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복음甲者福音

내 질문은 이것이다. 또 똑같은 일이 벌어진 걸까?

헤아려보니 교회에 발을 끊은 지 10년이 넘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지만 예배당은 별반 차이가 없다. 덕분에 교인들 틈에 섞여 들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가요판에서 10년 전 노래는 유물이 되었으나 교회에서는 내내 똑같은 음악이 흐른다. 이곳은 고고학이 설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내 질문은 이것이다.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까?

졸업 후 10년도 더 훌쩍 넘었다. 10년이 뭔가, 좀 있으면 입학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러나 모교의 문제는 여전히 쳇바퀴 돌듯 비슷하다. 10년이 넘은 졸업생에게도 모교의 문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다. 그 나물에 그 밥, 언젠가 보았던 사건의 판박이다. 그러니 또 냉소가 스며든다.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 짓 할만한 사람의 짓거리다.

그러나 다시 묻는다. 여전히 같은 사건의 반복일까?

정체성 논쟁은 여전히 반복된다. 학내 기득권 세력은 여전히 영적 싸움을 운운하고, 소수의 저항하는 목소리는 게릴라처럼 분투하고 있다. 최종 승리는 저들의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처럼 학교에 불만 있는 사람은 떠나거나 빨리 졸업하는 게 상책이다. 개교 이래로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늘 부는 바람처럼 모교는 항상 위태롭다. 그러니 모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기도와 후원만 필요할 뿐이다. 미래를 위한 건설적 비판 따위는 없다. 이들은 아마 사탄의 자식이겠지.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또 다시 벌어질 일이었을까?

성정이 유해졌는지 이런 생각이 든다. 너무 심하지 않나? 성聖-속俗의 다툼이야 저 동네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런데 내 기억에 교수를 찍어 내린 적은 없었다. 학생을 대놓고 조리돌림 하며 마녀 사냥하는 일은 없었다. 똑같이 권력을 쓰더라도 조용하고 은밀하며 소박했다. 마치 바바리맨처럼 내 바나나를 보시오 하고 자랑스레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참, 모교는 세속의 것은 멀리 하면서 세상 사람의 눈은 매우 신경 쓰지 않았나? 국민에게 가장 신뢰받은 뉴스에, 그것도 몇 차례 입방아에 오른 건 개교 이후 20년 만에 꽤 당혹스러울 일 아닐까? 수년 전 MB를 비판한 모 교수 징계사건에도 그렇고, 노 대통령 서거 이후 벌어진 사건에서도 모교는 원칙보다는 외부의 시선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에는 어떨까? 지켜보아야 알겠으나 꽤 당당한 모습이다. 암덩어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말부터, 징계로 찍어 없애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는 저들의 당당함이 당혹스럽다. 좀 싸워보았지만 저렇게 당당하지는 않았잖아. 독약이라면 안 먹으면 되지, 그걸 내어 버린다는 단호함은 다르잖아. 성결이란 근본적으로 개인 삶의 성결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었나? 공동체의 성결은 개인의 성결의 확장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소박한 내면의 투쟁이 필요한 것 아니었나? 이른바 홀리한 자들의 저 도끼질은 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

이것이 내 질문이다. 갈대 상자는 손을 벌렸지, 적어도 손에 도끼를 쥐지는 않았잖아.

어쩌면 지난 10년 간, 무언가 바뀐 건 아닐까? 며칠 전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의교회는 왜 무리수를 뒀나” 질문을 바꿔보자. “한동대는 왜 무리수를 뒀나.” 어쩌면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사랑의교회는 검찰청 앞에 화려하게 건물을 올리며 검찰청과 이웃이 되는데 그런 일들이야 전혀 문제가 안 될 것이라 생각했을 거다. 누구는 여의도에 둥지를 틀었는데 자신들은 대검찰청과 이웃이 되어 그런 자잘한 문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생각했을 데다.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고, <신화는 없다>는 말처럼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쌓아 올린 이 땅에서, 드러내 놓고 전횡을 일삼은 그처럼 이제는 무엇이든 기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지난 10년이 정말 무엇을 낳았는가는 후대 사람들에게 맡기자. 다만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다. 저들은 갑의 지위에서 명령하고 선언하기를 즐겨하며 또한 거기에 익숙한 자들이다.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고민하기보다는 선언하고 선포하며 강요하고 주입하는 자들이다. 암흑에 빛을 비추는, 한 밤중에 등불을 든 저 소박한 손에는 관심 없고, 이 작렬하는 태양 아래 그늘을 만드는 자들을 모두 일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갑질. 갑의 위치에서 믿음과 복음, 말씀과 신앙을 이야기하는 자들이 출현했다고 해야 할 테다. 그렇기에 저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는 말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천천히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는, 끊임없이 농부를 괴롭히는 겨자씨와 같은 저 하느님의 나라를 저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갑의 나라를 하느님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대학은 암을 잘라내고, 독약을 색출하여 내버리며, 죄인에게 마땅히 돌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저들의 ‘복음’이란 복된 소리이기는커녕 누구에게는 절망의 선언이며, 폭력의 경고이며, 추방의 명령이다. 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이유가 없다. 아마도 여기에는 어떤 혼동이 있겠지. 을, 소수자는 악하며, 악하기에 소수자가 되었다고. 당당한 혐오와 단호한 배제, 저들의 나라에는 고결한 갑甲들이 있을 테다. 나는 과연 이 다수의 복음, <갑자복음甲者福音>의 출현을 무엇으로 상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켜보는 것도 흥미 없는 건 아닐 테다. 키 작은 자캐오가 아니라 돈 많고 집 넓은 자캐오에게 예수는 말을 건넸다. 술꾼에 먹보, 죄인의 친구. 이제 예수는 다른 술을 마시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죄인들과 친구가 되겠지. 그리하여 복음, 복된 소식이란 역설적으로 갑들에게 기꺼운 소식이 되었다. 그러니 누구는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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