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의 노래

孔子適楚 楚狂接輿遊其門曰
鳳兮鳳兮 何如德之衰也 來世不可待 往世不可追也
天下有道 聖人成焉 天下無道 聖人生焉 方今之時 僅免刑焉
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
已乎已乎 臨人以德 殆乎殆乎 畫地而趨
迷陽迷陽 無傷吾行 吾行卻曲 無傷吾足
山木自寇也 膏火自煎也 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장자» ‹인간세人間世›의 마지막 부분이다. ‘인간세’라는 제목처럼 이 장은 인간 세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장자에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 즉 ‘인간세’란 무엇이었을까? 의외로 장자는 정치적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절대 권력의 군주의 횡포 아래 노출된 위태로운 삶. 이것이 장자가 문제로 인식한 세상의 모습이었다.

이는 섭공자고葉公子高에게 말하는 공자의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無適而非君也 無所逃於天地之間 是之謂大戒
무적이비군야 무소도어천지지간 시지위대계

어디를 가건 군주 없는 곳이 없어 천지간에 도망갈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크게 경계할 일이다.

«장자» 기록에 따르면 섭공 자고는 사신으로 제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스트레스로 몸에서 열이 나는데다, 혹시라도 일을 그르치면 몸이 상하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고민상담을 하러 공자를 찾아왔건만. 공자의 대답은 별로 해결책이 못된다. 도망갈 곳이 없으니 그냥 맡은 바 일을 하라는 것.

知其不可奈何 而安之若命 德之至也
지기불가내하 이안지약명 덕지지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마치 명命처럼 편안히 여기는 것이 덕의 지극함이다.

혹자는 장자의 주요 개념을 안명安命, 즉 자신에게 주어진 명命을 편안히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는 데 맞는 말이다.

정치의 세계는 엄혹하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 세계로부터 물러나 삶을 수고롭지 않게 해야 한다. 따라서 재주 있는 자가 되어 그런 삶에 휘말리지 말로 재주없는[不材, 無用]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세›에 나오는 ‘재목이 아는 나무[不材之木]’이나 ‘쓸모 없음의 쓸모[無用之用]’은 바로 이런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분명 장자는 공자와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도가道家 사상가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대한 태도[處世]에 있어 유가적 ‘구세求世’를 헛된 것으로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먼저 구세하려는 태도는 우리의 삶을 망가뜨릴 뿐이다. 비간이나 기자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세상을 구한다고 설치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 마치지 못한[不終其天年] 어리석은 이들이다. 한편으로는 일부의 노력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장자는 시대의 우울을 온 몸으로 겪어낸 사람이었다.

이런 장자가 볼 때 공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려 했던[知其不可而爲之者]’ 어리석은 자였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초광접여楚狂接輿,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는 이런 장자의 생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孔子適楚 楚狂接輿遊其門曰
공자적초 초광접여유기문왈

공자가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가 공자가 머무는 집 앞을 지나가며 노래했다.

공자가 초나라로 갔다는 사실은 의심할 것이 많다. 그러나 «장자»에 나오는 공자의 행적은 가상의 것일테니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초광접여는 «논어» ‹미자›에도 나온다. 내용은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내용이 좀 간결하고, 공자가 탄 수레를 지나치며 접여가 노래한 것으로 나온다.

‘접여’는 ‹소요유›에서 견오와 연숙의 대화에서 등장했다. 광狂, 미치광이 답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준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미친 소리, 광언狂言이야 말로 장자의 진실을 담은 말이었다. ‘말로 할 수 없는 가르침[不言之敎]’은 어쩔 수 없이 말 안 되는 말, 미친 소리 혹은 우화[寓言]로 전할 수 밖에.

鳳兮鳳兮 何如德之衰也 來世不可待 往世不可追也
봉혜봉혜 하여덕지쇠야 내세불가대 왕세불가추야

봉황이여 봉황이여! 덕이 쇠한 것을 어찌하려느냐. 앞으로 날들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나간 날도 좇을 수 없도다.

여기서 봉황은 공자를 가리킨다. 덕이 쇠한 세상, 다르게 말하면 무도無道한 세상을 어찌하려느냐는 질문이다. 개인적으로 ‘來世不可待 往世不可追也’ 이 표현을 참 좋아한다. 미래를 기대하지 말고, 과거를 좇지 마라. 주어진 오늘의 현실만이 존재하는 삶. 그것이 바로 장자의 시선이 머문 곳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신이 미래의 주인공입니다’라는 말 따위엔 ‘당신은 현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숨어 있지 않는가? ‘옛날에는 말이야’라는 말에는 현재 오늘날의 삶에 대한 고민이 빠져있다. 미래는 내것이 아니고 과거도 내것이 아니다.

