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번역과 이해 – [장자], 김학주 역, 연암서가

107쪽: 해설 – 삶을 기르는 것은 완전한 몸을 지님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분수대로 자연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진다. 외다리라고 불행하고 두 다리가 멀쩡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꿩이 우리 속에서 아무리 잘 먹고 지낸다 하더라도 자연 속에서 고생하며 먹이를 찾아다니는 생활보다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다’는 부제처럼 김학주의 번역은 인위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절대적 자유’야 말로 [장자]의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위에 인용한 해설에서 볼 수 있는 것마냥 [장자]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허망한 텍스트로 전락해버린다.

외발이가 된 우사右師에게 공문헌公文軒이 묻는다. 대체 어쩌하다 그렇게 외발이가 되었느냐고. 공문헌의 질문을 통해 추정컨데 우사는 본래 외발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간에 어떤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늘이 한 것인가? 사람이 한 것인가?(天與 其人與)’라는 공문헌의 질문에 우사는 ‘하늘이지 사람이 아니다(天也 非人也)’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하늘(天)을 김학주는 해설에서 ‘자연’으로 바꾸어 버린다.

과연 ‘자연’과 ‘하늘’은 똑같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크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함’ 혹은 ‘저절로 그러함’으로 옮길 수 있는 것처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법칙성이나 순환을 뜻한다면 ‘하늘’은 그와 달리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 있는 어떤 법칙이나 힘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즉 여기서 대립되는 것은 자연과 인위라는 익숙한 구도가 아니라 개별적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하늘로 이해할 수 있단 말이다.

원문 해석을 미루어 놓고라도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자기가 타고난 모습대로 즉, 분수대로 살 때 ‘삶을 온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가? 특히 그것이 남과 다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 혹은 남과 다른 신체를 어느 순간 – 여컨대 사고 등 – 부여받은 순간 우리는 분수대로 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장자는 어떤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긴 대로 살라고 하는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뱉고 있는 건가? 아니, 천하의 장자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우리 삶은 그런가? 누구는 강남 고층 아파트에서 태어났고 어떤 누구는 여름엔 침수되고 겨울이면 곰팡이가 피는 단칸 지하방에서 태어났다고 할 때 각자 제 분수를 지키며 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장자라면 읽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의 단순한 안정을 위해?

[장자] 같은 책을 읽을 때엔 택스트 전체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일부 파편들이 언제 어떻게 삽입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직접 [장자]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하나의 통일된 생각을 다루고 있다는 ‘내편’ 조차도 다양한 목소리가 뒤섞여 있지 않는가? 더불어 그 중에는 서로 충돌하며 맞지 않아 보이는 문장들도 있다. 각 편들 사이에만 이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편을 이루고 있는 여러 문장들 사이에도 이런 문제는 적지 않다. 그럼 어떻게 [장자]를 읽어야 할까? 간단히 말하면 읽히는 것을 간추려 장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보는 것이다.

김학주의 위 해석의 경우엔 우사의 이야기와 못 가에 사는 꿩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 버렸다. 참고로 안동림의 번역에서는 둘을 나눠놓았다. 둘을 모아 생각하는 것보다 둘을 나눠놓고 보는 것이 더 낫다. 그렇지 않는다면 외발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이겨내려는 모든 시도를 인위적인 것이며 마치 우리 안에 꿩을 가두어 놓듯 굴레를 씌워버리는 속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정말 그런가? 그렇게 두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던가? 아니다.

짧은 해설을 붙여놓았지만 붙여놓지 않는 만 못하게 되었다. 어떤 일관된 역자의 생각을 전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석에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통상적인 이야기를 간단히 덧붙여 놓았을 뿐이다. 역자가 해설자가 되려 하는 순간 번역의 질은 슆게 상한다. 좋은 번역을 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책 대신 다른 번역본을 구하고 싶지만 가독성 하나로 이 책을 보고 있다. 어서 다른 좋은 번역본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108쪽: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가 태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며, 그 사람이 죽은 것도 죽을 운명에 따른 것이다. 윤회하는 때에 안주하고 주어진 운명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을 끼어들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쌩뚱맞다고 밖에 평할 수 없다. 원문을 보면 이렇다. ‘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安時而處順’이라는 부분이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때를 편한하게 여겨 순조롭게 처신한다’ 정도가 된다. 이때 ‘때(時)’라는 것은 맥락상 오고 가는, 즉 생사의 때를 가리킨다. 그것을 ‘윤회의 때’라고 번역했다.

대체 [장자] 어디에 윤회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까? 쓸데 없이 과도하게 번역한 탓에 장자와 불가를 잇는 상상력이 작동하게 되었다.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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