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김학주 역, 연암서가

만족할만한 번역은 아니나, 현재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장자 번역본이 몇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책도 참고해야 한다. 두 주 후에 끝나는 ‘장자 세미나’에서는 안동림 역을 읽었다. 안동림 역이 가독성은 떨어지나 참고할만한 주석이 제법 상세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학주 역은 가독성이 훨씬 낫다. 누군가는 ‘한글 세대가 볼 만한 장자 번역’이라고 하던데 맞는 말이다. 읽기는 김학주 역이 더 낫다. 술술 읽히는 것 까지는 좋은데 어떤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풀어서 옮겼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0쪽: 일러두기 1) 이 역주의 대본은 전목錢穆의 «장자찬전莊子纂箋»을 중심으로 하고, 필요에 의해 다른 10여 가지 주해서들을 참고하였다. 그 중에서도 왕숙민王叔岷 교수의 «장자교전莊子校詮»과 타이완 대학에서의 «장자» 강의 노트는 가장 큰 참고가 되었다.

일러두기를 읽고나서, 전목과 왕숙민의 장자 연구가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19쪽, 장자 33편을 분류하는 부분에서는 ‘이상은 왕숙민의 1959년 타이완대학 강의고에 의거’라는 주석을 붙여 놓았다. 50년 넘은 강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게 대단하기도 하지만, 그 사이에 장자 원문을 연구한 사람도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1쪽: 유교의 예교 사상이 그 사회를 지배해 온 중국에서, 언제나 인간 본연의 위치에서 ‘자유’를 추구해 온 장자의 사상은 정체되려는 중국 문화에 끊임없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것은 장자가 ‘완전한 자유의 경지’를 추구함으로써 ‘예의’나 ‘인의’같은 인위적인 규범으로 사람들을 구속하려는 유교에 의한 지배에 숨돌릴 여유를 주었다는 뜻이다. ‘완전한 자유의 경지’란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행위와 사상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불편하다. 이른바 ‘예교비판’의 시선에서 장자를 읽는 방법이다. «장자» 내부에서 유가에 대한 비판의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자»를 읽을 수록 그 비판의 방향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유가와 대립하는 도가라는 관점 위에서 «장자»를 읽는 것과 «장자»를 읽으면서 그 속에 드러난 유가 비평을 요약하는 것은 전혀 다를 것이다. 다시 한 번의 «장자» 완독을 앞두고 있는 지금, 과연 «장자»의 핵심적 사상이 유가 비판에 있는가 하는 점은 끊임 없이 의문을 낳는다.

장자가 ‘자유’를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 그 자유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저자는 유가적인 ‘인위적 규범’, 더 나아가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행위와 사상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고 본다. 이른바 ‘절대 자유’라는 거다. 그래서 책 표지에도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다’라고 써놓았다. 그러나 «장자» 속에서는 그런 자유에 대한 지향 못지 않게 현실의 중력도 강하게 읽힌다. 과연 장자는 저자가 말하는 것마냥 완벽한 자유를 누렸던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장자»에 나오는 망량罔兩마냥 어디엔가 속박되어 있는 사람이었을까?

적어도 나는 ‘절대적 자유’를 믿지 않는다. 더구나 ‘절대적 자유’가 장자를 읽어야 할 이유라면 절대 읽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절대적 자유란 그저 정신 승리법의 하나가 아닐까. 그런 한가한 독해가 장자를 읽어야 할 이유라면 «장자»는 어쩌면 더 없이 해로운 텍스트 일지 모른다.

–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편명을 다 번역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요유’를 ‘어슬렁어슬렁 노님’으로 옮겼다. 내편의 경우엔 제목이 담당하고 있는 특정한 역할이 있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외편과 잡편의 경우에는 난감하기만 하다. 이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16쪽: 조정에서는 현종玄宗 천보天寶 9년(759)에 장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 부르고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부르도록 임금이 명을 내렸다. ‘남화’란 말은 장자가 조주曹州의 남화산에 숨은 일이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26쪽: 도가 사상은 사람들의 이성은 불완전한 것이고 사람들의 판단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절대적인 값을 매길 수가 없는 것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처럼 상대적인 판단에서 얻어진 불안정한 가치를 평생을 두고 추구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이성이나 감정 또는 욕망을 초월하여 아무런 의식적인 행동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지내야만 한다는 무위 자연의 이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긴 것과 짧은 것 등은 모두 절대적인 판단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큰 것과 작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등은 모두 실제로는 같은 가치의 것이며, 심지어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같은 자연 변화의 한 가지 현상이라는 것이다.

30쪽: 한편 이러한 ‘무위 자연’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숙명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람의 빈부나 귀천은 모두가 숙명이라는 것이다. 그의 숙명론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는 어떠한 인위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개인의 차가 있는 것은 마치 산이 높고 낮은 것과, 나무가 크고 작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차란 사람의 ‘인위’에 의하여 고쳐질 수는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숙명에 자기를 맡기고 완전히 ‘자연’스러워야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에 봉착한다. 숙명론을 두고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체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잘못하면 이런 자유는 숙명이기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무력함으로 이어지기 쉽다. 본래 이렇게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과연 이것이 장자의 매력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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