天下有道 聖人成焉 天下無道 聖人生焉 方今之時 僅免刑焉
천하유도 성인성언 천하무도 성인생언 방금지시 근면형언

천하가 제대로 다스려지면 성인은 업적을 이루지만 천하가 어지러우면 성인은 그저 살아갈 뿐이다. 지금은 겨우 형벌을 면할 때로구나.

성인聖人조차 무도한 세상을 어찌할 수 없다. 생生, 살아갈 수밖에. 더욱이 지금은 형벌을 겨우 면할 수 있는 세상이란다. 혼란기를 살아간 장자의 우울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자는 삶, 생生의 문제를 깊이 탐구한 사람이다. ‘양생養生’이라는 단어가 «장자»에 주요 개념으로 등장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노자»식의 ‘양생’과는 다르다. «노자»에서는 마치 천지처럼 오래 사는 것—천장지구天長地久가 목표였다면,  «장자»에서는 외물外物—외부적 삶의 조건에 상처입거나 다치지 않고 온전히 사는 삶[盡其天年]이 중요한 문제였다.

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
복경호우 막지지재 화중호지 막지지피

복이 깃털보다 가볍지만 가질 줄을 모르고, 화가 땅보다 무겁지만 피할줄을 모르는 구나.

재앙의 시대, 겨우 형벌을 면할 수 있는 이런 혼란기에 공자는 세상을 구하겠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복을 누릴 줄 모르고 화를 피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이 어리석음이야 말로 공자의 매력이긴 하지만 장자시대에는 그 어리석음 마저 사치스런 시대였다. 낭만의 시대는 끝났다.

已乎已乎 臨人以德 殆乎殆乎 畫地而趨
이호이호 임인이덕 태호태호 획지이추

그만두어라 그만둬! 사람들에게 덕으로 나아가는 것을. 위험하구나 위험하구나 땅에 금을 긋고 혼자 달려가는 일이.

접여는 공자에게 덕으로 세상을 이끌겠다는 생각을 접으라고 권한다. 그것은 쓸모 없는 일일 뿐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을 소모시키는 위험한 일이다. 그러다 다치는 것은 오직 그 자신을 뿐이기에.

迷陽迷陽 無傷吾行 吾行卻曲 無傷吾足
미양미양 무상오행 오행각곡 무상오족

가시나무야, 가시나무야! 내 가는 길을 다치게 하지 말라. 내가 굽이굽이 가노니 내 발을 다치게 하지 말라.

가시 밭길이야 말로 당대의 현실을 대표하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삶의 태도는 다치지 않고 잘 피해 사는 삶. 가시나무가 없는 틈을 노려 그곳으로 다녀야 한다. 마치 포정庖丁이 살과 뼈의 틈으로 칼날을 놀렸듯이.

생존이 화두가 된 사회에서 윤리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곧은 길을 가라는 그런 윤리적 삶은 통하지 않는다. 맹자는 의를 위해 삶을 버리겠다고[捨生取義] 했지만 장자의 삶은 정 반대이다. 구불구불, 인의仁義 따위의 가치보단 생존, 다치지 않는 삶이 우선이다

山木自寇也 膏火自煎也 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산목자구야 고화자전야 계가식 고벌지 칠가용 고할지

산의 나무는 스스로 베어지고, 기름 등불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쓸모가 있기에 벗겨진다.

‹인간세› 바로 앞에서는 오래 살 수 있었던 나무가 나온다. 그 나무가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은 쓸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쓸모 없음[無用]이 도리어 그 자신에게는 큰 쓸모[大用]가 된 역설을 장자는 말한다. 인의를 위해 사는 삶은 마치 기름 불이 스스로를 불태워 밝히듯, 자신의 삶을 소모하는 삶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도구화되는 삶을 의미한다. 과연 그 가치가 자신의 삶보다 소중한 것일까?

어떤 판본에서는 이 부분 부터 ‹인간세›의 마지막 단락으로 보기도 한다. 초나라 미치광의 접여의 노래가 앞에까지 끝났고, 이부분은 ‹인간세› 내용을 요약한 결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접여의 노래로 보아도 무관하다. 오히려 자연스럽다.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인개지유용지용 이막지무용지용야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지만 쓸모 없음의 쓸모는 모르는 구나

‘쓸모 없는 존재가 되기’ 이것이 장자가 선택한 삶의 방법이다. ‹인간세›에 나오는 ‘지리소’가 바로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곱추에 못난이인 이는 세상에서 보기에는 보잘것 없는 못난이이지만 그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도리어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남들이 당하는 삶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아도 되므로.

참고로 장자의 말에서 지리소의 삶이 빛나는 부분은 전쟁에 징집 당할 때와 나라에서 노역으로 사람을 끌어갈 때이다. 국가 끼리의 전쟁이나 국가적 사업에 지리소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내려주는 이익은 이익대로 취한다. 이런 면에서 장자는 국가의 지배체제안에서 국가를 지워가는 또 다른 삶의 길을 일찌감치 고민했던 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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