 중간에 갑자기 노래자老萊子라는 초나라 사람을 등장시킨다. 그 밖에도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설왕설래 말이 많다.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처음 이야기한 사마천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어떤 사람은 담(노담)이 바로 노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어? 그럼 도대체 누구라는 건데?!

제한적인 정보만으로는 과연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머리가 희어서 나와 노자라 불렀다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100년을 넘게 오래 살았기 때문에 노자라는 설도 있다. 뭐, 그 밖에도 전설같은 이야기가 잔뜩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은 이렇다. 과연 노자라는 인물이 실존했기는 한거야?

어차피 풀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미뤄두도록 하자. 노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늘날 까지 전해지는 [노자]라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다른 이름은 도덕경道德經. 도와 덕에 대해 논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책은 노자의 저서라고 믿어져 왔다. 그런데 파고보니 노자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이런 당황스런 상황. 이러니 [노자]라는 책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이 분분하다.

‘고전아카데미’에서는 지난 5주에 걸쳐 [노자] 원문을 다 강독했다. 마지막 시간 [노자] 5천자를 송독하며 끝맺었다. 그렇담, [노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텍스트일까. 한 두번 읽었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하나는 최진석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다른 하나는 강신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이라는 책이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8쪽: 우리는 노자를 읽을 때, 노자의 각 주석가들마다 각기 해결하려는 문제가 따로 있었으며, 노자와 각 주석가들 사이에 흐르던 시간적 거리가 그렇게 가깝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자의 여러 주석가들은 노자의 권위를 빌리면서도 정작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노자의 음성이 아니라 주석가 자신들의 음성이었다. 왕필은 왕필, 노자는 노자일 뿐이다.

보통 [노자]의 대표적인 주석가로 후한시대의 왕필을 꼽는다. 저자의 질문은 이렇다. 우리가 [노자]를 읽을 때 혹시 왕필의 말을 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노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노자 자신의 목소리를 읽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죽간본과 백서본을 비롯한 다른 이본들을 두루 참고한다.

그는 [노자]는 통일된 문화체계나 통치 체제를 주장하는 유가를 반대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본다. 유가의 문명 주의에 반대하는 반문명이야 말로 [노자]의 핵심적인 주장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부정의 의미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왕필이 무無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했다면 [노자]의 본의는 유有와 무無가 동등하게 중시되는 다양성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17쪽: 한 발 한 발 기대를 가지고 필자는 [노자]라는 산에 올라갔다. 어느 순간 정상에 이르렀을 때 필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노자]는 생각했던 것만큼 고봉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우리 삶에 이로운 보편적인 조망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쪽: 그렇다면 [노자]의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state라는 관점이다. 2000여 년 전 전쟁과 살육 그리고 주장과 논쟁으로 뜨거웠던 중국의 전국시대에서 [노자]가 지니는 고유성은 이 책이 이 모든 혼란과 갈등을 국가라는 관점에서 조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논리를 비교할 수 없이 정교하게 숙고했다는 데 있다. 반면 [노자] 주석서들과 해설서들은 [노자]를 국가의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강신주의 주장은 도발적이다. 과연 [노자]가 그렇게 위대한 책일 수 있느냐고 되묻고 있다. 철학이란 세계를 보편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노자]는 턱 없이 모자라는 책이라고 말한다. 평소 [노자]의 말을 즐겨 읽었던, 혹은 사랑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당황스러운 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에서 최진석은 [노자]가 유가의 국가주의적인 폐해를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주장했다고 보았다고 한 반면 강신주는 도리어 [노자]야 말로 국가의 관점에서 쓰여진 제왕학의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사실 [노자]에게 그런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자]에는 전쟁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으며, 그런 다툼 속에서 자신을 보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는 [노자]를 병가兵家적 텍스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저자의 주장은 이보다 한층 더 나아가는 것이다. [노자]는 국가적인 관점에서 쓰인 책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대안도 보여줄 수 없는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국가와 자본의 논리가 [노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뭥미-? 할 수 있겠지만 한번 쯤 귀기울여 들어볼 만한 말이다. 저자가 [노자]를 읽을 때 느꼈던 불편함을 파혜치고 있으니.

[노자]는 어떤 책일까. [노자]를 읽으며 어떤 것을 느꼈는가. 어떤 사람은 자유와 평안함을 느꼈다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처세와 통치술의 비정함을 발견했다고 할 수도 있다.

[노자]를 강독하며 읽히는 대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읽었으니 [노자]라는 산을 한번 정복해본 경험을 나누어볼 때다. 자, 그래서 고전아카데미에서는 위에 소개한 두 권의 책,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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