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 진정한 야당정치, 도덕국가를 향한 지침서», 장현근, 살림

* 책을 들춰보니 지난 3월에 사서 읽었던 책이다. 맹자 강의를 준비하면서 들춰보았던 책인데 뒤늦게 정리한다. 장현근 선생은 살림에서 나온 ‘e시대의 절대사상‘시리즈 뿐만 아니라, 한길사에서 나온 ‘인문고전 깊이 읽기‘ 시리즈 가운데도 «맹자 –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라는 책을 썼다. 한길사에서 나온 책이 더 나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7쪽: 맹자는 정치가였다. 그것도 보통 정치가가 아니라 세상 전체를 바꿔보려는 큰 꿈을 가진 정치가였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지 못했다. 그는 아예 야당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자기 말이 세상에 먹히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정부 여당의 정책에 시비를 걸고 이익 대신 의리의 대안을 제시하는 진정한 야당이었다.

‘진정한 야당정치’라는 표현이 바로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맹자»를 읽어보면 그가 끊임없이 비판자의 자리에 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위치에 서려는 것이다. 이런 맹자의 비판 정신에다 더불어 그가 주장한 호연지기나 대장부론 따위가 후대에 깐깐한 선비상을 낳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맹자를 ‘춘추시대의 이빨’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 물어 뜯기를 자기의 사명으로 삼는.

21쪽: «맹자»의 대부분은 이상정치 모델로서 인의와 왕도에 대한 주장, 정치와 사회에 대한 맹자의 소회, 정치가 선배들에 대한 찬양과 비판 및 분석, 이상정치를 위한 정책적 아이디어가 차지하고 있다. «맹자»는 한마디로 정치학 교과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서적인 «맹자»가 왜 철학 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건 성리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리학자들, 여기서 장현근은 한유로 부터 이어진 맹자 평가가 ‘철학자로서의 맹자’ 이미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의 인성론에 큰 관심을 두어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맹자»를 정치학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에는 동의하나 «맹자»를 철학서로 읽게 된 이유를 저렇게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즉 요약하면 성리학은 곧 철학이며, 이 성리학의 눈에 의해 «맹자»의 정치학적 측면이 간가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는 성리학을 비 정치적인 사유의 학문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사실 문제는 성리학을 철학의 프레임에 넣어 이해하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결국 성리학은 위대한 철학이라 운운했던 펑유란부터 까야…

40쪽: 맹자는 공자를 존경하고 꿈꾸었다. 어떻게 하든지 공자를 닮으려 노력하였다. 공자가 정리 편찬한 «시경», «서경»고 노나라 역사책 «춘추»를 열심히 읽었을 것이며, «논어»도 보았을 것이다.

까다로운 부분이다. 과연 공자는 «시경»이나 «서경»을 편찬한 인물일까? «춘추»는? 게다가 «논어»를 읽었다니. 개인적으로 공자를 육경의 편찬자로 이야기하는데 회의적이다. 그리고 «논어»의 성립 연대는 «맹자» 이후로 본다. 왜냐하면 «맹자»에 «논어» 문장들이 일부 등장하나 ‘자왈子曰’이라고 시작할 뿐이며, «맹자»에 나온 공자의 말 가운데는 «논어»에 없는 것도 있다. 게다가 «논어»에 등장하는 문장과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아마도 맹자 당시에는 후대에 «논어»가 되는 자료들이 얼마 있었을 것이다.

