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시선에 분노한다

* 한동대 석좌교수 유영익이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에 논란이 많다.
이 글은 유영익과 관련있었던 2008년 한동대학교 사건의 일부를 다룬 글이다.
인터넷 서핑중 찾아냈다. 크게 입장이 바뀐 것이 없기에 그대로 올린다.

나는 그들의 시선에 분노한다. By ZZiRACi | Published: 2008-09-23

졸업 후 학교 소식은 거의 듣지 않는다. 별 관심도 없을뿐더러 지금 내가 살아가는 나의 현실, 내가 부딪히고 마주치는 세상이 나에겐 벅차기 때문이다. 가끔 후배의 블로그에 들려 글을 읽다 학교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정도. 그런데 얼마 전 학교에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강의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뭐 그러려니 했다. 기독교 계열 학교다 보니 다른 학교보다 뉴라이트 논조를 따르는 강의가 열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뭐, 듣고 말고는 학생들의 몫. 그런데 오늘은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관련된 학생 대자보를 어느 교수가 찢어 버렸다는 사실. 그 논란의 중심에 있는 교수가 누구인지도 알았다. 그 낯선 이름을 기억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광장에서 만난 이방인

어느 주말이었다. 습관처럼 광화문 거리로, 아니 뻥 뚫린 광장으로 나갔다. 그날도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각기 어디서 어떻게 모였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아내와 함께 사람들 틈을 누비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큰 북을 몇 개 모아서 난타 공연을 벌였고 각기 악기를 갖추고 나온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아, 그날은 거리에 앉아 기타를 치며 사람과 노래하는 안치환을 보기도 했다.

새벽이 되어서, 아마도 새벽 2시쯤인가 서대문 쪽에서 어떤 무리가 지나갔다. 그들은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어느 교회에서 나왔나? 사실 그 큰 광장에서 기독교인을 만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지다. 하지만 그렇게 어색한 일도 아니었다. 전경차를 끌어내는 밧줄을 처음 잡아본 어느 날, 내 옆에는 찬양을 부르며 밧줄을 함께 잡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주의 군사~, 나는 주의 군사~’라며 자신을 다독이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지나가는 무리를 보며 그러려니 했다. 어느 교회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삼삼오오 모였을 수도 있지.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동아 면세점 앞. 그들은 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좀 쉴 자리를 찾다 어느 벤치에 앉았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리의 옆이었다. 가만히 앉아 쉬노라니 누군가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일제 시대 어느 목사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인즉슨, 당시 일본이 물러나게 된 것은 미국의 강대한 군사력 때문이란다. 일본이 미국에게 망한 것은 목숨을 잃기까지 금식하며 기도한 몇 목사 때문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광장에 모인, 이 불순한 세력을 몰아 낼 수 있는 것은 금식 기도뿐이란다. 만약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먼서 삼일 동안 금식기도를 한다면 자기도 참가하겠단다. 아내가 화를 버럭 낸다. 사람들을 ‘선동’해 놓고 자기는 슬쩍 물러서는 태도에 발끈하고 말았다. “왜 남들부터 하라고 하나!”

주변에서 탐탁지 않게 지켜보던 이들이 더 있었다. 좋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그러니 서둘러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잔다. 먼저 목소리로 제압하기! 주여 삼창! 이어지는 큰 기도소리. 그 순간 울컥 화가나고 말았다. 저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영적전쟁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겠지? 어쩌면 나와 나의 아내를, 그리고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동정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벤치에 올라가 소리를 질렀다. “성경에 어디에 가진 자와 힘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약한 자를 위하여 애통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 기도 아닙니까!”

