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 메모.

오늘 모 선생님과 오랜만에 긴 술자리를 가졌다. 중간에 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내 질문 가운데 하나는. 50 되어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술 먹는다는 푸념(?)에 대한 반론이었다. 거꾸로 오늘날 10대 혹은 20대가 50대 보다 더 체력이 약하지 않느냐는 질문.

내 물음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체력이 있어야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 그러나 채력이란 ‘젊음’의 증거가 아니라 ‘일상의 리듬’에서 획득된 건강함 아닌가? 오늘날 10대 20대를 만나며 느껴지는, 내 자신에게 느껴지는 쇠약함이란 리듬의 부재가 아닌가.

2) 이 리듬의 부재, 그것이 개인의 태만이건 혹은 너무 과도한 의무에 지친 까닭이건, 이 리듬의 부재로 체력이 약해졌다면 교육하는 선생들의 기준 또한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교육이 긴장을 통한 능력의 신장을 도출하는 작업이라면, 그 긴장이 유지될 수 있는 간극이 있지 않을까?

선생의 요구치가 너무 높다면, 이른바 학생의 현실에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면 이는 ‘교욱’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 혹은 과도한 부담이 아닐까?

.

3) 선생의 대답은 그러한 태도가 그들에게 장차 도움이 되는, 마치 맑스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의 문제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치는 태도가 아닌가 라고 되물었다. 즉, 선배들을 너무 적대적으로 대하는 게 아니냐는….

그러나. 거꾸로 오늘날 헬조선에서 필요한 것은 연대하고 함께 현실의 문제를 고민할 ‘동료’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든다. 그 대답이, 그것이 현실의 문제를 깨고 나갈 사람들의 연대를 뿌리친다는 말이, 거꾸로 그들이 이야기하는 현실의 문제라는 것이 과연 ‘현실’의 문제인가 라는 질문이 드는 순간이다.

선배 세대 혹은 선생 세대에게 느끼는 거리감은, 그들은 흔히 맑스, 혹은 푸코 따위에 근접한 또 다른 위대한 지표를 세울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듯하다. 혹은 그러한 믿음 혹은 욕망이 그들의 연구의 동력이 아닐까. 그러나 후배 세대는 맑스나 푸코는 커녕, 한 시대의 지성인으로 이름을 날릴 그런 자부심 혹은 기대감 따위도 없이 공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배 혹은 선생 세대가 어떤 식으로 손을 내미는가 하는 물어보는 것이다.

거꾸로 선배 혹은 선생 세대가 맑스 혹은 푸코와 같은 이가 되겠다는 ‘희망'(?)을 갖고있다면 과연 선배 혹은 선생 세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차라리 맑스나 푸코를 직접 읽으면 되는 일 아닌가?

4) 대화가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내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이 몰락의 시대에, 파국의 시절에, 찌질함을 디폴드 값으로 체득한 ‘지식인’ 아니, ‘지식인’ 혹은 ‘학자’를 욕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학문’ 혹은 ‘공부’를 지속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아주 작은) 실천의 장에서 어떻게 대중 혹은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

당신들이 그렇게 사랑한 사람은 커녕, 당신들 만큼도 못된다고 이미 선을 그은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공부 혹은 학습을 해야 하는가? 당신들은 여전히 자신처럼, 아니 저 빛나는 위대한 지식의 푯대 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할 텐가? 적어도 그런 ‘목표’는 가져야 한다고 말할 텐가?

네 현실의 비굴함, 찌질함, 철 없음 때문에 저 목표, 저 이상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말할텐가?

..

몰락의 시대, 파국의 시대의 지식인 나부랭이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또 그들은 어떻게 ‘현실’을 극복, 변형할 수 있는가. 극복, 변형이 불가능하다면 – 그 찌질한 이들도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들의 학습, 공부란 이미 패배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뭐, 이런 질문이 술이 채 깨기도 전에 나를 붙들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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