59쪽: «맹자»가 맹자의 친필 저작이 아니라는 이 박약한 한 가지 이유를 빼면, 친필 저작이라는 증거들이 훨씬 많고 정확하다. 첫째, 맹자의 생몰 연대를 고증하여 열전을 쓸 정도로 친히 «맹자»를 접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마천의 «사기» 내용을 자세히 분석하면 몇 부분은 제자와 공저했으나 대부분은 맹자 본인의 저술이라고 한다. 둘째, 제자들이 쓴 책이라면 «논어»가 «공자»라고 불리지 않은 것처럼 «맹자»도 책 편집자들에 의해 다른 이름이 택해졌을 것이다. «순자» 등 저서의 대부분을 본인이 직접 쓴 제자백가들의 책 이름은 모두 ‘~자’이다. 셋째 «맹자» 전체를 볼 때 과거 유가에서 높이던 성인의 유습이 쇠퇴하고 공자 사상이 빛나지 못한 것에 대한 한탄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 분명한 저술 동기와 일관성은 개인 저작이 아니면 설명이 어렵다. 넷째, 제자들이 썼다면 «논어»처럼 스승의 용모를 상세히 기록했어야 하나 «맹자»에는 맹자의 행동거지가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여러 제자들의 기록을 모은 «논어»는 내용과 문장구조, 어투 등 일관성을 찾기 어려우나 맹자는 아무런 하자 없이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앞뒤가 일치한다. 송나라 때 주희의 얘기다.

결국 «맹자»는 맹자 자신이 과거 행적을 좇으며 «논어»처럼 제자들과의 문답 형식을 빌려 정치적 이상을 매우 정밀하게 수미를 일관시켜 쓴 개인의 작품이다. 일부 제자들이 스승의 구술을 받아쓰거나 의견을 개진한 곳도 있겠지만 최후로 맹자가 교정을 보고, 앞뒤를 맞춘 책으로 보인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 글자 단위의 첨삭이 있을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맹자 본인의 저작으로 보고 읽는 것이 옳을 듯하다.

비판할 부분이 많다. 일단 여기서 비판하고 있는 ‘«맹자»가 맹자의 친필 저작이 아니라는 박약한 이유’는 염약거 등의 지적인데, «맹자»에 맹자 사후에나 붙었을 것이 분명한 시호들, 양혜왕이니 제선왕이니 따위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장현근은 ‘제자들이 나중 스승의 책을 총 정리하면서 일관성을 살린’ 것으로 추측한다.

이런 문제는 어떤 것도 명확히 규명하기 힘든게 사실이다. 즉, «맹자»가 맹자 자신의 저작이 아니라는 근거를 찾기를 힘들지만 반대로 «맹자»가 맹자 친필이라는 근거를 찾는 것도 역시 어렵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춘추시대 저작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저자와 텍스트를 구분해서 생각하애 한다고 본다. 역사적 공자와 «논어»에는 거리가 있으며 역사적 맹자와 «맹자» 텍스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텍스트를 통해 저자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더 후대의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이런 측면에서 장현근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첫째, 사마천이 «맹자»를 접한 것은 맞지만 맹자가 등장하는 «맹자순경열전»에는 맹자나 «맹자»에 대한 부분이 매우 짧다. 그리고 «맹자»에 대한 언급이라고는 첫 부분, 양혜왕과의 대화를 읽고 탄식하며 책을 덮었다는 게 전부이다. 차라리 «노자한비열전»에 나오는 장자에 대한 언급이 더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 장현근의 말처럼 «맹자»에 대한 사마천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 저자가 명확하지 않으나 ‘~자’로 불리는 텍스는 많다. «노자»나 «장자»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이다. 노자나 장자 본인이 썼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셋째, 일관성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릴 수 있지만 한 저자가 쓴 저작이라고 보기에는 일관성이 떨어진다. «논어»보다 발전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의 저작이라고 할만큼 짜임새를 갖춘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논증이 필요하겠으나) 기본적으로 «맹자»는 맹자 사후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맹자의 사유를 전하는 맹자 학파에 의해 완성되었을 것이다.