말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혹시나 주먹다짐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그 손을 뿌리쳤다. 어떤 사람은 자기도 기독교인인데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니 참으란다. 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고 다 알고 있다고 하지만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 두 여자가 끼어든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이냐는 질문에 놀라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저 한동대 교수에요.” 그 자리에서 ‘한동대’라는 이름을 듣게 되다니!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소리가 마치 교양을 갖춘 중산층 여자라는 것을 과시하는 말이듯, 한동대는 ‘건전한 기독교인’을 드러내는 수식어였다. 게다가 교수란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한동대 학생이란다. 뭐 그런 생각이었겠지. 한동대 교수와 학생이 참여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뜻. 게다가 주류의, 아주 건전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내새우고 싶었겠지. 기가 찼다. 얼굴도 익숙하지 않은데 교수를 사칭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내가 졸업하기까지 ‘김미영’이라는 교수는 없었는데. 그러면서 자기들은 에스더 구국기도모임으로 금요철야 기도를 나왔다고 말한다. 더 이상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비정치적이라는 뻥은 집어치라!

이번에 한동대에서 강의를 맡게 된 유영익 교수에 대해 찾아보았다. 공교롭게도 검색 결과 가운데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 한동신문사와 유영익 교수의 인터뷰기사. 요약하면 이렇다. 자신이 뉴라이트계 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은 ‘독립적’ 학자일 뿐 정치적이지 않다. 이번 학기에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 지도자였던 이승만을 가르치려고 한다.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관심없다. 의외로 뛰어난 학자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가 ‘독립적’, 비정치적 지식인이라는 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가 가르치고자 하는 ‘이승만’이라는 인물 자체가 비정치적일 수 없다. 유영익 교수가 말했듯 이승만은 문제적 인물이다. 그것은 이승만이 이념적 선택을 했던 ‘정치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아니라면 그를 읽을 이유가 없다. 그 결과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분히 이념이다. 유영익 교수가보다 비정치적인 혹은 이념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을 다루고자 했다면 모르겠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념적인, 그것도 아주 단순하고 굵은 이념적 특성을 갖는 인물이다.

근대적 학문의 배치에서 ‘정치’라는 영역이 구별되는 동시에 ‘정치인’이라는 특수한 인물이 탄생했기에 우리는 ‘정치’가 어떤 개별적인 독립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정치는 보편적이다. 철학을 전공하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철학은 정치적이라고. 사람들은 비판한다. 촛불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불순하게 바뀌었다고. (특히 불교를 가리켜) 종교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고. 사제가 정치적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고. 그러면서 정교분리라는 해묵은 개념을 들먹인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대통령의 종교적 성향이 어떠한 정치적 효과를 낳는지. “고소영” 인사라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교분리는 서구 기독교가 낳은 개념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에 관여하는 교회의 입김을 숨기기 위한 허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참고로 이승만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종교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대통령이었다. 그를 통해 기독교는 알게 모르게 정치적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강인철 교수의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를 읽어보길) 이명박 정권 아래서 유영익 교수가 외치는 이승만에 대한 찬가는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 때문 아닐까?

김미영 교수는 “사랑하는 한동국제정치학회와 한동의 여러 친구들에게”라는 글에서 대자보를 찢은 것이 자신이라며 간단하게 미안하다는 말로 얼버무린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다시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붙어있는 학생의 대자보를 찢은 것이 과연 국제법을 전공했다는 사람으로서 기본적 상식에 맞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잘 모르고 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여러 분들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 제가 학생식당 앞 게시판 한동국제정치학회 명의의 대자보를 제거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학회 친구들이 몹시 언짢아서 제게 사과를 요구했군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대자보에는 우리 학교 게시물의 원칙과는 달리 게시자의 연락처가 없더군요. 총학생회에 올라가 찾아달라고 했지만 알 수 없어서 나중에 겨우 M군의 전화번호를 얻어 전화를 걸었더니 수업 중이었는지 전화가 안 되더군요. 그래서 제가 일단 대자보를 떼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측에 있는 대자보는 유영익 교수님의 수업 T.A.를 맡고 있는 N군에게 부탁해서 내려놓도록 했습니다.
이 대자보는 이번 학기에 처음 열리게 된 연세대 유영익 석좌교수의 [근현대사] 수업과 부교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교수님은 지난 3년 반 동안 제 수업에 특강을 위해 한동을 오셔서 제게는 특별한 인연이 있고 무엇보다 이 대학자와 함께 교단에 선 것에 대해 늘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번 학기 첫 수업을 하시던 날, 한동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유교수님께서 상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저는 이 분이 또 이 대자보를 보게 될까봐 몹시 마음이 졸아들었습니다. 혹시라도 학생들이 읽고 전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하는 변명이 ‘게시자의 연락처를 기재해야 한다는 학교 게시물 원칙’과 달랐기 때문이란다. 이어서 게시자와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게시물을 임의로 제거했다고 말한다. 과연 이것이 상식적으로 맞는 일이기나 할까?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란 자신이 유영익 교수를 매우 존경하고 그가 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에 대해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 때문에 한 일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는 성서의 야고보서 말씀을 인용하여 ‘화평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끝맺고 있다.