74쪽: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싹 가운데 예禮와 지智에 대해선 «맹자» 한 권의 책을 통해서는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다. 공자는 예의와 인의를 동시에 강조했는데, 맹자는 예를 인의에 종속되는 외재적 표출로서 양보나 진퇴 등 몇 가지 행위규범을 뜻하는 정도로만 취급한다. 예라는 글자는 «맹자»에 68번이나 등장하지만 그중 60번이 행위규범에 대한 얘기이며 철학적 논쟁을 한 곳은 없다. 그의 다음 세대인 순자가 예의 범주를 우주자연의 원리에까지 확장하며 최고의 위치에 놓은 것과 사뭇 구별된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지는 인식론의 범주에 속하는 일인데, 맹자는 이를 윤리적 개념으로 바꾸어 인륜관계를 해석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예와 마찬가지로 지에 대한 구체적 철학적 분석은 없다.

순자는 증삼과 맹자가 오행 따위를 끌어 들였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더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은 이런 부분이다. 인의 곧 효제孝弟를 강조한 결과 순자 등의 유가와는 다른 내면적 성향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후대에 예교비판의 뿌리는 바로 맹자에게 있는 건 아닐까? 흔히 ‘예’라는 규범이 개별적 인간을 강하게 압박한 병폐라고 이야기하나 정작 그것이 무서운 것은 내면적 영역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맹자: 만장»에서 순을 대효大孝라고 칭송하는 맹자를 보고 있으면 가끔 섬뜩하기까지 하다.

104쪽: 더 정밀하게 얘기하면 맹자가 말한 군자는 관청에서 업무의 중심에 서서 열성으로 정책을 집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기보다 인.의.예.지를 온몸으로 구현해내는 사회적 실천가의 모습이다. 야당으로, 더 나아가 양심적 재야 활동가로서의 모습이다. 맹자가 말한 군자의 정치는 곧 권력을 초탈한 진정한 야당의 정치이다.

이 구절을 보니 ‘진정한 여당 정치’를 꿈꾼 다산 선생이 생각나는 군.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목민심서»는 «맹자»와 정 반대에 있는 셈이 된다. 목민관, 공무원이 되는 것이야 말로 다산이 꿈꿨던 꿈이었으니 말이다. 오늘날 «맹자»를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적 장 바깥의 또다른 정치의 영역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민심서» 따위는 노량진으로~!!

112쪽: 도덕이 권력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도덕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맹자의 주장은 포악한 군주 또는 현실권력의 장악자들을 공격하는 좋은 무기가 된다. 관념적인 도덕의 권위로 현실의 정치 권력을 제약하려는 시도는 맹자 정치학의 큰 성취이다. 천리 운운하며 도덕을 따지고 끊임없이 왕에게 대들었던 유교 관료들의 정치 전통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바로 이것이 «맹자»의 힘이다. 무슨 혁명이니 민본주의 따위가 아니라. 권력을 바꾸는 혁명의 장보다 권력을 제어하고 견제하는 장에서 «맹자»는 빛을 발한다. 즉 «맹자»가 백성의 힘으로 권력자를 바꾸는 따위의 일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도덕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왕을 견제하고 제어하는 데는 큰 일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14쪽: 이렇게 특정한 경우로 한정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어쨌든 군주전제정치가 급격히 가속화되어 가던 전국시대에 집권세력을 공격할 사상적 무기를 만들고 통치자에 대한 탄핵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맹자 정치사상의 역사적 역할을 긍정할 수 있다. 다만 애석한 것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집권세력은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말뿐, 어떻게 몰아낼 것인지 구체적 방법에 대한 구상은 «맹자»를 통해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역시 «맹자»는 난세보다는 치세의 학문이다. 그런데 이게 난세에 튀어나왔다는 역설.

 

* 책 뒷부분 절반은 «맹자»본문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지만 일부를 뽑아 번역해 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뒷 부분 절반은 영 쓸모 없는 부분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책 분량이 짧더라도 앞 부분만 출간하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원문 부분을 빼놓고 번역문만 넣던가. 책세상에서 나온 «맹자» 번역본을 보면 번역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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