그에게 있어 대자보를 제거한(혹자에 의하면 찢어버린) 일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일일 뿐이다. 교수라는 자기 자신의 신분, 그리고 대자보가 의미하는 함의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누가 그냥 붙여놓은 개인적 메모지를 치운 수준의 일로 치부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자신의 부동산 투기를 숨기려고 ‘힘’을 사용한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의 사건이 기억나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일 뿐일까?

사실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다. 김미영 교수는 자신의 행위가 자기의 정치적 ‘이념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일까? 대자보를 멋대로 없애버린 것은 자기의 의사를 ‘대자보’라는 특수한 통로를 통해 펼칠 수밖에 없었던 소수의 학생들을 교수라는 자신의 ‘권력’으로 짓밟는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일까? 정치가 일종의 ‘권력’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정치적’ 문제일 수 밖에 없다. 또한 현 시국의 정치적 지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마 기사화 된다고 해도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지 않을까? ‘모 대학 교수, 뉴라이트 수업 반대 대자보 찢어’ 그러기 때문에 일종의 ‘사건’이다.

학교라는 특수성, 거기에다 기독교 학교라는 종교적 특성으로 이 사건의 정치적 단면을 가려보고자 한다. 게다가 개인적 관계까지 내세워 삼중으로 문제를 가리려고 한다. 다 걷어내고 보면 당신들이 말하는 ‘정치’의 현주소를 바로 볼 수 있다. 아마 이런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학우들은 그리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언론을 통해 익히 보았던, 그리고 몸으로 이미 체험하고 있는 전혀 낯설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이 정권을 사유화하고, 언론을 사유화 하며 또한 입맛에 맞추어 공권력까지 길들이고 있는데 어느 대학의 교수가 벌인 작은 일이 대수겠는가?

 

나는 그들의 시선에 분노한다.

오늘도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내 상식의 그릇이 작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상상력이 나를 뛰어넘기 때문일까. 이젠 놀라는 데도 지쳐버렸다. 이 무개념 정치의 축소판에 불과한 작은 사건에 내가 분노하는 것은 나의 신체에 각인된 그의 시선 때문이다. 나를 무지몽매한, 폭력적인, 덜 배운, 덜 가진 자로 치부해 버리는 그 시선. 자신을 正의 자리에 나를 不正의 자리에 놓고 깔보듯 내려다보는 그 시선은, 불편함을 넘어 분노를 일으킨다. ‘너희는 무엇인가를 알지 못해’라는 관념이 그 시선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의 부재’라는 것은 화법의 문제가 아닌 시선, 즉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정치적’인 것을 끊임없이 비정치적 영역으로 몰아가려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성’을 지우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다. 정치적 이라는 이름을 지우는 것으로 면죄부를 삼는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인 ‘권력’의 흔적을 지우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권력은 힘의 차이를 이용해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것이 그 힘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며 대학 교수는 교수라는 직위가 그 힘을 가늠하는 주요한 척도가 된다. 거기에는 대상이 자신과 동등한, 아니 그저 ‘다름’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그런 시선 위에서 사랑과 평화를 논해보았자 그것은 또 다른 시선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분노한다. 나의 정치적 기능을 거세한 현 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한다. 정치란 소통과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하건만 그 기본적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무능력에 분노한다. 학생들의 정당한 언로조차 무참히 강탈해 버리는 몰상식한 행동에 분노한다. 나는 그 시선이 싫다. 그 태도가 나를 불온하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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